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시: 박목월, 작곡: 김성태
1.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아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2.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3.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학창시절 음악시간에 배웠을 국민가곡입니다. 그리고 작사가인 박목월 선생님의 존함은 국어시간에 조지훈 박두진 선생님과 함께 <청록파> 3인방 시인으로 열심히 암기했을 것이고,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란 시를 교과서에서 배웠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 암송하고 계신 분도 적지 않을 겁니다. 이 노래는 목월 선생님이 젊은시절에 비몽사몽 경험하신 짧고도 가슴아픈 사랑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그 스토리에서 또 다른 명시와 명가곡이 탄생했으니 바로 《떠나가는 배》입니다. 이제 이 두 곡을 색소폰으로 연속 연주하고 해설을 곁들이려 합니다.
《이별의 노래》 탄생 과정을 보면, 1952년 늦가을에 서울대 국문과 교수였던 시인 목월 선생님이 E여대 국문과 학생이던 H양과 사랑에 빠져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제주도로 돌연히 사랑의 도피를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피난 중이던 대구에서 처음 만난 후 환도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서 관계가 급속하게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갑자기 종적을 감춘 남편을 찾아 수소문하던 부인은 제주도까지 찾아와서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활극을 펼치는 대신 겨울 옷보따리와 돈봉투를 주면서 속히 돌아오라고 당부한 후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게다가 H양의 아버지가 찾아와 딸을 설득한 결과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기로 결심하였고, 뻘쭘한 목월 시인은 이별하기 전날 밤에 흐느끼는 H양에게 “이별의 노래” 시를 지어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제주항에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배에 오른 H양과 망연하게 탈진한 목월 시인의 이별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당시 제주 제일중학교 국어교사인 양중해 선생님이 “떠나가는 배”라는 시를 지었고, 나중에 변 훈 선생님이 곡을 붙여서 명가곡이 되었습니다. 한편 서울로 돌아온 목월 선생님은 염치없고 미안해서 차마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효자동에서 하숙을 하다가 2개월 뒤에야 집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52년 11월 목월 선생님은 피난시절 친분을 맺었던 김성태 선생님과 대구에서 함께 술을 마시다 이 시를 전했고, 이 시에 감동한 김성태 선생님은 그날 밤에 여인숙 방에서 불후의 명곡인 《이별의 노래》를 작곡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목청 높여 부르던 “아-아-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란 가사와 멜로디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시인의 사랑은 명시와 명곡을 낳지만, 일반인의 사랑은 불행과 비난을 남기곤 하지요. 그것은 일반인이 사랑에 빠져서 시인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어도 이런 명시나 명곡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박목월 (본명; 박영종, 1916 ~ 1978) 선생님은 경주 출신으로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의 계성(啓星)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동잡지 「어린이」와 「신가정」에 동요가 실릴 정도로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지만, 졸업 후 경주에 있는 금융조합에 취직하고 결혼하며 정착했습니다. 누구나 초등학교 1학년 때 배우는 《얼룩 송아지》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도 선생님이 지으신 동요였지요. 그후 「문장」지에 목월이란 필명으로 시를 투고하곤 하다가, 1939년에 <연륜>이란 시로 정지용 시인의 추천을 받으며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목월 (木月)이란 호는 평소 좋아하던 시인 수주(樹州) 변영로 선생님의 호인 ‘수’에서 나무목(木)자를 따오고 소월(素月) 김정식 선생님의 호에서 달월(月)자를 따서 지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46년에 박두진 조지훈씨와 더불어 한국 현대시에 큰 획을 그은 「청록집」을 발간했습니다. 선생님의 시풍은 초기엔 “자연과 향토적 정서”가, 중기에는 “사랑과 가정”이, 그리고 말기엔 “인생에 대한 달관과 허무의식”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후 대학교 국문과 교수가 되었고, 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셨으며, 후배들을 위해 월간 시전문지 「심상」을 창간하셨습니다. 목월 선생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128)번 《4월의 노래》의 해설을 참고 바랍니다.
목월 선생님의 수필집 <구름에 달 가듯이>에는 H양과의 만남부터 헤어질 때까지의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0여 년이란 이별의 세월이 흘러 이승을 떠나기 얼마 전에 목월 선생님은 늙은 H양을 다시 방문해 만나고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습니다.
“어제 그를 방문했다. 겨우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내가 가는 길에 눈이 뿌렸다. 그의 눈에는 영원히 멎지 않을 눈발이 어렸다. (중략) 사람의 인연이란 꿈이 오가는 통로에 가볍게 울리는 응답 … 백발이 되고 이승을 하직할 무렵에 한 번 더 만나보려니 소원했던 사람을 이제 방문하게 되었다. 덧없이 흐른 세월이여. 끝없이 눈발이 내리는구나”
이런 만남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H양도 목월 선생님도 노랫말처럼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아-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김성태 (1910 ~ 2012) 선생님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가 세운 교회에서 서양음악을 접하고 연희 전문학교 상과로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대학 시절 홍난파, 현재명, 채동선 선생님에게서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고는 부모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인 최초로 일본 도쿄음대 작곡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겸 지휘자 겸 음악교육가로 평생을 사셨는데, 호는 악석(樂石), 요석(謠石), 낙석(洛石) 또는 산남(山南)입니다. 고려교향악단 지휘자를 역임하셨고, 한국에서 초기 서양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해방 후 서울대 음대 설립에 참여하신 후 16년간 학장을 역임하셨으며, 55년에는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교 대학원으로 유학하셔서 작곡 이론을 연구하셨습니다. 저서로는 《악전》, 《화성법》, 《대위법》 등이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예술 가곡집인 《교향적 기상곡》,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현악 4중주》, 칸타타 《비바람 속에》, 연가곡 《꽃》과 《소월 가곡집》, 그리고 《이별의 노래》 《즐거운 우리집》 《동심초》 《못잊어》 《산유화》 《한 송이 흰 백합화》 등의 가곡과 동요인 《잘자라 우리아가》가 있습니다. 또 예술원 원장을 지내셨습니다. 김성태 선생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469)번 《동심초》의 해설을 참조 바랍니다.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곡이 많은 중에서도, 가을이 오면 우리들에게 항상 떠올려지는 노래가 있으니 곧 《이별의 노래》입니다. 그 이유는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이 국민애창곡의 가사 중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라는 대목에서 사랑과 이별의 아픔뿐 아니라 인생의 이별까지도 가슴 깊이 차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슬픈 가사의 사연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데다가, 우리들 모두가 “너도 가고 나도 가야하는” 운명에 속해있음을 관조(觀照)하게 합니다. 가을이 다가오는 이 즈음에 “기러기 울어예는” 뜻을 음미하면서, 가을의 명가곡인 이 노래를 조용히 따라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128)번 《4월의 노래》 (클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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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번 《동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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