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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마음이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고 천국을 지옥으로 바꾼다.’고 말했다. 사람은 자기 생각에 조종을 받으며 살게 되는 것이다. 어둡고 우울한 부정적 생각만 하게 되면 결국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고 밝고 활기찬 생각만 하면 용기도 북돋워지고 자신감도 생기게 된다. 다음은 우리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다.
☞자신의 생각에 귀 기울여라
‘나는 왜 이럴까?’ ‘구제불능이야’ ‘난 안돼’등과 같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부정적인 생각에 귀를 기울여라. 내부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고 그것을 글로 적어 큰 소리로 말해보라. 그러면 자신의 우울과 불안의 원인을 찾을 수 있고 왜 그런 기분이 드는 지도 알게 된다. 조금만 연습하면 자신의 내부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 일에 익숙해져 길을 걷거나 운전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쉽게 들을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생각에 이끌려 다니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감정과 행동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부정적인 단어나 문장들을 가려내라
자신이 쓰고 있는 말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평가 절하시키는 말을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불과하다’ ‘고작’ ‘겨우’등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를 가려내고 긍정적인 말만 사용하도록 하라.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말라
생각을 중지시킨다는 말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머릿속에서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그만’이란 한마디 명령어로 그 생각을 중지시켜라. 내부에서 들려오는 걱정과 불안, 두려움의 소리를 중지시키면 기분이 밝아진다.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라
부정적인 생각을 모두 중지시켜 버린 뒤에는 그 자리에 긍정적인 생각들을 채워야 한다. 우울하고 침체된 기분에 빠지게 되면 무엇이든 우울하게 보이게 마련이다. 불안과 걱정, 우울에서 벗어나 시험에 합격했을 때의 기쁨이나 소풍갔을 때의 즐거웠던 일, 승진했을 때의 기쁨 등을 떠올려 보라. 즐거운 기억들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그것들을 생각하면 금새 마음도 밝아질 것이다.
☞사고의 방향을 돌려라
생각하고 있는 방향을 바꿈으로써 우울했던 기분이 좋아질 수 있고 침체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금요일까지 꼭 해야만 하는 어려운 숙제 때문에 긴장해 있기보다는 토요일에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갈 즐거움을 생각해보라. 사고의 방향을 돌리게 되면 자신과 주변의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된다.
목표를 성취한 자신의 모습이나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최고로 완성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러면 곧 그렇게 될 것이다.
she is moribund(내가 보리분드래)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여성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 Mead)여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 가지 고민에 빠져 있다고 설파하였다. 즉 질병에 대한 공포, 이유가 분명하지 않은 어떤 불만, 그리고 신경불안증이라는 세 가지 고민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가 겪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왜 그러한 문제들에 휩싸여야만 하는가? 그렇게 되는 근본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질병에 대한 공포심에 휩싸이고 무엇 때문에 괜스레 짜증이 나고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는가? 근본적으로 그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확고한 삶의 가치 체계를 세우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자기 나름대로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분명히 세우고, 삶의 목표를 확고하게 설정하고 있고,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분명히 선언하고 지니고 있는 사람은 그러한 세 가지 고민에 빠져들지 않을 듯 싶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선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확신의 바탕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여기 그 좋은 예를 하나 읽어보자.
때는 1960년대의 어느 해 여름날, 오스트리아의 어느 국립병원에 50대 아주머니가 입원했다. 의사들의 계속된 정밀검사 결과 아주머니는 암으로 판정되었고, 더불어 앞으로 1년 이상을 살기가 어렵다는 결론도 내려졌다. 어느 날 갑자기 암이라는, 그래서 앞으로 얼마의 기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그러한 사람들의 심리변화를 연구한 어느 학자의 얘기를 빌리면, 그때 사람들은 대체로 다섯 단계를 거쳐서 죽어간다고 한다. 즉, 처음엔 그러한 진단과 선고를 불신하다가, 다음엔 그것에 대하여 ‘하필이면 왜 저를 데려가십니까?’하고 분노를 겪는다. 그러다가는 하나님과 협상을 벌인다고 한다. 이렇게 저렇게 제가 할 테니까, 하나님 1년은 너무 짧고 앞으로 3년만 더 살게 해주십시오. 협상이 안 되는 것을 알고 환자는 슬픔에, 절망에 빠지고, 맨 나중엔 체념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앞서의 아주머니도 그러했다. 처음엔 그러한 사실을 믿지 않으려 했고, 다음엔 하나님께 분노하고, 의사와 가족들에게 분노했다. 그러다가 아주머니는 하나님과 협상하기 시작했다. 간절히 기도를 했다. 몇 년만 더 이 땅에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간청하는 기도를 계속했다. 삶에 대한 마지막 불타오르는 열정이 그 아주머니의 몸과 마음속에 가득했다.
이때쯤이었는가 싶다. 병원에 가본 사람은 모두 알겠지만, 의사들은 아침마다 회진을 한다. 그러나 주치의만 회진하는 것은 아니다. 주치의와 관계되어 있는 많은 동료 의사들이 각기 제각금의 일을 위해 병실을 들락날락거린다. 이 병원에서도 그랬는가 싶다. 어느 날 주치의에게 환자가 매달렸다.
“선생님, 저 좀 살려주세요.”
의사는 한참이나 말을 못했다. 차트 속에 나타나 있는 기록으로는 도저히 살려낼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의사는 무슨 말을 해주어야 되겠다 싶어 한참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살려 드릴게요. 그러나 저희가 아주머니가 1년 이상을 더 넘기시기 어렵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주머니가 지금 암에 걸리셨어요. 암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의 경우는 좀 특별해요. 도대체 아주머니의 암은 무슨 암인지 진단하기가 어려워요. 아직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밝혀만 내면 고칠 수 있어요. 그런데 저희 병원 의사들로서는 아직 밝혀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보다 새로운 의학을 공부한 전문의가 와서 아주머니를 다시 진단하고, 암의 정확한 병명을 찾아내면 고쳐드릴 수 있어요.”
이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그날부터 잠만 깨면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했다.
“하나님 마지막 부탁입니다. 이 한 가지만 들어주세요. 이 병원으로 빨리 새로운 의학을 공부한 의사를 보내주세요. 제 암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의사를 보내주세요. 그래서 진단만 하면 고칠 수 있답니다.”
