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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작시 2 목차 (NO. 695부터)
695. 낮달2 / 16무등.블
696. 불운과 천운
698. 꽃 등/ 블
701. 죄인罪人 /16무등. 블
708. 땔나무하다 /16무등
710. 수확의 기쁨
715. 겨울나무3/블
717. 새 유택을 마련하다 /블
718. 돌부리 /블
719. 나목/14석조
721. 근황
722. 건망
725. 무감無感/13무등, 블
732. 길 끝
735. 비방 / 블
736. 방황의 호사
737. 밥잔치 / 블
739. 한 살이-설해목
740. 묘비명
742. 가을의 방황/ 블
743. 깨 털기
748. 꽃불/블
749. 망기
752. 흰죽/18석조. 블
756. 나의 시
759. 모기약
760. 별난 장사꾼
765. 선견지명
766. 한봉 명가
767. 남포 터지다
776. 무등산 어머니/블. 문산회
777. 밥벌이 길
778. 내 마음 2
779. 조각달 2
780. 꽃잎/블
781. 덤불 속 호박덩이/블
782. 연동사 백구/블, 전매.문산회
783. 겨울바람/블
784. 진대나무※를 만나다/블.문산회. 서은
785. 그날 밤의 총성/블, 시분과
786. 코로나19/블
787. 반가운 참꽃 피었어요/ 블.문산회. 동산
788. 울 엄니2/블
789. 검정 고무신/블. 동산
790. 저물녘의 비애/블.문산회
791. 한 우물을 파다/블
792. 길을 묻는 그대에게/블.서은
793. 좋은 이웃/블.시학
794. 째마리/블
795. 또다시 입영/블
796. 동내 경사가 났다!/블
797. 화개花開/블
798. 이백 리 꽃길 /블
799. 고묘
800. 산
801. 죽마고우 편지/블
802. 땀의 여백/블
803. 체증약/블
804. 호수2/블
805. 나눔의 행복/블
806. 선물/블
807. 그 겨울날
808. 추억의 도양읍* 정리
809. 설산雪山
810. 마음의 잡초도 뽑다
811. 종심의 각심
812. 시모님이 보낸 편지
813. 감사한 도선생님께
814. 나 홀로 집타령
815. 가을을 두고 간 여자
816. 나를 위로하다
817. 낮달
818. 제야의 종소리
819. 내 탓2
820. 고향 무정
821. 사랑의 두 얼굴
822. 군걱정
823. 또 다른 출근 날
824. 경삿날
825. 십팔공十八公 별호를 내리다
826. 유정有情
827. 목련
828. 꽃불
829. 꽃잎 지것다.
830. 앉은뱅이꽃 불타
831. 광주학살※을 알아방이다※
832. 산마을이 좋아
833. 낙화를 꿈꾸다
834. 하심下心
836. 빗속의 여자
837. 변신을 위하여(<<초작1에서)
838. 못/티스
839. 호반의 길손/티스
840. 가을의 애수/티스
841. 일장춘몽/티스
842. 홍단풍나무/티스
843. 가을 속 독백/블
844. 가을 산사에서/블
845. 까치밥/블
846. 홍시/블
847. 알밤/블
848. 가을 산/블
849. 씨도둑/블
씨도둑 849
안 맵고 달짝지근해, 갖다 심어 봐!
읍내 종묘 상회 오동통한 주인 여자
안 매운 고추라며 권해 곧이듣고 심었다.
보리밥 한 덩어리 시원한 물에 꾹꾹 말아
생된장 듬뿍 찍어 게걸스레 먹던 기억
풋고추 올찬 거로 뚝뚝 한 주먹 딴다
확 콧속을 꿰뚫는 알알한 냄새
눈은 그깟 것 하고 손은 어비하여
잡았다 놓았다, 씨와 씨모를 생각해 보다
자고로 씨도둑은 못 한다고,
혹여 남에게 탓을 듣어서는 안된다며
한평생 흐트러짐 없이 살고자 무던히 애쓰신
아버지를 많이 닮은 나를 돌아본다
걸음질에서 묻어나는 냄새 비위가 상해
왼고개 젓는 사람 아직까지는 못 보고
오늘도 같이하자는 이웃이 있어 감사하다
그러나, 들꽃 한 송이를 쳐다보면서도
미안한 마음 안 들게 바르다 할 수 없는 삶
앞산 바라보는 것조차 부끄러울 때가 있다.
가을 산 848
저 높은 산 멧부리
아스라한 벼랑 끝에, 덩그맣게
내 목마른 영혼 내려놓을 수 있다면
울컥울컥 피 울음 토악질하여
그 서글픔 온 산에 저렇게
영롱한 꽃등으로 밝혀 내걸고
나무들처럼 계절을 모른 기도로
칼바람 진눈개비, 의젓이 언 강을 건너
주저 없이 청청한 사랑 듬뿍 안으리
하지만, 돌아볼수록 이제는
사랑도 미움도 그리움도 한없이 덧없고
기다란 그림자 찬란히 서러운 석양녘
가을빛 속 또 다른 빛이 되어
어느덧 다 타고 부지깽이만큼 남은 여정
절름절름 걸어서라도 가야 한다.
알밤 847
과년이 찬 유월 크내기
도랑물에 발 담그고 놀다
밤꽃 내음에 잉태하였다
가시 울타리에 갇히어
알토란같이 키운 세쌍둥이
추석달 애받이에 순산하였다.
홍시 846
잎사귀 뒤에 숨어 보일락 말락
숨바꼭질하는 홍시 하나
술래가 된 키가 훌쩍한 전짓대
살금살금 곧추서 손 내밀자
아스라한 돌팍 사이로 껑충
머리는 안 보이고 낭자한 선혈.
까치밥 845
앞 고샅 빈 감나무 우듬지
대롱대롱 홍안의 미인
하늘에서 찾아든 검은 길손
다가와 옆구리 쿡쿡 찌르자
천길 벼랑으로 후울떡
산산이 부스러지는 순정.
가을 산사에서 844
빠-ㄴ한 동공에 별이 총총
자욱한 안개 속 사려 깊은 산자락
벚나무 품속이 아늑한 길등
돌멩이 구르는 소리 깨이는 졸음
적막에 잠긴 산사 풍경이 울고
창연한 석탑 밤을 지새우는 묵도.
가을 속 독백 843
훨-훨-태울 수 있을까
불붙은 가을 산같이
훌-훌-털어낼 수 있을까
떨어지는 낙엽처럼
칼바람 이겨 내고
꽁꽁 언 강을 건너면
다시 찾아들까 새봄이
스산한 이 마음 밭뙈기에.
홍단풍나무 842
벌써 이냐! 말 걸어 왔지요
아니라 했지요 그냥
뭐가 아니야 언성을 높이 대요
정말 아니라 했지요
퉁명스레, 나이가 몇이냐 물어왔지요
한참 꽃띠 이팔 이라고,
바람에 물어 보라 무질렀지요
홍당무가 된 얼굴 뒷걸음질 치더니
어인 일 이냐, 가여워 했지요
나도 모른다 했지요
하기는 사십령 고개 넘기도 전에
상상봉에 서리 하얗더니
바야흐로 가을이라고 하대요
우겼지요 끝내 애초라고
만년 홍치마 보라고 꼭, 오는 봄에.
일장춘몽 841
봄날, 무단히 마음 시려하자
쏘옥 가슴속 파고드는 여자 하나 있었지요
아무리 내치려도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목로주점에 나란히 나가 앉아
양껏 소주 한잔 하기로 했지요
요런조런 세간사 들내놓고 안주 삼아
권커니 잡거니를 수도 없이 하다, 그만
곤드레만드레 대취하고 말았지요
하늘을 너울너울 날 것 같이
손잡고 으쓱대며 답청 놀다, 그만
꼭 안고 엎어져 잠 들었어요, 그늘 멍석 위에
몇 나절 인지 세상모르고
보드레한 젖무덤을 더듬으려다
불현듯, 정신이 버쩍 들어 눈 떠 보니
봄날의 긴긴 해는 벌거니 눈 흘기고
아내가 옆에서 쑥 다듬다 빙시레 웃었지요.
가을의 애수 840/티스
가을은 아파하지 말자
무심결에도, 돌아앉아 회한의 탄식일랑 말자
수없이 마음을 다잡는다.
들풀 우부룩한 풀섶에 묻혀서도
쑥 내음 그윽이 풍기는 곰삭아 누운 쑥대처럼
이내 계절도 아무 향이든 하나쯤은 품기 바랐지
바람은 잘게 깨어진 거울 조각
여직 한 번 가슴을 뜨겁게 불타게 한 적 없는
열매보다는 가지만 우거진 사과나무 같은
가을의 길목 갈꽃 흰 깃발 나부끼는 강둑에 서자
내안에 차곡차곡 쌓이는 공허함
정열을 잃은 해 허겁지겁 종심의 강 건너는
뒤 돌아보다 흘깃 눈길 하늘에 이르자
봇물 터지듯 밀려드는 부끄러움
갈한 심신을 얼러 마음의 고삐 바투 잡는다.
호반의 길손 839
바람이 그지없이 집적거려도
요조숙녀처럼 얌전하고 정숙한 산국
내뿜는 향기 호안에 가득한
외져 발길 뜸해진 고요로운 호수
오늘도 긴 벤치 홀로이 찾은
호반의 길손
밀려갔다 밀려드는 파문
산산이 부서져 반짝이는 윤슬에 실려
그윽이 풍겨 오는 물의 내음
등에 얹힌 멍에 일순에 사라지고
붉어오는 나뭇잎의 체온
오롯이 가슴에 담는다.
못 838
탕탕! 못 박았다
버럭 불뚝대고 말을 무지르고, 안하무인으로
무던히 믿었던 이들 가슴에
깨소금처럼 고소했다
마음의 탕개가 풀려 눈 귀에 띄는 게 없고
하늘 무서운 줄 몰랐다
어쩌다 역지사지해 보면
무수히 박은 못에 붙박여 곁이 허한 나
세상을 막사는 망나니짓이었다
망치도 못도 녹슬고 못 쓴 지 오래
종용히 뒷방에 들앉아 면벽하다
파란 많은 생 돌아본다
꺼들대며 박은 크고 작은 못
대침 되어 내 야윈 가슴팍에 내리박히고
찬웃음 매운 눈빛 뒤통수에 꽂힌다.
2023. 9. 10.
변신을 위하여 837
대작대기로 두들겨 맞고 싶다
어깨에 얹힌 멍에 내려놓을 수 없음에도
안락의 유혹에 발 디밀어 보는
내 다리몽생이 작신 부러지게
쇠몽댕이로 내리쳤음 싶다
자고 샜다하면 새것이 봇물 터진 듯한데
녹슨 데이터 수정에 흐리터분한
내 물호박 머리통 박살이 나게
온몸 지근지근 밟히고 싶다
한 마름의 턱마루 허위허위 넘어서고도
외통곬 헌 누더기 못 벗어던지는
내 영혼의 육신이 으스러지게.
