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법화경』을 외어 7년이 되었고, 법화경 3000번을 독송하여 스스로를 법에 통달했다하여 법달(法達)이라 불렀던 스님이 있었다. 그런데 그분은 『법화경』을 그렇게 많이 읽었어도 마음이 미혹하여 바른 법의 당처((正法之處) 를 알지 못하더니, 어느 날 혜능대사를 찾아가 물었다.
“제가 『법화경』을 3000번이나 읽었는데도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라며 청했다. 그러자 혜능 대사께서 “나는 글자를 모르니 너는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나를 마주하여 한 편을 읽으라. 내가 들으면 곧 알 것이니라." 고 하시자, 법달이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대사를 마주하여 한 편을 외우는데, 비유품에 이르러 혜능 대사가 “이제 그만 읽어라. 내 그대에게 『법화경』의 대의를 일러주리라.” 하고 그 뜻을 설명하셨다. 법화경의 일곱 권이 모두 비유와 인연임을 설명하고 있고, 오로지 일불승(一佛乘) 뿐이며, 부처님•세존께서는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셨음을 설명하셨다. 또한 이 법을 어떻게 알며 이 법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너는 내 말을 들어라. 안팍이 미혹하지 않으면 곧 양변(兩邊)을 떠난다. 밖으로 미혹하면 모양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에 집착한다.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난 것이 곧 미혹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을 깨달아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니라.
마음에 무엇을 여는가?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이니라. 네 문으로 나뉘나니,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開)과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示)과 깨달음의 지견을 깨침(悟)과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入)이니라. 열고 보이고 깨닫고 들어감(開示悟入)은 한 곳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다. 곧 깨달음의 지견으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곧 세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고, 법화경에 굴림을 당하는 원인을 아래에서 알 수 있다.
법달아, “⓵세상 사람의 마음이 삿되면 어리석고 미혹하여 악을 지어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열고, 세상 사람의 마음이 발라서 지혜를 일으켜 관조하면 스스로 부처님 지견을 여나니, 중생의 지견을 열지 말고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곧 세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오직 일불승(一佛乘)만을 의지하라. ⓶마음으로 행하면(心行) <법화경>을 굴리고(轉法華),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나니,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⓷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리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⓸힘써 법대로 수행하면 이것이 곧 경을 굴리는 것(轉經)이니라."
법달은 대사의 말을 한 번 듣고 3000번을 외워도 모르던 것을 단박에 깨쳤다. 법달은 크게 깨달아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실로 지금까지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였습니다. 칠년을 <법화경>에 굴리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법화경>을 굴려서 생각 생각마다 부처님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 행이 곧 부처님이니라(卽佛行是佛)." 그 때 듣는 사람으로서 깨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법화경을 7년동안 3000번을 외우고 법에 통달하였다고 하여 스스로를 법달이라고 했던 스님이 왜 경의 뜻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를 못했을 까요?
