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祖 이길권 <李吉券, 904~1008, 신라 효공왕 8년~고려 목종 12년>
용인이씨 시조 이길권(李吉券) (904~1008)
서기 904년 신라 효공왕8년에 탄생하셨다. 공께서는 본시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고 깊으셨으며, 재능이 탁월하시어 천문과 지리에도 통달하시었다.
도승 도선대사가 공을 처음 보고 말하기를, "이 분이 장차 왕을 도와 큰 일을 할 재목"이라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드디어 이 때 부터 서로 친하게 사귀게 되어 공께서 많이 배우는 바가 있었다 한다. 바야흐로 신라의 국운이 쇠하여 농민의 반란에 이어, 각 지에는 군웅이 할거하는 난세가 되었다.
누차, 고려태조의 부름을 받은 공께서는 비로소 일어나 국란수습을 도웁게 되었으니, 후백제의 견훤과 태봉국의 궁예를 섬멸하고, 동예의 고부이오환 등을 정복하여, 마침내 삼한을 통일하여, 고려건국에 크게 공을 세우셨다.
태조께서 즉위하신 후 이르기를, "주(周)나라를 크게 일으킨 여상이나 한(漢)나라의 개국을 도운 장자방의 공은 이모(李某)의 공에 비하면 오히려 가볍다" 하시며 특별히 500호(戶)의 식읍을 내리고, 산성군(山城君)을 봉하였다. 그러나 공께서는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신은 본시 산골에서 나무하고 신이나 삼으면서 궁하게 살고 있는 터에, 어찌 이토록 후한 녹을 본심을 어기고 받을 수 있겠읍니까"하였으나, 태조께서는 거듭 공의 뜻과는 달리 다시 구성백(駒城伯)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 태사(泰師)에 봉하였다. 또 일설 고려왕의 부마가 되셨다고 한다.
일찌기 용인 일대의 토호이면서도 공은 평소에 벼슬을 뜬 구름과 같이 여기시고, 오직 청렴과 수분안거(守分安居) 하시면서 밖으로는 나라에 충성하고 안으로는 덕으로 다스려 보국안민의 귀감이 되시었다.
그 후 계적(繼籍)을 용구로 하시니, 우리들이 용인이씨라 부르게 된 연유가 여기에 비롯된다.
서기 1008년에 세상을 뜨시니 수(壽)가 105세였다. 나라에서는 공의 공덕을 기리어 안의공(安毅公)의 시호를 내리고, 능선각(能善閣: 공신의 위패 모신 곳) 28위 중 제2위로 모셨다.
묘는 기록에 용인군 기흥면 영덕리 자은교마을 뒷산으로 되어 있으나, 그 동안 천세의 세월이 흘렀고, 무수한 병란과 정란으로 실전한지 오래이니 참으로 자손의 불효가 어찌 망극하다 하지 않을 수 있으랴.
비록 작은 정성이나마, 서기 1977년 공의 수훈종덕하신 높으신 얼을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 대종회의 발의로 발상지비를 세웠으니, 여기에는 후손들로 하여금 뿌리를 익히고 얼을 심어 나라와 가문에 더욱 영광을 이룰 인물들이 족출(簇出)되기를 다짐하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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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가능한 한, 원문을 그대로 이기하였으나, 병기된 한자의 일부는 생략하였으며,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추가를 하였습니다.
(2) 위 "용인군 기흥면 영덕리"는 현재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