빗속의 여자 836/티스
여자야,
어스레한 가로수길 우산도 없이
체머리 흔들며 앞서가는
내린머리 여인아
소슬한 음풍
시린 빗방울 함초롬히 맞으며
어딜 찾아 가는가
질곡의 세월
아무도 눈물 받아 줄 사람 없어
차라리 호젓한 길 찾아 나섰는가
내 설움도 다 못 안는 이 가슴
북받친 슬픔 우산을 접고 뒤 따른다
캄캄한 벌판을 내가 헤매며 운다.
하심下心 834/티스
방울땀 까맣게 익어 가는 복분자 밭머리
우람한 느티나무 푸르른 그늘 멍석에 누워
바람도 흰 구름도 유정하자 손짓한다
그냥 스쳐가다, 막무가내
마음에 밟힐 성싶은 일 보면
下心은 곗술에 낯내는 비열을 마다하고
먼 눈에라도 띌까 무섭게 선뜻 들쳐 멘다고
칠갑의 강에 돌을 던지는 바람 한줄기
낯 두를 데 없어 뒷등 바위 바라기하다
두견이 알싸한 밤꽃 향기에 취해
한 계절 토혈하여 울어대면
이름 없는 골짜기 절로 피고 지는
그늘골무꽃 그리움에나 숨줄 붙이련다
어느덧 낯익은 얼굴과 이름이 지워지면
달 넘어오는 산잔등 노루목 궁노루 한 쌍
등 굽은 노송 아래 사랑놀이 훔쳐 보이는
풀벌레 노래 그윽한 언덕배기
나지막한 흙집에 돌아가리라.
낙화를 꿈꾸다 833/티스
지명이 되면 돈 버는 일손 거두고
비단옷 못 입었어도 고향 깊숙이 들어가
호수가 잘 보이는 산코숭이 양지 녘
봄이면 까투리 새끼 치고 푸두둥 날아오르고
밤에는 뻐꾸기 뒷산 지켜 주는 데다
명매기집 같은 토막이라도 하나 마련하여
한적히 살기로 맘먹었지요
집 앞 길 마당에 두어 뙈기 텃밭 가꾸고
가축도 얼굴별로 몇 마리씩 치며
틈틈이 물 가양에 나란히 나앉아
못다 본 책 보고 시도 짓고 살자고
당신과도 찰떡같이 약속했지요
허나, 낯바닥이 땅 두께 같은 욕심이 도져
눈귀 막고 입 다물고 오 년만 더 벌어
아무짝에도 철딱서니 없는 새끼들
제냥으로 숟가락 들게 하자고
내게 한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은 터에
옷 벗을 연령까지 따라 늦춰졌으니
떡 본 도깨비처럼 좋아 날뛸 일이요만
이정표 바라보면 앞길이 빤히 내다보여
얼마큼이나 발등어리가 퉁퉁 부어올라야
번듯한 발자취를 남길 수 있을지
오늘도 하루해를 채질 한다오.
산마을이 좋아 832/티스
들꽃은 외로움에 젖고 싶어
호젓한 들판 저만치 외따로이 피고
까치는 동구 밖 멀리 보고 싶어
당나무 우듬지에 지붕 없는 집 짓는다
산은 오순도순 이야기가 그리워
실개울에 발 담그고 앉아 산객 기다리고
구름은 산 넘어 산이 그리워
뿌리 없이 살아 산봉우리 넘나든다
물은 한 몸으로 보듬는 게 좋아
아래로 비집고 흘러 바다에서 만나고
반겨 안는 산마을이 좋은 나는
오늘도 세상 밀쳐놓고 산길을 오른다.
광주학살※을 알아방이다※ 831
공기가 양끝 맞당기는 고무줄, 팽팽하다
탁자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유리잔처럼
기어코 결딴이 날 조짐이다
직원들 돌 씹은 것같이 점심을 깨작거리다 말고
허기진 곰에 쫓기듯 설레발로 돈 찾으러 온 고객들
질어진 입이 시퍼런 육두문자 한 동이씩 쏟는다
국민이 나라 지키자고 세금 내서 산 총칼
미친 전두환 졸개 공수부대가 무단으로 들고나왔다고
적도 구분 못하고 총부리 거꾸로 들이대
국민을 무참히 죽인다고, 6ㆍ25보다 더 무섭다고
전무가 어디론지 긴히 통화를 끝내더니
업무 단축 지시로 셔터가 내려지고
드리워진 검은 커튼, 일일 결산 마친다
서울로 실려 가는 놀란 소 눈망울을 하고
접객 소파에 다붙여 앉은 직원들 가운데로
대뜸, 금고실 현금 가방이 나와 동석하고
울분 애써 참으며, 소나기는 피해서 가야하고
세상이 어지러운 때는 꼭 손에 현찰이 있어야 한다
필요한 직원은 급여를 선급한다, 그리고
바위 밑에라도 피해서 머리털 하나도 안 다쳐야 한다
대동세상 반드시 열린다, 그때를 위해 힘을 모으자
목마른 내게 한 뭉치 비상금이 건네지고
백지에 전무가 연서한 수령 확인서 한 장
가방 빈자리 채우고 육중한 금고문이 닫힌다
두방망이질치는 가슴 지그시 억누르며
밤새 광주 땅에 사랑꽃 흐무러지는 기적 주십사
기도로 앙다문 어금니 가족 향해 살걸음 친다.
※광주학살: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까지 전두환 등 신군부를 비롯한 쿠데타
세력이 내란과 폭동을 저지르고 이에 저항한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사
건이다. 처음에는 신군부에 의해, 광주폭동으로 불렸으나 현재는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주항쟁, 광주학살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일어난 날짜를 줄여서 5 · 18로
부르기도 한다. (피해: 직접사망 193명, 후유증사망 376명, 실종 65명, 부상 3139명,
구속 및 고문 피해자 1589명)
※알아방이다 : 무슨 일의 낌새를 알고 미리 대비하다
앉은뱅이꽃 보살 830.
발길 걸지 않은 동토 한 켠 가까스로 발붙이고
온갖 풍진 억척스레 버텨 내며
감사와 기도로 삶을 잇는 민초 민들레.
꽃샘바람 목덜미 파고들어 앙탈 부려도
망념을 사르고 희망의 닻을 올리길 바라서
봄의 길목에 샛노란 꽃등 보시하는
행여 누구의 꽃자리도 넘보는 일 한 번 없이
첫정 못 잊어 생명줄 꿋꿋이 내리 딛고
날개는 살포시 접어 아래로 몸 낮추어 사는
땅의 아기집 찬연히 피워 올린 별꽃
그예 꽃대 받쳐 올려 절절히 발원하다
무단한 발길질도 내색을 않고 참아내는
어느 결 여물인 호호백발 두상 위 씨알
오롯이 길라잡이 바람 날개 기다려
홀홀 딸려 보내고 무소유의 깃대 흔드는.
한생이 깨달음의 향기 농농한 법문
보면 볼수록 영락없는 앉은뱅이꽃 보살
올봄도 광명 바라 묵언 수행 들었다.
2023. 3. 29.
꽃잎 지것다 829
지난밤 봄비 벙긋벙긋 터뜨린 꽃망울,
비바람 치면 어떡하나
꽃잎 지것다
바람길 심등 켜 들고 기다렸노라고
꽃그늘에 꽃방석 깔고 앉아 눈도 맞추고
한 마리 꽃 본 나비이고 싶은데
고초 끝에 힘들게 힘들게 핀 꽃,
오늘밤 한바탕 바람비 내리칠 기세인데
꽃잎 하염없이 떨어지것다
마음의 탕개를 조인 봄의 역사가
일순의 비 바람 가운데 오고 간다고
생의 여정도 진배없다 일러 주려는 듯.
꽃불 828
봄 가시나
유하주에 대취하여
앞들 뒷산 온 천지에
꽃불 질러댄다
매화 산수유 개나리
벚꽃 진달래 목련……
바람 날개 타고
위쪽으로 위쪽으로
미친 듯 번져 간다.
(2023. 3. 29.)
목련 827/티스
사랑에 못이 박힌
어느 정절부인의 혼백이냐
춘정에 연연히 이는 그리움
빠끔히 입술을 여는 너
마음의 창 화알짝 열뜨리고
깊은 속 순애를 고백하여라
못다 한 사랑, 촉화처럼
봉긋봉긋 피어오르리니.
유정有情 826/티스
깜빡 잠결에 떠오르는 기러기 가족,
엄동설한 방을 못 구했는지
울며불며 북쪽 변방으로 날아가던.
세상에, 홑옷 바람에
달빛도 새하얗게 얼붙은 밤바다를
어린것들 맨발로 얼마나 발 시렸을꼬!
온몸 시퍼렇게 얼었을꼬!
모두 다 두툼한 바람막이에
곁불 쬐고 안으로 따끈한 방으로
서둘러 아늑히 파고드는데
그 많은 식솔, 이 핑계 저 핑계 대다
집주인 끝내 방을 안 주었겠지
내 전전긍긍 셋방 얻을 때같이
생각할수록 아르르 저미는 가슴골
희읍스레 밀려오는 여명 타고
창 밖에 불끈 칼을 든 동장군.
십팔공十八公 별호를 내리다 825/티.23문협
부모님 산소에 동자승처럼 깜찍했던 너
바람에 옷고름 너푼대는 어느 가을날 해거름
넌지시 불러들였지 길라잡이 없는 마음의 뜨락에
쉴 줄을 모르는 시간 열차 올라타고는
눈길 보낼 때마다 한층 더 수려한 면모에다
불길 같은 열정 눈빛은 하늘에 이르고
깨무는 입술 새어 나오는 자탄의 한숨까지도
금싸라기로 알고 온전히 마음공부에 팔렸었지
오늘은 고통을 삼키며 허욕의 긴 팔 잘라 내고
겉치레 번지레한 더벅머리 정갈히 다듬은 너
십팔공十八公 별호를 내린다
먼 하늘 우렛소리에도 올곧게 뼈를 못 세우는
비루한 이 몸 도반 되어 되알지게 손잡고
길 중의 길을 좇아 해맑은 거울로 서자꾸나.
*십팔공十八公 : 소나무를 달리 이르는 말.
'松, 자의 파자 풀이임.
경삿날/月靜 강대실 824/티
눈부신 빛살
화알짝 열리는 동문
새뜻한 앞산
산새들 낭랑한 노래
산들산들 춤추는 바람
스미는 솔내음
지구행성 어드메
숨 받은 것 하나
마악 발 내딛는갑다.
또 다른 출근 날 823
귀때기가 새파랬던 시절
첫 출근의 북받친 감격 떠올리며
면접도 이력서도 없이 반겨 맞아 주는
새 터전으로 나선다
늘 그 자리에 대롱 매달렸다
땀과 밥과 보람의 길 열라 눈짓하는
번질번질 다림질 된 와이셔츠
때때로 바꿔 매던 넥타이도 버리고
자유로움 하나 달랑 걸치고 간다
손가방에 시집 한 권 메모지와
볼펜 물병 챙겨 넣고
걸음걸음을 느긋이 헤아려도 좋다
찻길이 막혀도 마음이 여유롭다
문은 사방군데 열렸고 온 동네 벗들
일면식 없어도 모두 다 반갑다
허나, 꼭 지킬 건 놀빛에 흠뻑 젖으란다
솔잎 향 실린 바람에 취하고
산자락 찾아 든 산그늘에 안겨
우화등선하여 하늘에 꼭 오르라 한다.
