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내 성가정 성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광주 유수부인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鄭溵, 1804-1866년)와 그의 재종손인 정양묵 베드로(鄭亮默, 1820-1866년)의 고향이자 유해가 묻혀 있는 곳이다. 앞에 단천이 흐르고 뒤에 숲이 울창한 와룡산이 감싸고 있는 단내 성가정 성지는 한국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성직자를 조선 땅에 영입한 주역 가운데 하나인 순교 복자 윤유일 바오로(尹有一, 1760-1795년)의 묘가 있는 어농 성지와도 지척이다. 단천리는 또한 한국에 교회가 세워지던 1784년 이전부터 천주교가 들어와 있었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기도 하다.
광장 한편에 성 가정상과 이천 지역에서 태어나거나 체포되어 순교한 5위 성인 순교비(五位聖人殉敎碑)가 자리하고 있고, 그 옆으로 계단을 오르면 말끔하게 단장된 순교자 정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의 묘소가 나온다. 묘역 주위에는 유난히 푸른빛을 띠고 있는 소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마치 순교자의 굽히지 않는 신앙을 증언해 주고 있는 듯하다.
동래 정씨로 그 조부 시절부터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서학(西學)을 접했던 정은 바오로의 집안은 이미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촌형인 정섭과 정옥이 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순교의 모범을 보여 준 바 있다. 신유박해가 지나간 3년 후인 1804년에 태어난 정은 바오로 역시 천주교에 입교했고, 그의 어머니 허 데레사와 부인 홍 마리아 역시 입교하였다. 그들이 살던 단내 마을(단천리) 맞은편의 ‘동산 밑 마을’(동산리)은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중 한 명인 이문우 요한(李文祐, 1809-1840년)의 고향이기도 하다.
1866년 병인박해의 회오리는 이 마을에도 휘몰아쳤고, 포졸들은 정은 바오로를 붙잡기 위해 매봉에 숨어 망을 보았다. 당시 63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추운 겨울날 낮이면 마을 뒷산 ‘검은 바위’ 밑 굴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내려와 잠을 자고 또 올라갔다. 그러나 결국 그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남한산성까지 가파른 산길로 끌려갔다. 이때 그의 형님의 손자인 정양묵 베드로가 작은 할아버지께서 병드신 몸으로 홀로 잡혀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곁을 지켜드리고자 자진하여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함께 잡혀갔다.
한 달여를 남한산성에 갇혀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은 두 사람은 그 해 12월 8일(음력)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백지를 덮어 숨이 막히게 해 죽이는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들이 순교한 뒤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 밖으로 시구문을 통해 던져졌는데 가족들이 몰래 정은 바오로의 시신을 찾아 이곳에 안장했다. 그러나 정양묵 베드로는 당시 함께 순교한 수많은 시신들 틈에 섞여 미처 찾아오지 못했다. 끝까지 작은 할아버지 곁을 지키다 순교한 정양묵 베드로의 뜻을 기억하고자 2000년 4월 11일 남한산성 동문 밖의 흙 한 줌을 가져와 할아버지 묘 옆에 가묘를 만들어 모셨다.
단내 성가정 성지는 한국에 존재하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교우촌 가운데 하나이며 성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지이기도 하다. 아울러 한국 103위 순교 성인 가운데 이천에서 태어났거나 체포되어 순교한 5위의 성인을 기념하는 성지이다.
특별히 단내가 가정성화를 위해 순례하는 성가정 성지로 명명된 것은 성지에서 기념하는 다섯 명의 성인과 순교자 중 이문우 성인을 제외하면 모두 가족 순교자이기 때문이다. 정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 순교자는 작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 이호영 베드로(李~, 1802-1838년)와 이조이 아가타(李~, 1784-1839년)는 남매 사이, 조증이 바르바라(趙曾伊, 1782-1839년)와 남이관 세바스티아노(南履灌, 1780-1839년)는 부부이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1796-1839년) 역시 순교 성인의 한 분이다. <가톨릭 굿뉴스 성지 안내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