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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이만수 일러스트 / 출처=KBO
초등학교 때는 유도선수
초등학교 때 유도를 했어. 1971년에 대구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유도부가 없는 거야. 아쉬워하고 있는데, 어느 날 교내방송이 나왔어요. “야구하고 싶은 1학년, 오후에 운동장으로 나와라.” 나중에 안 건데, 그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 학교 야구부가 내 학년 선수 스카우트를 한 명도 못 했더라고. 한 학년이 통째로 비니까, 일반 학생이라도 데려와서 선수 숫자를 채우려고 한 거지.
1. “야구하고 싶은 1학년, 운동장으로 나와라.”
초등학교 때 유도를 했어. 1971년에 대구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유도부가 없는 거야. 아쉬워하고 있는데, 어느 날 교내방송이 나왔어요. “야구하고 싶은 1학년, 오후에 운동장으로 나와라.” 나중에 안 건데, 그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 학교 야구부가 내 학년 선수 스카우트를 한 명도 못 했더라고. 한 학년이 통째로 비니까, 일반 학생이라도 데려와서 선수 숫자를 채우려고 한 거지.
난 그 때까지 야구는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골목에서 고무공으로 ‘짬뽕’만 해봤지. 야구공을 잡아본 적도 없었어. 그런데 친구가 꼬드기는 거야. ‘야구부 하면 오후 수업 안 해도 된다!’ 솔깃하더라고. 그렇게 엉겁결에 야구부 테스트를 받게 됐어. 운동신경은 있었고 그때는 발도 빨랐어요. 처음에 200미터 달리기를 해서 1등. 그 다음 100미터 달리기도 1등. 그리고 날아오는 공 잡는 거였는데, 어영부영 또 잡았어. 그렇게 합격하고 야구부원이 됐지. 정작 나랑 꼬드긴 친구는 며칠 뒤에 그만두더라고요. 부모님께 공부나 할 것이지 무슨 야구냐고 혼났다더라고. 그 친구는 나중에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됐어요. 그때 그 친구 꾐에 안 빠졌으면 내가 출세했을까? 하하하.
야구를 해 본 적도 없는데 잘할 리가 있나. 실력이 너무 없어서 1년 유급도 했어요. 그래도 누구보다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어. 중1 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매일 4시간씩 밖에 안 잤어. 매일 새벽에 아버지가 깨우면 한 시간 달리고 스윙 연습하고 학교 갔어. 그래서 매일같이 코피가 나니까 별명이 ‘쌍코피’가 됐어. 그렇게 3년 하고 나니까, 결과가 나오더라고요. 졸업반 되니까 공도 잘 던졌고 방망이도 잘 쳤어. 처음에는 투수로 먼저 소문이 났지. 변화구는 못 던지고 직구만 가지고도 전국대회 우승을 시켰어. 그런데 그때는 훈련을 진짜 무식하게 했거든. 매일 100개, 150개씩 던진 거야. 그러니까 팔이 견뎌내질 못하지요. 너무 아프고 팔이 펴지지를 않는 거야. 그래서 감독님한테 울면서 얘기했어. 저 투수 그만하면 안 되겠습니까? 감독님이 수긍하시더니, “덩치가 크니까 포수를 해보자” 하시더라고. 그렇게 해서 중3 때 처음 마스크를 썼지.
▲ 스포트라이트가 익숙한 이만수, 그에 비해 평범했던 유년시절 / 출처=KBO
실력이 빨리 늘어서, 대구상고 1학년 때부터 주전 포수를 맡았어요. 1975년 청룡기 대회에서 서울운동장(이후 동대문운동장. 2008년 철거)도 처음 밟아봤어. 대전고랑 첫 경기는 내 인생 첫 야간경기였어. 고교야구 인기가 엄청났을 때라, 관중이 2만 명은 넘었을 거야. 거기서 홈런을 친 거야. 내 인생 첫 홈런이었어. 나중에 안 건 그 홈런이 그 대회 1호 홈런이었는데, 1학년이 대회 1호 홈런을 친 건 청룡기 30년 역사상 처음이었대요. 난 의식도 못 했는데, 내가 뛰면서 펄쩍펄쩍 뛰고 팔을 휘두르고 난리도 아니었다더라고. 그러니까 이만수 하면 생각나는 요란한 홈런 세리머니는 고1때 처음 한 거야.
