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들
烈女의 정의
남편을 위하여 온갖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 여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아내를 일컫는 말.
홍근호가 지은 〈열부정려기 烈婦旌閭記〉에 "부인의 행(行)은 죽음으로써 열을 나타냄이니, 대개 타고난 천성(天性)을 지킴이로다"라고 했다. 한자로 '열'(烈)의 뜻은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열녀란 '세차고 사납고 굳세며 정열을 지키기 위하여 욕망을 불태워 없애고, 빛나고 밝고 아름다운 큰일을 한 여자'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유교에서 특히 중요시한 것은 효(孝)와 열로서, 효는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잘 섬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이며, 열(烈)은 부부 사이에 있어서의 여자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사서(史書)에 보이는 대표적인 열녀로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도미(都彌)의 아내, 박재상의 아내, 평강공주 등을 꼽을 수 있다. 유교를 건국이념을 내세웠던 조선 사회는 우선 정절(貞節) 또는 수절(守節)의 개념이 달라졌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만 해도 남편을 여의고 수절한 여성은 곧 열녀로 간주되었으며 이를 기려 국왕이 정표(旌表)할 것을 명했다. 이는 당시까지만 해도 남편이 죽으면 개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으며, 수절하는 것이 극히 드문 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서는 여성의 정절이나 정조관이 법규화되기까지 했다. 1486년(성종 16)에는 〈경국대전〉에 재가부녀(再嫁婦女)와 서얼의 자손은 금고법(禁錮法:벼슬길을 막음)의 적용을 받도록 하는 조항을 넣었고, 더욱이 중종 때에는 자손 금고뿐 아니라 재가 그 자체를 범죄시하게 되었다. 재가 금지의 이론적 뒷받침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절개가 굳은 여자는 다시 시집가지 아니한다'(忠臣不事二君 貞女不更二夫)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양반사회에서 처첩을 마음대로 두고 여기에서 출생한 자녀를 서출(庶出)이라고 하여 제약을 가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향락을 위하여 여성들과 그 소생에게 희생과 고통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남녀간의 부당한 불평등은 한쪽 배우자가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남편은 아내가 죽은 뒤 1년 정도 상복을 입고, 이내 재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특히 양반 계층에서는 평생을 두고 죽은 남편을 위해 상복을 입어야 했다. 그리하여 여성들의 수절은 여성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되고 장려됨에 따라 조선 중기 이후에는 점차 수절이 일반화되었으며, 수절만으로서는 열녀가 되지 못했다. 열녀의 대부분은 남편이 죽은 후 3년 동안을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하루도 남편의 묘를 떠나지 않고 지켰으며, 어떤 열녀는 3년상을 무사히 치르고 자결하기도 했다. 때로는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열녀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여인은 아무리 젊을지라도 남편이 죽은 후 재혼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수치요, 집안의 망신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시대가 고려시대와 특히 다른 점은 여성들의 사회적 접촉을 극도로 억제하고, 수절을 제도적으로 강요하여 이를 사회 습속화(習俗化)시킨 데 있다.
그러나 16세기말 왜군의 침입과 17세기초 여진족의 침입은 조선사회를 황폐하게 했으며, 특히 침략군에 의한 부녀자의 실절(失節)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시켰다. 게다가 이민족의 침략 앞에 드러난 집권층의 무능하고 비겁한 모습은 반체제적·반전통적 가치관의 대두를 촉진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여성관에 큰 변화를 가져와 개가를 보다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한말 개화기 때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확산되었고, 동학에서 여성의 수절을 비판하는가 하면, 갑오개혁 때는 여성의 재가를 허용하는 조문(條文)을 포함시키면서 근대적인 여성관이 대두하게 되었다.
