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에는 내로라 하는 강타자들이 즐비하다. 야구가 재미있으려면 특출한 투수와 함께 특출한 타자가 있어 상호 균형을 맞춰야 한다.
내가 상대해본 한국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강타자 9명을 골라 내가 그들을 상대했던 경험을 간단히 돌이켜 보겠다.
이 강타자 명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김성한 선배지만 그는 줄곧 나와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대결할 기회가 없었다. 성한형이나 나나 여간 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장종훈. 1990년대를 대표하는 강타자다. 한국프로야구에서 개인통산 최다홈런기록을 갖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렇지만 나는 그에게 단 하나의 홈런도 내주지 않았다.
내가 장종훈에게 강한 이유는 간단하다. 짧게 끊어치려는 타자보다 크게 치려고 덤비는 타자일수록 허점이 많기 때문이다.
1992년7월9일 광주경기에서였다. 5―3으로 리드한 가운데 나는 9회초 2사후 갑자기 컨트롤이 흐트러지면서 연속포볼을 허용, 동점주자를 내보냈다. 다음 빙그레 타순은 이정훈―장종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어지간한 투수라면 장종훈의 한방이 두려워 이정훈과 대결하려 들었겠지만 나는 장종훈이라면 워낙 자신만만하던 터라 까다로운 이정훈을 은근슬쩍 4구로 걸리고 장종훈과의 승부를 택했다.
만루홈런이 나올까 봐 조마조마한 팬들도 있었겠지만 나는 안쪽 직구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은 후 2구째도 역시 안쪽으로 빠르게 찔러 1루수 파울플라이를 유도, 승부를 끝냈다. 그는 워낙 힘이 좋은 타자이지만 나의 변화구를 공략할만한 기교는 갖고 있지 못했다.
1991년부터는 변화구를 노리는 기미가 보이길래 나는 거꾸로 빠른 볼로 투구패턴을 바꿨다. 아무리 홈런타자라도 완벽하게 컨트롤된 몸쪽볼은 좀처럼 때려내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어정쩡하게 가운데로 쏠렸다간 큰것을 얻어맞게 되므로 몸쪽볼은 완벽한 컨트롤이 생명이다.
국내에서 최다홈런을 기록하고 있는 이만수 선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게임을 놓칠만한 위기상황에서 그에게 안타나 타점을 뺏긴 적은 한번도 없었다.
장타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도 안쪽볼보다는 가운데에서 바깥쪽으로 흐르는 공을 주로 홈런의 제물로 삼는 스타일이었다. 그렇게 던졌다가는 반드시 홈런은 아닐지라도 거의 70%는 강하고 빠른 타구를 얻어맞는다. 바꿔 말하면 이만수도 장종훈과 마찬가지로 몸쪽에 약점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몸쪽 빠른 볼을 던져 내 공의 위력을 보여주고나서 바깥쪽 낮게 변화구를 던지면 영락없이 헛스윙이다. 또는 타이밍이 맞지 않아 힘없이 구르는 병살타가 되고 만다.
내 몸쪽 볼에 질린 이만수는 최근 몇년전부터는 안쪽으로 공이 들어오리라 예상하고 뒷발을 빼며 스윙하는 두뇌플레이를 보여줬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몸의 중심이 흔들리는데다 나이먹은 탓에 스윙마저 무뎌졌기 때문에 페어지역으로 공을 날리기는 힘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면 거꾸로 바깥쪽으로 찔러넣었다. 그럴 경우 이만수는 배트가 닿지도 않을 만큼 엉거주춤 헛스윙해버리고는 ‘속았다’며 제 손으로 헬멧을 탁탁 두들겼다. 재미있고 순수한 선배다.
홈런타자라면 김기태도 빼놓을 수 없다. 같은 장거리타자이면서도 내가 상대해본 김기태는 장종훈과 아주 딴판이었다. 1991년 시범경기에서 처음 만난 김기태는 여느 장타자와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볼카운트 1―3으로 몰린 나는 승부에 신경쓸 필요가 없는 게임인지라 ‘한번 쳐보라’는 심정에서 안쪽 직구를 두번 연속 던져봤다. 그랬더니 김기태는 연신 헛스윙으로 일관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나는 ‘흐흐 너도 역시 마찬가지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전을 치르다 보면 상대의 약점이 보인다고 해서 들입다 그쪽만 찌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투구패턴상 안팎을 오가며 볼을 배합하는 게 당연하다.