눈물어린 기도는 낮밤 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게 웬일인가. 처음 보는 낯선 의사가 환자 앞에 섰다. 아주머니는 기대에 부풀었다. 이 양반이 내가 기도한 덕분에,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새 의사인가? 누워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환자를 이렇게 저렇게 살펴 본 이 의사는 그때, 옆에 서 있는 다른 젊은 의사들과 간호원들을 향해 영어로 말을 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영어도, 독일어도 통용된다. 영어가 통용이 안 되더라도 의사들은 원래 수많은 전문용어를 영어로 말하는 것이 상례였다.
"She is moribund."
이 여자는 모리분드이다. 환자도 들었다. 날보고 모리분드라, ‘모리분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하기야 그때까지 이 단어는 사전에 나오지 않는 단어였으니까. 「모리분드」 그래, 원래 병명은 학술적으로, 전문용어로 표현할 때 그렇게 어렵지 않던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날보고 모리분드라, 그래 맞아 내가 모리분드암에 걸렸다 이것이다.
“그래 나는 모리분드 암에 걸렸다.”
이렇게 생각한 아주머니는 하나님께 자신의 간구에 응답해 주셨음을 눈물로 감사하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들어주셔서 내게 새 의사를 보내주셨고 그 의사는 내 병명을 진단해 냈다.
이제는 주치의 말대로 이 사람들은 나를 고칠 수 있을 거야, 병명이 밝혀졌으니까. 병명을 몰라 못 고친다고 했지 않은가?
“아 주여,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살아서 나갈 수 있습니다.”
감사와 환희의 뜨거운 눈물이 매일 가슴을 적셨다.
이 아주머니는 1년을 넘겼다. 그리고 그 이듬해,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아주머니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을 했다. 병세가 참으로 호전된 것이다. 완쾌는 안 되었지만, 집에 가있어도 될 만큼 호전된 것이다. 1년을 못 넘긴다는 사람이 2년 가까이 병원생활을 하더니 살아서 집으로 돌아간 것이라 모두가 놀라워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도대체 이 환자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병세가 호전되었을까? 의사들은 의학적인 측면에서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동안 그 아주머니의 치료과정을 다시금 면밀히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수술이, 어떤 약이 그 아주머니의 병세를 호전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이때나 그때나 암을 고치는 특별한 약이 발견되지 않았는가? 의사들은 별로 신통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결국 의사들은 다시금 환자를 만났다. 이제부터 환자의 투병과정을 듣기 위해서였다.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셨어요?”
“1년은 너무 짧으니 몇 년 만이라도 더 살게 해달라고요.”
“그랬더니요?”
“의사선생님께 애원했지요. 그런데 의사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병명을 몰라서 못 고친다고, 이 병원에 오늘이라도 훌륭한 새 의사가 와서 제 병명을 진단하게 되면 고칠 수 있다고 하십디다. 그래서 그날부터는 새 의사를 보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 새 의사가 아주머니 기도대로 오셨습니까?”
“네,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이 누구였습니까?”
“저기 저분 같았습니다.”
“그래요, 아주머니 병명이 진단되었나요?”
“네, 밝혀졌습니다.”
“병명이 뭐라고 하던가요?”
“모리분드요.”
아마도 이 이야기를 들은 의사는 그 스스로도 졸도할 만큼 놀랐을지 모른다. ‘모리분드(MORIBUND)는 병명의 종류가 아니다. 암의 종류가 아니다. “다 죽어가고 있다.”라는 뜻이다. 그때 어느 의사가 회진을 돌면서 “이 아주머니는 다 죽어가고 있구나.”라고 던진 한 마디였던 것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결론을 내렸다. 결국 이 아주머니가 기적과도 같이 살아난 것은, “병명을 알면 고칠 수 있다.”라는 환자만의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루신 기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냥 이루신 기적은 아니었다. 그 아주머니가 참으로 얼마나 굳게 믿고, 온 몸 온 마음으로 그러한 믿음을 바탕에 깔고 노력했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적을 이루시는 밑바탕이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일찍이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자기충족적 예언(selp-fulfiling prophecy)이라고 개념화시켰다. 그러나 그러한 식의 믿음과 습관화는 우리에게도 일찍부터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 것이 그렇다. 어떤 예언을 하면, 그 예언 그대로 예언이 실현되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즉 예언 그 자체가 예언을 실현시키는 가장 큰 힘이 된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예언을 하면, 예언은 그렇게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사에 어떻게 예언하는 것이 좋겠는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긍정적으로 예언하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예언하면, 우선 행동의 반경, 행동의 시간과 공간이 넓어진다. 똑같은 현상을 보았어도,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이 내보이는 지각의 범위는 엄청나게 차이가 진다.
긍정적으로 예언하고 행동하면, 마음속에 언제고 기쁨을 느끼고, 그로 인한 자아 내적인 동기가 커진다. 사람을 처음 만나서 그 사람을 긍정적으로 예언하면, 그는 그 사람과의 만남과 그 사람과의 일을 기꺼운 마음으로 행한다. 또 어떤 일을 맡게 되었을 때, 그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그 일의 능률도 오르고, 성과 역시 기대 이상으로 크게 거두게 된다.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용해시키고 포용하게 된다. 작은 허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눈에 띄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좋은 점만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네 어른들이 가정교육에서, 학교교육에서, 또 거리의 사회교육에서 우선 우리네 청소년들에게 가져야 할 기본시각은 바로 좀더 긍정적으로 그들을 예언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선생님이 학생에 대하여 보다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일이 그들의 미래를 키워나가는 데 있어 무엇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할 전제조건이라 생각한다.
가련한 사람들을 돕고 싶다- 알프레드 노벨
알프레드 노벨(1833~1896)
알프레드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의 스톡홀롬에서 가난한 집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정 형편은 말이 아니어서 세무서 장부에 구호대상자로 등록이 되어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노벨은 날 때부터 몹시 허약하였다.
“내 요람은 죽은 사람의 침대와 같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조금도 포기하지 않고 곧 꺼질 것 같은 생명의 불씨를 지키기 위하여 밤새도록 돌보아 주셨다. 나는 젖을 빨 힘도 없이 가끔 경련을 일으키면서 보챌 뿐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죽음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노벨은 소년 시절을 회상하기 싫어했다. 병치레의 나날에다 갖은 고생의 연속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했다. 맨 마지막으로 손댄 스웨덴 최초의 고무공장이 도산하자 채권자들을 피해 처자를 남겨둔채 스톡홀롬에서 핀란드를 거쳐 러시아로 도망갔다. 그후 어머니는 스톡홀롬의 식료품 가게에서 일을 해 네 아이를 키웠다. 이 시기에는 노벨을 포함한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성냥을 팔았는데 그 보잘 것 없는 수입에 살림에 큰 보탬이 될 정도였다.