군걱정 822
모락모락 타는 바람 가슴에 안고
햇살 좋은 오월 민들레 홀씨처럼
홀연히 둥지를 박차고 떠나
뻗쳐 오는 손길 하나 없는 가시밭 길
스스로를 태워 한 발 한 발 헤쳐 간 너
퍽이나 대견하고 한없는 보람이었지
낯선 하늘 갈수록 생경한 불모지
바위 틈바구니 발붙임의 힘겨움이
먼 산 바람꽃 같은 그리움 불렀나
피붙이 살 내음 얼마나 목말라
소라 속 같은 거처 가득히 채울
한 자락 빛살 바라는 갈급한 음성
그 외마디 짠하고도 다급해
지어미랑 갈마들며 곁이 되어 빈 방
끈적끈적한 온기를 올려 주곤 하지만
계절은 거침없이 오고 가는데도
박힌 돌멩이같이 꼼짝 않는 너
혹여 외기러기 날개 될까 이는 군걱정.
사랑의 두 얼굴 821
이제 그만 동거 끝내자고
거실 꽃분들 남창 아래로 내놓다, 문득
생각을 한다 사랑의 내 두 얼굴 곰곰이.
아비 아들 범벅 금 그어 먹잔 건 아니되
피붙이 어느새 자라 앞산도 들쳐 멜 만하여
책가방 내려놓으면 다음 날 부터는
내 눈앞에 얼씬도 말라 이르곤 한.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성깔진 바람 기웃대면 서둘러 맞아들여
눈 맞추며 새봄의 고운 꿈 키우다
햇발에 아리따운 자태 벌 나비 만나라며
진자리 마른자리 골라 돌보는.
선뜻이 파도 더 센 인해로 뛰쳐나가
힘겹게 나래치는 모습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언젠가는 태산준령을 홀로 넘어야 하기에
힘을 거들 것은 맵고 쓰거운 눈초리와
살면서 몸에 익은 조용한 기도뿐
어찌 못할 야누스 같은 사랑의 내 두 얼굴.
고향 무정 820
고향에 찾아왔어도
아버지 어머니 얼굴 뵈올 길 없고
이사 드신 봉안당 찾아가 성묘 드리고
늦자란 망초 풀만 쥐어뜯다 간다
고향 동네 다 돌아봐도
봉철이 명문이 소식 들을 만 한 데 없고
윗주막 들 큰밭에 들러
감나무 매화나무 손만 한 번 잡고 간다
들일머리 말씀 생생한데
뒷산 같은 그 모습 여전히 보이질 않고
주인 바뀐 전답에서 일어난 바람
서낭당 고개까지 따라나선다
지금도 상월부락은 상월부락인데
묏등걸에서 뒹굴던 벗들은 다 어디로 가고
오장산 봉머리 에돌아 온 구름
밀재 너머 북으로 북으로 울어 옌다.
내 탓2 819/ 티
내 탓입니다 전부가
그 언제가부턴
비바람 천둥 번개
깜짝깜짝 놀래키는 거
인심 각박하고
세상 이지러지는 거
한 마름 넘도록
알고 짓고 모르고 짓고
하많은 죄다짐으로
천님이 주신 회초립니다
.
2010. 5. 13.
제야의 종소리 818
재벌기업 오너
식당 찬모
구멍가게 할머니도
이웃집 아저씨
100m 금메달 선수
보행기 탄 갓난애도
모두 다 한시에 결승선에 도착한 신호
새해 손잡고 힘차게 내딛는 출발 신호
지구촌은 어우렁더우렁 한 가족.
2023. 1. 1.
낮달1 817/티
하늘 맡에 밀쳐놓은
그리움의 씨알 하나
일락함지 어슬녘
애처로이 피어나더니
장강 넘고 건너다
타다 남은 애간장이냐
어둑새벽 서산마루에
손톱만치 걸렸다.
나를 위로하다 816/티
오늘도 많이 늦었네요
다른 일 없었지요
저녁은요
힘 많이 들지요, 날로
옷 갈아입어요
그리고 씻고
다리 좀 주물러 줄까요
아니, 차 먼저 한 잔 하게요
인삼차가 좋아요
매실차를 챙겨 올까요
아무렴에도, 피곤하니
꿀차가 낫겠지요
꽃 잔에 차 한 잔 챙겨 마시며
내가 나를 위로한다.
가을을 두고 간 여자 815/티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을까
먼 하늘 나의 별 가슴에 얼굴을 묻고
지새워 목쉰 독백 나누었을까
팔려가는 송아지 같은 속울음 소리
차창 밖 가을 산은 알아챘을까
바람은 새살새살 달래 주었을까
하마, 망각의 강 질러 멀리 갔을까
산책길 붉나무 연신 떨구는 잎새 헤며
추억의 향기 헤적이고 있을까
계절이 오고 갈 때면 아리게 떠오르는
가을을 두고 낙엽 따라 간 그 여자
앙가슴에 꺼멓게 멍울지는 그리움.
나 홀로 집타령 814/티
사통팔달 도심권 한복판 이층 양옥
혹자는 지나가다 휙 돌아서서 멀거니 쳐다보는
아무래도, 아파트는 닭장 같고 징역살이로만 보여
내로라한 이 권에 선뜻 더 얹어 준
20여 년을 마당 가득히 햇볕 쏟아져
옥작옥작 두 아들 눈 틔우고 짝 맞춰, 스스로
밥술 들게 한 보금자리에 재산 목록 제 일 호
허위허위 은행 빚까지 마저 털고 나니
백마 등에 오른 왕자 뿌듯함은 간 데 없고
희끗희끗한 쑥대머리며 찌든 궁기뿐
언제부턴가 도심권에 냉기 일고, 가족들
아파트 노래 불러대 금 쐬고자려고 내놓으니
분내 풍기며 달려드는 복부인 먼 산 보듯 보고는
막무가내 본전을 갈라 먹자 콧김 튕기네
서울 아파트 자고 새면 억 억 억장 무너지고
잽싸게 골목집 팔고 신 개발지로 간 친구
만났다 하면 천 천 속에 불 놓는데
정든 대궐집이 소형 아파트 전셋돈이 안되니
아이고머니나, 애초 이재에 뜬소경 내 탓이리
가족 공원이나 내고 나 죽걸랑 한쪽 수목 밑에
분골 꼭꼭 묻어 달라 이르고 싶지만
내 저지른 일 내 어깨로 감당함이 옳거니
거간꾼 말마따나 작자 있을 때 넘기자,
변방에 비바람이라도 피할 오두막 살 수 있을 때.
2006. 7. 6.
감사한 도선생님께 81/티
두 발로 걷고, 좋고 낮음을 아는 이고야
그 누가 목젖 닳게 군침 안 삼키리오
처마 밑 벌겋고 다디달게 익어 가는 곶감을 보고
아버지 생각나 손공 들여 치렁치렁 매달고는
풍경 하도 산뜻하고 순수 그대로라
이리저리 사진 찍어 SNS에 자랑 쳤지요
햇살 좋고 살랑바람 일고 반천에 달 높을수록
입맛 당기게 달보드레하니 익어 가는데
감꼬치 곶감 빼 먹듯 한다는 말 되새기며
완숙될 그날을 춘향이 이 도령 기다리듯 했지요
선생님도 뜬금없는 진풍경에 홀려, 솔깃이
도지는 곶감 서리의 추억 농막의 길손 되어
이마 앞에 두고 보니 돌연 마음이 혼미해 진거지요
참으로 요상하고 감사한 도선생님
얼마나 끌끌하고 점잖으면, 전부도 반도 아닌
꼭 두 꿰미만을 왼손에 쥐었어요, 금줄 쳐졌다는 듯
도선생님, 진정일진대 아무런 염려 마시어요
나는 은이요 이웃은 금이다는 믿음의 확신입니다
그리고, 남은 건 다 내 차지잖아요
선생님께서 주신 거라며 두루두루 나눌 라고요
혹여, 내년 내내년에도 지나시는 길에
얼핏이라도 눈에 띄면 들러 챙기셔요, 몫 스스럼없이
곶감 드시고 내내 기체후 만안하셔서.
2022. 11. 18.
시모님이 주신 편지 812/티스
얘야, 주원이 어멈아
아비가 밤중에 119 차에 실려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나와 몸조리 잘 하다
어인 일인지 다시 입원 했다니 무슨 날벼락이다냐!
한 장이 멀다고 지성스레 들러더니
설에 너랑 다녀간 뒤로는 발길이 끊기어
날마다 눈이 까매지게 들머리 내다보자니
오만 생각이 다 들고 몽조 뒤숭숭하더니......
지지난달 막둥이 동생이랑 벌초 와서는
그만그만해 퇴원했다기에 맘이 좀 놓이더만
길어진 병석에 어멈이 고생이 많은 줄 안다
예로부터 긴 병에 장사 없다고 했다
곁에서 수발드는 네가 잘 먹어야 한다 안 지치게
자가 원체 의지가 무쇠 같은지라 곧 일어설 것이다
지금은 용한 의사도 좋은 약도 천지다만
큰밭에 난 머위가 중풍 같은 데는 효험이 있느니라
뿌리를 차로 끓여 상복하도록 해 봐라
우리는 천명이 박복해 고까이 북망산에 들었다만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낫단다
너희가 우리 몫까지 오래도록 살아서
두 손자 동재로 기르고 손부까지 꼭 보거라
온 가족 건강하고 알콩달콩 살게 도와 달라고
네 아버지랑 기도 더 많이 헐란다
고맙다
2022. 7. 10.
종심의 각심 811
말이 씨앗이라도 되었나
지금껏 병원에 한 번 입원 안 해보고
뒷등 큰바위처럼 굳건히 산다고 자랑쳤건만
정초 벼락같이 찾아든 병마
한밤중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들어와
약에 주사바늘에 링겔줄에 하루종일 묶였다
지는 해를 따라서 공원에 나와
빈 벤치에 앉아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는다
얼마나 지난한 나날을 보냈던가
그리고 얼마나 박세게 버텼던가
내 몸은 뒤도 뒤도 돌아볼 새 없이
남 먼저 해내야만 한다
뒷 서면 낙오자가 된다
가족들만을 위한 가여운 한 생
몸이 더는 지탱 못하고 병실을 찾아 들었다
그만 모든 걸 내려 놓자고
멍만 때리고서 한 번 살아보자고
그래야 내 몸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마음속에 불끈 주먹을 품는다.
2022. 5. 19.
길가의 풀을 뽑는 노인장 810 /티스
큰길 옆 병원 앞 쌈지 공원
줄줄이 늘어선 길나무 그늘 아래
수없는 질시와 발길질 아랑곳하지 않고
계절을 딛고 무심히 짓어 오른 잡풀
풀 뽑는다 병원 이름 새긴 옷 입은 노인장
혹여, 행인들 머리가 어떻게 된 사람 아니면
지지리도 할 일 없는 식충일 거라고
흘깃흘깃 퍼붓는 욕바가지 뒤집어쓰겠다는 듯
마음에 한 번 걸리는 것은
사돈네 쉰 떡 보듯 그냥 못 두는 성미이신지
한 손에 링거병 달린 봉대 다잡고
한 쪽 맨손으로 보도 세세히 풀 뽑는다
길 모롱이 호떡 굽는 아낙네
파리 날리는 눈빛 뽀르르 쫓아가서는
그 풀 뭐할라냐 캐묻는 앙칼진 소리 내뱉고는
휙 회리바람처럼 돌아선 뒤꼍
길보다는, 이내 마음 밭
야금야금 묵어 든 잡풀 뽑았다는 듯
겸연스런 얼굴빛 숨 돌리는 칠십객 노인장
솔선이 막막한 인해의 등댓불로 밝다.
