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연도 등 논란은 있지만 조(趙)씨 뿌리는 송나라 황제라는 설이 대부분 의견이다.
양주조씨의 세보(世譜)에 의하면 중국 송나라 태조(太祖)인 조광윤(趙匡胤)의 7세손에 익(翼)·기(冀)·이(裏)·광(廣)의 4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셋째와 넷째가 고려에 귀화하여 각각 평양조씨과 임천조씨의 원조(遠祖)가 되었다고 한다. 또 익(翼)의 아들 4형제 지린(之璘)·지수(之壽)·지청(之淸)·지말(之末)이 고려 의종 때 고려에 건너와 각각 배천·한양·풍양·양주 조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에는배천조씨가 송(宋) 태조의 장자(長子)의후예(一說에는 趙子龍의 후예), 임천조씨는차자(次子)의 후예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2003에 간행된 한양조씨 대동세보(계미위조보)에서는 시조가 중국 송태조의 9세손이다.
〈증보문헌비고〉의 평양 조씨 편에 보면 고려말의 학자 이곡(李穀)이 "조씨의 선대는 본래 은(殷)나라 사람으로 기자(箕子)를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고 했다.
조(趙)씨 뿌리는 중국이 아닌 대한민국이길 바라는 마음도 크기에 조(趙)씨 뿌리가 대한민국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게 주장되고 있다. 그리 따지면 중국으로 건너간 멸망한 고구려가 뿌리인 민족은 중국인이 아닌가? 어느 성씨던 대부분 멸망한 국가를 거쳐 최종적으로 대한민국 사람이 되었다.
대한민국에 최종 소속된 이상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가지며 살면 될 듯 하다.
▶한국의 나라 조(趙)씨 주요 조상님
•[평양] 조준 - 조선 영의정(현 국무총리급)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사실상 첫 번째 수상으로 과전법의 아버지
•[평양] 조인규 - 고려 문하시중(현 국무총리급), 딸은 고려 충선왕비 조비
•[풍양] 조인영, 조현명- 조선 영의정(현 국무총리급)
•[풍양] 신정왕후 조씨 - 조선 마지막 대왕대비
•[양주] 장렬왕후 조씨 - 조선 대왕대비
•[양주] 조두순 - 조선 영의정(현 국무총리급)
•[한양] 조광조 - 조선 대사헌 종2품, 사후 영의정 추존
•[한양] 조맹선 -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 광복군사령부의 사령장
•[함안] 조려 - 생육신 중 한명(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배천] 조헌 - 임진왜란 의병장(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횡성] 조영인 - 고려 문하시중(현 국무총리급)
•[횡성] 조충 - 고려 문하시중(현 국무총리급)
•기타 부총리급, 장관급 등 다수배출
▶한국의 나라 조(趙)씨 주요 기업, 공직자 등
•조순 - 통합민주당 대통령후보, 서울특별시장, 경제부총리, 초대 한나라당총재, 민주당총재
•조병옥 - 민주당 대통령후보, 미군정청 경무부장, 내무장관, 국회의원
•조중훈 회장 - 대한항공의 한진그룹 창시자
•조홍제 회장 - 효성그룹 창시자, 삼성물산공사 공동 설립 후 친구인 이병철이 잘되길 바라며 소송도 안하고 나와 효성그룹을 창시함.
•조양래 회장 - 한국앤컴퍼니(한국타이어 등)
•조동길 회장 - 한솔 회장으로 범삼성가 삼성 이병철가문
•[함안]조용기 - 여의도 순복음교회 원로목사, 국민일보 명예회장
•[한양]조용기 - 우암학원설립(남부대학교, 전남과학대학교)
•조재연 - 대법관
•조승형 - 헌법재판소 재판관
•조성욱 - 공정거래위원장
•조남풍 - 대한민국재향군인회회장(전 육군 대장)
•조명래, 조윤선, 조성태, 조병옥, 조완규 등 장관 다수배출
•조정식, 조원진, 조승래, 조배숙, 조은희, 조정훈, 조태용, 조경태, 조한천, 조전혁, 조순형, 조응천, 조수진 등 국회의원 다수 배출
•조남관 - 검찰총장 직무대행
•조현오, 조종석 - 경찰청장(치안본부장)
•조용근 - 지방국세청장
•조중연 - 제 51대 대한축구협회장(원정 최초 월드컵 16강진출, U-17 월드컵 우승, 올림픽 동메달 등)
•조현우, 조소현 등 스포츠국가대표 다수 배출
•그외 고위공무원, 대기업임원 등 다수 배출
풍양조씨시조 및 풍양조씨유래
양주조씨의 세보(世譜)에 의하면 중국 송나라 태조(太祖)인 조광윤(趙匡胤)의 7세손에 익(翼)·기(冀)·이(裏)·광(廣)의 4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셋째와 넷째가 고려에 귀화하여 각각 평양조씨과 임천조씨의 원조(遠祖)가 되었다고 한다. 또 익(翼)의 아들 4형제 지린(之璘)·지수(之壽)·지청(之淸)·지말(之末)이 고려 의종 때 고려에 건너와 각각 배천·한양·풍양·양주 조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조선 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에는 배천조씨가 송(宋) 태조의 장자(長子)의 후예(一說에는 趙子龍의 후예), 임천조씨는 차자(次子)의 후예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시조 조맹(趙孟)의 원래 이름은 조암(趙巖)[바우(岩:바위 암)]이다. 그는 풍양현(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천마산 기슭 바위동굴에 은둔해 살았다. 당시 신라를 정벌하던 왕건은 영해(현 경상북도 영덕)지방 전투에서 신라군에 참패를 당하여 휘하의 장군들을 모아놓고 중지를 모았을 때 한결같은 대답은 풍양현에 숨어 사는 바우 도인의 지략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이에 왕건이 그를 찾으니 당시 나이가 70여 세였다. 이 때부터 신라 정벌의 길에 올라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삼국통일을 이루자 태조 왕건이 맹으로 이름을 내렸다.