2. “나를 쳐라”
고1이 끝나가던 겨울에, 반가운 소식을 들었어. 대구상고 동문이자 당대 최고 포수였던 정동진 선배님이 제일은행에서 은퇴하시고 모교 감독으로 오신다는 거야. 나도 포수였으니까 정 감독님은 늘 내 우상이었지. 설레는 마음으로 첫인사를 나누고 나서, 감독님이 달리기를 지시하셨어. 평소 우리가 달리던 코스는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야. 그런데 출발하고 나서 3학년 선배들이 ‘땡땡이’를 치자더라고. 감독 부임 첫날이라 길도 모르고 몇 시간 걸리는지도 모를 거니까, 쉬엄쉬엄 놀다 가자고. 중간에 골목으로 빠져서 수다 떨고 노래 부르고 신나게 놀았어요. 한참 놀다가, 전력 질주해서 학교로 복귀했지. 숨 헐떡여서 운동 제대로 하고 온 것처럼 보이려고. 그런데 감독님이 “다시 갔다 와” 하시는 거야. ‘아, 들켰구나.’ 싶었지. 알고 보니까 지나가던 택시 기사님이 대구상고 유니폼 입은 선수들이 골목에서 노닥거리고 있다고 학교에 신고를 한 거라. 혼비백산해서 50분 만에 전력 질주로 갔다 오니까, 감독님이 한겨울 운동장에 엎드리셨어요. “이건 내 잘못이다. 한 대씩 나를 쳐라.” 우리 모두 바짝 얼어붙었지.
그런데 감독이 계속 엎드려서 이러는 거야. “너희가 때릴 때까지 밤새도록 엎드려 있겠다.” 난 감독님이 너무 불쌍해 보였어. “제가 치겠습니다.” 하고 나섰지. 선배들이 난리가 났어요. “이 새끼가 미쳤나. 빨리 안 놓냐!” 그런데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 “만수야 네가 날 좀 도와줘라.” 결국 내가 치게 됐어. 살살 눈치껏 쳐야 했었는데, 그런 요령을 몰랐어. 너무 아프게 때렸어. 10방 치고 나서 울면서 잘못했다면서 방망이를 놓으려고 했는데, 감독님이 아직 24방 남았다고 꿈쩍도 안 하시는 거예요. 나도 독종이지만, 감독님 같은 독종은 그 뒤로도 본 적이 없어. 결국 34방을 다 때리고야 끝이 났지요.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다음 날 온 대구 시내에 소문이 다 났어요. 난 ‘스승을 때린 제자’로 신문에도 등장했어요. 동문들이 학교로 찾아와서 이만수 나오라고 소리를 질러댔지. 난 너무 무서워서 서울 이모 집으로 도망을 갔어요. 야구 인생은 끝났구나 싶었지. 한 달쯤 뒤에 부모님께 전화를 받았어. 이제 내려오라고. 내려가서 감독님을 만났어요. “니는 내 마음 알제? 나는 누가 책임감 있고 배짱 있는 선수인지 보고 싶었다.” 하시더라고. 눈물이 났어. 그때 감독님한테 그랬어. “제가 감독님한테 배워서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가 되겠습니다.”라고.
3. “3천만원, 진짜입니까?”
난 약속을 지키려고 더 열심히 노력했어. 노력의 결과는 확실했지. 고3 때는 전국 최고 타자가 됐어. 청룡기 MVP도 받고 이영민 타격상도 받았지. 그래서 나를 두고 대학팀들의 스카우트 경쟁이 살벌했어. 어느 학교 감독님은 집에 식칼을 들고 오셨어. “만수 우리 학교 안 오면 나 자살한다.” 어느 학교에서는 3천만 원을 주겠다고 제안도 했어. 그때는 대학에서 돈 주고 특급 선수를 데려가는 게 관행이었거든. 물론 불법이라 암암리에 하던 거였지. 우리 가족은 결정을 못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이게 소문이 너무 난 거예요. 어느 주간지에 ‘이만수 영입 위해 3천만원 제안 의혹’이 기사로 나와 버린 거지. 3천만원이면 그때 서울에 집을 두어 채쯤 너끈하게 살 수 있었을 거야. 기사 나오고 나서 먼 친척들까지 전화가 오더라고요. 돈 빌려달라고. 어느 날에는 집 앞에 검은 지프차가 와 있더라고. 집 안에 검은 양복 입은 남자들이 서 있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이래. 아버지한테 묻더라고. “3천만원 소문 진짜입니까?” 다행히 요원들은 별일 없이 돌아갔지만, 나는 스카우트비 받는 건 꿈도 꿀 수 없게 됐어.
