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원고는 2013년 4월 7일 다누림교회 주일예배 설교 원고였습니다.
제 목 : 태초에
0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 사람의 방식
이미지 훈련 혹은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운동선수, 영화배우, 가수 등 많은 사람들은 실전에 임하기 전, 또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거나 연마할 때 머리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훈련을 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야구에서 국민타자라고 불리는 이승엽 선수가 있습니다. 이승엽 선수는 우리나라 야구 선수 중 가장 뛰어난 타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잘 할 때는 정말 잘 합니다. 그런데 못 할 때는 정말 답답할 정도로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못 하다가도 경기의 승리를 위해 꼭 필요한 순간이 되면 어김없이 한방을 날려 줍니다. WBC 야구 월드컵 대회 때도 그랬고, 북경 올림픽 때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를 국민타자라고 불러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요? 정말 피눈물 나는 훈련을 했을 것입니다. 그의 인터뷰를 들어 보면 그는 경기가 잘 안 될 때 더 많은 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미지 훈련입니다. 즉 경기가 잘 되었던 때를 기억하면서 머릿속에서 수많은 배팅 연습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미지 훈련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세계피겨선수권 대회에서 우리를 기쁘게 했던 김연아 선수가 있습니다. 그 선수 역시 머릿속에서 얼마나 많이 자신이 경기하는 모습을 그려보았을까요? 아마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배경 음악을 마음속에서 연주하면서 이미지 훈련을 했을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의 라이벌이라고 불리는 아사다 마오는 아마 더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선수는 트리플 악셀을 성공하지 않으면 도저히 김연아 선수를 이길 수가 없기에, 그러나 트리플 악셀은 성공률이 너무나 낮기에 은반 위에서도 물론 많이 연습을 했겠지만 머릿속에서는 더 많은 훈련을 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미지 훈련은 영화배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본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연습 촬영을 하기도 하지만, 대본을 외우면서 이 장면에서는 이렇게 하고, 저 장면에서는 저렇게 해야지 하면서 미리 이미지 상으로 촬영을 해보는 것입니다. 오늘 오후에 K-Pop 스타 파이널 라운드 생방송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악동뮤지션의 팬입니다. 그들 역시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생방송이라는 특성상 방송 사고를 내지 않기 위해 엄청난 연습을 했을 것이고, 머릿속에서도 그들의 노래를 이렇게도 불러보고, 저렇게도 불러보며 최상의 조합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이미지 훈련을 통해 연습을 하기도 하는 것이며, 이미지 훈련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도 하는 것이며, 이미지 훈련을 통해 자신만의 기술을 개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많은 효과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이미지 훈련은 운동선수나 배우, 가수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은 목표로 하고 있는 대학 캠퍼스를 거니는 꿈을 꿉니다. 판, 검사가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재판하는 장면을 머릿속에 수없이 그려보며 힘든 것을 이겨냅니다. 의사는 수술을 잘 하기 위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째고, 잘라내고, 붙이고, 꿰매는 연습을 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러한 이미지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 훈련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능력의 한계, 사람의 상상력의 한계, 사람의 지식의 한계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모두가 슈퍼맨이 되지 않는 이상 불가능 한 것이며, 아니 슈퍼맨이 된다 하더라도 또 슈퍼맨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미지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작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안타깝게도 이러한 방식이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뿌리깊이 박혀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직 동일한 한 분이신데,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은 모두 다르게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사랑의 하나님이고, 어떤 분에게는 진노의 하나님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인데, 어떤 분에게는 징계와 심판의 하나님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은 자신의 삶을 관리하고, 안내하고, 책임져 주시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고 지배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다 하나님에 대해 각각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 이미지 속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하나님을 다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하나님이 왜곡되고, 기독교가 왜곡되고 있다는 심각한 사실입니다.
2. 성경속의 하나님 왜곡
이러한 일은 성경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이 탄식하고 부르짖습니다. 그 부르짖는 소리가 마침내 하나님께 상달되고, 은혜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기 위해 마침내 모세를 찾아주십니다. 하나님과 모세가 대화하는 첫 장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13],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면서 모세가 하나님께 묻는 장면이 나오고, [출애굽기 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의 질문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애굽의 왕궁에서 교육을 받은 모세는 애굽의 모든 신들은 계보가 있으며, 각각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께서 익히 아시고 계신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을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 내 앞에 신이라고 나타나서 이야기하는 당신은 어느 신의 계보에 속해 있으며, 도대체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아시고 나는 어느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은 어느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자신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과연 모세가 이 뜻을 이해했을까요? 아니요. 할 수가 없습니다. 모세가 아주 오랜 세월동안 왕궁에서 익힌 신에 대한 지식, 광야를 떠돌면서 배운 미디안 신들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의 단 한 마디에 포기하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믿습니다.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세상에 그런 신이 어디 있어요?’라고 하면서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왕궁에서 배운 신, 광야에서 배운 신에 대한 지식체계, 인식체계를 말로써 바꾸는 것이 아니라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모세 스스로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도록 모세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은 [시편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니이다’라고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시편 6:1],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면서 책망의 하나님, 징계의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다가 [시편 39:10], ‘주의 징벌을 나에게서 옮기소서’라고 합니다. 정말 달라도 너무 많이 다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과연 우리의 하나님은 정말 사람의 생각대로 그때그때 달라지는 하나님일까요?