노벨은 8살에 성 야곱 실업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성적은 82명 중 3등을 할 정도로 좋았다. 그러나 1년 뒤에는 학교를 그만 두었다. 러시아에서 기계공장을 경영하던 아버지가 사정이 좀 나아지다 가족들을 불렀기 때문이다.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노벨이 훗날 풍부한 교양을 갖추고 여러개의 외국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독학으로 얻어진 결과였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공장에서 일하다 스톡홀롬으로 돌아와 니트와 글리세린으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았으며, 유산 3,200만 크로네는 유언에 따라 노벨상 기금이 되었다. 물론 노벨상은 세계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낸 학자나 인물들에게 주어지지만 다른 의미의 유언장도 남겼다.
“될 수 있다면 인생을 헤어나지 못하는 가련한 사람들을 원조하고 싶다.”라는 내용이었다.
노벨은 다이나마이트가 군사용으로 남용되어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그것이 전쟁에 사용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전쟁은 “공포 중의 공포요, 범죄 행위 중에서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죽음을 미리 생각해 보는 자세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일약 구라파의 거부가 된 스웨덴의 알프레드 노벨은, 1884년 4월 어느 날 프랑스의 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신문에 자신의 사망 기사가 게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은 그의 형이었던 루두비히 노벨이 죽은 것을 신문사가 잘못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벨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은 자신의 사망 기사뿐만 아니라, 그 기사 속에 표현된 자신에 대한 호칭 때문이었습니다. 그 기사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란 폭탄을 발명한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 사망하다.”
노벨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음의 상인’이라 부르고 있다는 데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 노벨은 자신의 죽음과 죽음 이후를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 재산을 희사, 인류의 행복과 생명을 위해 기여한 사람에게 큰상을 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약 그가 그의 잘못된 사망 기사가 게재된 프랑스 신문을 보지 않았더라면, 다시 말해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갖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야말로 ‘죽음의 상인’으로 죽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당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당신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하루살이 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죽음을 알고 있다면 당신의 이미 생명의 사람이 다 되었습니다. 자기 죽음을 아는 자는 참 삶의 길을 걷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의미가 부여된 삶
의미 있는 삶이 중요한 것은?
ꡔ당신이 지금 웃으며 그곳에 서있듯이, 나도 한때는 웃으며 그곳에 서있었소.
내가 지금 여기에 누워 잠들어 있듯이, 당신도 언젠가는 이런 곳에 잠들 것이오.
어서 돌아가서 나를 따를 준비를 하시오.ꡕ
어떤 사람의 묘비명을 대신하여 쓴 위 글을 읽고는 어떤 느낌이 들까?
어찌 읽어보면 처음엔 돌아가는 길이 무섭기도 하고 겁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에게 변함없는 한 가지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죽을 준비’, 그것이 곧 살아가는 것임을, 살아간다는 것이 곧 ‘죽을 준비’를 하는 것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결국 삶과 죽음은 반의어가 아니다. 반대말이 아니다. 대칭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삶과 죽음은 동의어이다. 같은 방향의 행동을 시각에 따라 달리 표현한 것이다. 삶이 죽음이고, 죽음으로 향한 노력이 곧 삶의 노력이다.
이러한 삶의 과정, 죽음의 과정은 모든 동물들에게 공통된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 비하여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로서, 삶과 죽음의 과정에서 저 나름대로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어떤 학자가 실험을 하였다고 한다. 회사를 가장해서 사람을, 신입사원을 뽑는다는 광고를 냈다. “학력불문, 연령불문, 성별불문, 외모 체격 불문” 모두가 불문이었다. 가뜩이나 모집광고에 보면 ‘대학졸업자’를 뽑는다는 얘기뿐인데 어찌된 일인가? 이 회사에서는 학력이든, 성별이든, 무엇이든 따지지 않겠다니, 그리고 광고 맨 끝에 붙여진 활줄, ꡔ본 회사에서는 4년제대학 졸업 신입사원의 월평균임금액인 1,500$을, 매주 그 만큼씩 지급하겠음.ꡕ하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한 달에 그러면 6,000$씩 준다는 얘기 아니냐. 확인을 해보니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응시를 했다. 연구자는 그 가운데서 100명을 제비뽑기 식으로 뽑았다. 물론 겉으로는 입사시험을 보았으나, 그것은 실험을 위장하기 위한 형식적인 시험이었다. 그리고 100명을 불러 모았다. 모두들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고 그렇게 많은 돈을 준다는 것이냐? 설마하니 도둑질은 시키지는 않을 것이고, 모두가 기대에 차서 인사부장의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였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회사에 입사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각기 방(사무실)을 배정 받을 것입니다. 각 방에 가시면, 여러분 책상 위에는 16절지 종이가 쌓여 있습니다. 종이를 보시면 좌우에 점이 아래로 쭉 찍혀있습니다. 여러분이 저희 회사에서 하시는 일은 바로, 그 점에 따라 자 대고 좌우로 줄을 치는 일입니다. 근무는 아침 9시에 시작하여 12시까지 일하고, 점심시간은 12시부터 1시까지, 그리고 오후에는 1시부터 5시까지 하시면 됩니다. 하루에 몇 장씩 그어야만 하는 최소 부담량은 없습니다. 그저 성실히 그으시면 됩니다. 하루에 30장밖에 못 그으셔도 됩니다. 그저 성실히 열심히만 해주세요.”
사람들은 신이 났다. 정말일까 하는 의문도 생겼다. 그러니까 연령, 학벌, 성별을 모두 따지지 않는다고 했구나. 그래, 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고, 다른 동료와 갈등을 일으킬 필요도 없고, 머리 싸매고 골머리를 앓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줄만 그으면 된다는 거지. 그러면 금요일 오후 5시에 퇴근할 때 1,500$을 준다고.
첫날인 월요일에 사람들은 모두 신이 나서 열심히 줄을 그었다. 이튿날도, 사흘째도 모두가 그러했다. 그러나 변화는 나흘째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100명 중 몇 사람이 사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따졌다.
“이 종이에 줄을 그어서 어디에 쓸 것이냐? 왜 그어야 하느냐? 줄친 종이가 필요해서 그러느냐? 우리를 실험하는 것이냐? 못 배웠다고 불쌍하게 여겨 적선하는 것이냐? 차라리 밖에 나가서 땅을 파라고 하거나 쓰레기를 주우라고 해라. 이런 일이 일이냐? 줄그은 종이가 필요하면 인쇄해서 써라.”
