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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54회만의 카페가 개설되었으니 글을 써 올려달라는 김태수 사무총장의 부탁을 받고 무엇을 쓸까하고 고민해보다
내가 가장 오랫동안 했고, 가장 잘 했던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니 곧 술이라는 것이 떠 올랐다.
나는 1960년대 10년간은 농화학과에서 술과 관련된 전공과목을 열심히 공부했고 10년은 국내 최고의 주류회사였던 OB맥주에서 맥주를 만들다 1977년 SCOTLAND로 유학을 가서 스카치위스키를 비롯한 양주를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본격적으로, 체계적으로 배웠다.
1979년 귀국한 이후 20년간은 당시 세계 최대 양주회사였던 SEAGRAM과 합작으로 스카치위스키 전문 회사인 OB씨그램(주)을 설립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스카치위스키를 위시한 진,브랜디,보드카등의 양주들을 공장장 때부터 직접 만들었고, 사장이 된 후에도 현재 국내 위스키 시장의 선두인 윈저를 개발했다..
1988년 IMF사태로 현금이 필요한 두산그룹이 소유지분 50%를 합작선인 SEAGRAM 에게 넘기게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양주를 건전하게 소비시키자는 목적으로 설립한 씨그램스쿨에서 원장으로 근무하며 바텐더 종사자들과 음주문화에 관심이 많은 교수등의 오피니언 리더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술이 가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양면성을 정확히 가르치므로서, 술이 건전하게 소비되어 우리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게 되는데 도움이되는 윤활유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10년을 보냈으니 술과 관련해 꼭 50년을 보냈다.
술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쉽게 접하니 우리 모두가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으며 특히 서양 술들은 오랫동안 수입금지 품목이어서 비공식적으로 음성적으로 소비되다가 양주 수입 자유화가 시작된 1988년 이후에 비로서 소개되었기에
역사가 짧아 우리가 잘못 알거나 모르는 것이 꽤 많이 있기에 이를 정확히 알리는 것이 술의 건전한 소비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해
지금까지 방송이나 잡지에서 대담한 내용이나 글들을 게재하려고 한다.
내가 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인 1960년 설날 때 외갓 집안에서 가장 어른이었던 어머님께 세배드리러 온
동대문 경찰서장이었던 외 육촌 형님때문이었다.
동대문서와 담장을 같이쓰고 있는 동양맥주(회사 이름이지만 당시에는 일반인에게는 브랜드인 OB 맥주로 더 익숙함) 와는 업무 관계로 회사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형님이 OB맥주에서는 우수한 기술직 사원을 독일에 유학시켜 주며. 대우도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잘 해 준다고 말씀하시며 나에게 공부 열심히 하면 OB맥주에 취업시켜 주겠다고 (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박두병회장님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인사에서 빽이라는 것은 절대 통하지 않았음) 뻥을 쳐, 어차피 대학을 빨리 졸업하고 가족들의 생계를 돌보아야 하는
급박한 처지인 장남이었기에 크게 관심을 갖게되었고 이게 내가 갈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특히나 요즘은 해외유학은 돈만 있으면 누구나 가는 좋은 시절이지만 국민소득 년 100$ 도 안 되었던 그 때는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자비로 유학을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도 없는 일이었기에 회사에서 유학을 보내준다는 것이 큰 매력으로 나에게 강렬하게 작용했다. 그 때 맥주회사에 입사하려면 이과를 선택해 서울대학교 농화학과에 입학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고2때 이과를 선택하고 나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OB맥주에 입사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으니, 동기부여가 되어 자연히 방과 후에 전보다 덜 놀게되고 그 날 배운 것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날 꼭 복습하는 원칙을 세우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음악 점수로 최저 기본점수인 70점을 받고도 전체에서 3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올려 게획대로 잘 진행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고 3때 신체검사할 때 받은 색맹검사에서 색약의 의심이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색약이면 이과 지원이 불가능하기에 좀 더 최신의 색약검사 책이나 도구가 있다고 소개 받은 연세대, 한국전력 병원등 여러 곳의 안과 전문 병원을 여러 달 동안 찿아다녔으나 색약인지 아닌지 아주 애매한 경계에 있다며 확실한 답변을 해주지 않아 불안으로 세월을 보냈다.
만일 색약이라면 농과대학 응시가 불가능해져 OB맥주에 입사하겠다는 나의 꿈이 깨어질까봐 마음고생을 하며 몇 달을 힘들게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서울대학교에 지원할 것이니 서울대학 병원에서 판정을 받아 보자는 마음에서 검사 신청하여 의사에게서 테스트를 받았으나 전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기에 내가 지나온 사정이야기를 하니 안과과장인 한심석 박사님의 특진을 어레인지 해 줘
약속한 날 갔더니 한과장님이 직접 검사하시고, 다른 병원들의 여러가지 검사 결과를 종합적으로 판단하시더니 " 색맹및 색약이 아닌 색감에 정상" 이라는 진단서를 자필로 직접 써 주셔서 몇 달 동안의 깊은 악몽에서 벗어나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이 진단서는 내가 가장 귀하게 보관하고 있는 보물(?)중의 보물로 지금도 고이 잘 보관하고 있다.
농과대학에서도 필기시험 후 가졌던 과장님 교수 면접후 옆에서 실시한 색약테스트에서도 문제가 있었지만 다행히 1963년에 서울대 농화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당시 OB맥주에 입사하기위해서는 군필이 필수였으므로 2학년을 마치고 1965년1월 25일 그 추운 한 겨울에 육군 사병으로 자원 입대했다.
