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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박헉거세 (bc57~ad4)거서간 ~태양의 의미, 제사장이라는뜻
2대 남해 차차웅(ad5~)무당이라는뜻
3대유리(노래이질금ad24~)연장자인 이사금 ,석탈해와 이빨이 많으므로 왕
5대 파사왕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의 유민(망하여 나라가 없어진 백성)이 지금의 경상도 지방 산곡간에 흩어서
살면서 양산촌, 허촌, 진지촌, 대수촌, 가리촌, 고야촌 등 여섯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때 양산 밑 나정
이라는 우물 근처에 신기한 빛이 하늘에서 땅에 닿도록 비추고 있고, 흰말 한 마리가 꿇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가보니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하늘로 날아가고, 알을 깨어보니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
다고 한다. 큰 알이 마치 박과 같다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고 이 아이가 박혁거세이다.
박혁거세가 13세가 되던 해여 6마을의 왕이 되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이라 하였다. 그리고 알영을
왕비로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면하여 생산의 증가에 힘을 썼고, 백성들은
박혁거세를 칭송하였다. BC37년에 서울에 도읍지 금성을 쌓고 BC32susdp 금성에 궁궐을 지었다.
박혁거세는 61세로 죽게 되었는제 현재 경주시 남천의 남쪽에서 장사를 지냈다.
박혁거세는 신라를 건국한 최초의 왕이다
혁거세가 나정 가에 놓인 알에서 나오던 날,
사량리 알영정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그녀의 얼굴과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부리와 같았다.
월성 북천에서 목욕을 시키자 그 부리가 떨어져 나갔으므로,
그 시내의 이름을 발천이라고 하였다.
남산 서쪽 기슭에다 궁실을 짓고 (지금의 창림사이다) 성스러운 두 아이를 받아 길렀다.
남자아이는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향인들이 바가지를 박(朴)이라 했기 때문에 성을 박씨로 하였다.
여자아이는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 삼국유사>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존장(尊長)에 대한 칭호인데 오직 남해왕(南解王)만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赫居世)요,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며, 비(妃)는 운제부인(雲帝夫人; 운제雲梯라고도 한다. 지금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는데 가뭄 때 여기에 기도를 드리면 감응感應이 있다)이다. 전한(前漢)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甲子; 4)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인 지황(地皇) 4년 갑신(甲申; 24)에 죽었다. 이 왕이 삼황(三皇)의 첫째라 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상고해 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진한(辰韓)의 말로 왕이란 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귀인(貴人)을 부르는 칭호라고 하며, 차차웅(次次雄)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김대문(金大問)은 말하기를, "차차웅(次次雄)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드디어 존장(尊長)되는 이를 자충(慈充)이라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사금(尼師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잇금[齒理]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자 그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 했다. 이에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한다"하고 떡을 입으로 물어 시험해 보았다.
고전(古典)에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했다. 이것을 김대문(金大問)은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서열(序列)은 위(位)를 따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의 서열은 주(主)가 되고 신하의 서열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왕(新羅王)으로서 거서간(居西干)과 차차웅(次次雄)이란 이름을 쓴 이가 각기 하나요, 이사금(尼師金)이라고 한 이가 열 여섯이며,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이가 넷이다. 신라 말기의 명유(名儒)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들을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불렀는데, 이 일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南解王) 때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또 천봉(天鳳) 5년 무인(戊寅; 18)에 고구려(高句麗)의 속국인 일곱 나라가 와서 항복했다.
3대유리왕
28년 제3대 유리왕 5년의 일이다.
왕이 어느 날 나라 안 사정을 살피러 나갔다가 한 할머니가 춥고 배가 고파서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왕은 “부덕한 내가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도다!”
왕은 곧 유사에게 명했다.
“홀아비와 홀어미, 고아와 늙은이, 병이 들어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백성은 모두 나라에서 먹여 살리도록 하라!”
이 소문을 듣고 이웃나라에서 백성들이 몰려왔다...
또한 백성들은 편안하였고 풍년이 들어서 ‘도솔가’를 지어 불렀다.