설산雪山 809/덕암상
세밑가지 설한을 뚫고 산문 연다
키 큰 나무들 옷 벗어 어린나무 덮어 주고는
눈 짐을 지고 동안거하는 중이다
네발로 기어가다 유목 내민 손 잡다
산정은 아득한데 숨이 앞장서서 턱에 올라
노송과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숨 고른다
선뜻, 한 번쯤 누군가 흘린 눈물 강에
덤벙 뛰어들어 보듬고 허덕여 봤더냐
선문답이라도 하듯이 던진다
내달아 팔소매를 걷어붙이기보다는
먼눈으로 바라보다 야기죽거리기도 했던
내 반생 스스럼없이 털어놓자
바윗등에서 고개를 삐쭉 엿듣다
같이 갔으면 더 쉽고 멀리 갈 수도 있었다며
귓전에 슬쩍 흘리고 줄행랑친 바람 한 점
후끈 달아오르는 낯짝 입술 감쳐물고
바람 발자국 엉금엉금 쫓으며
내 안의 내 속 깊이 다진다, 나를 죽이라.
추억의 도양읍 정리 808/블
언제부턴가 눈도 입도 그저 그만일 테니 꼭 한 번 짬을
내라 했어도 황막한 벌판길 가물거리는 횃불잡이 등 뒤
로 쏟아지는 뭇 시선 따가워 달 걸러서 어깨를 겯던 벗들
벼르다말고 간만에 무릎 맞댄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에 겨워 물오리 둠벙을
보면 떼거리로 모여 걸쭉히 한마당 벌이듯 짐짓 상기된
표정 그럴싸해 마당에 시퍼런 바닷물 들락이는 횟집 가려
잡고 펄펄하고 큼직한 생선 몇 마리 회 친다.
그들먹한 회접시 금세 이마를 맞댄 교자상 가운데 대감
처럼 좌정하고 맞앉아 권커니 잣거니 연신 오가는 잔에
천년의아침 고꾸라져 토를 해 대니 빈병 가뜬한 마음은 벗
들 감흥을 불러 맘속 들독 같은 시름 사르고 비움의 절절한
소망이 되어 만면에 발그스레 불탄다.
멍석을 깐 벗 벌떡 나서서 짊어진 돈 전대 넘 무거워 등
창이 났다며 냉큼 물주를 잡고는 후렴으로 근방 카페로 옮
겨 마담 빵싯빵싯하는 얼굴 곰살스런 응대에 기분 업되어
못다 한 정 마저 나누며 달라진 내일을 낳자 마음 잡죈다.
보랏진 하루 항포구에 어느 결 어둑발 뉘엿뉘엿하고 흔
흔한 가슴 저잣거리가 좁은데 바다를 건너오던 아기사슴
무르팍까지 빠져서 보리 피리 불다 아직도 말로써 다 못
한 사연 있다며 어여 건너와 눈 좀 빌리자 손짓한다.
*도양읍: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반도의 남서쪽 끝에 위치해
있는 읍.
그 겨울날 807/블
삐리리! 삐리리! 보채대는 전화기 마뜩찮아
하는 왼손을 들어 귀에 맞대자 환히 피어나
는 반가운 이름 충사(忠事)! 여느 날처럼 반
가움 건네자 곤두선 목소리 어-이, 나 때려
치웠어 어제 날짜로! 웬 날벼락이여! 이 엄동
설한에 입도 뻥긋 않더니 난 행장은 따 놓은
당상으로 알았어, 친구는 어떡하겠는가 그
개같은 녀석들이 쥐구멍도 안 보고 막무가낸
데 이빨 빠진 사냥개라고 나는 벌써 넉 달째
네 영에서 뺨 맞고 저잣거리서 눈 흘긴다고
손톱만 송곳같이 갈고 있어 나는 평생 가슴속
품고 살라네 소리 안 나는 총 하나 어디 구할
데 있나 알아봐 친구가 선배 아닌가 사회! 이
른 아침 졸지에 백수당 선배가 됐네! 자네나
나나 죽으면 죽었지 징역 갈 며리는 없지 않
는가! 맘 추슬러 새 마당 열어보세! 암, 그렇지
그 더러운 개자식들 천벌 없기만 빌고 앉았
겠는가 물먹은 솜덩이 같은 가슴 칼바람 가
르며 미로를 나선다 어제의 뒤안길 희미한
기억 밟으며.
선물 806/블
내 마음속 그대에게
아낌없이 드리고 싶은
그대 마음속 나 있어
모든 걸 받고만 싶은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선물이어야 합니다.
나눔의 행복 805/블
반백 년 부초같이 흐느적거렸던 불초
향촌 아래뜸에 구년묵이 세간 부쳐 놓고
속죄의 삽질로 묵은밭 일으켜 심었지요
감 대추랑 배 매실 사과...... 빼곡히
몸에 안 배어 가다가는 각다분하기도 하고
종심의 여기저기에 적신호 욱신욱신해도
신 새벽 흙내 맡으면 불끈 힘이 넘치는 오뚝이
하루가 멀다고 발자국 소리 내지요
감나무 시득부득 노름한 꽃 진 자리에
가지가 휘도록 주먹감 흔전만전 매달고
갈바람에 취해 단맛 빨갛게 들이지요
맏물은 원매 기다린 지인께 보내고
원근처 사양지심의 정인들 챙기고 나면
내 차지는 이내 비뚤고 새들이 쪼아 댄 거에다
더 못 나누어 섭섭한 이웃들이지요
하지만, 유년 적 동지죽 먹으면 싣고 나갈
토방 위 쟁여진 나락가마니 들쳐 메 보이며
싱글벙글하던 박 씨처럼 행복 넘실하지요.
2003. 12.
호수2 804/블
-담양호에 어머니 계셨네!
언제나없이 가 보고 싶은 곳, 다녀오면
가슴속 몽쳤던 응어리 스르르 사라져
드렁칡 같이 뒤엉킨 세사 가닥이 보이고
일상에 생기와 의욕이 샘솟게 하는 곳.
먹구름에 난데없는 돌개바람 말달리더니
산천을 뒤흔드는 뇌성벽력에
앞이 혼미하고 가슴이 두방망이질해
먼산만 쳐다보다 새벽 걸음에 찾았네
뵈었네, 담양호에 어머니 계셨네!
언젠가부터 번질나게 찾아다녔어도
한 번을 뵈올 길 없던 우리 어머니
서창에 설핏 해가 드는 지금에야 만났네
치마끈 질끈 졸라매고 가난을 절구질하여
이따금씩 봄바람 꽃 냄새 얼비치는데
천수 다 못하고 훌쩍 낮달 따라 가신
어머니 담양호에 햇살처럼 살아 계셨네
보았네, 호면에 아른거리는 어머니 모습
어느새 찰랑찰랑 내 속을 알아챘는지
한참을 합장으로 발복을 기도 올리시고는
후줄근한 내 등을 쓰담쓰담하셨네
물이 산을 못 오르고, 산이 물을 못 건너니
여하튼지 허몽을 품지 말고
항상 발아래 진구렁을 명심하라며
차근차근 눈부신 윤슬로 일러 주셨네
돌아서려니 늘 스스로를 비춰보라며
거울처럼 맑고 넓고 고요한 호수
가슴속 한가득히 채워 주시고는
옷고름 손에 쥐고 서서 바라만 보셨네.
호수2 804-2/블
-담양호에 어머니 계셨네!
언제나없이 가 보고 싶은 곳, 다녀오면
가슴속 몽쳤던 응어리 스르르 사라져 실
타래 같이 뒤엉킨 세사 가닥이 보이고일
상에 생기와 의욕이 샘솟게 하는 곳.
먹구름에 난데없는 돌개바람 말달리더니
산천을 뒤흔드는 뇌성벽력에앞이 혼미하
고 가슴이 두방망이질해 먼산만 쳐다보
다 새벽 걸음에 찾았네
뵈었네, 담양호에 어머니 계셨네! 언젠가
부터 번질나게 찾아다녔어도 한 번을 뵈
올 길 없던 우리 어머니 서창에 설핏 해
가 드는 지금에야 만났네
치마끈 질끈 졸라매고 가난을 절구질하여
이따금씩 봄바람 꽃 냄새 얼비치는데 천
수 다 못하고 훌쩍 낮달 따라 가신 어머
니 담양호에 햇살처럼 살아 계셨네
보았네, 호면에 아른거리는 어머니 모습
어느새 찰랑찰랑 내 속을 알아챘는지 한
참을 합장하고 발복을 기도 올리시고는
후줄근한 내 등을 쓰담쓰담하셨네
물이 산을 못 오르고, 산이 물을 못 건너
니 여하튼지 허몽을 품지 말고 항상 발아
래 진구렁을 명심하라며 차근차근 눈부신
윤슬로 일러 주셨네
돌아서려니 늘 스스로를 비춰보라며 거울
처럼 맑고 넓고 고요한 호수 가슴속 한가
득히 채워 주시고는옷고름 손에 쥐고 서서
바라만 보셨네.
체증약 803/블
연분홍이나 갈색의 쥐눈이콩 만한
부모님 늘 안 떨어지게 갖추어 두셨던
매스꺼운 속이 몇 알에 씻은 듯 내려간.
사슴 눈망울 같은 손자가 내려왔다가
며칠 더 할애비랑 놀겠다고 남았다
잠자고 난 누에처럼 게걸스레 먹더니
한밤중 뱃속이 똴똴해 보챈다
갈큇살 같은 손으로 배를 쓸어 주다
섬광처럼 번쩍 떠오른 체증약,
유년의 마음이 황소보다 더 든든했던
언제인가 종적도 없이 사라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의 고통
이날이직 두 분 지혜의 분깃 못 이은
이내 아둔함 탓이리
타는 가슴, 회한의 한숨 짓는다.
땀의 여백 802/블
한없이 언제 언제만 되뇌겠냐며
큰맘 먹고 낙목 쫓아가는 막내 동서랑
땅끝 마을 달마고도 트래킹에 올랐다
산문에 드니 기실 나는 땅을 기는 미물
울울한 숲길을 걸으면 구정물 들이킨 잡물
산골에 들어서자 있는 듯 사라지는 안개
산주 청설모 앞서 달려간 바윗등
힘이 풀리고 후들후들한 네 다리가 기어
가까스로 산정에 땀벌창 되어 닿는다
무상무념 반석에 오도카니 앉아
가쁜 숨 갈앉히고 사방으로 눈길 보내자
아득히 열리는 시야, 땀이 일군 여백.