사실 내가 처음에 가고 싶었던 학교는 연세대였어요. 어릴 때 친척이 신촌에 살아서 자주 갔었거든. 연대가 한국 최고 학교인 줄 알았어. 그리고 고등학교 때 전국대회에서 경남고를 자주 만났거든. 그때 자주 대결하던 (최)동원이랑 친구가 됐어. 동원이가 연대를 간다더라고. 나도 연대에 가서 배터리를 하고 싶었지. 그런데 한양대에서 파격적인 제안을 했어. 나 말고도 대구상고 친구들 4명을 더 받아주겠다는 거야. 지금은 그러면 안 되지만, 그땐 이것도 관행이었어요. ‘4명 더’는 다른 학교에서는 바라기 어려운 조건이었지. 그래서 한양대로 결정을 했지요.
대학에서도 야구를 잘했어요. 타율도 높았고 홈런을 밥 먹듯 쳤지. 2학년 때부터 ‘대학야구 최고 타자’ 소리를 들었지. 4학년 되기 전 겨울에 일찌감치 진로도 정했어요. 그때 실업야구 최강인 포항제철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했지. 포철에는 중학교 때부터 졸졸 따라다녔던 장효조 선배님이 뛰고 계셨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입단에 동의했지.
그런데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4. “4번, 포수 이만수”
어릴 때 내가 야구를 한다니까 누나들이 미국 야구 잡지들을 구해오셨어요. 거기서 메이저리그라는 ‘프로야구’가 있다는 걸 알았지. 너무 멋있었어.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거야. 너무 신났지요. 삼성 라이온즈 입단 계약서에 사인하고 포철에서 받은 가계약금을 돌려드렸어. 내 몸에 ‘파란 피’가 흐르기 시작한 순간이었지.
1982년 3월 27일에는 아침 일찍 동대문운동장에 도착했어. 프로야구 출범 식전 행사부터 참가해야 했거든. 몸을 풀고 다 모여서 코치님이 불러주는 타순을 들었어요. 지금은 많은 팀이 가능하면 하루 전에 선수들에게 타순과 출전 여부를 알려주지만, 당시에는 경기 직전에야 알 수 있었어요.
“4번, 포수 이만수”
꿈에 그리던 프로야구 첫 경기의 4번 타자가 된 거야. 별로 긴장하진 않았어요. 그냥 아이처럼 신나고 들떠 있었어. 그 이후 벌어진 일은 모두가 아는 그대로지. 나는 1회초 첫 타석에서 MBC 청룡 이길환 선배를 상대로 좌익선상 1타점 2루타를 쳤어. 한국 프로야구 첫 안타, 첫 타점을 내가 올렸지. 5회에는 유종겸 선배를 만났어. 오른손 투수도 잘 쳤지만 좌투수는 더 자신 있었지. 스리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약간 바깥쪽에 직구가 들어왔어. 제일 좋아하는 코스였지. 완벽하게 받아쳤어. 아직 나무배트가 낯설 때였지만, 맞는 순간 넘어간 줄 알았어요. 한국 프로야구 첫 홈런이었지. 그 경기를 KBS랑 MBC에서 모두 중계해서 전 국민의 절반 넘게 봤다고 해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 홈런 이야기를 해주시니, 나는 복이 넘치는 사람이야. 달리면서 펄쩍펄쩍 뛰는 내 방정맞은 모습도 인상적이었겠지.
▲ 한국 프로야구 첫 안타와 첫 타점을 기록한 이만수 / 출처=KBO
참, 그 개막전은 NHK가 일본에도 생방송을 했어요. 덕분에 일본야구계에도 내 이름이 알려졌지. 1982년 시즌이 끝난 뒤에 일본 긴테쓰 구단의 관계자가 찾아왔었어. 그때 받던 연봉의 몇 배를 줄 테니 오라는 거야. 내가 ‘1호 기록’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만약에 그때 갔으면 ‘1호 해외 진출’도 나였겠지. 하지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했어요. 삼성에서 뛰는 게 행복했거든. 일본 프로야구에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어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메이저리그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네. 그로부터 20년 넘게 지나 코치로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 다음 해에는 더 잘했어. 타율-홈런-타점을 모두 1위를 해서 프로야구 첫 3관왕이 됐고 MVP를 탔지. 첫 10년 동안은 거칠 게 없었어. 홈런왕 3번 했고, 골든글러브 5번 받았지. 프로야구 첫 10년 동안 홈런, 타점을 제일 많이 올린 사람이 나야. 포수로 그 정도 쳤으니 꽤 괜찮았지.