도솔가는 왕의 어진 정치를 찬양하고 백성들의 평안함을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노래와 음악의 시초이다.
32년 왕 9년 봄에는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이 주어졌다.
양산부를 양부라 고치고 성은 이씨,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치고 성은 최씨,
대수부는 모량부로 고치고 성은 손씨,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치고 성은 정씨,
가리부는 한지부로 고치고 성은 배씨,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쳐 성은 설씨로 하였다...
그리고 관리제도는 17관등제를 실시했다.
6부가 정해진 뒤 6부의 여자를 두 편으로 나누어서 공주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자기편을 거느리고 7월16일부터 밤낮으로 길쌈을 하다가
8월15일에 길쌈의 성적을 매겨 이 때 진편은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 내도록 하였다.
이날 밤 춤과 노래, 온갖 놀이를 즐겁게 놀았는데
이것을 ‘가배’라 일컬어 오늘 날 한가위의 유래이다....
이때 진편의 여자가 나와 춤추며 ‘회소회소’ 하고 탄식조로 불렀다고 한다.
뒷날 사람들이 이것을 ‘회소곡‘ 이라 하였다...
5대 파사왕
婆娑王 ⇒ 파사이사금 파사이사금 婆娑尼師今 ?~112(파사이사금 33). 신라의 제5대 왕(80~112 재위). 유리이사금의 둘째 아들이다. 유리이사금의 동생인 내로(奈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허루 갈문
왕
. 갈문왕은 파사왕 때만이 아니고 여러번 존재했습니다.
파사왕의 아내는 허루 갈문왕의 딸이고
지마왕의 아내는 마제 갈문왕의 딸이라고 합니다.
일성왕의 아내는 지소례 갈문왕의 딸과 결혼을 했습니다.
또한 미추왕의 어머니는 이칠 갈문왕의 딸이고 아버지는 구도 갈문왕입니다.
유례왕의 어머니는 내음 갈문왕의 딸입니다.
지증왕의 아버지는 습보 갈문왕입니다.
진흥왕의 아버지는 법흥왕의 아우인 입종 갈문왕입니다.
진평왕의 어머니는 복승 갈문왕의 딸입니다.
진덕여왕의 아버지는 국반 갈문왕으로 진평왕의 동생입니다.
진덕여왕 이후로도 갈문왕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2. 갈문왕과 이사금
이사금의 뜻은 '치리(齒理)' 즉 '이의 자국'이라는 뜻입니다. 옛말에 이가 많은 사람, 즉 연장자는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 이사금이라는 왕호는 제3대 유리왕부터 제16대 흘해왕까지 이어지며, 지금도 '임금'이라는 단어로 남아 왕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사금이 임금으로 변한 과정은 대개 '이사금 - 니슨금 - 닛금 - 니은금 - 임금'으로 보여집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뜻하는 이사금은 부족 사회에서 이의 수를 가지고 부족장의 후계를 가리던 풍습에서 생겨난 용어로 생각됩니다.
이사금 칭호를 언제까지 사용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다른데 '삼국유사'에서는 16대 흘해왕까지 사용했다고 하고 '삼국사기'에서는 18대 실성왕까지 사용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17대 내물왕 때부터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는데, 내물왕 대에 왕권이 강화된 사실에 비춰 볼 때 타당한 관점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이사금이라는 것이 현재에도 임금이라는 단어로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사용되던 시절에도 여전히 이사금이라는 칭호도 함께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삼국사기'가 실성왕 때까지 이사금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을 꼭 잘못된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을것으로 보여집니다.
파사 이사금
파사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다. 왕비는 김씨 사성부인으로 허루 갈문왕의 딸이다.
처음 탈해가 죽었을 때 신료들이 유리의 맏아들 일성을 즉위시키고자 했으나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일성이 비록 적자이기는 하지만 이엄과 총명이 파사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마침내 파사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파사는 절약하고 검소하여 씀씀이를 줄이고 백성을 아끼니 나라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2년 봄 정월에 친히 시조묘에 제사 지냈다. 3월에 주와 군을 돌아다니며 위무하고 창고를 열어 구휼했으며, 감옥의 죄수들을 조사해 참수형과 교수형이 아니면 모두 용서하였다.