[마태복음 19:13-15]을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께로 나오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는 장면입니다. 왜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사람들을 꾸짖었을까요? 제자들의 생각으로는 ‘어린 아이들은 지금 예수님과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 어린 아이라는 존재는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통치로부터 구원할 위대한 메시야의 품위를 훼손시키는 행위다, 지금 이 자리에 어린 아이가 있는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격에 맞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이 오신 본래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일어나는 심각한 왜곡입니다.
3. 계시의 종교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성경을 통해 이미 다 드러내셨습니다. 그 계시는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으로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더 이상의 계시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해 이미 다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성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가치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면서 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시고 행복한 삶, 천국의 삶으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그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종종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 꿈 등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환상과 꿈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옮기면 좋은데 꼭 전달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시각이 작동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심각한 기독교의 왜곡 현상이 나타나고, 복음이 변질되고, 이로 인해 기독교가 싸구려 종교로 둔갑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목사님들이 설교 할 때 아멘으로 화답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그러면서 ‘네가 아멘으로 화답할 때마다 천국에 네가 살 맨션에 벽돌 하나를 더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천국에서 더 큰 맨션에 살기 위해 아멘, 아멘 합니다. 어차피 설교는 졸리는 것이니까 잠이라도 깨기 위해 무슨 뜻인지 헤아리지도 않고 그저 아멘, 아멘 합니다. 여러분, 이 말대로라면 이곳이 천국입니까? 천국은 슬픔도 없고, 눈물도 없고, 분노도 없고, 너무 너무 좋은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천국은 차별은 있는 곳이 됩니다. 아멘 많이 한 사람이 더 좋은 곳에서 사는 차별 있는 곳이 바로 천국이란 말이 됩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멘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아시지요? 하나님의 참 진리가 선포될 때는 여러분 아멘 하셔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귀에 달콤하게 느껴질 때는 열 번 하셔도 좋고, 백 번 하셔도 좋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께서 벽돌 열 개, 벽돌 백 개를 준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아멘이라는 화답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잘 알아가는 것이고, 은혜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정말로 유명했던 목사님의 천국, 지옥 체험 간증문의 일부분입니다. ‘유황 불 못은 세상 도시처럼 수천, 수만 개나 된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이곳에 온 영혼들은 땅에서 성경 말씀을 믿지 않고 교회나 교인들을 업신여기며 조롱하고 핍박하던 자들이며, 또 세상의 부귀와 권세를 위해 신앙을 저버리고 주일을 범하는 등, 교회 안에서 분열과 분쟁을 조장하고 교회를 자기 권세의 장소로 삼아 싸움을 일삼았던 자들이 온다고 천사는 말했다. 천사가 내게 소리쳐 “00 목사, 저기 유황 불 속에서 아우성치며 고통당하는 영혼들 중에 본적이 있거나 아는 자가 있나 보라” 하였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내가 아는 한국교회에서 이름 있던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도 꽤 있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교권과 명예와 권세를 위해 신앙을 떠나 자기 유익을 구한 나머지, 교회와 총회에서 싸움과 분열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찢고 부수던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유황 불 못에 왔다고 천사는 말한다. 큰 교회의 교만한 목사, 교만한 부자 장로, 스스로 잘난 권사와 집사들.’ 지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음은 천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천사에게 졸라서 내 집 있는 곳을 보여 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니, 주님이 허락하셔서 겨우 내가 살 천국 집을 향해 날아갔다. 얼마나 멀리 멀리 가니 이제 터를 닦고 신축을 시작하는 집 세 채가 있는 곳으로 왔다. 그런데 짓다가 중단된 작은 3층 집이 내 집이었다. 너무나 실망이 커서 안 들어가겠다고 했더니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가 보아야 된다고 강권하여 할 수 없이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2층 방에 상장 2개만 벽에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하나는 18세 때, 고아원에서 성탄절을 보내러 가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거지 할아버지에게 잠바를 벗어 준 것이고, 헌금할 돈으로 다 식은 붕어빵 몇 개를 사서 드린 것이 상이 되어 있었다. 나는 400명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고, 아파트를 교회 옆에 건축하여 50세대에게 나누어주었으며, 가난한 신학생 39명에게 장학금을 주어 목사 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목사가 되어서는 집을 팔아 교회를 개척하여 5,000명 교인으로 부흥을 시켰으나, 그런 것들은 하나도 상으로 기록되지 않았기에 천사에게 따져 물었더니, 그것은 이미 땅에서 국민훈장 받았고 문교부장관상 받았으며 학생들에게 명절 때마다 감사를 받아버렸으니, 천국에서는 그 일로 상을 줄 것이 없다고 한다.’ 또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이 세상 도시들과 같은 주택들로 만들어진 도시가 있는가 하면, 빌딩들로 이루어진 곳도 있다. 어느 곳을 가니 높은 빌딩들이 있었다. 나는 천사에게 저 높은 빌딩들은 누구의 집이냐고 물었다. 그 빌딩들 중에는 미국의 전도왕 00 선생의 집도 있었고, 한국의 전도왕 00 목사의 집도 있었다.’
