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말해서 총명한 더프가 사람들은 몸이 허약했다.
이브의 쌍동이 자매인 래티티아는 갓난아기 때 죽었다. 이브 자신도 결코 튼튼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이제 검은 곱슬머리와 약간 창백한 안색을 한 13세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는 명랑하고 쾌활하며 아주 재치가 있었다. 학교에서도 총명했기 때문에 시험 때마다 일등을 했고, 프랭크의 말에 따르면 더프 가의 진짜 천재였다고 한다.
학교는 에꼴레스 거리에 있는 도미니꼬 수도원이었고 거기서 그녀는 수녀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질이 우수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것은 그녀의 성덕, 즉 그녀의 맑고 깨끗한 영혼의 아름다움이었다.
모드 브린은 이브의 학교 동료이자 친구였다. 어느 겨울날 두 소녀는 하늘에서 춤추며 내려와 운동장 위에 흰 비단 양탄자를 깐 것처럼 쌓이는 예쁜 눈송이를 창밖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 그들은 점심시간에 밖에 나가서 마음껏 뛰어 놀았다. 흥분에 들떠서 그들은 찬 기온을 느끼지 못했다.
수녀들이 그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꾸짖었고 당연히 이브는 감기에 걸렸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학교 생활이 되었다. 그녀는 심하게 아파서 병원으로 보내졌다. 의사는 결핵이라고 진단했다.
죽기 전 7개월에 걸친 투병 생활 동안 그녀는 놀라운 성성을 보여 주었다. 본당 신부인 맥그래드 신부가 그녀를 찾아와 성체를 영해 주곤 했다. 그는 그녀의 거룩함에 매우 감동되어 클론리퍼 대학의 히케이 박사에게 그녀를 보여 주었다.
말년에도 프랭크는 그의 집 층계 창 곁을 지나가던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의 앞에는 이브가 실내복을 입고 창백한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저 애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그 뒤 곧 죽었다.
프랭크가 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의 첫번 째 관심사는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병으로 인해 일찍 은퇴했고 가족들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하기는 불가능했다. 그 대신 그는 공무원으로 들어가(시험에서 일등으로) 재무성에 근무했다. 다소 갑작스럽게 그는 가족을 부양할 위치에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느 수학을 싫어했기 때문에 재무성에 임명된 데 대해 상당히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임을 깨닫고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방법 "책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급수학과 과학을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세운 거대한 도서관은 그가 공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노력해 볼 만한 목표가 있었고 그는 그것을 성취했다. 매일매일 그는 부지런히 공부를 했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것, 과학의 흥미로운 세계, 순수한 정신적 노력, 이 모든 것은 그의 지성을 열광시켰고 이전에 이런 과목들에 대해 품었던 혐오감은 사라졌다. 이제는 그가 맡은 분야에 대해 단순한 열중이 아니라 순수한 열광이었다.
그의 정확하고 빈틈없는 지성과 문제에 대한 뛰어난 실제적 접근으로 그는 그 부서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겨우 21세가 되었을 때 그는 그 부서의 장관의 관심을 끄는 계산 방법을 발명했다.
그 결과 그는 그의 방법을 런던 재무성 관리들에게 시범을 보이도록 런던으로 초청을 받았다. 그 부서는 후에 그의 새로운 방법을 채택했다. 그는 자신의 성취에서 자부심을 맛보았고 역시 봉급이 올라 기뻤다.
과중한 업무와 임무 수행이 공무원의 틀에 박힌 생활이었지만, 그가 일하는 사무실에서는 우애와 유쾌함이 흘러 넘쳤다. 한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생기가 넘치는 곳에는 반드시 더프 씨의 웃음과 익살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바쁜 업무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부 활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학교에서 "해방된" 다음 그는 즉시 드럼콘드라에 있는 테니스 클럽에 들었다. 테니스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운동 중의 하나이며 그 운동을 아주 잘했다. 그리고 그가 가입한 테니스 클럽은 하드코트를 갖추고 있어서 일년 내내 이용할 수가 있었다.
도전적인 성격이 없었다면 그가 걸어 다닌다는 것은 기분 전환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날 그는 아버지가 기차를 놓쳐서 트림 시까지 꼬박 걸어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들도 할 수 있다"고 프랭크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더블린에서 출발해서 트림까지 83키로미터의 거리를 하루가 채 안 되어서 걸어갔다가 뒤돌아왔다. 날씨가 더워 길가 물이 나오는 곳을 지날 때마다 머리에 물을 적셨다.
