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늦가을의 선선한 날씨가 상큼한 냄새를 풍기는 초저녁시간 !
외대 주변의 선술집들은 언제나처럼 시끌벅적하다.
둥그런 드럼통에 양은 판을 얹어 만들어놓은 술판 위 사기그릇을 대신한 막걸리잔 두 개에는 소량의 고춧가루를 뿌린 콩나물국이 놓여있고, 거의 비어있는 소주 한 병과 안주로 야채곱창이 먹음직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독자였던 선우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아버지가 사고로 죽고 어머니는 선우를 두고 집을 나가 소식이 없었다.
먼 친척이 자기가 키우겠노라 하면서 데려가 학교를 보내거나 따로 공부를 시키지도 않았을뿐더러 농사일을 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수시로 구타를 하였다.
자신의 부모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선우는 9살이 되면서 친척의 집을 뛰쳐나와 지방의 소도시를 전전하면서 온갖 궂은 일들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성품이 모나지 않고 착한 선우는 모든 주변인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지내긴 했지만 배운 것도 없고, 고향마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남보다 훨씬 못한 대우를 받으며 성실히 살아왔다,
서울로 거소를 옮긴 것은 15살이 되던 때였고, 청량리 인근의 가판대에서 운영하던 구두수선점에서 소위 말하는 찍새(인근 다방이나 사무실에서 닦을 구두를 모아오는 심부름꾼)로 먹고살아야 했다.
삶이 힘들었지만 어렵사리 반지하에 전세로 방을 얻으면서부터 외로움을 많이 느끼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 26살이 되던 때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을 하였지만 아무것도 없는 선우를 반가이 맞아줄 리 없는 장인, 장모는 딸을 내 쫒았고 둘은 사랑만으로 열심히 살아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떠돌이 생활을 했고, 고향도 제대로 모르던 선우에게는 주민등록이 없었다.
사실 그걸 신경 쓸 여유도 없이 살아왔고, 꼭 필요한 것도 아니란 생각에서 그냥 그렇게 살아왔기에~~~
결혼도 했고, 아이도 생기면서 어떻게든 주민등록을 만들어야 했고, 혼인신고와 출생신고도 해야만 했다.
어찌어찌해서 주민등록을 만들기는 했으나 더 큰 문제가 선우를 괴롭혔다.
군대를 다녀오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법으로 만 29세까지는 병역을 마쳐야 하는데 이제야 불거진 문제를 어찌해야 했을까?
특정된 연고가 없고 재산도 없는데다가 결혼하고 자식까지 있으니 군에 갈 형편도 아니어서 결국 28살의 나이에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때가 아해와 선우가 만나게 된 시기였다.
아들의 양육비라도 벌어야 했던 선우는 공익근무를 마치고 나면 밤새 알바를 했고, 때문에 근무시간에 자주 졸았었는데 이를 지켜보던 아해가 선우와 술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들었고,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던 아해는 동료 직원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주게 되었다.
준수에게서는 라면 1박스, 경훈이는 쌀 5Kg, 민지는 분유 2통, 아해와 나머지 두직원은 10만원을 모아 6개월 동안 매달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리고 선우는 아해의 도움으로 의가사로 근무해제가 되었다.
공익근무가 해제되고 꼭 1년6개월 뒤인 오늘 선우가 아해를 찾아온 것이다.
『그래~ 일은 잘 하고 있는거지?』
아해가 물었다.
『예! 모두들 도와주신 덕분에 이제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으며 선우가 말을 이었다.
『직원분들께서 많은 도움을 주셔서 공익생활도 잘 마치고 이젠 조금씩이나마 저금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주임님이 해주신 일에 동참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무슨 일?』
『큰 돈은 아니지만 주임님들이 하시는 좋은 일에 보탬이 되고 싶어요. 매달 5만원씩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선우는 단호한 결심을 한 듯 아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라면 1박스에 14,000원 정도 하니 3박스를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선우야, 니 마음은 잘 알겠는데 너도 지금 어렵지 않니~! 시간이 좀 지난뒤에 여유있을 때 해도 되는 일인데 . . .』
『주임님! 꼭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우는 소주를 들이키고 있는 아해를 바라보며 간절한 듯 말을 이었다.
『이걸 꼭 받으시고 앞으로도 제가 벌어서 조금씩 더 드리겠습니다.』
선우는 주머니 속에서 곱게 접어둔 흰 봉투를 꺼내 아해 앞으로 내밀면서 말을 이어갔다.
『주임님들이 저 말고도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들한테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젊은 친구들이 저처럼 도움을 받아 자립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봤습니다.』
목이 막히는 듯 선우는 소주 한 잔을 마시고는 콩나물국을 들이키며 조곤조곤 말을 시작했다.
『직원분들도 각자 생활이 있으신데 계속 도움만 주기는 힘들꺼 같습니다. 그러니 저같이 도움을 받은 사람이 조금씩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더 많은 친구들이 삶의 희망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피라미드가 기초가 튼튼해야 장엄한 삼각뿔을 이룰 수 있듯이 주임님들께 도움을 받은 저희 같은 사람들이 작은 힘을 모아 지탱해 쌓아가면 언젠가는 피라미드의 정점처럼 도움을 받은 친구들 중에 나라에 보배 같은 사람도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아해는 선우의 말을 들으며 지난 시간 동안 적게나마 지원을 했던 일이 떠올랐다.