▲ 타격 3관왕 시절 이만수 / 출처=KBO
그런데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도 있어요. 그때는 모든 지도자들이 일본 스타일의 ‘다운스윙’을 강조하던 시대였어. 그때는 ‘도끼 타법’이라고 했지. 도끼질처럼 배트를 내려치면 땅볼이 나와요. 옛날 운동장은 맨땅이 많았으니까, 땅볼을 굴리면 불규칙 바운드가 많이 나와서 안타가 될 확률이 높았거든. 그러니까 ‘도끼 타법’은 단타를 노리는 스윙이었어. 그런데 내 스윙은 그게 아니었어. 미국 스타일로 홈런을 노리는 호쾌한 스윙이었거든. 그래도 코치님들이 시키면 해야지요. 겨우내 ‘도끼 타법’ 연습만 하는 거야. 하지만 내 몸에 안 맞는 타법으로 치면 맞을 리가 있나. 그래서 시즌 초에 부진했던 적이 많아요. 그러면 다시 내 스윙으로 돌아가는 거야. 만약에 내 스윙에 간섭을 안 받았다면 훨씬 잘 쳤을 거라고 확신해. 그때 내 라이벌들이 김봉연 선배, 친구 김성한 같은 해태 선수들이었거든. 해태 선수들한테 물어보니까 아무도 스윙에 간섭을 안 한다는 거예요. “내 스타일대로 치는데 누가 뭐라고 해?”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내 몸에 안 맞는 스윙 연습으로 시간 낭비 안 하고 내 스윙을 마음껏 해보고 싶어.
5. “가자 가자!!!”
상대 선수들 중에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내 입 때문에. 포수로 나가 있으면 한시도 조용히 있지 않았거든. 백인천 감독님이나 김봉연 선배 같은 분들은 타임 걸고 심판에게 이 놈 좀 조용히 시키라고 항의도 많이 했지. 게다가 내 목소리가 별로 듣기 좋은 편은 아니잖아요? 찢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가자가자!!!!!” 쩌렁쩌렁 소리 지르면 우리 편까지 놀랐어.
내 목소리에는 사연이 있어요. 중1 때 야구부 가입해서 처음 한 게 야구 연습이 아니라 소리 지르기였어. 선배들이 연습할 때 1학년들은 학교 담장을 보고 도열했어요. 담장에 대고 소리를 지르라는 거야. 파이팅하는 방법부터 배워야 한다는 거지. 목청이 작으면 불호령이 떨어졌어. 다들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지. 그렇게 며칠 하니까 목에서 피가 나더라고. 명창들처럼 득음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마침 변성기 때라 목소리가 이상하게 바뀌더라고.
고교 진학 뒤에도 소리를 질렀어요. 우리 학교랑 라이벌 경북고가 당시에는 바로 근처에 있었거든. 경북고 야구부가 연습할 때 지르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우리 학교까지 들릴 때가 있어. 그 날은 1학년들 제삿날이야. 쟤네보다 목소리가 작으면 안 된다는 거야. 경북고까지 들리도록 파이팅 소리를 지르는 게 우리의 임무였어요. 지금 들으면 엽기적이지만, 그때는 그런 시대였어.
▲ 항상 파이팅이 넘쳤던 ‘헐크’ 이만수 / 출처=KBO
삼성 팬들은 내 고함 소리를 좋아했지만, 난 내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목소리가 내 인생에 도움이 될 때도 있었지. 1998년에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처음 코치를 시작할 때, 난 아무 것도 아니었어. 아무도 영어도 못 하는 내가 누군지 몰랐지. 외로웠고 많이 울었어. 그런데 어느 날 나한테 3루 주루코치를 맡으라고 하더라고요. 미국 코치들은 다들 조용해. 그런데 나는 경기장에선 신나게 소리를 질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거든. 아는 영어가 ‘레츠고!’ 밖에 없어서, 우리말이랑 섞어서 경기 내내 소리를 질렀어. 그랬더니 다음 날부터 나한테 말을 걸어오더라고요. 나중에 메이저리그 팀 코칭스태프까지 올라가는 첫 밑천이 결국 내 듣기 싫은 목소리였던 거지.