죽마고우 편지 (시형) 801/블
마당 귀퉁이 긁적긁적해서 뿌린 푸성귀
시나브로 앞들 뒷산으로 퍼져나가
쌔고 쌘 게 달래 냉이 곰취 고사리 더덕……
천지가 친구 나물거리라고!
양지쪽에 뚝딱뚝딱 막 지어 기른 가축
알게 모르게 야음 타고 뛰쳐나가
눈에 차인 게 까투리 오리 토끼 멧돼지……
전부 다 자네 사냥 고기라고!
그나 참 친구 재수가 불붙었네!
바쁜데 짬을 내 뿌리고 돌보지 않아도
칡뿌리 산삼 녹아든 물 산열매 먹고
해와 달 별 보며 우둥푸둥 살찐다니
여보게 친구, 부탁하네!
올여름 코흘리개들 탁족회 날 잡히면
달력에 표시해 놓고 꼭 전화 주시게
이제부턴 열 일을 제치고 내려감세
간만에 모교도 가 보고 어우렁더우렁
한 합 되어 먹고 뒹굴고 천렵도 하다
아침저녁 해 전 해 후 산보길
나물 캐고 사냥도 해 술안주로 하세
계곡물에 살평상 놓고 발 담그다
장만한 미효에 친구네 잘 익은 신선주
권커니 잣거니 거나하게 취해도 보고
못다 한 정 두툼히 쌓아보세.
죽마고우 편지(서술형) 801-2/블
마당 귀퉁이 긁적긁적해서 뿌린 푸성귀 시
나브로 앞들 뒷산으로 퍼져나가 쌔고 쌘
게 달래 냉이 곰취 고사리 더덕……천지
가 친구 나물거리라고!
양지쪽에 뚝딱뚝딱 막 지어 기른 가축 알
게 모르게 야음 타고 뛰쳐나가 눈에 차인
게 까투리 오리 토끼 멧돼지……전부 다
자네 사냥 고기라고!
그나 참 친구 재수가 불붙었네! 바쁜데
짬을 내 뿌리고 돌보지 않아도 칡뿌리 산
삼 녹아든 물 산열매 먹고해와 달 별 보
며 우둥푸둥 살찐다니
여보게 친구, 부탁하네! 올여름 코흘리개
들 탁족회 날 잡히면 달력에 표시해 놓고
꼭 전화 주시게 이제부턴 열 일을 제치고
내려감세
간만에 모교도 가 보고 어우렁더우렁 한
합 되어 먹고 뒹굴고 천렵도 하다 아침저
녁 해 전 해 후 산보길 나물 캐고 사냥도
해 술안주로 하세
계곡물에 살평상 놓고 발 담그다 장만한
미효에 친구네 잘 익은 신선주 권커니
잣거니 거나하게 취해도 보고 못다 한 정
두툼히 쌓아보세.
산 800
찾을수록 가깝다
자주 오르면 이무럽다
친구도 그렇다.
고묘 799/블.현대
-백야도 등대길에서
섬에서 나서
한생 바다를 건너지 못해
손에 닿을 듯한 뭍머리
눈이 닳게 바라보다
끝내 섬에 묶인
순애는 끝이 없나
섬 끝 파도가 부서져 날리는
등대 밑 허리 굽은 노송 옆
나란히 자리 잡은
바람소리 파도 소리
이따금씩 지나는 통통배 소리
모두 기다림에 겨운 비가
긴긴 안식이 처량하다.
2021. 4. 30.
이백 리 꽃길 798/블
멀고 먼 땅 끝 가칠한 남풍에 실리어
산을 넘고 물 건너 온
풋풋한 꽃향내에 홀린 마음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 에워 안은
산모롱이 돌고 바람길 더듬어 찾아간
쌍계사 이백 리 꽃길
이 산 저 산 온 들판이 왁자지껄
바람난 개나리 산수유 목련
두견화 이화 앵화 도화
배꽃 벚꽃 조팝 민들레......
꽃이란 꽃은 우르르 쏟아져 나와
어우렁더우렁 한마당 꽃 잔치
꽃향기에 취해 벼룩잠 자는 차량 행렬.
2021. 3. 26.
화개花開 797/블
온 천지가 청명하다
콧등이 센 바람 실어 온 향기
코끝에 향긋하다
양지쪽 골짜기 잔설 밀어젖히고
노오란 복수초 벙긋이 피어나나 보다.
동네 경사가 났다 796/블 서은
넷째야, 동네 경사가 났다
아래 고샅 상 큰댁 네 순기 형
순하디순하고 일 잘 하는 씨어미
산고를 앞산이 다 쩌렁쩌렁 따라 울더니
순산했는갑다 아까참에
네 배 짼디 잠잠해졌다 인제는
야야!, 낼 아침에는 식전에
갈초랑 큰 소쿠리에다 속겨 꼭꼭 눌러 담아
한행부 살째기 짊어다 주어라
먹고 새끼 젖 잘 물리고 얼른 힘 타
농골 수렁배미 애갈이해야 쓴다 해토하면
그러고, 단단히 일러두어라
이참에는 송아치 암수 간에 젖 떨어지면
집시랑 밑에라도 꼭 판도치 숙부네 집에
소고삐 매어 줄 생각 하라고
소 뜯기던 언덕 너머 금살 소 울음소리
망각의 강 질러오는 아버지 말씀.
또 다른 별리 795/블
네 형 때는 셋이서 열차로 올라가
연병장에 대열로 세워 놓고 돌아섰어도
이렇듯 애틋함 몰랐는데
난생처음인 별리 아픔 같은 건 모른 듯
너는 쫓기는 짐승의 발, 역사로 줄달음쳤지
연신 죄어 오는 입소 시각 초조로운 마음
눌러댄 단축번호는 착신 중지 안내음 이었지
퇴근길 맞댄 가슴 몇이 군 생활 곱씹으며
위로술에 갈앉진 마음도 잠깐
터벅터벅 샛골목 야음 밟아 마주한 가족
얼굴에 겹겹한 그늘 숲속보다 무거웠지
쉽사리 잠이 올 성싶지 않다는 네 어머니
두 아들 애지중지 길러 조국을 품게 했으니
더 장한 일 있겠냐며 다독였지
여하튼, 온갖 풍파에도 일념으로 노 저어
이제는 고삐 풀린 약관의 건아, 차차
품에서 멀어질진대 마음의 탕개 풀자 했지
다들 자리에 들고 홀로 고요로운 뜨락
허허로운 동공 잠 못 든 네 별 끔벅이고
차운 하늘 북극성 우러러보다
무탈로 사 주 훈련 마치고 의계로 살 적에
헌신의 고임돌로 써 주십사 빌었지.
째마리 794/블
심심풀이로 두말할 나위 없는 땅콩,
동삼을 가보같이 알뜰살뜰히 간수하다가
봄볕 따사롭게 내리 쪼이는 토방에 쭈그려 앉아
갑옷을 벗기고 첫눈에 든 것들 골랐지요
부끄러이 열린 땅의 궁실에 정성으로 다져 넣고
약속처럼 새뜻한 얼굴 볼 날 기다렸으나
더러는 곯고, 서생원 웬 떡이냐 죄다 훔쳐먹었지요
모종을 사다 두벌 심고는
한더위 숨 돌리는 틈에 풀에서 건져 내 거름 넣고 물주고
알뜰살뜰히 수확의 기쁨 키웠지요
웬걸, 들짐승들 제 것인 양 뒤져 먹고 난 처진거리뿐
하천해도 흙의 고결한 보답에 감지덕지
샅샅이 이삭을 주웠지요
우리 부모님 세세연년 허리가 휘게 땅을 파
크고 좋은 거로 한 석작 광 시렁 위에 아껴 두었다
지성으로 윗대 기제사 모시고는
자식들 생일상 걸게 차린 모습 눈에 선했지요
불현듯, 되살아난 농심 씨오쟁이 채우고
남은 건 손자들 입에 물리고 싶지 않은,
오십년 째마리 같은 생 박차고 숨 쉴 곳 찾아
산 그림자 속 기어든 내 차지, 째마리뿐이지요.
*째마리: 사람이나 물건 가운데서 가장 못된 찌꺼기.
2020. 9.
이웃사촌 793/블
오가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는데
가면 갈수록 먼눈에라도 띄면
무는 개 보듯 힐끗힐끗 쏘는 눈총 따가워
긴한 일 외는 출입을 삼가자니
다붓한 산을 찾는 날이 잦아졌다
오늘도, 오솔길 적막 헤치고
뒷산 얼굴도 몸태도 옷매도 제각각인
귀목나무 벚나무 갈참나무......
서로 기도해 주는 나무마을에 든다
내 또래의 갈참나무 하나
간밤 뜬눈에 연달은 외풍 막아서다
힘 부치고 어질해 발목을 삐끗했단다
식겁한 나무들 달려들어, 아니다고
한 번 드러누우면 기신 못한다고
머리를 고이고 어깨 붙들고 등 내주고......
친살붙이같이 지극정성 부축한다
옳아, 나무 마을이나 사람 동네나
내 낮은 손 내미는 이웃 되면
세상은 모두 어깨를 겯는 이웃사촌
말없는 나무마을, 절로 머리 숙여진다.
2020. 9. 7.
길을 묻는 그대에게 792/블. 서은
얼루기 먹던 제 구유통 마구 떠받아 엎듯
마음의 뜨락 우북한 잡초 갈아엎어야 하리.
어느덧, 지는 해 서창 너머로 설핏한데
여기저기 솔깃한 눈맛 귀맛 쫓아다니다
아까운 세월도 이웃도 다 흘려보내고
고향 땅 앞산 밑 탯자리에 발 붙인 그대여
뒷산에 숨어들어 할퀴고 내뺀 세월 뒤쫓다
목을 꺾고 울며 돌로 발등 찧어 봤는가!
불고추 씹어 내뱉는 얼얼한 고통 맛봤다면
줄밤을 새워서라도 우리 무릎 맞대자꾸나
늦지 않았다고 비로소 시작할 때가 왔다고
네발로 기고 물소의 뿔로 산과 바다를 넘자
맞잡은 다짐 앙가슴에 아로새겨, 기어코
뿌리 깊은 달콤한 사과나무 키워 내자
굽이쳐 흐르는 강물 제아무리 서글퍼도, 우리
노을빛보다 더 따스운 마음으로 건너리라.
2020. 8. 25.
한 우물을 파다 791/블.시학과시.덕암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 하지만
어디 말같이 그러기가 쉬운가
막 지난 어제조차 낯설어 아뜩해지는 세상
황우 뿔 세우고 한길로만 가기가
잽싸게 인해人海 바다 헤쳐 나가다
난데없이 암초를 만나 죽을 영금 보기도 하고
하찮은 것에 어금니 악물더니 끝판에는
앞이 번듯하게 된 사람을 수도 없이 봤던지라
경주 토함산 석굴암과 불국사 찾고
무등산 규봉암 서석대 오르고
정도리 구계등 갯돌 새에 붙박여 다진 심지
어둠을 뒤져 파고 판 우물 아닌가
먼발치에라도 내 피땀 눈여겨본 사람은
삼 년 가물 석 달 열흘 장마에도
끄떡없을 명줄이라 침 흘리지만
선뜻 발 아래로 염려 내려놓지 못하고
시나브로 땅윗물 못 들게 뒷정리 해 가며
세세히 지켜봐 점차 손 떼볼까 하다
언제 하늘이 돌변하여 상전벽해 되고
땅이 흔들리고 갈라질지 알 수 없는 데다
그러고도 어디 그리 쉬운 일이랄 수 있는가
아무리 고통이 더 큰 고통을 낳더라도
모처럼 물오른 손 칼로 무 자르듯 내려놓기가
여하간, 단물 풍풍 솟구쳐 입에 대기 전에는
좀처럼 손 못 놓을 것만 같아.