장안동의 반지하 단칸방에서 식구 일곱 명이 모여 살던 김칠성 할아버지의 공부 잘하던 손주 태성이에게 몇 명의 도움을 받아 수업료와 독서실비를 지원하게 되었는데, 태성이는 다음 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했고, 1년뒤 2학년이 되어서는 오늘 선우처럼 교복을 입고 찾아와 자기도 좋은 일에 끼워달라고 했는데 안타까운 마음에 그냥 돌려보냈던 기억이다.
「그때 태성이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함께했다면 지금쯤은 공군 장교가 된 그로부터 애처로운 감정 없이 반가운 일원이 되었을텐데 . . .」라고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랬다면, 태성이처럼 훌륭한 사회의 일원이 된 그와 함께했다면 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서로가 행복했을 것이다.
『그래 선우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보는 게 내 꿈이기도 하다.
니 좋은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다.』
아해는 소주잔을 쥐고 있는 선우의 억세 보이는 손을 두 손으로 싸 안았다.
곱창 안주와 소주 세 병을 다 비우는 동안 선우의 아내가 아들 경훈이를 데리고 찾아와서 인사를 나누고 남편의 뜻을 받아줘서 고맙다했고 아해는 그들에게 가 볼 곳이 있다며 일어섰다.
외대전철역을 끼고 허술한 집들이 몰려있는 재개발 예정지의 어느 조그마한 단독집 뒤쪽으로 붙어있는 양철문을 두드리자 20대 중반의 여자가 나와 아해에게 인사를 했다.
『잘 지내셨어요?』
『예, 지난번에 알려주신 대로 해서 동사무소에서 지원금을 받아서 잘 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마운 인사를 한 미경은 아해 옆에 서 있던 이들을 보고는 가볍게 목인사를 했다.
『아~ 이 친구는 이 동네 사는 후배인데 부부가 너무 착한 사람들이고 해서 술 한 잔 하다가 지나는 길에 들었습니다.』
미경과 선우 부부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고 아해는 미경과 선우를 번갈아 가리키며
『이쪽은 춘우 어머님이고~~ 이쪽은 경훈이 아빠, 엄마입니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아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뭐 특별한 건 아니고 이분들이 춘우 어머님과 친하게 지냈으면 해서 제가 인사시켜드리는 것이고요~』
차마 금전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선우부부는 미경의 가족과 함께해야 한다고 알아들었고, 미경도 어렴풋이 그 뜻을 이해했다.
아해는 선우가 건넸던 봉투를 꺼내서 공손하게 미경에게 건내면서 말했다.
『이건 경훈이 아빠와 엄마가 춘우랑 춘우 동생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어머니가 알아서 아이들에게 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어색하지만 봉투를 받아든 미경은 꾸벅 큰 인사를 하고는 바로 눈물을 훔친다.
미경은 17살에 서울로 홀로 올라와 미싱공장에서 잡일로 열심히 살아보려 했으나, 배운바 없이 순진하기만 했던 터라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공장지배인에게 이용당하고 춘우를 낳으면서 공장에서 쫒겨났고, 두 번째로 들어간 공장에서는 함께 일하던 유부남이 유린해서 춘우의 동생까지 낳아야 했지만 결국 버림을 받아 두 아이의 젊디 젊은 엄마로 살아가는 여인이었다.
다행히도 아이들을 데리고 일할 수 있도록 해준 마음 넉넉한 식당 주인 할머니의 도움으로 식당에 딸린 작은 방에 아이들을 두고서 일을 했고 할머니의 깊은 배려로 초저녁 손님이 잦아들면 일찍 귀가시켜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우리 경훈이 데리고 저녁에 자주 놀러올께요, 괜찮으시죠?』
선우의 아내가 어색할 수 있는 분위기를 돌리며 말을 건냈다.
『집이 좁아서 편치 않으실텐데 아이들이 같이 놀면 저도 좋을 것 같아요. 하루종일 저하고만 있어서 우리 애들은 밖에 친구가 하나도 없어요.』
미경은 선우 아내의 제안이 너무나 고마워 흔쾌히 수락하면서도 낡고 좁은 거주환경을 미안해하는 마음이었다.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해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말을 꺼냈다.
『그럼 우리 알게 된 기념으로 이번 일요일에 다 같이 요 앞에 의릉에 놀러 가는 건 어떨까요? 시간들 되실까요?』
잠시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시간이 흘렀다.
『제가 김밥하고 먹을 거 조금 준비할께요』
선우의 아내가 선뜻 답을 했고 이어서 선우도 거들었다.
『저도 시간 됩니다. 경훈이랑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잘 됐습니다.』
『저야 너무 고맙지요. 우리 애들은 그런데 갈 여유가 없었거든요~』
미경도 모두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일요일 12시에 여기로 모여서 출발하는걸로~~』
아해의 말에는 확정적인 결의가 있었다.
『예!』
『예!』
『예!』
어느덧 초저녁의 하늘은 캄캄한 밤이 되어 중천에 달이 훤하게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