풍양(豊壤)은 경기도 양주(楊洲)의 옛 지명(地名)으로, 원래 고구려(高句麗)의 골의노현(骨衣奴縣)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황양(荒壤)으로 고쳐 한양군(漢陽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후에 풍양으로 고쳐 양주에 속하였다. 그후 포주(抱州 : 抱川)에 이속되고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다시 양주(楊州)에 속하였다.
6세까지 실전(失傳)한 전직공파(殿直公派)는 고려 때 전직(殿直)을 지낸 조지린(趙之藺)을 일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으며, 몇 대까지 실전(失傳)했는지 상고(詳考)할 수 없는 평장사파(平章事派)는 조신혁(趙臣赫)을, 상장군파(上將軍派) 조보(趙寶)를 일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세 파(派)는 동원(同源)이면서도 계대(系代)를 알지 못해 대동보(大同譜)에서도 구분(區分)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전직공파(殿直公派)는 다시 호군공파(護軍公派 : 사충) 회양공파(淮陽公派 : 신) 금주공파(錦州公派 : 임) 등 3파(三派)로 나누어지고, 평장공파(平章公派)는 상장군공(上將軍派)를 합쳐 크게 5파(四派)로 분파(分派)되었다.
회양공파(淮陽公派)의 후손에서 다시 한산군파(漢山君派)와 사옹정공파(司饔正公派)로 크게 갈리는데 이들 두 파가 조선에서 크게 명성을 떨쳤고, 후손도 가장 번창해서 현존(現存)하는 풍양 조씨(豊壤趙氏)의 과반수를 차지한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운흘(云仡)이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계림부윤(鷄林府尹) 등을 지냈고, 조선(朝鮮)이 개국한 후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특히 풍양조씨는 조선 말기에 와서 크게 세도를 떨쳐 명문(名門)의 대(代)를 이었으며, 그 세력은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쌍벽을 이루었다.
부총관(副摠管)을 지낸 익정(益貞)은 공조 좌랑(工曹左郞) 안평(安平)의 손자로 벼슬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공조(工曹)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으며, 지진(之鎭)의 아들 현범(賢範)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중종 때 사섬시정(司贍寺正)을 지낸 종경(宗敬)과 명종 때 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하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안국(安國)은 훈련대장(訓鍊大將) 경(儆)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경(儆)은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 방어사(慶尙右道防禦使)가 되어 추풍령(秋風嶺) 싸움에서 패하고 금산(金山)에서 왜군을 격퇴시켜 1599(선조 32)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올라 선무삼등공신(宣武三等功臣)으로 풍양군(豊壤君)에 봉해졌다.
명문(名門) 풍양조씨를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 일으키는데 주춧돌이 된 인물들을 파별(派別)로 보면, 청교파(靑橋派 : 회양공파의 후손)에서 상우(相遇)․문명(文命)․현명(顯命)․재호(載浩) 등의 정승(政丞)과 원명(遠命) 시준(時俊) 정진(鼎鎭) 홍진(弘鎭) 상진(尙鎭) 병필(秉弼) 병창(秉昌) 등의 판서급(判書級)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평장공파(平章公派)에서는 조선 중기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인 익(翼)이 효종(孝宗) 때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복양(復陽)은 현종(顯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복약(復陽)의 아들 지겸(持謙)은 숙종(肅宗) 때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형조 판서(刑曹判書) 만원(萬元)과 함께 헌종(憲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한산군파(漢山君派 : 회양공파의 후손)는 도정(都正)을 지낸 도보(道輔)의 아들 상경(尙絅)․상강(尙綱)․상기(尙紀) 3형제와 8명의 손자(孫子)가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벼슬에 올라 영조(英祖)와 정조조(正祖朝)에 걸쳐 확고한 세도의 기반을 닦았다.
상경(尙絅)의 세 아들 가운데 둘째 엄(曮)은 영조(英祖) 때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갔다오면서 감자를 가지고 들어와 우리 나라에 퍼뜨린 사람으로 유명하다. 성품이 강직하여 세칭「조고집」으로 불리웠던 그는 정조(正祖) 때 공조(工曹) 및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에 이르렀으나 권신(權臣) 홍국영(洪國榮) 일당의 탄핵으로 김해(金海)로 유배(流配)당했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영조(英祖) 때 과거에 급제하여 부총관(副摠管)을 지낸 흥진(興鎭)이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으며, 판서(判書) 용화(容和)는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文章)에 능하여 당대의 거유(巨儒)로 일컬어졌다.
이렇게 조선조(朝鮮朝)에서 명성을 날린 풍양 조씨는 근대에 와서도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한말(韓末)의 격동기에 나라와 가문을 위해 몸 바쳐 충성했다.
그 중에 항일투쟁에 앞장선 정구(鼎九)․완구(琬九)․동석(東奭) 등이 이름났는데, 정구(鼎九)는 고종(高宗) 때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와 기로소 비서장(耆老所秘書長) 등을 지내고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으로 재직중 한일합방이 되자 합방 조서(合邦詔書)와 고유문(告諭文)을 찢고 자결하려다 실패하자 금강산(金剛山)에 입산(入山)하여 중이 되기도 했으며, 그의 종제인 완구(琬九)는 군수(郡守)에 재임중 합방을 당하자 간도(間島)로 가서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간부로 활약했고, 동석(東奭)은 경북 상주(慶北尙州)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순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