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이후 : William Rush Dunton 에 기록에 의하면 6.25 한국 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한국전쟁당시 미군의 감독하에 작업치료 연수과정이 시작된 것으로 소개되었다(Willard & Spackman. Principles of Occupational Therapy, 2nd ed. 1954:8.) |
1952년 : |
부산 동래에 '상이군인 정양원'을 설립. |
1953년 |
정양원이 국립재활원(의무과장: 오정희)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재활 치료의 발판을 구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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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한미 재단(American Korea Foundation, 단장: harvard A. Rusk)이 한국 재활 사업을 돕게 되었는데, 이것은 미국의 민간 단체로 한국의 재활을 성장시키는 중요한 역할이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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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k의 한국 방문으로 한국의 재활발전을 위한 지원이 제안되었고, 이로 인하여 국제 연합 한국 재건단(UNKRA: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은 직업훈련과 의지 및 보조기 생산을, 한미재단에서는 재활치료 요원을 지원하게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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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작업치료사로 Miss. Barbara, 물리치료사 Miss. Wendigitten, 재활전문간호사로 Mrs. Semian(정확치 않음)가 지원되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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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선교사 Louis Grubb가 대구 동산병원에서 작업치료 행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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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는 한미재단의 지원으로 재활의학을 공부하고 귀국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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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고로 미국 작업치료사 면허를 취득한 Esther Park이 국립재활원 에 합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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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육재활원에 작업치료실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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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수녀 Susan Baldus가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작업치료 행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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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으로 최귀자가 처음 작업치료사 면허를 취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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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에 의해 고대부속병원에 재활의학과가 신설되면서 작업치료실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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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mela Woolcott에 의해 연세대 부속 세브란스병원에 소아작업치료실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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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작업치료를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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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Pamela Woolcott가 전명희에게, Claire Sandstrom이 변광주에게. 영국작업치료사인 Gai Elioart가 유미옥, 황환익에게 작업치료교육을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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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현재 변광주는 도미, 유미옥, 이경혜, 전명희는 주부이며, 이경혜는 면허시험에 응시하지 않아 면허증을 보유하고 있지 않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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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on Shaw는 전주예수병원에서 작업치료교육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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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원주의과대학보건학과가 설립되어 정규교육이 시작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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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업치료사 1차 모임이 연세대 부속 세브란스병원에서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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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보건학과가 재활학과로 독립되어 작업치료 교육이 이루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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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치료와 물리치료가 분리되어 교육이 전문화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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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차례의 모임을 통해 협회의 결성 준비를 하고, 보건복지부로부터 승인을 받아 사단법인 대한 작업치료사협회를 발족 (초대회장: 김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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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표기는 Korean Occupational Therapists Association(KOTA)로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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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태평양 작업치료사협회 가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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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보인 〈작업치료〉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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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기사 수습제도 폐지로 인하여 전문교육기관에서 작업치료를 전공해야만 면허 취득 가능케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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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작업치료사연맹(World Federation of Occupational Therapists, WFOT)에 49번째의 정식회원국으로 가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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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표기를 Korean Association of Occupational Therapists (KAOT)로 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