군대에서는 KATUSA로 배속받아 미 7사단 정비대대 본부 요원으로 1년 반을 동두천에서 미군들과 같이 생활했는데
이 때의 경험이 후에 유학을 가고 미국과의 합작회사에서 근무할 때 큰 도움이되었다.
1968년 3학년으로 복학해서는 무조건 OB맥주에 입사해야 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식품관련 과목중에
맥주제조와 관계가 깊은 식품학, 식품학 중에서 발효 미생물학, 발효공학, 양조학등의 과목을 열심히,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A학점 따기가 하늘의 별처럼 따기 힘들다는 호랑이 교수님이신( 강의 시간이 2시간이라면 중간시험 1시간 보고 남은 시간에 강의를 계속하실 만큼 엄격하셨음) 김호식 학장님이 직접 강의하시는 발효미생물학, 발효공학, 양조학등의 전공과목을 ALL A를 받아
내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기대했던 OB맥주에 우선적으로 추천을 받을 근거를 마련했다.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여건을 충족시킬만큼 준비를 완료했으나 그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기업중의 하나였던 OB맥주(당시는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이 시작 전이고 2차 산업의 초입 단계에 있었기에 큰 규모의 회사가 없었고 현대건설보다 큰 회사였음)도
대졸 출신은 1년에 5명 내외로 뽑는 인원이 아주 적었고 특히 이과는 안 뽑는 해도 있어 불안해 했으나 다행히 그 해 이공계에서는
농화학과 출신 1명만을 뽑는 다고 학교에 추천의뢰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당연히 내가 추천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뜻밖에도
이춘영과장 교수님이 그당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국민 소득이 향상되자 제일 먼저 식생활에 변화가 있어
라면,과자등의 식품업계가 고도 성장을 하고 있으니 새로운 분야로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추천을 보류하셔서
또 한 달 여를 추천권을 가지신 농화학과장이신 이춘영교수님, 이계호 교수님께 OB맥주 입사가 나의 오랜 꿈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설득하여 드디어 과장님의 추천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 입사 서류를 제출했다.
(당시 농화학과에서 군대 필하고 취업 가능한 졸업생이 7명 뿐이었는데 식품업계의 호황으로 삼양,농심, 오리온 해태제과,태평양 화학 등 20여 회사에서 취업의뢰가 와 아무데나 갈 수 있었지만 다른데는 지원하지 않고 오로지 OB맥주만 가겠다고 기다렸음)
모든 것이 잘 되는 줄 알았는데 입사 지원서를 제출한 지 두 달이 넘어 나보다 늦게 다른 식품업체에 지원한 친구들은 면접이 끝나고
입사가 확정되어 월급을 받고 있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기에 종로 5가에 있던 본사 총무과에 가서 문의하니 이곳 저곳 알아보더니
상경계 4명은 이미 박두병회장님 면접이 끝나 입사가 확정되었다고 하며, 어찌된 일인지 내 지원서는 박두병회장님 비서의 깔판밑에 있어 처리가 안됬다며 미안하다고 말하더니 추후 박회장님 면접일자를 잡아주겠다고 하였다.
(그 때 박회장님은 OB맥주 사장직을 전문 경영인이신 서울상대 후배인 정수창씨에게 물려주시고, 당신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부임하셨음 ) 며칠 후 총무과에서 면접 일자를 정해 주어 박회장님과의 단독 면접(박회장님은 그 후 OB맥주일에는 관여하시지 않고 오로지 대한 상공회의소 일에만 전념하신 관계로 내가 영광(?)스럽게도 두산그룹에서 박두병회장님이 면접으로 뽑은 마지막 사원이었음)을 거쳐 드디어1969.12.21일 10여년 전부터 바라고 바라던 나에게는 꿈의 직장이었던 OB맥주(주)에 기술사원으로 입사하여 양조기술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연구소 연구원 , 생산부서, 품질관련부서, 제맥(맥주 원료인 보리를 엿기름으,로 만드는 과정)부서에서 4년여를 근무하여
맥주제조 과정 전반을 파악한 후 그 당시 OB맥주그룹(후에 두산그룹으로 개칭)의 최대 중점사업인 이천맥주공장 건설팀의
건설과장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중간에 여러가지 애로가 있었지만 34살 늦은 나이에 문교부에서 시행하는 유학시험(1년에 4회,시험과목은 영어듣기,이해,작문, 역사,시사 논문 과목)을 거쳐 그렇게도 오랫동안 바라고 바라던 해외유학을 1977년 8월1일
양조학과가 학부에 있는 세계 유일의 대학인 SCOTLAND의 EDINBURGH에 있는 HERIOT-WATT 대학원으로 유학을떠나게 되었다.
양조는 술의 원료가 농산물이라 농산물 재배,가공에 관한 지식과 공장 설비를 유지하기 위한 화공학적 지식 그리고 발효의 주체가 효모라는 발효미생물이므로 미생물 전반에 관한 지식이 필요한데 이 3가지 기능을 가진 대학이 그 당시에는 HERIOT-WATT 대학이
세계에서 유일한 대학이었고 이 학교 교수진들이 발행하는 양조 전문기술 잡지인 JOURNAL OF INSTITUTE BREWING은 전세계의
양조인들이 가장 많이 구독하는 기술 잡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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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랑스러운 인생행로를 축하합니다. 목표를 일찍 세우고 그에 따르는 엄청난 노력을 했군요.최초 길잡이의 행운도 잡으시고.. 복있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살아오면서 중간중간에 여러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일찍이 내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 끝에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믿고 있네...
다행히 그 목표가 내 적성에 맞는 것이었고 , 또 1980년대 우리나라에 양주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붐을 탄 시기였기에
빛을 보았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