1991년8월14일 광주에서 겨룰 때였다. 4회초 선두로 나온 그를 볼카운트 2―1로 몰아붙인 나는 바깥쪽으로 헛스윙을 유도하는 직구를 던졌다. 그러나 김기태는 그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대로 밀어쳐 레프트담장을 넘겨버렸다. 밀어쳐서 펜스를 넘겨버리는 그의 힘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홈런 한방 때문에 우리 해태타선을 2안타로 막아낸 쌍방울 김원형에게 1―0으로 지고 말았다.
광주일고 10년 후배인 김기태는 나이어린 타자답지 않게 변화구를 능숙하게 받아치는 기술이 있었다. 1995시즌에 타격왕을 다투었던 게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볼카운트가 유리할 때는 홈런을 노리고, 불리할 때는 저스트미팅으로 전환하는 기술이 단연 돋보인다.
교타자라면 장효조 선배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의 대결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1986년5월6일 대구경기였다.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았던 나는 권영호와 맞서 6회까지 2―0으로 앞서나갔다. 단순히 리드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난생 처음 퍼펙트행진을 벌이고 있었다.
7회말에도 가볍게 투아웃을 잡은 후 장효조와 맞섰다. 사실 나는 7회를 맞으면서부터 퍼펙트게임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볼카운트 2―3이 되자 포볼로 걸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칠테면 쳐보라, 친다고 다 안타가 되느냐 하는 마음으로 빠른 직구로만 승부를 걸었다. 장효조는 3번이나 파울볼로 걷어냈다.
힘껏 던진 직구들이 연방 커트되자 나는 마음을 바꿔 슬라이더를 찔러넣었다. 그랬더니 딱 소리아 함께 좌전안타. 과연 그는 대타자다웠고 퍼펙트게임에 대한 나의 꿈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그것은 1986시즌에 그에게 내준 유일한 안타였는데 나중에 곰곰 생각해 보니 포볼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스트라이크존에서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을 던졌어야 옳았다. 장효조도 어차피 삼성팀내에서 안타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안타를 치겠다고 덤볐을 테니까.
교타자 계열에서는 이정훈이 장효조와 쌍벽을 이룬다. 그는 거기에 덧붙여 투지까지 철철 흘러넘치는 선수였다. 내가 여지껏 싸워본 타자 중에 가장 껄끄러운 상대가 바로 이정훈이었다.
그의 최대장점은 자신감이다. 어지간한 타자들은 ‘선동열’이라는 이름 석자 앞에 지레 주눅들게 마련이었지만 그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무릇 모든 경기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얼마나 자신감을 갖고 싸우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라지는 법인데 이정훈은 죽기살기로 달려든다는 점에서 단연 첫손가락에 꼽히는 타자였다.
그의 또다른 강점은 어떤 공에나 힘차게 제 스윙을 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타자들은 볼이 어지간히 빠르다 싶으면 제대로 스윙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갖다맞히기에 급급한데 그는 어떤 구질이든 있는 힘을 다해 휘갈겼다. 투수로서는 그게 가장 겁날 수밖에 없다.
지금은 현대 유니콘스 감독으로 올라선 김재박 선배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강타자는 아니면서도 배팅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각종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사실 김재박은 타격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엄청나게 두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출루하면 베이스 사이를 휘저으며 신경을 건드리기 때문에 투수로서는 ‘출루시키면 큰일이다’하는 걱정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뜻밖의 실투, 즉 그가 노리는 곳으로 공을 던지게 된다. 야구는 실수투성이인 사람이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그렇다.
김재박을 내 주무기로 잡아버리면 그만이니까 출루시킬 걱정을 아예 걷어치우면 되겠지만 실전을 치르다 보면 그게 말처럼 되는 게 아니다. 내보내서는 안된다는 ‘잡념’이 생기다 보면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진 공이 들어가는 수가 종종 있다.