6. “만수 나온나 캐라!”
나는 팬들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았어요. 12년 연속 올스타 베스트 10에 선정됐고 팬 투표 1등만 4번을 했으니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 항상 열심히 하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을 더 좋아하셨을 거야. 그러니까 야구 실력이 떨어진 뒤에도 좋아해 주셨겠지. 사실 1994년쯤부터는 팀에서는 은퇴를 권유하기 시작했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어. 실력도, 체력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 은퇴 직전까지도 전지훈련 전에 체력테스트를 하면 최상위권이었어.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후배들의 앞날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원년 멤버들이 모두 유니폼을 벗은 뒤에도 그라운드를 지킨 건 그런 이유였어요. 그래서 구단과 마찰도 많았지.
▲ 올스타전 행사로 선동열과 닭싸움을 하는 이만수 / 출처=KBO
벤치에 머무는 경우가 늘어나니까, 후배들을 관찰하고 응원하는 시간도 늘었지. 제일 많이 본 게 (이) 승엽이였어. 스윙이 너무너무 멋졌어요. 내가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스윙이었거든. 부러워서 더그아웃 뒤 기둥에 숨어서 한참을 보곤 했어. 그리고 퇴근하면 집에서 따라 했지. 나중에 타석에 들어서면 이렇게 쳐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가끔 그럴 기회가 있었어요. 승부가 대충 갈라진 경기 후반이면 팬들이 소리를 질러댔어. “만수 나온나 캐라!” 내가 진짜로 대타로 나오면 환호가 엄청났어. 시원하게 헛스윙을 하고 헬멧이 벗겨지면 팬들이 너무나 좋아하셨어. 그리고 박자에 맞춰 나를 놀리셨지. ‘만수 바~보~ 만수 바~보~’
7. “만수 바~보~”
2007년 5월 22일은 내 평생 못 잊을 날이에요. 미국 생활을 마치고 SK 와이번스 수석코치로 첫 대구 원정을 갔거든. 그러니까 대구를 10년 만에 찾는 날이었던 거야. 전날 식구들과 함께 대구로 갔어요. 지인들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손님들이 너무 반가워하면서 사인 요청을 하시더라고. 다음 날 파란색 대신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3루 대신 1루쪽 덕아웃에 들어가면서 관중석을 봤어요. 내 사진으로 만든 환영 플래카드를 들고 계시더라고. 더 감동적인 순간은 클리닝타임 때였어. 팬들이 내 이름을 연호하시는 거야. 덕아웃 앞으로 나가서 손 흔들고 답례를 하는데, 옆에 뭐가 떨어지는 거예요. 장미꽃이었어. 팬들이 나에게 장미꽃을 던져 주시는 거야. 나중에 기사 보니까 100송이였다더라고. 야구장에서 장미꽃 세례를 받은 야구인은 나밖에 없지 않을까?
▲ 여전히 대구 팬들은 이만수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 출처=KBO
대구 팬들만 나를 반겨주신 게 아니었어. 첫 광주 원정을 갔는데, 경기 막판에 관중석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리는 거야. ‘만수 바~보~ 만수 바~보~’ 눈물이 핑 돌았어. 그 소리가 정말 그리웠거든. 그분들께도 ‘만수 바~보~’가 즐거운 추억이었을 걸 생각하니 행복했어.
남은 삶은 내가 받은 사랑을 조금이나마 돌려드리고, 나를 있게 한 야구를 발전시키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 해. 사랑을 먹고 산 사람에게 자선과 기부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 생각해. 동남아시아에 야구를 전파하는 사업도 조금씩 커지고 있어. 라오스에 이어 베트남에도 곧 첫 국가대표팀을 만드는 게 목표야. 어쩌면 내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베트남 대표팀이 나올 수 있을지도 몰라. 베트남 일도 열심히 하고 있지만 나는 라오스 협회 임원이니까, 만약에 베트남이랑 라오스가 붙으면 라오스를 응원하기로 했어. 그래서 라오스가 이기면 시행할 공약도 걸었어.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의 중심가를 한 바퀴 뛰는 거야. 물론 팬티만 입고. 하하하.
이성훈 기자 / SBS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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