2003. 12. 25.
저물녘의 비애 790/블,문산회
신역 광장에는 두 길이 있었어요
역사로 들어가 새물을 먹는 길과
궁벽한 라도(羅道) 구석구석에 붙박이는
다섯 갈래 부챗살 같이 퍼진 길
중문 밀치고 안에 들어가면
꽃 같은 두 도회 당겨 가는 지름길 있었어요,
소도 개도 다 오갈 수 있는
허나, 간신히 뜨인 반눈이 바둥대다
이도 저도 못하고 썩배기로 주저앉고 말았지요
바늘 가는 데 실로 따르는 두 녀석
사람 새끼는 서울로 보내랐는데도 못했어요
땀과 눈물로 얼기설기 마련한 토끼집 팔고
이리저리해서 당차게 봇짐 쌀 맘이었지요
하지만, 너나없이 둘러보고는 거저먹자 하고
달리 솟대 같이 아득한 거처 마련
내게는 하늘 대고 손가락질하는 일이었어요
말 꼬리에 붙은 파리의 꿈도 꾸었으나
기적도 요행도 아무나 찾지 않았지요
다행스레, 품안에서 간신히 책가방 들리고
무릎 밑에서 앞 열어 살라 윽박았어도
식솔이랑 제냥으로 나가 밥숟갈 뜨고 있어요
덧없이 날아간 세월 반추하면
새길 하나 못 터 주고 허공 허우적대
행여, 속에 이 아비 원망의 씨알 안 품은지
저물녘의 비애로 밀려들지요.
2020. 7. 18.
검정 고무신 789/블,동산
아버지 꼭꼭 아끼어 신어라 사 주신,
옆볼이 찢어지면 촘촘히 꿰매어 신다
장날 나가서 신기료장수한테 때워 신지요
어느새 닳아서 흙먼지 물 새들면
바닥 길이를 잰 짚풀 자 깊이 넣고 가셨다
깜빡 잊었다고 그냥 오셨다가도
다음 장날 발보다 큰 문수 사 오시지요
밖에 나가서는 혹여 잃을세라
한켠에 표나게 벗어 놓고 연신 눈을 주다
끝나기가 무섭게 후다닥 챙겨 들지요
어쩌다 남의 신이랑 바꿔서 돌아오면
내 먼저 알아챈 아버지 열화 같은 지천에
도선생 소 몰듯 서둘러 찾아 나서지요
신발 짝 벗어서 가재랑 다슬기 잡다
엉겁결에 손이 빠져 물살에 떠내려가면
허겁지겁 쫓다 물에 빠진 생쥐 되지요
마지막까지 가슴 설레게 하는
잘깡잘깡 헌 고무신 외는 엿장수 가위 소리
고마운 타이야표 검정 고무신
못 잊어 사 신고 폴짝대지요, 지금도.
2020. 6. 29.
울 엄니2 788/블
훈풍에 이따금 꼬순내도 나는데
헐떡이며 한 마름 넘더니 머시 그리 바빠
처마 끝 낮 달 따라 훌쩍 떠나신
허리띠 졸라매고 하늘 누우런 봄날
사립 앞 고샅에 그리도 끊이지 않는
벌컥벌컥 맹물 바가지로 허기 때운 발길들
앞개울 윗골 당산 밖 천둥지기 나고 드는
북실이 엄씨 지실댁 한골댁……
그림자 쫓는 꺼멍이 컹컹 짖는 소리 들리면
맨발 걸음에 고래고래 불러 들이어
'후딱 묵어, 후딱 묵어' 꾹꾹 밥 만 양푼 디밀고
속살 드러나는 남루 갈아입히신
보내고는 이내 혀 끌끌 차신 울 엄니
주머니 없는 단벌옷에 빈손으로 가셨으니
지금은 어찌 나누시는지, 다 내 죄만 같아.
2020. 5. 29.
반가운 참꽃 피었어요! 787/블,문산회.동산
봄볕 따사로이 찾아든
바람 비킨 산모롱이 양지 녘
올해도 반가운 참꽃 봉싯봉싯 피었어요
등성이 너머 땔나무하러 간 쇠죽방 박센
한 다발 꺾어 나뭇짐에 지고 온 꽃 위로
하늑하늑 춤추는 노랑나비 달고 온
농골산 나물 캐러 간 종만이 엄니
온 산 헤매어 다니다 하도 반가워
나물은 안 캐고 바구니 꼭꼭 눌러 따 온
춘삼월 꽃피는 호시절은 아직 먼데
이마 위 앞산에 눈을 두고 지켜보다
두견이 노래 쫓으며 따 먹어도 따 먹어도
허기 가시지 않은 내 유년의 꽃.
2020. 3. 15.
코로나19 786/블
하나되어 반만년 이어온 우리
언제부턴가 가리가리 나뉘어
제 앞에 큰 감 갖다 놓겠다고
딴죽 걸고 검은 쌍소리 마구 내뱉고
아귀다툼 그칠 새가 없더니마는
파죽지세로 뚫었다 빈틈
때국 우한 보이지 않는 밀사,
왕관 쓴 걸신들린 염병
호시탐탐 온 목숨 노릴 것 같이
네기, 이놈 코로나!
감히 여기가 어딘데
어디 코리아 매운 맛 좀 볼 테냐?
훌쩍 물렀거라!, 박살내기 전에.
2020. 02. 24.
그날 밤의 총성 785/블, 시분과.23문협 즉 낭송
23.5.19수정
타-앙! 탕 타-앙!
한밤중 우리 아들들 누가 명령해 총을 쏘았나?
오월이 다시 와도 풀리지 않은 그날 밤 총성
뜬금없는 가불금 받아 쥐고 골목길로 달려
대인동 시외 터미널 막 발차한 담양행 막차
출구에서 붙들어 타고 간신히 퇴근 했으나
암굴 속 붙박인 오월의 해는 길기만 하다
통신도 교통도 다 끊긴 고립무원의 섬 광주 땅
방송은 폭도들 난동이라 생거짓나발 불고
자고새면 방관자, 점점 아프게 찔리는 양심
사정사정해 웃돈 얹어 주고 대절한 택시
교도소 앞 고개 못 넘는다며 차를 돌려 세운다
저리는 오금 뒤뚱뒤뚱 고개 너머
사천왕 홉뜬 눈으로 꼬나본 총검 빠끔히 터 준 길 꿰어
솟구치는 분노의 걸음 도청 앞에 당도한다
인해를 이루어 목 놓아 사자후 토하다
어느새, 날 저물고 기력은 몸을 가누기 힘겨운데
반 백 리 길에 교통까지 막힌 탕자의 몸
유동 직장 숙직실에 기어든다
일찍이 인적 없고 가끔씩 바람이 셔터 흔드는 소리
밤이 깊을수록 아늑히 해방의 기대감 차오르는데
난데없이 정막을 깨고 들려오는 총소리 세 방
타-앙! 탕 타-앙!.
2020. 2. 11.
진대나무※를 만나다 초2-784/서은/블,문산회.서은.덕암상
지리산 화엄사 등반길, 일찍이
발 잘 못 들이어 맘껏 천기 누리지 못하고
긴 허리 꼿꼿이 못 펴고 살아
대웅전 대들보로 쓰임 받지 못한
해와 달 별이 먼 일가 같이 했어도
그윽한 꽃향내 작은 벌레들도 분분히 찾고
나무갓 큰 품 쫓긴 산짐승 걷어안았을
나이 이길 덕이 없어 수려함 쇠잔하고
독야청청 허연 알몸이 절개 지켜 가더니
골바람에 힘이 부쳐 벌러덩 나자빠지고 만
나락에 빠져도 아주 못쓰게 되진 않다고
찾아든 청설모 산지니 앉아 쉴 등 대주고
산객들 땀 밴 옷 받아 뽀송히 말리는 일
자신만이 감당해야 할 일 있다는
세월의 발톱에 긁힌 흐물흐물한 살은
배고픈 중생 흰개미 땅강아지 지네들……
옆구리 곪아 터진 음부는 진물 빠는 버섯들
모름지기 공양할 제물이다는
그러고도, 궁극에 남은 지스러기는 기꺼이
흙으로 썩고 섞이어 목숨 탄 것들 생명소로
보시의 공덕 닦아야 한다는
오늘 우연히 연이 닿아 상면하였지만
지금껏, 어디서도 한 번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못할 일을 다 하는 진대나무 보살.
※진대나무: 산 속에 죽어서 넘어지거나 쓰러져 있는 나무.
2020. 01. 10.
겨울바람 783/블
일손 거둔 허수아비 몸 움츠리는
텅 빈 들판 냅다 싸다니다가
높다란 까치집 턱을 덜덜 떠는
미루나무 가지 끝 매달리다가
산코숭이 덤불 속 웅크려 앉아
할딱할딱 가뿐 숨 몰아쉬다가
구동을 건널 데 어디 있냐고
샛강 얼음장같이 울부짖다가
얼어붙은 오금 절름절름 끌고
솔폭 밑으로 꽁지 감춘다.
연동사 백구 782/블,전매,문산회
금성 산성 오름길에서 탁발을 하다
산객들 길라잡이 맡아 헐레벌떡 내려오는
연동사 독경 소리에 귀 씻은 백구
간만에 쌔근거리며 오르는 날 보고는
달려들어 합장에 머리를 주억주억
오늘은, 사시불공 마침맞으니 길 열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갈림길에 이르니
불공 배우는 길은 이쪽 멀고 험한
버벅거리며 눈을 맞추려고만 애써
면구스러운 마음 고개를 외로 돌리자
길체로 비켜서서 온광 일렁이는 눈
종심의 마음속 절간 하나 못 모시고
언제까지 시루봉 올라 우화만 꿈꿀 거냐고
연신 나무 관세음보살 왼다.
2019. 12. 19.
덤불 속 호박덩이 수정 781/블
꽃 피고 새가 우는 춘삼월
묵은 쩍밭 한쪽 귀퉁이 예전의 두엄자리에
신접살이 차린 호박아씨
우거진 찔레나무 환삼덩굴, 좋아라
긴 계절 네 활개 치며 말 타기에 정신 팔려
앳되고 번지레한 옥동자 하나 안 보여 주더니
된서리에 그만 진이 빠져 온 천지에 까발린
퍼질러 낳아 여기저기 덤불 속 꼭꼭 숨겨 온
용알 같은 누우런 호박 덩이,
일찍이 청상 되어 열녀로 산다더니
어찌 부음 들었는지, 입성 채로 달려와
영정 앞 희읍하는 열 자식 감쪽같이 숨겨 온
숲정이 소갈머리 없는 당골네같이.