또 머리를 시원하게 하기 위해 모자 속에 잔디를 넣었는데 그것을 잊고 도중에 소성당에 들어가서 모자를 벗었을 때 매우 당황했다.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 7마일 동안 그의 오른발이 심하게 물집이 생겼지만 자신이 한 번 하기로 마음먹은 것을 완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후에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느냐고 묻자 그는 "지기 싫어서"라고 대답했다.
그런 완고한 결심은 그의 두드러진 성격으로 드러났다. 일단 한 번 마음을 정하면 바꾸기가 불가능했다.
그가 즐긴 모든 야외 활동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자전거를 타는 것이었다. 그가 처음 직장을 구했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프랭크야, 난 이제 더 이상 자전거를 잘 탈 수가 없구나. 너에게 주마. 네가 필요할 것이다."
프랭크는 그 자전거를 약간 손을 본 다음 그의 자전거를 항상 여행의 동반자로 삼았다. 그는 사무실에 자전거로 출근했고 전할 것이 있어도 자전거를 타고 갔으며 소풍도 자전거를 타고 갔다.
주일 아침 미사 뒤 그의 일행들은 해안도로를 따라 하우드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리고 오후에 다시 브레이나 혹은 다른 경치 좋은 곳으로 자전거를 타고 갔다.
대체로 청년 더프는 매우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많은 그의 친구들은 '상류사회'에 속해 있었고, 그는 많은 상류층 결혼식에서 들러리를 섰다. 재무성에서는 밝은 장래가 이 젊은 수학자에게 보장되어 있었다.
그때 그의 전생애를 엄청나게 다르게 바꾸어 놓은 사건이 생겼다. 프랭크가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것은 1913년 10월이었고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이전에 프랭크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들어가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그 후 그와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며 그가 매우 존경하는 잭 캘러한으로부터 다시 권유를 받았다. 그는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갈멜 산의 성모 마리아의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가입했고 모임을 참관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가 세번째 모임에 참석했을 때 그는 그 회의 서기로 임명되었다.
당시 더블린에서의 가난은 소름끼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실업 상태였고 일가족들이 슬럼가의 방 하나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굶주림, 불결과 술에 만취한 생활이 만연했다. 종교적 냉담은 더욱 심했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목표는 가장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라도 구제하고 동시에 그런 가난한 사람들을 영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프랭크는 때때로 가난한 사람들을 부양해야 하는 절박한 사정 때문에 영적 목표가 무시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빈첸시오회가 복음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25, 40). 그 말씀의 실체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에게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이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 모두 안에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존재하신다. 더러운 손, 때묻은 얼굴, 피로에 지친 다리는 동정과 도움을 절규하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신비체의 일부였다. 그들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 도와야 할 불쌍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들은 참으로 이 땅에 계신 그리스도의 지체였다.
프랭크는 이제 지금까지 그의 신앙에 평범한 것, 즉 비교적 따분하고 지루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현존이라는 이 교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는 신앙이 줄 수 있고 또 주어야 하는 감격적인 모험을 깨달을 수 없었다.
몇몇 병원에서 그 당시 상황은 원시적이고 비위생적이었다.
프랭크가 한 병원의 암병동에 있는 환자들을 방문했을 때, 그는 자신이 방문하고 있는 사람이 진실로 그리스도라는 생각을 상기함으로써만이 그 불쾌감을 참고 견딜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후에 슬럼가를 방문했을 때, 그 끔찍한 상태를 직시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위에서와 같은 숭고한 진리를 떠올림으로써만이 가능했다.
소년 시절 프랭크는 결코 가난을 가까이서 보지 못했다. 그의 집에는 풍부함과 청결함과 정성들여 꾸민 환경이 있었다. 그는 물론 멀리서 가난을 보았고 허름한 옷을 입은 아이들을 보았으며 길에서 술에 만취된 사람을 보았고 두려움에 뒷걸음질쳤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사회의 "버려진 이들"과 "어깨를 스친" 적이 없었고 극빈자들이 사는 상태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활동은 이제 그로 하여금 소름끼치는 현실에 직면하게 했다.
아마 그의 정화된 품성은 그가 경험한 것들에 의해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전혀 새로운 세상, 그리스도의 불쌍한 백성들을 발견했다.
그는 그들을 열정과 온화함을 가지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그들을 돌보았고 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시중을 들었다. 그들은 그의 새로 발견된 친구들이었고 일생 동안 그의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