그대 아직도 ‘열녀’를 꿈꾸는가 ‘현모양처’‘똑똑한엄마’로 이어지는 신열녀 강요된 여성상 해체, 한국적 페미니즘 토대로 21세기인 지금 <열녀전(列女傳)>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지난 12일 중국어문학회·한국여성연구원·여성신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동아시아 여성의 유형, 그 이미지의 계보학’ 학술대회는 동아시아 여성관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열 녀전>을 여성학적으로 다시 보며 동아시아 여성의 현재를 점검하는 시도였다. 유교적 가치관이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기 시작한 한나라 때 유향이라는 유학자 에 의해 씌어진 <열녀전>은 여성 110명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을 7가지 유형으 로 분류하여 유교적 부덕을 갖춘 여성들을 칭송한다. 특히 유향은 각 전기의 끝부분에 ‘군 자왈’ 형식의 총평을 통해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지켜야 할 유교적 덕목을 제시한다. <열녀전>의 등장 이후 중국에서는 <여계><여논어><여효경><여범> 등 다수의 여성 교육서 및 정사의 여성열전, 유사열녀전 등이 출현했으며 우리 나라의 경우 조선시대에 <열 녀전>이 번역되어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는 특히 여러 여성의 유형을 나열한 ‘열녀(列女)’가 아닌 정절을 지킨 ‘열녀(烈女)’의 이미지만이 부각되며 ‘열 녀’에 대한 개인 전기 및 <내훈><계녀서><사소절> 등의 책들이 저술되어 여성 교육서 의 계보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열녀’의 이미지는 오랜 역사를 통해 유지·재생산되면서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발 휘하고 있다. 즉 ‘현모양처’ 혹은 ‘똑똑한 엄마’와 같은 고정된 이미지로 확대·재생산 되면서 여성의 삶을 일정한 틀 안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인 지금 <열녀전> 다시 보기가 필요한 것은 이처럼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가 덧씌워 진 여성에 대한 해체를 통해 현모도, 악녀도 아닌 현실 속에 존재하는 여성의 모습을 찾아 자생적 동아시아 페미니즘의 토대로 삼기 위함이다.
● 유교질서 유지에 이용된 열녀들 ‘아들’낳아 성공시켜야 훌륭한 엄마로 칭송 ‘군자는 색을 멀리’유교관따라 추녀도 왕비로 <열녀전>이 제시하고 있는 여성상은 크게 모범이 될만한 어머니상과 몸가짐이 정숙하고 절 개를 지킨 여성, 뛰어난 언변술 등 지혜를 겸비했으면서도 유교적 질서에 충실한 여성상으 로 나뉜다. 모친의 전범이 될만한 여성의 전기인 ‘모의전’을 보면 어떻게 여성의 몸에 유교적 세계관 이 덧씌워지는지 확인할 수 있다. 가령 ‘기모강원(棄母姜嫄)’과 ‘설모간적(설母簡狄)’에 서는 혼인을 하지 않은 처녀가 임신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유교가 국가 통치 이념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당시 사회통념상 처녀의 혼전임신은 감춰야 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러한 야합에 의한 임신이 적지 않았다. 이러 한 딜레마로부터의 돌파구를 <열녀전>은 ‘아들 출산’이라는 방법을 통해 마련한다. 결국 ‘아들’을 낳아 대를 이으며 ‘어머니’로 거듭나는 여성을 바람직한 여성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의전’에는 특히 ‘어떤 어머니가 아들 누구를 낳았다’는 구절이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머니는 자신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오로지 아들을 교육하고 지도하 는 데만 전심을 다하여 결국 아들을 성공시킴으로써 칭송을 받는다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 다. ‘모의전’의 이야기들은 어머니보다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성공한 아들에게 더 많은 비 중을 할애하고 있다. 또한 여성의 몸을 출산과 정조의 틀로 규정짓는 유교적 여성관은 여성의 ‘눈빛, 낯빛, 몸 짓’처럼 일상적인 행동거지에까지 깊숙이 관여한다. 