2019. 11. 15.
꽃잎 780/블
돌아서자,
한 가닥 미련도 새기지 말고
아득히 잊자
내 가슴속 너의 향기
너의 마음속 나의 정열
고스란히 살라 버리자
하늘에 낸 길 잊고 가는 바람처럼
품어 안은 냇돌 찾지 않는 벽계수처럼.
눈물 한 방울 없이
분분히 떨어져 흐르는, 저어기 저
꽃여울 꽃잎들.
조각달 2 779/블
망망한 밤바다에
애처로운 조각배
파도 드센 큰 바다를
홀로 떠가는 난파선
못 잊을 그리움 살라
여명을 부르누나.
내 마음 2 778
어둠을 불사르고
동산 위에 솟는 해도
동지섣달 설한 마룰
홀로이 넘는 시린 달도
몰라, 내 마음 몰라
태풍이 훔친 하늘에
피고 이는 흰 구름도
검게 탄 산마루 넘다
눈물짓는 먹구름장도
몰라, 이내 마음 정말 몰라.
밥벌이 길 777
일찍이 마을 앞에 우마길이 났다
지게미 쌀겨로라도 끼니 잇기 위해서는
먼동 트면 너나없이 건너야 했던
이슥토록 만든 죽피방석 장에 내고
장정들 레미콘 공장 벌이 위해서는
이 길을 건너야 했다
강변 황무지 돌 캐내고 메밀 갈고
어울려 천어 잡고 어죽 끓일라치면
이 길을 건너서 다녔다
긴긴해 목이 마르고 기운이 달려
주막집 한 잔 대폿술 간절해지면
이 길을 건너서 오갔다
부단히 밥벌이 길 건너다니며
식솔들 나물죽이라도 연명하다가
북망산도 이 길 건너 애달프게 갔다.
2019. 3. 4.
무등산無等山 어머니 776/블,문산회
무등산은 우리 어머니 입니다
알 둔 새 마음 같아 첫새벽에 일어나
부뚜막에 정화수 중발 올려놓고, 어쨌든지
자식들 무사하기만을 눈물로 비손하는.
숯등걸 된 가슴 불쑥 찾으면
언제 올라나 눈이 까매지게 내다본다며
맨발로 나와 두 손 덥석 잡는 어머니같이
멍울 스르르 스러지게 합니다
죽지를 다 못 펴 안달음을 놓으면
기회는 준비한 너에게 가직이 오고 있다며
옆에 다가와 어깨를 토닥이는 어머니같이
마음을 차분히 먹게 합니다
갈피를 못 잡아 허둥지둥 일어서면
눈앞 샛길로 말고 멀리를 보고 가야 한다며
가슴을 열고 꼬옥 걷어 안는 어머니같이
허욕에 들뜨지 않게 합니다
무등산은 오늘도 나처럼은 말고, 내 자식
무등 잘 살게 돌봐 주십사 기도로 사시는
우리 어머니 마음 입니다.
※무등산: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화순군·담양군에 있는 산. 호남정맥의 중심 산줄기로 일컬어진다. 최고봉 천왕봉의 높이는 1,186.8m이다. 산 전체는 산정 부군의 암석노출지를 제외하면 완경사의 토산을 이루고 있다. 산세는 웅하며, 다양한 형태의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어 사철경관 아름다운 경승지가 많다. 3대 석경은 서석대·입석대·광석대이다. 1975년 도립공원이 되었으며, 2013년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어 한국의 제21호 국립공원이 되었다. 전체 면적은 75.425㎢이다.
2019. 1. 13.
남포 터지다 767
집채만 한 바윗덩어리가
굉음과 함께
하늘로 솟구친다
일진광풍 일으키며
대구루루 사방으로 나뒹군다
저들끼리 깨부숴진 놈
쳐다본 사람 박 터뜨린 놈
똥 싸는 고라니 다리 분지른 놈
자욱이 피어오른 먼지 구름이
벌컥 화약 냄새 토해낸다.
2017. 11. 27.
한봉 명가名家 766/송순문
향리에 한봉 명가 귀동양반이 계셨어요 열 두 가족이 소 개 닭 토끼 염소랑 한 식구가 되어 적지 않은 농사에 틈틈이 벌을 쳤어요 울안 곳곳에 반반한 호박돌로 초석을 놓았지요 그러고 위에다 아파트처럼 층층이 통나무 속을 파낸 빈 벌통을 앉혔어요 모내기 철이 되면 분봉이 시작되고 예닐곱 살 어린 자식들은 벌 지킴이가 되지요 형은 봉군이 어느 쪽으로 날아가나 망보고 아래는 부리나케 들로 달려가 아버지를 불러왔지요 집 주위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잠잠해지면 내내 도리도리를 외며 쑥대 묶음으로 꿀 바른 멍덕에 쓸어 담았어요 벌통 위에 얹고 드나들 구멍 하나를 두고는 진흙으로 봉했지요 냉수와 붉은팥 한 사발을 벌통 앞에 차려 놓고는 사립에 금줄을 치고 사흘을 정갈히 했어요 그러고는 내내 벌통 안팎을 청결히 해 주었지요 어느덧 꿀 사역이 끝나는 겨울이 되면 주인은 만나를 맛보았지요 문고리가 쩍쩍 손에 달라붙는 추운 날 식전에 꿀을 땄어요 안양반은 매운 연기를 벌통 위에다 연신 불어 넣어 벌이 못 달려들게 막고요 큰 양푼 가득히 꿀을 따서 우선 자식들을 먹였어요 어려서부터 얼마나 먹었던지 감기 같은 것은 얼씬도 못했지요 쥔 양반처럼 꿀도 평판이 좋아 백 리 밖에서까지 구입해 갔어요 돈을 만져 보기도 어려운 시절에 벌이 자식들을 대처로 보내 눈을 띄워 주었지요 그러나 어인 일인지 미물이 귀동양반 가시고는 시나브로 세가 약해지더니 왕대밭에 백화꽃 핀 뒤로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어요.
2018. 01. 20.
선견지명先見之明 765
우리 아버지 자식들이 예닐곱 살만 먹으면 목매기처럼 논밭 고랑에 끌고 다녔지요 꼬막손에 연장 들리고 꼴망태 절어 들쳐 메게 했어요 소 풀 뜯기며 망태 빵빵히 꼴 베어다 쇠죽 쑤도록 했지요
그러고는 또 등짝에 지게 붙여 주셨지요 보릿단 망옷 짊어지고 졸랑졸랑 따라다녔어요 방학 땐 뒷산 올라가 보리풀 뜯고 땔나무 했왔지요 그러다 보니 나이보다 더 철이 들고 일머리 알게 되었어요
들에 가면 돌멩이 주워내라 흙덩이 잘게 깨부숴라 꾸중으로 가르쳤어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저 감사뿐이지요 한 번 몸에 익으면 쉽사리 안 잊히고 언젠간 유용히 쓸 수 있다는 선견지명이 있으신 거지요
왠지 일상이 털털거린다 싶으면 밭에 가지요 일찍이 익힌 땀 흘려요 주인 그림자 보고 자란 곡식들 거둘 때는 한없이 신비롭고 뿌듯하지요 새끼들 주고 이웃이랑 나누는 그 맛 안 해 본 사람 진짜로 몰라요.
2018. 01. 14.
별난 장사꾼 760
상리에 건강보조기 홍보랍시고
별난 장사꾼 한 무리 들어왔다
이 동네 저 고샅 도리반대며
혼밥 몇 술 억지로 챙겨 든 촌부들 실어다
창고 같은 데다 밤늦도록 앉혀 놓고
폭폭징에 절여진 징한 세월
염라국 문턱까지도 등에 업고 넘을 듯
알랑스레 엄니, 이모, 누님 해가며
쓰자니 별로요 버리자니 죄스러운
선물공세에 마음의 귀가 끌리어
연차, 묻어 둔 돈뭉치 내놓게 하더니
살 만 한 집은 다 산 성 싶었는지
신발, 죽초액, 연고, 쿠커……장사에
지붕, 화장실, 주방, 거실……공사며
현장 체험이라며 요리조리 끌고 다니니
이러다가 마침내는
먼 데 자식보다 가까운 남이 더 낫다고
들앉을 안방 비워라 할는지도 몰라.
2017. 6. 11.
모기약 759
철천지원수이냐
걷거나 둘러앉았거나 잠을 잘 때도
나만 만만히 보고 물어뜯는다
모기약 냄새가 역겨운 아내
파리채만 휘휘 내두르다가 만다
안 보인다고, 모기는 무슨 모기냐고
화가 치밀어 모기약을 들이켰다
세이웃이랑 주거니 받거니 하고는
모처럼 아침까지 푸욱 꽃잠 잤다
놈들, 통째로 잡았다며 달려들어
밤새껏 얼마나 실컷 뜯어먹었는지
온몸 여기저기 분화구에 만발한 복사꽃.
2017. 6. 11.
나의 詩 756
앞들 허리 조아린 갈숲 사이
굽이굽이 흐르는 물굽이
날 보란 듯 세상 가장 낮은 곳 찾아
재잘재잘 흘러간다.
그러나 내 詩는 나를
한 발짝도 아래로 내려놓지 못하고
나의 만족이나 위안이나
구원의 수단이 되고 말았다.
부여안고 끼적끼적
詩와 그 변방을 서성인지 오래.
앞서 갈커녕 뒤따르기도 버겁지만
그냥, 팔자소관이려니 하며 오늘도
또 詩를 쓸 수밖에….
나를 지키기 위해 계속
이 미친 시농사 짓으리라
산 밑에 흙집 지어 갈 그때까지.
2017.01.01.
흰죽 752/18석조.블
앞산 양달에 진달래꽃 피어나더니
하늘 노랗고 해 긴긴 봄날
시름시름 넘는 보릿동 멀기만 한데
또 도진 어머니 가슴앓이
한 울타리 친 큰집 작은아짐
울 너머로 가만히 보낸 손사래
영문 모르고 지게 걸머지고 달려가면
바로 가 쌀죽 쑤어 드려라며
지게 위에 짊어 준 장작 반 아름에
들려 준 멥쌀 한 됫박
누그름히 끓인 흰죽 잡수고
거뜬히 몸을 털고 일어나신 어머니
흰 쌀 보면 선뜻 그리워지는 그 옛날
아슴아슴 가슴 저미는 추억 한 채.
2016. 12. 20.
망기忘棄 749
해와 달빛 속에는 틀림없이
바람이 빚어낸
흰 물감이 녹아들어 있다
안 그러고서야 어찌 이즈음
내 머리 속 곡간이
허옇게 색칠 될 수 있으랴.
꽃불 748/블
봄 가시나
유하주에 대취하여
앞들 뒷산 온 천지에
꽃불 질러댄다
매화 산수유 개나리
벚꽃 진달래 목련……
바람 날개 타고
위쪽으로 위쪽으로
미친 듯 번져 간다.
(2023. 3. 29.)
깨 털기 743
멍석 위 자잘한 고문이다
매에는 장사가 없다는 듯
당할 게 무서워 순순히 게워낸다
곤죽을 먹여서는 안 된다
칭얼대는 아이를 얼리듯
토닥토닥 일깨워 주어야 한다
엇비듬히 거꾸로 움켜쥐고
아래서부터 위로 위에서 아래로
주무르듯 자근자근 두드려야 한다
초달에 매워서가 아니다
고집쟁이 다루듯 존조리 하다 보면
머금은 것 연신 토악질해 낸다.