그리고는 사장실 문을 뛰쳐나가 회사를 그만 두었다. 결국 모든 사람이 몇 주일 안 가서 직장을 그만 두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렇게 돈을 많이 주는 회사를 박차고 나갔을까? 답은 자명하다. 사람은 제아무리 돈을 많이 주어도, 결국 일의 ‘의미’를 찾기 어려울 때 힘들어하고 결국엔 그 일로부터 떠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몹시 배가 고프고 먹고살기 어려웠을 때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따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에선 그렇지 않다. 먹을 수 있다. 배는 고프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일까?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각각의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여 우리는 힘든 것이 아닌가!
살아가는 의미, 죽어 가는 의미의 발견은 모든 사람이 모든 연령, 모든 계층, 모든 직업, 그 어떠한 것에도 관계없이 필수적인 요건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러한 의미는 결코 밖에서 그 어느 누가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찾아내야 하고 각자가 만들어 내야 한다. 회사에서 사원들에게 월급도 주고, 승진도 시켜주고, 지위도 주고, 철 따라 선물도 주고, 모든 것을 준다. 그러나 개인이 그 회사에 다니는 ‘의미’만큼은 그 어느 회사도 이것이다 하고 나누어줄 수가 없다. 그들 스스로 찾아야 한다.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고 학습을 할 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학교에 가서 제아무리 교실에 오래 앉아 공부를 한다 해도, 의미를 찾지 못하면 학습은커녕, 그들은 더욱 더 학교에 대한, 자아에 대한 증오심만 키운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학생들을 도와주어야 할 가장 큰 일 중의 하나는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의미를 찾아내도록, 의미를 가꾸고 유지해 나가도록 돕는 일일 것이다.
재수
5학년 한 아이가 쓴 글인데 내용을 줄여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도시락을 싸오지 않았습니다. 컵라면을 사먹기 위해 주머니를 뒤져보더니 “우와, 오늘 재수 디게 없네.” 이러는 것입니다. 돈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집에 돌아가다가 똥을 밟고 말았습니다. “우와, 내 진짜 징허네. 오늘 재수 디게 없네. 돈도 잃어버리고 똥까지 밟다니 오늘 무슨 재수 없는 날인가.” 또 개울에서 신발을 씻고 집에 돌아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우와, 오늘 디게 열 받네.” 그리고 홧김에 돌을 차버렸는데, 그만 발이 길가 시멘트로 해 놓은 곳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내 발! 아이고 이 놈의 재수가 없어도 디게 없네.”
제딴엔 너무 화가 나니까 그 돌을 집에 가지고 가서 망치로 부셨습니다. 그런데 돌을 부셔가다가 그만 망치로 손을 치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내 손! 돈도 잃어버리고 똥도 밟고, 돌 때문에 넘어지고 망치로 손을 치고 오늘 무슨 재수가 내 죽이는 날이가.” 이러면서 ‘오늘 재수 디게 없는 날이다.’라고 푸념 섞인 한마디로 끝맺은 글입니다.
웃음이 나오지요, 그렇지만 제 잘못을 ꡔ재수ꡕ로 돌리는 건 아무래도 옳다고 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재수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어른들 같으면 위의 아이와 같은 일을 해놓고 ‘재수가 옴붙 듯 하다.’든지 ‘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할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 재물이나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는 운수를 ‘재수’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실수를 한다든지 잘못을 저질러놓고 “난 재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해버립니다. 어느 누구나 요행수를 바라고 있는데 그 요행수를 크게 바라면 바랄수록 재수를 크게 바라는 사람이라고 보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또 재수를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사람은 자기 잘못이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합리화해버리는 사람이라고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굴러 떨어진 돌에 언덕 밑 길에 있던 사람이 맞아 다치는 것, 축대가 무너져 잠자던 사람이 죽는 일, 하고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신에게 떨어지는 재수 없는 일은 참으로 많지만 따지고 보면 사람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일 아니겠습니까. ‘재수 불 일듯 한다’란 말은 재수가 퍽 좋아서 뜻대로 잘 되어 간다는 말인데 사실은 어떻게 저절로 좋은 일이 생기겠습니까. 좋은 일이 생기게 되기까지는 그 만큼의 뼈아픈 노력이 따랐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재수가 좋아서 나쁜 일로도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는 코가 깨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그 ‘재수’가 진짜 재수가 아니란 걸 알 것입니다. ‘재수’란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지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황금들판의 어머니와 아이
아이가 어머니를 따라 황금들판에 나왔습니다. 아이는 논둑에 자란 풀을 쳐버리는 어머니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논으로 들어가 이제는 정성스럽게 벼를 베는 어머니를 볼 것입니다.
아이의 눈에 비친 어머니의 일들은 신비롭기만 합니다. 왜 풀들은 낫으로 쳐서 버리고, 왜 벼는 정성스럽게 베어 걷어 들이는지 지금은 아무래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잡초는 씨 뿌리지 않아도 그냥 자랍니다. 나쁜 생각은 가만히 있으면 그냥 자랍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쓸모없는, 낫으로 쳐서 버리는, 힘만 들고 소득은 전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벼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생각은 씨 뿌리고 김매고 열심히 가꾸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좋은 열매로 맺어 우리의 양식이 되고 기쁨이 되고 만족이 됩니다.
아이는 행복합니다. 어머니의 일하는 모습과 황금들판을 바라보면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자연은 그들을 가까이하는 이를 버리지 않습니다. 언제나 사랑과 도움과 깨달음을 줍니다. 가을은 몸짓 하나만으로도 우리를 이렇게 충분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류태영(건국대학교 교수)
머슴의 아들로 태어난 나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가난은 나에게 있어서 한이었고, 비참을 뛰어 넘는 비극이었으며, 굶주림과 무지의 굴레로 씌워진 운명이었다. 오직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힘은 믿음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흙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기독교적 신앙의 힘이었다.
원래 나는 문화 류씨의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었으나 할아버지 대에 와서 집안이 몰락해 버리는 바람에 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니 하루 끼니를 때우는 일조차 예삿일이 아니었다. 어느 해는 한달이 지나도록 곡식을 입에 넣어 보지도 못하고 소나무 껍질이나 칡뿌리, 도토리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심지어 어느 날은 자동차에 치어죽은 고양이를 삶아 먹기도 했다. 집이라고 해야 한 칸 방의 흙집에 여러 식구가 올망졸망 부대끼며 살았다. 거지와 다름없는 비참한 생활이었다.