김재박은 또 남달리 세이프티 번트에 강점을 갖고 있어 그 점을 늘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면 전력투구를 하기에 앞서 수비동작에 신경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았다.
이번에는 김민호. 나는 1995년까지 롯데를 상대로 20연승이라는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그 전만 하더라도 롯데전 전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나보다 1년선배이면서 롯데의 간판타자인 김민호에게 종종 결정타를 얻어맞았기 때문이다. 1985년부터 88년까지 4년동안 28타수 13안타, 거의 5할 가까운 안타를 허용했다.
그러나 1989년 이후로는 1할대로 타율을 떨어뜨렸다. 팬들은 아직까지도 ‘김민호는 선동열에 강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왜 그런 타율의 변화가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프로입단 후 몇년동안 김민호에게 많은 안타를 내준 것은 그가 빠른 공에 유난히 강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있게 던진 직구가 얻어맞으면 ‘그래, 또 쳐봐라’하는 식으로 정면으로 대들다가 또다시 얻어맞곤 했다. 그는 왼손타자라는 강점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9년 이후에는 나의 피칭요령에도, 그의 타격스타일에도 변화가 일었다. 우선 그의 변화부터 말한다면 종전에 단타위주이면서 심심찮게 장타를 터뜨리던 그가 주로 장타를 노리는 풀스윙으로 바꾸었다. 크게 휘두르면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 나는 나대로 투구패턴을 바꾸었다. 그가 직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좋은 먹이를 던져줄 이유는없었다. 그는 공을 세심히 고르지 않고 ‘이거다’ 싶으면 마구 휘두르고 들어오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그가 좋아하는 높은 공보다 약간 더 높이 던지면 십중팔구 ?려들었?? 즉 정직한 스트라이크보다는 볼로 승부하는 게 주효했다.
내가 상대하기 거북했던 타자 중에는 김동기가 있다. 장타를 노리는 풀스윙을 하면서도 정확도가 대단했다. 또 초구부터 수를 읽고 들어오기 때문에 한게임에 한번 이상은 강한 타구를 날렸다. 한게임에서 3안타를 무더기로 맞은 게임이 두번이나 된다. 나는 태평양(현 현대)전에서 통산 27승8패를 거두었는데 내가 진 날은 대부분 김동기가 호조를 보인 날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태평양에는 그다지 위협적인 타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김동기만 철저히 막아내면 좋은 결과가 나왔다.
그를 특별히 요주의인물로 꼽는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의 포지션이 포수라는 점이었다. 포수들은 대체로 배팅이 잘되는 날이면 투수리드도 덩달아 좋아진다. 반대로 타격이 마음대로 안되면 기가 꺾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김동기의 방망이를 무디게 만든다는 것은 크게 보면 우리 타자들의 방망이가 잘 돌아가도록 간접적으로 도와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OB 김형석을 살펴보자. 그는 약간 느린 변화구를 때리는 데는 도사다. 몸의 중심을 뒤에 두고 풀스윙하는 타격폼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에게 내준 안타는 주로 변화구를 던지다 맞은 것이었다.
그는 치겠다고 일단 마음먹으면 어떤 공에나 배트를 내밀고 특히 초구를 노리는 경우가 많다. 하긴 대부분의 투수들이 볼카운트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초구를 스트라이크로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좋은 공을 골라 친다는 점에서는 초구를 노리는 게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스타일의 타자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요령을 갖고 있다. 초구부터 전력투구하되 스트라이크존에서 공 서너개쯤 높은 볼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강한 타구를 맞지 않는다. 물론 공이 상당히 빠르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한때 삼진을 잡는 데에 매력을 느끼면서 공을 건드리지도 못하게 만들려고 애썼지만 요즘은 굳이 삼진을 잡기보다는 초구를 건드리도록 유도해 범타로 잡는 게 휠씬 경제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김형석은 앞서 말한대로 변화구 공략에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지만 그를 잡아내는 결정구로는 스트라이크존 아래로 휘어떨어지는 슬라이더를 주로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