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사람
-매화와 국화
김형진
내가 사는 아파트는 지은 지 사십 년이 다 되어가는 구식이다. 그래서 남쪽을 향하여 한일자[一]로 서 있는 단순한 모양새다. 건물도 세 동밖에 되지 않고 높이도 십일 층밖에 되지 않아 요즈음 새로 지은 단지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옆에 야트막한 동산이 있고 자동찻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청정하고 아늑하다. 아파트를 지을 때 화단에 심어놓은 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등의 관상수와 살구나무, 감나무 등의 유실수들이 이제 늙어 밑동이 거뭇거뭇하다. 이를 닮아서인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대다수가 머리가 희끗희끗, 얼굴은 거뭇거뭇하다.
이른 봄, 키 큰 나무 사이사이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키 작은 나무들과 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꽃 잔치에 한창이다. 그 중 화단 동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늙은 매화나무가 유독 눈길을 끈다. 구부러진 굵고 검은 줄기에서 벋은 제법 굵은 가지가 유독 눈길을 끈다. 구부러진 굵고 검은 줄기에서 벋은 제법 굵은 가지가 다시 가느다란 가지를 벋어 거기에 꽃망울을 터트렸다. 아직 쌀쌀한 날씨인데도 꽃망울이 틔어 꽃샘추위를 이기고 꽃잎을 연 것이다. 큰 것도 그렇다고 단단한 것도 아닌 꽃망울이 꽃잎을 열어 아름다운 꽃송이와 해맑은 향기로 세상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마 매화는 애초에 그런 아름다운 모습과 맑은 향기를 지니고 태어났을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도 출중한 자질을 타고난 이가 더러 있다. 이는 커다란 축복임에 분명하다.
서쪽 화단 귀퉁이에 속잎을 내민 한 무더기 풀이 있다. 국화다. 국화는 매화가 고아한 자태와 해맑은 향기로 세상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을 때, 잡초인 듯, 쑥인 듯 허접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킬 뿐 타고난 자질을 드러내지 않는다. 제비꽃과 수선화와 꽃무릇이 피었다 질 때까지, 기세를 떨치다가 시들어갈 때까지 국화는 그저 우부룩한 풀이다. 그러던 것이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조금씩 꽃대를 올려 그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긴긴 세월, 천둥의 가슴 내려앉는 무서움도 소쩍새의 가슴 휘젓는 슬픔도 묵묵히 이기고 찬 서리 내리는 때에야 꽃대를 세우는 것이다. 봄에 피는 꽃들과 여름에 피는 꽃들과 초가을에 피는 꽃들이 한바탕씩 잔치를 치러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때에도 아무런 동요 없이 한껏 몸을 낮추고 온갖 고난과 위협을 온몸으로 받아 삭히다가 서리가 내릴 즈음에야 꽃망울을 터뜨려 그윽한 향기를 뿜는 국화는 단순히 아름다운 꽃이 아니다. 면벽정진(面壁精進)하여 득도한 고승의 모습이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도 꽃과 다르지 않을 듯하다. 타고난 재능에 운까지 더하여 젊은 시절 짧은 동안 세인의 눈을 사로잡다가 시들어져버리는 매화를 닮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질은 뛰어나지만 불운에 시달리며 오랜 기간 고난을 겪다가 이를 이기고 일어서 시들어 가는 세상에 생기를 더하는 국화와 같은 사람도 있다. 매화를 닮은 사람이 타고난 출중한 재능을 자기만의 축복으로 여기고 자아도취에 빠져 도깨비춤을 추다가 일찍 사라지는 사람이라면 국화를 닮은 사람은 출중한 자질을 타고났으나 불운에 시달리면서도 궁구(窮究)하고 탁마(琢磨)하여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길을 열어가는 사람이다.
오늘 아침 일어나 거실에 나가 밖을 보니, 바깥 유리창에 박빙이 엉켰다 풀렸는지 흘러내린 물줄기 자국이 선명하다. 어느새 초겨울이다. 외출하기 위해 두꺼운 옷을 챙겨 입고 집에서 나와 아파트 현관문을 민다. 얼굴에 끼쳐오는 바람결이 차다. 겨울의 차가움을 몸으로 느끼며 잠깐 멈춰 화단 서쪽 귀퉁이를 바라본다. 노란 꽃 무더기가 눈에 잡힌다. 며칠 전까지 꽃잎을 머금고 있던 꽃망울이 드디어 열린 것이다. 시들어 가던 화단이 한순강에 환해져 생기가 도는 느낌이다.
잰걸음으로 다가가 그 앞에 선다.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혀 향기를 맡으려 한다. 하지만 만성비염인 내 코는 부질없이 벌렁거릴 뿐이다.
《계간수필》 2022년 여름호
김형진
계수회 회원 토방 동인 순수필 동인 고문
수필집 『흐르는 길』 등 4권
평론집 『이어받음과 열어나감』 등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