이 목사님은 도저히 제가 따라 갈 수 없는 유명한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안타까운 것은 이 분이 바라보는 하나님은 성경 속 하나님이 아니라, 이 분이 꿈에서 체험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분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은 차별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과 똑같습니다.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주는 세상의 원리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은혜의 하나님이라 부르고, 사랑의 하나님이라 부르는데 과연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나요? 하나님이 왜곡되어 있고, 그로 인해 기독교가 변질되어 있는 것입니다.
4. 태초에
오늘 성경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성경에서는 ‘태초에’라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의 지식으로도, 사람의 경험으로도, 사람의 상상력으로도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하나님께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태초는 시간도 생기기 전입니다. 공간도 생기기 전입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모든 것들도 생기기 전입니다. 바로 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은 태초 이전부터 계셨다는 선포입니다. 시간, 공간적으로 유한한 사람의 기준에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경지, 생각도 할 수 없는 경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 그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생각나는 대로 막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속성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에 따라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앞서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태초에’는 사람의 유한함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그 어떤 지식으로도, 사람의 그 어떤 경험으로도, 사람의 그 어떤 상상력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지배하고, 압제하고, 다스리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무 걱정 없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그것이 바로 오늘 ‘태초에’입니다.
5. 하나님이 기준
학교에서 운동장 조회를 할 때 학생들을 질서 있게 세우기 위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란히 합니다. 그리고 줄을 맞춥니다. 군대에서도 그렇습니다. 제일 먼저 하는 것이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 기준에 따라 질서가 확립됩니다. 집안에서도 기준이 있습니다. 보통 가장이 기준이 됩니다. 회사에서도 기준이 있습니다. 대개 사장이 기준이 됩니다. 그 조직이 질서가 있고, 그 조직이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기준이 명확하게 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기준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기준이 잘 못 되면 모든 것이 망가져 버립니다. 그만큼 기준은 중요한 것이고, 그만큼 기준이 된 자는 그 역할을 잘 해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움직이는 여러 법칙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세상 속 진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며, 세상 속 원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속 진리와 원칙은 그때그때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기준이 되느냐에 따라, 무엇이 기준이 되느냐에 따라, 그리고 언제가 기준이 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바뀌면 나라의 통치 기준이 달라집니다. 교장 선생님이 바뀌면 학교의 운영 기준이 달라집니다. 사장이 바뀌면 회사의 경영 기준이 달라집니다. 세상에는 참 기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 기준이 없기에 세상에는 참 진리와 참 원칙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태초에’는 하나님의 기준 되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태초에 만물을 지으셨고, 그 만물 중에 우리 사람이 포함되어 있으니,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야 견고하게 세상 속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이 기준임을 인정하고 그 원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데, 오직 사람만이 그 기준을 흔들어 버립니다. 자신이 기준이 되겠다고 합니다. 자신이 기준이 되어 하나님마저 바꾸어 버립니다. [출애굽기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거나, 하나님의 그림을 그려서 그것을 우상화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는 너의 마음 속에 너의 임의의 하나님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근거,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 ‘태초에’입니다.
성도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사실을 인정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실은 하나님이 기준 되심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좋아하셨던 하나님의 심정으로 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기준 되심을 자랑스러워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즐겁게 다 누리며 사시는 우리 모두 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