‘찬물은 위아래가 있어도 끓인 물은 위아래가 없다.’는 말처럼 우리네 농촌의 처절했던 가난을 정확히 대변할 말은 달리 없는 듯하다. 우리의 미풍양속에는 어른이 먼저 음식을 손에 대야 비로소 아랫사람이 손을 댈 수가 있었다. 비록 찬물 한 그릇이라고 어른이 먼저 마신 후에야 아랫사람이 마셔도 된다는 뜻이다. 끓인 물이 위아래가 없다 함은 물이 끓을 때 아래위로 뒤섞이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먼저 마셔도 좋다는 의미다. 밥솥에 끓인 물이 바로 숭늉이다. 어른이 숭늉 밑에 가라앉은 누룽지 찌꺼기를 먹기 위해 아랫사람에게 숭늉은 먼저 먹어도 좋다는 일종의 양보(?)를 하는 예의절차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나도 숭늉 찌꺼기를 얻어먹기 위해 형편이 괜찮은 친구 집에 일부러 자주 들렀다. 한 번은 마루에 놓인 커다란 숭늉 양푼 바닥에 두어 숟가락쯤 되어 보이는 찌꺼기가 가라앉아 있는 게 보여 그 찌꺼기를 먹기 위해 숭늉 한 그릇을 다 마셔버린 적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먹는 것도 없이 지게를 지고 일을 하면서도 나에게는 유일한 낙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 아무리 힘든 생활이었지만 내 주위에서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이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도 교과서 대신 지게를 짊어지고 황소처럼 일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공부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리하여 집에서 키우던 토끼 몇 마리를 팔아 중학 강의록이라는 책을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꺼내 읽었다. 때로는 초등학교에 미 진학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고등 공민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그런 내가 기특하게 보였던지 마침내 나에게 첫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지역 국회의원 아들의 가정교사로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 그 국회의원의 배려로 중학교에 편입할 수가 있었다. 그때 내 나이 18살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다시 가슴이 답답해왔다. 하릴없이 산 속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몇 날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굳게 마음을 결정했다. 나의 이런 결심에 어머니도 어쩔 수 없으셨는지 말리기를 포기하시고 쌀 한 가마니 정도의 돈을 빚내 주셨다. 서울에서 한 달 최저 생계비도 안 되는 돈을 들고 서울로 떠난 것이다.
이 길이 비록 멀고 험할지라도 한 번 세운 뜻은 결코 굽히지 않으리라. 후대의 자손들이 그 덕을 입을 수 있다면 성실하게 살다가 죽었다는 것에 만족하리라. 절벽 앞에 섰을 때에는 하나님을 부르며 이마로 바위를 치리라. 그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좋은 길이 열리리라. 그렇지 않다면 이마가 터져 피를 흘리며 죽어 버리리라. 굳을 결심 끝에 서울로 올라온 나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결코 고향에 내려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처음에는 대방동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 구두닦이를 했다. 잠자리는 영내 구석에 쳐놓은 천막이었다. 일단 고정된 수입이 생기자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길로 무작정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따라 흑석동에 있는 동양공업 고등학교 서무실로 찾아가 서무과장을 만났다. 그러나 입학철이 두 주일 정도 지난 시점이라 한 마디로 거절당했다. 내친 김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무조건 교장 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결국 교장선생님을 만나 사정 얘기를 했다. 당시 교장 선생님은 김 봉주 선생님이셨는데 그렇게 인자하실 수가 없었다. 그 교장 선생님의 특별 배려로 구두닦이 하던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입학금은 면제받고 등록금은 분납토록 하는 외상 입학이었다. 학교에 입학하자 필요한 건 돈이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신문배달, 아이스 케키 장사. 빨래비누 장사 등 이 내가 했던 그때의 직업들이다. 그래도 대학교에 들어갈 등록금까지 마련해 두어야 했기 때문에 자장면 한 그릇 먹기를 그렇게 소원하면서도 시장 바닥에서 파는 멀건 수제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그나마 수제비도 아까워 주식은 10환에 다섯 개 주는 국화빵이 대부분이었다. 신문 배달을 할 때 길거리를 지나다가 길가에 떨어진 밥덩이를 주워 흙을 털어내고 먹거나, 곰팡이가 나서 버린 빵 조각을 주워 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공부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어려운 시절을 보내자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대학 시절에도 신문 배달, 공장 청소부 등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다가 후반기에는 입주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다. 대학 3학년 무렵으로 생각된다. 그때 나는 독립군 근처에서 가정교사를 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나를 잘 보았던지 속옷은 몰라도 내의 정도는 빨아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내게 내의가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내의가 없으면 진작부터 말을 할 것이지 사람이 어찌 그리 무디나, 원 우리는 내의를 두 벌씩 입어도 추위를 견디지 못해 엄살인데, 학생은 도대체 강철로 된 인간인가.”
그렇게 혀를 내두르면서 아주머니는 내게 내의를 두 벌이나 사주었다. 실로 태어나서 26년 만에 처음 입어보는 내의였다.
등록금을 제때 마련할 수 없었던 나는 대학을 무려 7년 만에 졸업했다. 그리고는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비웃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뜻이 있어 신학교 기독교 교육학과에 학사로 편입했다.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위해서였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고등 농민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잊고 있던 흙에 대한 꿈이 새롭게 일었다. 그 당시 나에게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은 일본의 가가와 토요히코 선생이었다. 그는 나에게 ꡔ한 알의 밀알ꡕ이라는 책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끝없이 일러주었다. 바야흐로 어려서부터 막연하게 키워온 잘사는 농촌 건설에 대한 구도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지상 낙원이라는 덴마크 유학에 대한 꿈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시절에 나는 지금의 아내이자 평생의 동반자인 이소영씨를 만났다. 그녀의 부친은 초등학교 교장이었고, 마침 내 친구가 그 학교 급사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친구를 찾아가면서 그녀 부친의 눈에 띌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와도 자연스러워질 수가 있었고 급기야 난 청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길로 그녀의 부친에 청혼서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답신이 왔다.
‘과분한 청혼을 한 귀의를 당장 받아들이고 싶으나, 지금은 군이 공부에 매진할 시기인 만큼 나중에 적당한 시기를 보아 이야기하자.’