3년 봄 정월에 명령을 내려 말하였다. "지금 창고가 비어 있고 병장기는 무디어졌으니 만일 홍수나 가뭄이 들거나 변경에 사건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막아내겠는가? 마땅히 담당 관부들이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게 하고 군사를 조련해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게 할 일이다."
5년 봄 2월에 명선을 이찬에 임명하고, 윤량을 파진찬에 임명하였다. 여름 5월에 고타군주가 푸른 소를 바쳤다. 남신현에서는 보리 이삭이 한 줄기에 여러 개가 달리더니, 크게 풍년이 들어 길에 가는 이들이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6년 봄 정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여름 4월에 객성이 자미궁에 들어갔다.
8년 가을 7월에 명령을 내려 말하였다. "짐이 덕이 없이 이 나라를 차지하고 있으니,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경계를 접하였는데, 덕망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이웃 나라가 두려워하기에 부족하다. 마땅히 성새와 보루를 수리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라." 이 달에 가소성과 마두성의 두 성을 쌓았다.
11년 가을 7월에 사신 열 사람을 나누어 보내서 주주와 군주 가운데 공무에 부지런하지 않거나 밭과 들을 크게 황폐하게 한 이들을 감찰해 강등시키거나 해직시켰다.
14년 봄 2월에 왕이 고소부리군을 순행하여 친히 나이 많은 이들을 위문하고 곡식을 내려주었다. 겨울 10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15년 봄 2월에 가야의 적군이 마두성을 포위하였다. 아찬 길원을 보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쳐서 쫓아냈다. 가을 8월에 알천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다.
17년 가을 7월에 폭풍이 남쪽에서 불어와 금성 남쪽에 있는 큰 나무가 뽑혔다. 9월에 가야인들이 남쪽 변경을 습격하였다. 가성주 장세를 보내 막게 했으나 적군에게 살해되었다. 왕이 노하여 용사 5천 명을 거느리고 나가 싸워 그들을 쳐부수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18년 봄 정월에 군사를 일으켜 가야를 치려 했으나, 그 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와 사죄하므로 그만두었다.
21년 가을 7월에 우박이 내려 날던 새가 맞아 죽었다. 겨울 10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어 민가가 무너지고 죽는 이가 생겼다.
22년 봄 2월에 성을 쌓고 월성이라 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23년 가을 8월에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 영토를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판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왕이 난차하게 여기고 '금관국 수로왕이 연로해 아는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해서 수로왕을 불러 물었다. 수로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귀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해 모여서 수로왕을 위해 향연을 베풀도록 하였다. 5부는 무도 이찬으로서 접대하게 했는데 유독 한기부만이 지위가 낮은 이가 접대하게 하니, 수로가 노하여 종 탐하리를 시켜 한기부주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다. 탐하리는 달아나 음즙벌국 타추간의 집에 숨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수색했으나, 타추가 보내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몰아 음즙벌국을 치니, 음즙벌주와 그 무리가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과 압독 두 나라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 겨울 10월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었다.
25년 봄 정월에 뭇 별들이 비오듯 떨어져 내렸으나, 땅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가을 7월에 실직이 배반하므로 군사를 내서 토벌하고 평정했으며, 그 남은 무리를 남쪽 변경으로 옮겼다.
26년 봄 정월에 왕이 압독에 행차하여 빈궁한 이들을 구휼하였다. 3월에 왕이 압독에서 돌아왔다. 가을 8월에 마두성 성주에게 명해 가야를 치게 하였다.
29년 여름 5월에 홍수가 났다. 백성이 굶주리자 10도에 사신을 보내 창고를 열어 구휼하였다. 군사를 보내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을 쳐서 병합하였다.
30년 가을 7월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왕이 산천에 두루 제사하여 재해를 물리쳐줄 것을 빌었더니 누리가 없어지고 풍년이 들었다.
32년 여름 4월에 성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33년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사릉원 안에 장사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