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조명희, 그 치열한 삶의 궤적을 따라 1
2014년 9월 2일 포석선생의 유족 분들과 포석문학관 건립 관계자 등 8명은 11일 동안의 일정으로 선생의 삶의 흔적을 찾아 망명지였던 러시아로 떠났다.
진천군과 충청북도의 도움으로 문학관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그때 우리는 문학관에 전시할 자료를 찾아야 했다. 선생의 불꽃같은 생애가 44년밖에 안 되는 짧은 세월이기도 했지만 국내에서 선생이 독립운동하신 자료 등은 일부러 지운 듯이 찾아도 찾아도 없어 허탈하여 가슴앓이를 했던 시간들이 얼마던가 그러나 이제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선생의 궤적을 따라 가는 것이다.
민족민중문학의 선구자로 열정적 삶을 산 근대문학의 ‘우뚝한 별!’
선생은 한국의 현대 희곡, 시, 소설 어느 분야에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문학가이다. 선생이 근대문학초창기 한국문단에서 활동한 기간은 8년 정도로 짧은 기간이지만 다양한 활동으로 민족주의적 극작가, 사실적인 시인, 현실비판의식이 높은 프로소설가라는 선구적 업적을 뚜렷이 남겼다. 각 부분에서 최초라는 이름을 달고……
1920년 극예술협회에 가담하면서 희곡 ‘김영일의 사’를 발표했다. 이 희곡은 그의 처녀작으로 ‘동우회’극단에 의해 1921년 전국순회공연을 올려 호평을 받았다. ‘김영일의 사’는 민족주의 신극운동을 개척했다는데서 희곡사적 의미를 가진다.
23년에는 우리나라 최초 창작 희곡집 <김영일의 사>를 펴냈고, 2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발표 창작시집 <봄 잔디밭위에>를 펴냈다. 27년에는 그의 대표작이며 기념비적인 소설 ‘낙동강’을 <조선지광>에 발표했다. ‘낙동강’은 자연발생적인 수준에 머물던 신경향파 문학을 목적의식적인 프로 문학으로 발전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28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로 망명한 후에는 산문시 ‘짓밟힌 고려’를 비롯해 항일투사들의 활동을 그린 소설 ‘만주 빨치산’ 등을 쓰는 등 KGB에 연행될 때까지 2편의 장편소설과 7편의 산문시 수필 평론 등을 썼다. 이러한 작품들은 당시 교포문단에 활력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땅에 뿌린 한국문학의 씨앗이 되었다.
시인․소설가․희곡작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일관한 포석!
그러나 나는 국문학사에서 선생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내가 선생에 대해 알게 된 것은 90년대 초였다. 카프활동과 프로레타리아 문학에 개입했고 러시아로 망명한 작가라는 낙인 때문에 선생의 작품은 금서로 묶여 있다가 1988년 납북작가 작품이 해금 된 후에야 우리 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 무렵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 있는「문학박물관」에는 ‘조명희기념실’이 설립 되었고 4년 후 타슈켄트에 '조명희 거리‘가 명명되는 등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에서는 선생을 우리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인정해주고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우리 한국에서는 아니, 고향인 진천에서는 포석조명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선생의 유족과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선생의 탄생 100주기를 맞는 1994년에서야 진천에서「조명희 탄생 100주년기념, 조명희문학제」를 열고 생가 터에 ‘조명희 조벽암(선생의 조카)태어난 곳’ 표지석을 세우게 됐다. 그리고「조명희 전집」도 동양일보의 주선으로 비로소 간행되었다.
2003년 진천군은 포석문학공원을 조성하고 시비(詩碑)를 세웠다. 비록 작은 공원이지만 내용물이 알찬 곳으로 이곳에서 가을이면 포석조명희 추모제를 2014년까지 지낸 곳이다. 비록 초라하게 세워진 표지석이지만 우리들의 기도가 20년 동안 삭혀진 곳이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공원앞 도로가 ‘포석의 길’로 명명됐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 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다 알게 된 후배로서 그분을 위한 문학관만은 꼭 지어야 한다는 숙제가 주어진 것이다.
그 숙제를 풀려고 거제도에서 강원도까지 수많은 문학관을 찾아다니며 견학을 했고 웬만큼 밑그림이 그려지자 2010년에 문학관을 지어야 한다는 발의문을 발표하고 2011년에는 기존의 포석회를 포석기념사업회로 키워서 2013년에는 사단법인체로 등록을 마쳤다.