난 뛸 듯이 기뻤다. 직장도, 집안도, 장래성도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던 나에게 신뢰를 보여준 그녀의 아버지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약혼을 한 지 2년만이 33세 때 결혼식을 올릴 수가 있었다. 결혼식 날 생전 처음으로 처가에서 맞춰준 새 양복과 새 구두를 신었다. 그러나 신혼여행을 다녀올 돈도 나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식장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기본요금이 오르기 전에 차에서 내려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나는 내 돈을 내고 사 먹는 음식 중에 가장 값비싼 떡만두국을 사먹었다. 그리고는 서울역에서 안양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안양에 내려 유원지 근처에 있는 한 여인숙에서 둘만의 신혼 초야를 보냈다. 물론 길가의 포장마차에서 된장국으로 식사를 했다. 아무런 불평도 없이 따라오는 아내가 그지없이 고맙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가슴에 담아두었던 유학의 뜻을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비쳤다.
“몇 년이 걸려도 좋으니 가서 내 걱정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서 힘을 길러 오세요.”
그렇게 유학의 뜻은 정했으나 당장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왔다. 편지를 쓰라는 것이었다. 그길로 나는 한국의 농촌현실과 덴마크의 선진화된 농업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써서 서툰 영어로나마 번역을 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누구에게 보내야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또 기도를 했다. 그리고는 덴마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 국왕에게 보내면 내 뜻을 들어줄 것이라고 짐작했다. 곧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 백과사전을 찾았다. 덴마크 국왕은 프레드릭 9세였다. 주소는 알 필요 없었다. 덴마크 국민이면 누구라도 국왕이 사는 곳을 알 수 있으리라. ‘덴마크 코펜하겐 프레드릭 9세 국왕 귀하’ 겉봉투에 쓴 주소와 이름이었다.
40여일 만에 덴마크 왕실로부터 ‘귀하가 보내주신 서신에 국왕께선 감동을 하셔서 행정부로 이첩하면서 귀하의 소원을 가능하면 들어주라고 당부하셨다.’라는 내용의 답신을 받았다. 곧이어 덴마크 외무성으로부터 공식 초청장이 날아왔다.
‘당신이 원하는 기간, 원하는 장소, 원하는 분야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지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꿈에 그리던 유학의 길에 오를 수 있었다. 덴마크 농과대학에 입학한 후 먼저 덴마크 언어를 속성으로 배웠다. 3개월 후부터는 모든 대화를 덴마크어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덴마크어가 유창하다는 정도로 칭찬을 받아, 9개월 후부터는 여러 덴마크 국민 고등학교에 초청을 받아 한국을 소개하는 강의를 덴마크어로 자연스럽게 하고 다녔다. 유학 온지 10개월쯤 되었을 때인가 싶다. 덴마크 주변의 여러 유럽 국가를 여행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 외무성 국장을 찾아갔다.
“당신의 나라에서 나를 초청하여 국비로 공부시켜주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당신네 나라의 돈으로 나를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국장에게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당신 개인보다는 당신 조국인 한국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민 총생산의 2퍼센트를 개발 도상 국가에 지원하도록 결의한 바 있다. 우리는 그 결의를 준수하여 개발 도상 국가에 학교나 병원을 세워 운영하기도 하고, 청년을 초청하여 지도과 과정을 교육시켜 그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도 한다. 당신도 그런 차원에서 초청된 것입니다.”
“그러면 덴마크 한 곳에 머물러 연구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비교 연구를 하는 것이 좋습니까?”
“물론 비교 연구가 효과적이죠.”
“그럼 내가 유럽 각국에 문화를 시찰할 수 있도록 예산 지원을 주선해주십시오.”
“나에겐 그런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럼 결정권이 있는 장관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오, 당신편이 되어서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끝내 2만 달러의 특별 예산을 얻어 내 개인 돈은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할 수가 있었다.
덴마크에 온 지 2년이 되어, 덴마크에서 개발 도상 국가 지원 자금을 예산에 확보해놓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나는 당장 외무성 차관에게 달려갔다. 그동안 구상한 한국 - 덴마크 농업기술학교 설립안도 제출했다. 덴마크 정부로부터 80만 달러의 무상원조를 받아 한국에다 농업 기술요원 양성학교를 세운다는 계획이었다. 덴마크 정부의 의사는 긍정적이었다.
‘자연인 당신에게 그 돈을 줄 수가 없으니 당신 정부의 추천서나 의견서를 받아오시오.’
그러면 지원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즉시 나는 우리 정부에 편지를 보냈다. 주 스웨덴 한국 대사관에도 정부 추천을 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증빙 서류도 제출했다. 그러나 별로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귀국하여 직접 교섭키로 마음을 먹었다. 그 길로 나는 공부를 중단하고 즉각 귀국을 서둘렀다. 귀국하는 길에 이스라엘 정부의 초청을 받아 이스라엘에 들렀다. 이스라엘 농촌 개발에 관하여 6개월간 공부를 했다. 영어로 강의하는 외국의 선생의 교육기관에서 연구하였던 것이다. 귀국하자마자 나는 당장 추천서를 받기 위해 정부 부처를 찾아다녔지만 누구 하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증빙 서류도 첨부했지만 결국 시한을 넘겨버려 그 돈은 몽땅 탄자니아에 개발 자금으로 넘어가 버렸다. 정부 측의 무성의로 계획이 무산되자 공무원들의 경직된 사고방식과 행정 자세에 분노가 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는 농촌 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여러 대학에 시간 강사로 출강을 했다. 그러던 중, 건국대학교 설립자이신 상허 선생을 만나, 건국대학교 축산대학 교비 장학생들의 정신교육을 맡아 훈련시키는 성관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렇게 건국대학교에 재직하면서도 틈나는 대로 농촌을 방문하고, 텔레비젼이나 라디오에도 출연하면서 농촌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와대의 부름을 받고 들어가 청와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만들어 새마을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환경과 비슷한 이스라엘에 대한 유학 욕구가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2년간 새마을 운동에 관여하다가 마침내 1973년 봄, 나는 모든 관직을 떨쳐버리고 이스라엘 유학길에 다시 올랐다. 히브리어 한 글자 모르는 상황에서 난 이스라엘에 간지 3개월 만에 회화를 마스터하고, 7개월 만에 대학원 입학시험을 히브리어로 보아 합격했다. 어떤 상황이든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인 것이다.
5년 2개월 동안의 피나는 노력으로 나는 최단 기간 만에, 최고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 학위를 마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이 가장 컸다는 믿음과 하고자 하는 의욕 그리고 노력에 의해 얻어낸 결과였다. 이런 나의 자세는 언젠가 세상을 다하는 순간까지 끊임이 없을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소련에서 있었던 일이다.
