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佛法)의 요체(要諦) 서문(序文)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사는 인간(人間)의 사고(思考)나 행동(行動)이 우주(宇宙)의 도리(道理)에 맞지 않으면, 자신(自身)의 주변(周邊) 환경(環境)과 충돌(衝突)을 일으키거나 조화(調和)를 이루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필연적(必然的)으로 인생고(人生苦)가 따르게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대요(大要)는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현재(現在)도 행복(幸福)하고 다가올 내생(來生) 또한 행복(幸福)하기 위한 것이 부처님의 근본(根本) 가르침입니다.
인간(人間)은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천지우주(天地宇宙)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을 계속하고, 일체만유(一切萬有)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끊임없는 변화(變化)를 거듭하면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그러한 이치(理致)를 잘 알지 못하면 허망(虛妄)한 집착(執着)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일체개고(一切皆苦)이기 때문에, 필연적(必然的)으로 인생고(人生苦)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인생고(人生苦)를 해결(解決)하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의 방법(方法)으로 도체(道諦)을 알려 주셨습니다. 불교(佛敎)는 신앙방법(信仰方法)에 있어서도 타력신앙(他力信仰)의 정토문(淨土門)과 자력신앙(自力信仰)의 성도문(聖道門)이 모두 구족(具足)하게 갖추고 있는 모든 삼계(三界) 우주(宇宙)를 포괄(包括)하는 종교(宗敎)입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가 자기(自己) 자신(自身)를 사랑하는 꿈을 꾼다고 할 때, 꿈속의 타인(他人)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분신(分身)이 꿈 속에서 나의 화신(化身)이 되어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世上)의 모든 현상(現象)은 우리가 꾸는 한바탕의 꿈과 같지만 우리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남의 탓을 하면서 허망(虛妄)한 생각으로 살아가기 쉽습니다.
우리가 현생(現生)에서 영원(永遠)하게 행복(幸福)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몸도 결국(結局)은 과거생(過去生)의 헌 옷과 미래생(未來生)의 새 옷 사이에 있는 임시적(臨時的)인 존재(存在)에 불과합니다. 새 옷을 입었을 때는 새로운 생(生)에 이르는 존재(存在)가 되는 것이며, 헌 옷을 벗게 되었을 때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存在)가 되는 것입니다.
실상관(實相觀)은 천지우주(天地宇宙)를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진여(眞如)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떠난 이언진여(離言眞如)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범부(凡夫)인지라 그런 자리를 미쳐 보지 못 보하였다고 할지라도, 의언진여(依言眞如)라, 그런 자리도 부처님께서 심심미묘(深深微妙)한 지혜(智慧)의 말씀으로 진여(眞如)의 실상(實相)을 말로 표현(表現)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실상관(實相觀)입니다.
실상관(實相觀)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여 영생상주(永生常住)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생명(生命) 그 자체(自體)를 말합니다. 진여(眞如), 여래(如來), 불(佛), 열반(涅槃), 도(道), 실제(實際), 보리(菩提)는 말만 조금씩 다를 뿐, 본래면목(本來面目), 제일의제(第一義諦)라고도 합니다.
법성게(法性偈)에서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 법성(法性)은 원융(圓融)하여 두 상(相)이 없다는 말입니다. 보적경(寶積經)에 백천만겁(百千萬劫) 구습결업(久習結業) 이실상관(以實相觀) 즉개소멸(卽皆消滅)이라 하였습니다.
백천만겁(百千萬劫) 동안 쌓인 업장(業障)들도 실상관(實相觀)을 하는 것으로 즉시(卽時) 모두 다 소멸(消滅)된다는 말입니다. 참다운 행복(幸福)의 근원(根源)은 참다운 지혜(智慧)에 있고, 이것이 반야지혜(般若智慧)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입니다.
우주(宇宙)도 나 이전(以前)에는 없습니다. 현상계(現象界)의 모든 것은 생각의 발로(發露)이며 환상(幻想)일 뿐, 모두 다 실제(實際)가 아닙니다. 마음을 깨치면 전우주(全宇宙)에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고(全智), 모든 근심 걱정을 다 떨어내고, 완전(完全)한 자유(自由)와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全能). 그래서 누구에게나 모든 고통(苦痛)을 해결(解決)해 줄 수 있는 환한 길을 알려주는 것이 대승보살(大乘菩薩) 정신(精神)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혜천(慧泉) 합장(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