포석문학관을 짓는 것은 평생에 숙명처럼 주어진 숙제라고 생각했으며 그 일을 이루기 위해
포석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일을 시작 할 때 주위의 많은 방해도 받았고 그러면서 이 일을 끝까지 해 낼 수 있을지 실로 많이 두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때 조명희 선생님의 마지막 사진을 들여다 보았고 그 사진 속의 눈빛이 제게 말씀하시는 듯 느껴져 온 몸이 전률했던 날 쓴 시입니다
그 눈빛이 말을 걸어오다
무엇이 두려우냐 떨치고 일어나라
너 가진 것 잃어봐야 몇 푼어치나 되겠니
조국도 가족도 친구도 다 두고 난 떠났다
단 한마디 언질 없이 아무도 모르게 떠난
그때의 내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게다
바람도 지문을 남긴다는 시를 쓴 너이니까
조국에 뿌려 키울 유토피아 씨앗 찾아
일하고 싶어 떠났다 돌아오려고 떠났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을 짐작이나 하겠니
낯선 땅 러시아에서 겪었을 고통들을
무너지려는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을
설득이 가 닿지 않는 무지 앞의 절망을
연해주 내 동포 지키려 스탈린에 맞선 죄로
내 꿈은 스러지고 그렇게 묻혔지만
혼만은 너희들 곁에 함께하고 싶구나
조명희문학관 건립을 위한 발의문
세상에 나무가 없다면 흙먼지 날리는 황량한 환경 속에서 지독한 질병과 싸우며 절망스럽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작은 예가 되겠지만 나무가 없어서 일어나는 황사를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면 공기가 맑아지고 기후가 안정되면 아름다운 새들이 모입니다.
각박한 물질문명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정서는 날로 황폐해지고 있으며 그로인한 엄청난 부작용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심각해지고 있는 인간의 마음속에 ‘문학’이라는 푸른 나무를 심어 주는 것이 병든 마음을 치유하는 지름길임을 알고 있기에 현재 대한민국 곳곳에서 문학관을 세우거나 문학인들의 유업을 기리는 갖가지 사업들로 정신문화를 살찌우고 있습니다.
충북만 해도 이미 세워진 문학관은 옥천의 정지용시인을 기리는 ‘지용문학관’, 보은의 오장환 시인을 기리는 ‘오장환 문학관’, 충주의 박재륜 시인. 정호승 시인. 권태응 시인 홍구범 소설가를 기리는 ‘충주 문학관’, 영동의 ‘농민문학관, 제천의 ’원서문학관‘ 이 있으며, 청주․청원의 김수현문학관’, 괴산의 홍명희문학관, 단양의 우탁문학관 등이 준비 중에 있습니다.(음성은 소설가 이무영을 기리는 사업으로 생가 터를 구입, 문학비와 흉상을 세웠고 정자를 지어 놓았음)한국엔 현재 46곳에 문학관이 건립돼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진천은 빠졌습니다. 우리 진천에는 시인이자 소설가요, 한국 최초의 희곡작가인 ‘조명희’(1894-1938)라는 한국문학의 거목이 계심에도 해방 후에는 국가에서 금서라는 장막을 쳐서 가렸고, 해금 후에는 진천인들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외면해 온지 20년을 넘겼습니다.
현재 조명희선생의 작품은 대한민국 안에서는 대학교재로, 고3 수능교재로 채택되어있고 중국 연변에서는 중고등학교 교재로 채택된 지 65년이 넘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쉬켄트에는 ‘조명희 거리’가 명명되어 있고, 우리지역에서는 문학비가 섰고 매년 ‘포석 조명희문학제’가 18년간 열리고 있으며 중국 연변에서도 ‘포석 조명희문학제가 10년째 매년 개최되고 있습니다. 2006년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조명희 문학비가 섰으며 진천의 문학공원에 또 다시 시비건립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에 대한 연구가 갈수록 활발해지고 선생의 고향을 찾는 이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음에도 진천에는 문학관이 없어 선생의 문학적 위업을 기리는데 한계를 느끼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후배 문인들은 늦은 감은 있으나 조국광복과 한국문학에 열정적으로 생애를 바치신 그분의 뜻을 기리고 문학을 활성화 시켜 푸르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명희문학관’ 건립을 발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들의 이 간절하고도 아름다운 바람을 소중하게 받아들여 진천문인들의 자존심과 군민들의 자긍심을 놓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2010년 11월
진천문인협회 회장 나순옥
위의 사진은 2011년 7월 포석기념회 발기대회에 참석했던 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