철도국에서 근무하는 한 직원이 냉장고 화차 속에 들어간 후에 실수로 문이 밖에서 잠겨버렸다. 갇히게 된 그는 아무리 빠져 나가려고 해도 나갈 수가 없었다. 힘껏 두드려 보아도, 냉장고 화차 속의 단단한 시설로 인하여 바깥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혹시 누가 와서 우연히 문을 열어 주어 구언을 받는 것만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얼어 죽게 될 형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람은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드디어 몸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의 상태를 화차의 벽에다 기록해 나갔다.
“몸이 점점 차가워 진다…. 그래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나는 점차로 몸이 얼어옴을 느낀다.…. 나는 이제 몽롱해진다…. 아마도 이것이 나의 마지막일런지도 모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직원들이 그 냉장고의 화차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냉장고 화차는 오래 전부터 고장이 나 있었던 것이다. 공기도 충분하고 실내 온도가 섭씨 13도에 불과했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되는 것이다.
역사 속의 신앙인
안중근(1879~1910)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는 많이들 알지? 1909년 10월 26일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를 죽인 하르빈의 총성과 목이 터져라 외친 “대한 제국 만세!”, 그리고 죽음을 앞둔 강도 일본의 재판정에서의 의연한 몸가짐과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도도한 연설. 더구나 사형 직전 2천만 동포들에게 적어 보낸 유언은 오늘의 우리가 들어 봐도 숙연한 내용이지.마음을 여미며 들어 볼까.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산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의사는 이듬해 3월 26일 32세를 일기로 어머니가 손수 지어 보내 둔 새 옷을 깨끗이 갈아입고 만주 뤼순 감옥에서 원수의 손에 의하여 장렬히 순국하셨어.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간 대한 남아 안중근 의사.
오늘은 그보다 신앙인으로서 의사의 면모를, 교회법을 뛰어 넘은 한 성직자의 사랑과 함께 이야기 해 볼까 해.
안 의사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어. 그는 거사 출발에 앞서 성호를 긋고 “하느님께서 부디 성공을 주십시오.”라고 기원했으며, 일본 관헌에게서 이토의 사망 확답을 듣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는 사라졌습니다.”라고 외쳤다고 해.
안 의사는 의거 후 사형 선고를 받고도 놀랍게 조금도 거동에 변함이 없고 말이 적어지고 눈을 감고 묵상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해. 그는 정근, 홍근 두 동생들이 면회 와서 그들이 죽은 뒤의 일을 묻자, “생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음이 있는 법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이 빠르냐 늦으냐 뿐이다. 사람이란 자기가 뜻한 것을 충실히 이행하는 데 사람다움이 있다. 따라서 자기가 택한 직분에 생명을 걸고 일하며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오히려 가르쳤어.
그런데 안 의사가 카톨릭 신자라는 말이 전해지자 당시 조선 교구의 뮈텔 주교는 이러한 내용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며 발뺌을 했대. 주교는 사형 언도를 받은 안 의사와 그 가족이 신부를 보내 달라는 거듭된 청원을 묵살했어. 그때 황실과 한국 위정자 등은 이토의 죽음에 조의를 표명하는가 하면 조문 사절을 보내고, 이토 동상 건립을 추진했으며 장례비까지 지출했다고 해. 교계 또한 방관 내지 암묵적 동조의 모습을 보이며 안 의사와의 관계를 쉬쉬했지.
이 같은 상황에서 한 신부가 주교에게 여러 차례 안 의사에게 보내달라고 청원을 했어. 그러나 주교는 번번이 거절하고 북행길을 좌절시켰어. 그는 결단을 할 수밖에 없었지. 드디어 그는 죽음을 앞둔 ‘양’에게 마지막 성사를 베풀고자 천주교 내부 질서인 주교의 허락과 상관없이 홀로 뤼순으로 향했던 거야. 그의 이름은 빌렘(한국명 홍석구), 당시 53세의 프랑스 신부였어. 그는 암살 15년 전인 1895년에 안 의사에게 ‘도마’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준 분이기도 했지.
사형집행을 보름 앞둔 안 의사를 찾아간 빌렘 신부는 그저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 죽음 앞에 저토록 초연할 수 있을까 고개가 숙여졌다고 해. 빌렘 신부는 이후 네 차례 안 의사를 만나 교리 훈계, 고해 성사, 성체 대례를 집행하고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조선으로 돌렸지. 그러나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차디찬 징계의 손길뿐이었어. 그는 주교로부터 2개 월 간의 미사 집행 정지의 징계와 함께 ‘사제 사이에 분열과 갈등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프랑스 본국에 소환되는 곤경을 겪었지. 물론 나중에 바티칸 종교 판결에서 승소하여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확인 받았으나 당시 조선 교구의 모습은 비겁한 작태 바로 그것이었다.
마음 가꾸기
생각이 행동을 만들고 행동은 습관을 만들며 습관은 운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때문에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어떤 운명을 만드느냐와 연결된다. 우리는 너나없이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궁금해 하지만 자신의 생각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보면 해답은 쉽게 나온다. 좋은 생각은 좋은 운명을 만들고 나쁜 생각은 나쁜 운명을 만든다. 그래서 운명을 바꾸는 일은 생각을 바꾸는 일이다.
생각은 마음속의 스크린이다. 스크린은 영사기에서 비쳐지는 그림만 보여주게 되어 있다. <모래시계>를 돌렸는데 <딸 부잣집>이 나올 리가 없다.
군에 입대하면 제대할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제식훈련을 한다. 앞으로 가, 뒤로 돌아가, 차려, 열중 쉬어 등을 밥만 먹으면 시키는 것이다. 이 정도라면 초등학생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반복이 군인을 군인답게 만드는 것이다.
삶이란 완성을 위한 수련의 반복이다. 우리는 미완성의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사람답게 사느냐 아니냐는 얼마만큼 자신을 완성시켜 가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
먹고 자고 마시고 종족을 번식시키고 싸우는 일은 소나 돼지도 한다. 이런 하찮은 동물과 같은 행동으로 삶을 이끌어 간다면 그것은 비극중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다. 개처럼 살거나 돼지처럼 살아서는 안될 일이다. 안중근 의사는 처형당하는 순간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완성시키기 위해서였다. 사형집행인이 물었다.
“마지막 소원은 무엇인가?”