위 법화경에 굴림을 당하는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이 내용은 종교를 떠나 어떤 상황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법칙이라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위의 내용을 편의상 ⓵번∼⓸번까지 번호를 넣어 봤다. 내용을 종합해 보면, 결국 “올바른 마음”이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스스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되어 죄를 짓고, 마음이 바르면 올바른 지혜를 일으켜 부처의 행도 할 수 있고 예수의 행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대로 수행하는 것도 마음이 올바르면 무엇을 하더라도 법과 원칙을 지켜가면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사회와 국가에 반하지 않는 정정당당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즉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나쁜 행위를 하여 죄를 짓는 일도 자신이 말들어 내는 것이고, 좋은 일을 하여 복 짓는 일을 하는 것도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남 탓을 한다. 가령, 지인으로 부터 한 금방을 같이 털어 반씩 나누자고 제안하자, 돈도 없는 데 여러가지 일을 고민해 왔다며 동의하고 같이 범죄를 저질러 형사처벌을 받고 망신까지 당했다고 하자. 이때 어리석은 사람은 내가 그런 행위를 안 할려고 했는데 같이 하자고 꼬드기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며 상대를 탓한다. 그러나 가만히 헤아려 보라, 상대가 그런 행위를 제안 하더라도 거절하면 그만이다. 결국은 자신이 어리석어서 스스로 죄를 저지른 것이다.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그 행위가 옳은 것인지, 해도 무방한 것인지, 사회와 국가에 누를 범하는 일은 아닌지 항상 늘 돌아 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무엇을 행하려고 하거든 진실한 마음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에도 없으면서 겉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 쇼를 하는 행위는 중생의 지견을 내는 것이다. 어리석으면, 그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끌려 다니게 된다. 즉 누가 어디를 구경 간다고 하면 “나도 가 볼까”하고 따라 하고, 누가 무엇을 산다고 하면 나도 사러가는 등 남 따라 하는 일들이 흔한 게 우리의 삶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바람불면 그 방향 따라 낙엽이 흩 날리듯 경계 따라 흩어지게 된다. 이것이 세상 흐름에 굴림을 당하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 따라 나도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의해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한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는 술먹고 실수를 하면, 술이 술을 먹었다. 혹은 술이 사람을 먹었다는 이야기 를 한다. 술을 좋아하더라도 적당히 즐기면서 멈춰야 할 순간 멈춤의 지혜가 있는 사람은 아무리 주변에서 술을 권하더라도 “오늘 나는 여기서 그만 할 꺼야”라고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나 의지가 약한 사람은 주위에서 권하면 “그래 오늘 망가질 때 까지 먹어보자, 이런 기회가 흔치 않으니까”라며 자신을 합리화하며 그 자리에서 몸을 가눌 수 없도록 마시게 된다. 이는 술에 굴림을 당하는 삶. 즉 술에 끌려다니는 삶을 사는 것이다.
또 청매(靑梅, 1548~1623) 선사의 십종무익송(十種無益頌)에는 “心不返照 看經無益(심불반조 간경무익)” 이란 내용이 있다. 즉 마음을 돌이켜 비춰보지 않으면 경전을 보아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말이다.
經典이나 聖經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지 않고, 소설책 읽듯이 건성으로 보아 넘긴다면 성경과 팔만대장경을 다 외운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經典(聖經)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고 성찰할 줄 모른다면 ‘쇠귀에 경읽기’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듣고, 좋은 책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과 글에 심불반조(心不返照) 하지 않고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심불반조 하지 않고,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향상시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經典을 읽고 聖經을 공부하는 것은 내가 부처님의 행을 거울 삼아 실천으로 옮기고, 예수님의 행을 본받아 실천으로 옮겨 返照 했을 때에 곧 내가 부처의 삶을 사는 것이고, 예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늘 자신의 언행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를 보면 ‘좋은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좋은 밭’이 따로 있을 뿐이다. 같은 씨라도 ‘좋은 밭’에 떨어지면 때가 되어 열매를 맺지만 밭이 아닌 ‘길바닥’이나 싹을 틔울 수 없는 불모지에 떨어지면 아무리 좋은 씨라도 열매 맺을 도리가 없다. 말씀은 진리의 삶을 살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고, 진리를 가리키는 이정표일 뿐이다. 따라서 그 이정표대로 살지 못하면 말씀이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종파를 초월하여 종교인은 내 마음 밭을 잘 가꾸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세상에 굴림을 당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세상을 굴리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혜능대사의 말씀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 되어 시정해야 할 것은 시정하고, 함께 해야 할 것은 따라서 하고, 수용할 것들은 수용하면서 옹골차게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기 보다는 함께 아울러 중도의 삶을 살 수 있을 때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經典과 聖經의 가르침을 내 인생의 올바른 지표로 삼아 나를 향상하는 데에, 내가 깨달음을 실천하는 데에 잘 활용해야 하는데, 오히려 經典과 聖經에 쓰인 언어와 문자가 주인이 되어 내가 끌려 다니는 삶을 살아간다면 법을 굴리는 자가 아닌 법에 굴림을 당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참고) 한국기독교자로회총회, 새역사 70년, 주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하소서/김성 (서울동노회,예수원교회,목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