가을의 방황 742/블
가을은
오고 갈 때 마다
먼저,
내게 묻곤 하였다
갈 길이 어디냐고.
묘비명 740
1
한 잎 눈에 잘 안 띄는 들풀이었나니.
그러나, 세상은 온통
내 푸르른 꿈 좇았나니.
2
한 잎 눈을 못 끄는 들풀이었나니
그러나, 세상은 온통
내 푸르른 꿈에 젖어 들었나니.
3
굴러서 계곡에 떨어진 돌이었나니
물살에 떠밀려 씻기고 닳아
시심이 굳은 강가 한 톨 밤돌이나니
4
강바닥에 나뒹군 돌덩이 이었나니
무량겁 씻기고 닳아 시심이 굳은
반질반질한 밤돌로 살았나니
5
풀잎 끝 맺힌 이슬방울 이었나니
새벽빛 영롱히 못 머금코 떨어지나니
김종
나는 꽃잎 한 장보다 작았지만
세상의 꽃잎들이 웃어 주엇다
감사하다.
한 살이 739
╶ 설해목
눈 덮인 산 오르면 안다
윗가지가 부러지면
아래 가지가 눌리어
부러진다는 것을
큰 나무가 넘어지면
옆 나무가 깔리어
못 산다는 것을
세상살이도 똑같다는 것을.
밥잔치 737/블로그
기 죽지 않는 눈과 추위에 두 발 묶이어
아랫목 요 밑에 발 뻗고 앉아
건성건성 책장 넘기며 詩 만나다가
사립 앞 눈이라도 치워야
밥값 하겠단 생각에 온몸 싸매고 나가니
풍겨 오는 콩나물밥 익는 냄새
졸래졸래 따라 들자
회당 가득 희색이 만면한 일촌 식구들
어서 오라 보내는 쇠눈빛
어울려 그림책도 보고 운동 하자고
동네 밥잔치 벌인다고
부지런한 사람이 찾아 먹는다고
겸연쩍은 마음, 틈새에 끼여 앉아
양념장에 고봉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운다.
2014. 12.22.
방황의 호사 736
시문詩文과 가까이하기로는
사철 푸른 숨결의 댓잎 향 불어 잇는
대나무골이 제일 좋을 것 같아
신문 쪽지 움켜쥐고 한달음에 찾아가
궁둥이 붙일 자리 잡았지요
생에 찌든 번뇌의 때 벗기 위해
밭고랑에 엎드려 풀과 씨름하고
들개처럼 앞 뒷벌 이슬 쓸고 싸다니고
감춰 둔 길 내주는 산을 찾아 오르며
누습한 생각의 부대 비워내지요
때론 하루가 물먹은 솜뭉치 같지만
머잖아 마음의 진창에 더덩실 달 떠올라
잘 익은 홍시 같이 달콤한 詩 한 편
꼭, 빚어낼 것 같은 예감에
오늘도 방황의 호사 누리지요.
2014. 5. 28.
비방 735/블
이 악물고 황우처럼 걸어온 生
꽉꽉 조였던 나사가 헐거워졌나 그새
밤새껏 여기저기가 쑤시고 저려
찾아간 터미널 앞 통증클리닉
닫힌 창문 틈으로 새어 드는
길 건너 삼층 한의원 쑥뜸 뜨는 냄새
삼거리 기름집 참깨 볶는 냄새
죽순 도갓집 죽순 삶는 냄새
스미는 냄새 비방으로 마시며
핫백에 물리치료 받고나면
먼 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기운
바위라도 번쩍 둘러메치고 싶은 욕망.
2014. 4. 21.
길 끝 732
이순 고개 문턱 넘듯 선뜻 넘어
구불텅구불텅 산굽이 돌아
쉼 없이 닦아 왔어도 알 수 없는
가다 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말기 환자의 병실을 찾을 즈음엔
아슴아슴 보일 것도 같은
벼랑처럼 뚝 끊어진 길에 이르러
그만, 길고 긴 밤이 열릴 때는
끝인 줄을 모를 것 같은
단지, 남의 무밭을 지나치듯
시간이란 모든 시간을
망연히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할.
2013.11. 30.
무감無感 725/ 13.무등.블
봄꽃 흐드러진 꽃길 걸어도
마음속 화단에 꽃 한 송이 피지 않고
온 밭에 번진 쑥 뿌리 파내도
마음속 텃밭에 잡풀 짓어 나는
생의 무감이여!
들 가운데 갈기 세운 바람이 되고
이 산 저 산의 선바위 되어, 심곡이
진도 신비의 바닷길로 열리길 바랐으나
바늘귀만큼도 트이지 않는
어두침침한 계절이여!
새들 대숲에 드는 해름녘이다
처마 끝 장명등 밝힐 저물녘이다.
2013. 4. 12.
건망 722
가는 금이 간 항아리냐!
기억의 쪽박이 새 깜박깜박한다
이름 모를 바람 웅성대는 어슬녘
본향으로의 길을 닦는다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며칠 전에는 자동차 열쇠
오늘은 또 만년필을 찾느라
한바탕 야단독판 친다
지나온 세월 더듬어 본다
가야할 길 곰곰이 생각해 본다
미워 말아야지 또 다른 나를, 절대로
아무리 캄캄한 허우적거림에도
호롱불처럼 부끄러워지는 이내 마음
막힘없는 저 편 길 달린다.
2013. 2.
근황 721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내가, 왜 이러지?
누우면 한잠 자고 싶고.
2013. 2.
나목 719/14석조
울 너머로 훔쳐본다 했더니
과연 흑심을 품었던 게지, 내게!
한 겹 한 겹 옷 벗어 내치더니
알몸으로 팔풍받이에 서 있는 바람둥이
언제까지 연모의 정 품으려느냐?
귀곡 소리 질러대며.
2013. 2.
돌부리 718/블
그냥, 몰라보고 지나가면
발 걸어 자빠뜨린다
앞에 얼쩡거린다고 걷어찼다가는
찬 내 발이 아프다
그러나, 험한 벼랑길에서 만나
손 내밀면 손 잡아 주고
미끄러지면 두 발 꼭 받쳐 준다
한 동네에 쭈-욱 눌러 사는
터줏대감처럼.
2013. 1. 5.
새 유택을 마련하다 717/블
아버지 걸음 졸래졸래 따라가
처음 알게 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거소
종종 산성산 오를 때는
꼭, 그 집 옆을 지나곤 했습니다
산초 맹감나무 가시밭길 뚫고 들어가면
호젓한 노송 그늘 밑에 터를 잡은
아버지, 지관 대동하고 길지 찾았지만
천운 안 닿아 그대로 눌러 계신
작년 윤 삼월 길일 이사 가시는 길에
바람도 쐬고 꽃도 보시고
아들 내외랑 함께 나란히 내 집에 들러
삼 대가 하룻밤 지냈습니다
이제, 윗대 할아버지 아버지 기스락 하에
마련한 아담한 새집에 드신.
2013. 1. 4.
겨울나무3 715/블
나인들 다 떠나보내고
막막 천애 혼자 남은 임금님
발가벗고라도 이 궁 지키자
태평성세 꼭 오리니
패장의 애끓는 흐느낌
언 강 건너는 겨울나무.
2012. 10. 5.
수확의 기쁨 710/
흙은 아무나 파먹고 사나!
아직도 참새 방앗간 찾는 눈치보기
들깨 베러 갔다가 아주 털어 왔다.
남 따라 덩달아 장에 가듯
들깨 모 얻어다 손바닥만큼 심어 놓고
낫 들고 나선 이웃 보고는 들로 나간다
웬걸, 주니가 났던지 잎 다 떨구고
멀거니 밭머리 바라보고 있는 녀석들
여태껏 어디다 딴눈 팔았냐는 듯
땅과 새와 벌레들과 나누고도
흘린 땀의 몫으론 너무나 감지덕지해
베고 털고 살라 멍석에 널어놓고 나니
오달지고 천석꾼이 안 부러운데
아내, 더위에 수고 많았다며
막걸리 한 병 사온댄다.
2015. 10. 5.
땔나무하다 708/16무등
한뎃부엌 땔나무 한 짐 해왔다
하늘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
연신 시린 손 비비며
낯선 바람 따라가다
길 잃은 낙엽 울 넘어 들어
해종일 새물대는 허허로운 마당
창 너머 빤히 내다보이는
담장 밑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고
헌 장판때기로 덮는다
노적가리다
나도야 이제는 부자!
나무가 묵으면 쌀도 묵는다지
쳐다만 봐도 절로 배가 부르다.
2011. 12. 5.
죄인罪人 701/16무등/블
사성암四聖庵* 오르며 생각에 젖네
구절양장 가파른 이 길 오르게 한 죄인
셔틀버스다, 아니
절집이다, 아니
부처다!
닭장 만 한 차 하나 겨우 오를 수 있는
여기저기 움패이고 끊어져
자칫하면 목숨 걸어야할
오산 430m 사성암
눈 앞 아득히 펼쳐진 경전 묵독하네
길이 있네!
화엄이네!
죄인은 바로 나 버러지만도 못한
연잎 하나 마음밭에 못 피워낸.
2011. 6. 25.
*사성암四聖庵: 전남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 산7에 있는 암자.
4명의 고승 즉 원효 도국선사 진각 의상이 수도하였다하여
사성암이라 부른다 한다.
꽃 등 698/블
농익은 방절
바람에 길들이어 찾아온
백철 영산홍
봄의 여울목 빈터에다
백등 홍등
눈이 시리게 내걸었다
꽃의 그지없는 기도다.
2011. 4. 27.
불운과 천운 696
이십 년도 더 넘은 세월
마당귀 한자리에 발 섞고 사는
석류와 모과나무
한쪽은 땅 넓은 줄을
다른 한쪽은 하늘 높은 줄 모른다
연리지 하나 맺을 생각 없이
타의 불운은
나의 천운이 되어 오는가!
삼시선으로 찬란히 꽃 피워
연년이 발아래 선혈로 낭자하다고
석류나무 가지 찍어 냈더니
화들짝 꿈을 키운 모과나무
둘이 거둔 것보다 더 많은 결실
이 가을의 창고에 쌓는다.
뜨락에 환희가 넘실댄다.
2011. 3. 22.
낮달 2 695/16무등.블
언젠가부터 슬며시
눈물이 어리곤 한다 눈시울에
그날 아침 처마끝 너를 보면.
둘러앉은 살붙이들 절절한 바람에도
두 볼에 스르르 눈물 보이더니
황망히 먼 길 서두신 어머니
심곡에 고이 접어 둔 한마디
기어코 이르고 싶은 욕심에
혀끝으로 굴리며 몸부림치던
덧없이 초조롭고
이우는 녹두꽃 애처로운 낯빛에
끝내 두 눈 다 못 감은
이제, 먼빛에라도 날 성 싶으면
스치는 바람 붙잡고
사알짝이 숨어다오 구름 뒤켠으로.
2011.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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