가는 사람에게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관행이기 때문이다. 그는 술을 마시게 해달라거나 담배 한 대 피우게 해달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저에게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위대한 것은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도 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완성을 위해 힘썼다는 점이다. 안중근 의사는 5분 동안 책의 마지막 부분을 다 읽고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
자기 완성은 스님들처럼 벽을 향해서 눈을 감고 10년씩 도를 닦는 방법도 있고 좋은 스승의 말을 듣고 깨우치는 방법도 있으며 좋은 책을 자신의 벗으로 삼는 법도 있다. 좋은 책은 올바르게 사는 방향을 가르쳐 주고 자신을 발견하게 해주는 책이다. 똑같은 노래를 1천 번만 부르면 누구나 가수 이상의 실력을 보일 수 있듯이 좋은 책도 1천 번 읽으면 변화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도둑과 도덕
도덕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딱 부러지게 대답하기가 곤란하지? 물론 도덕과 관련된 여러 낱말들은 많이 떠오르지만. 예를 들면 양심, 인격, 규칙, 규범, 사회, 정의 등등
그렇지만 여러 낱말 가운데 도덕과 가장 관련이 깊은 말은 뭐니뭐니 해도 도둑이 아닐까?
잘 이해가 안 가겠지. 왜 도둑이 도덕과 가장 관련이 깊은 말인지 차근차근 따져 보기로 하자.
먼저 도덕이란 말을 한문으로 써 보자.
道德. 道의 뜻은 길인데 사람이 걸어가는 길을 단순히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를 의미한다고 하지. 우리가 사람 인(人)이란 글자를 다섯 개 써 보고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 어떨까?
人人人人人(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德이란 그 사람을 평가하는 용어에 해당하는 것이겠지. 특히 어떤 사람에게 ‘덕이 있다 없다’ 하는 말은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를 의미하겠지. 덕이란 쉽게 인격, 즉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으로 일단 해석하기로 하자.
문제는 도덕이란 한자어의 어원인데 그것을 정확하게 추적하는 것이 오늘 얘기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니 잘 생각하며 따라가 보자.
도의 원래 한자어는 다닐 행(行)과 머리 수(首) 두 글자가 합쳐진 다음과 같은 글자에서 나타났다고들 하지.
首+行
순서대로 해석하면 머리로 생각하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면 되겠지. 그리고 덕의 원래 한자어는 얻을 득(得)에서 나왔다고 해.
得
뭘 얻는 다는 것일까? 이건 아마도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 혹은 다른 사람의 평가를 얻는 다고 보면 되겠지. 좀 어렵지만 도덕이란 말의 원래 뜻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될 수 있겠지.
“마음속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자신에 대한 평가”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생각과 행동의 일치를 의미하는 도의 옛 글자의 뜻이야. 생각과 행동의 일치 그리고 자신에 대한 평가 그 두 가지를 다 합쳐 놓은 도덕이란 말의 정의에 가장 가까운 인물을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보면 도둑이란 사람을 쉽게 떠올리게 되지.
그럼 도둑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재물과 비난 이 두 가지가 되겠지. 그런데 재물은 쓰면 없어지지만 비난은 도둑이 도둑인한 계속해서 남아있게 되는 것이지. 그리고 도둑이 제일 처음으로 나쁜 짓을 했을 때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꼈던 양심의 가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사람의 치명적인 손해가 되는 것이고.
이제 도둑은 어떤 사람인가를 풀이하면 “남의 물건을 훔치겠다는 생각을 실행에 옮겨 재물을 얻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얻는 사람.”
반대로 도덕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겨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존경)을 받는 사람.”
이때 중요한 것은 “어떤 행동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얻는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존경은 다름 아닌 다른 사람 혹은 사회를 위하여 애쓰는 행동에서 얻게 되는 것이란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애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에 충실한 것, 즉 양심의 떳떳함이라고 하는 기본자세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단다. 양심의 떳떳함 없이 다른 사람을 위한 행동은 위선(僞善) 즉 거짓 선행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지.
위에서 도둑이 갖는 이익과 손해에 해당하는 것이 재물과 비난 그리고 양심의 가책이라고 했지만 도덕적인 사람은 물질적, 혹은 육체적 손해를 스스로 입을 수도 있겠지만 양심의 떳떳함 더 나아가 사람들로부터의 존경이라는 귀중한 것을 얻을 수 있겠지.
세네카라는 사람이 한 다음과 같은 말은 오늘의 주제를 더욱 쉽게 표현하는 것이란다.
“남에게 선을 베푼 자는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도 선을 베푼 자이다. 이 말은 남에게 베푼 착한 일의 보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착한 일을 한 그 행위 속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착한 일을 했다는 의식은 인간에게 최고의 보수이기 때문이다.”
이런 도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출발점에 우리 모두 서 있는 것이고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충실한 사람, 나아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면 돼.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 올바른 생각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되겠지.
다음으로 그 올바른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신념과 용기 즉 실천의지가 도덕적인 사람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됨을 깨달아야만 한단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정리해볼까?
도덕이란 올바른 신념과 용기로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겨 양심 혹은 존경이라는 대가를 얻을 수 있는 행위 즉 “행동하는 양심”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단다. 그 무엇이 올바르고 그른 생각인지를 고민하는 시간은 비단 도덕이란 교과시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란다.
마지막으로 도둑의 차원 높은 낱말 풀이는
“재물은 늘어나지만 행동하는 양심은 적어지는 사람”
자 이제 도둑이 될 것인가? 도덕적인 사람이 될 것인가? 그 유혹과 판단의 바다에서 힘든 항해를 시작해보자꾸나.
자 여기 그 힘든 항해에 작은 힘이 될 만한 얘기를 적어놓았으니 다 함께 읽어보자.
만약, 뭇 사람이 이성을 잃고 너를 탓할 때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만약, 모두가 너를 믿지 않을 때 자신을 믿고 그들의 의심을 감싸 안을 수 있다면
만약, 기다리면서 기다림에 지치지 않는다면
만약, 네 일생을 바칠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아도 낡은 연장을 집어 들고 다시 세울 수 있다면
만약, 모두를 중히 여기되 그 누구를 지나치게 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만약, 용서할 수 없는 1분을 60초 동안의 벅찬 달리기로 채울 수 있다면
그러면 이 세상과 그 안의 것들이 네 것이 되리라.
그리고 그 때 너는 비로소 어른이 되리라.
ꡔ인생이 값지다고 하는 것은 장래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때때로 간사하고 연약하여 값진 인생의 가치를 망각하고 살아갈 때가 종종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