당대의 소설 <앵앵전>을 보면 최낭자 (앵앵)는 “수줍음을 품은 아리따운 자태로 힘이라곤 자기의 몸조차 가누지 못할만큼 약 해” 보이는” 외모를 가졌고 “대체로 최낭자(앵앵)가 다른 사람보다 돋보이는 점은 무슨 기예든지 그 실력은 수준급이면서도 겉으로는 모르는 체하는 것이고, 또 말솜씨도 민첩하고 조리 있었으나 여간해서는 다른 사람의 말에 대꾸하는 일이 드물었던” 요조숙녀로 묘사된 다. 한편 여성을 유교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존재로 규정하는 <열녀전>은 아름다운 여성은 군주 를 미혹에 빠뜨려 나라를 어지럽히는 화의 근원이라는 여화론(女禍論)에 근거하여 못생겼어 도 유교적 가치를 체화한 여성은 칭송한다. <열녀전>에 등장하는 ‘종리춘’이라는 여성을 묘사한 대목을 보면 “절구통 같은 머리에 푹 들어간 코, 길고 긴 손가락 발가락에 굵디굵은 마디까지 맺혀 있었다. 코는 들창코에 목 구멍이 튀어 나왔고, 목 뒤로는 두둑하게 살이 찐 데다가 머리칼이 띄엄띄엄 나 있었다. 허 리는 굽었고 가슴이 튀어나왔으며 피부는 옻칠을 한 듯 검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너무도 추악해 나이 마흔이 되도록 아무도 그와 결혼하지 않으려 하자 종리춘은 직접 왕에 게 찾아가 왕비로 삼을 것을 요구한다. 종리춘은 ‘군자는 색을 멀리해야 한다’는 유교적 가르침에 기대는 한편, 몸을 숨기는 신통한 재주와 뛰어난 언변으로 왕비의 자리에까지 오 른다. 요컨대 <열녀전>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유형의 여성들은 여성 자신이 아니라 이상적 인 유교 통치를 위해 요구되는 자질과 덕성을 갖춘, 유교질서를 유지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장치로 이용된 셈이다.
● 경계해야 할 여성상 묶은 ‘얼폐전’ “장부의 마음 품고서 칼을 차고 관을 썼다” 남성권위에 도전하면 악녀로 낙인 찍혀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지만 음란했다.” <열녀전>에서 경계해야 할 여성상을 모은 ‘얼폐 전(孼嬖傳)’의 내용은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유향이 <열녀전>을 통해 제시하는 마지막 분류항인 ‘얼폐전’에서는 특히 나라와 집안을 망친 여성들을 기록하고 있다. 유향은 ‘얼폐전’에서 각 왕조 마지막 제왕의 여인들, 즉 말희, 달기, 포사를 미모로써 제 왕을 미혹해 국가와 사직을 도탄에 빠뜨린 악녀로 거론했다. 이들 외에도 ‘얼폐전’의 여 성들은 모두 군주나 대부의 부인으로서 음란했고 정권다툼을 일으켜 나라를 혼란으로 몰고 갔다는 이유로 경계해야 할 여성으로 꼽힌다. 얼폐전의 서두에 실린 말희에 대한 기록에는 “여자임에도 장부의 마음을 품고서 칼을 차고 관을 썼다”고 언급하고 있다. 장부의 마음이란 권력에 대한 욕망이고 그는 남성의 전유물 인 권력에 고전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여성이면서 남성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사실만으 로 이들은 악녀로 낙인찍히게 된다. ‘얼폐전’을 포함한 동아시아 고전에 등장하는 악녀들을 유형별로 살펴보면 자신의 성적 매력을 무기로 생존을 도모하고 욕망을 추구하다가 스스로 파멸한 반금련(<금병매> 등장인 물)과 같은 요부형, 남성 위에 군림했던 왕희봉과 같은 악처형, 기존의 순종적 여성상을 거 부하고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전통적 가치관에 저항하다 출구 없는 길에서 희생된 임대옥 (<홍루몽> 등장인물)과 같은 비극형이 그것이다. 권력투쟁에 참여했던 얼폐전의 여성들에 대한 기술을 살펴보면 반란은 늘 여성 1인 혹은 그 와 정을 나눈 음부(淫夫)의 음모로 축소되고 열전의 마지막 논평 부분에서 여성이 바로 사 회혼란의 원흉이라고 단정짓는다. 사람들은 왕조 멸망의 책임을 국사를 돌보지 않는 무능한 왕에게서 찾기보다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여성에 의해 미혹되어 어쩔 수 없어 일어난 일로 평가했던 것이다. 이러한 악녀에 대한 담론은 열녀와 마찬가지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 들의 시각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와 근원적으로 뿌리가 같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성공한 여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종용하며 여성의 정치참여를 금지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