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원고는 2016년 12월 4일 다누림교회 주일예배 설교 원고였습니다.
본 문 : 느헤미야 1:1-11
0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02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0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0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05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0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0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0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09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10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1. 성경에 관한 오해
제가 설교할 때나 성경공부를 할 때 가끔씩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두 마리 개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하시는 분, 계십니까? 한 마리는 편견이라는 이름의 개이고, 다른 한 마리는 선입견이라는 이름의 개입니다. 예. 사람은 누구나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두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저 나름의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고,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 편견인지 모른 채 언제나 그것이 옳은 생각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 선입견인지 모른 채 언제나 그것이 바른 생각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니까 결국 편견과 선입견이 신념의 단계로까지 진화하게 됩니다. 결코 물러설 수 없고, 결코 양보할 수 없고,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신념으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지난주 TV에서 한 토크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한 여성 방청객이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자기 부부는 그야말로 아무 문제가 없는 부부라는 것이었습니다. 바깥 일, 안의 일, 시부모와 친정부모 모시는 일, 또 자녀를 키우는 일 등, 모든 일에 그 부부는 언제나 한 마음 한뜻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싸울 일이 전혀 없고, 늘 고요하고, 늘 평안하고, 늘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이상적인 가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 반전은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이 집의 모든 상황이 돌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부간에 정치적 관점, 정치적 견해, 정치적 지향점이 너무나 달라서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부부는 서로 입에 거품을 물고 싸우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물러섬이 없고, 결코 양보가 없고, 결코 타협이 없고, 늘 평행선을 달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치가 부부싸움의 빌미가 되어 심한 경우에는 며칠씩 각방을 쓸 때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될 수 있는 대로 정치 이야기는 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집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단 정치 이야기만 하지 않으면 가정에 평화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반대의 경우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치적 의견은 언제나 일치하는데 바깥 일, 안의 일, 부모 모시는 일, 자녀를 키우는 일 등, 나머지 일에서 언제나 의견 충돌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각방을 쓰는 것이 아니라 벌써 남이 되었을 것입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무슨 글자가 됩니까? ‘남’이라는 글자가 됩니다. 예. 벌써 남이 되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부가 다른 때는 멀쩡하다가 왜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그렇게 돌변을 할까요? 그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정치적 신념이 너무 확고하게 정립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에 관한 일반적 상식이나 지식이 어느덧 편견과 선입견의 단계를 거쳐서 상대방은 무조건 틀렸고 나만 옳다는 신념의 단계로까지 발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 어떤 사안에 있어서 신념을 갖게 되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습니다. 물러서지도 않고, 양보하지도 않고, 타협하지도 않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싸움을 하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상처만 입히고 결국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자가 주장하는 그 신념이란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주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의 기준이 무엇이라고 말씀드렸습니까? 그 기준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옳다고 주장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옳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옳지 않다고 주장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으면 그것은 결국 옳은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의 기준은 사람의 상식, 사람의 지식, 사람의 지혜가 아니고, 사람의 편견이나 사람의 선입견도 아니고, 사람의 신념도 결코 아닙니다. 그 기준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에서도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 이게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일입니다. 여러분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는 곳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품과 모양,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 하나님의 가치와 원리가 기준이 되는 곳, 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옳은 것만 존재하는 곳이어야 하겠습니까, 옳지 않은 것도 존재하는 곳이어야 하겠습니까? 옳은 것만 존재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예. 당연히 이런 결론이 나와야 합니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의 기준은 하나님뿐이고, 교회는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는 성도들이 모인 곳이기에 교회는 언제나 옳은 것만 존재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이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 증거가 교회에서 싸움이 그칠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항상 옳은 것만 존재하면 당연히 갈등과 시기와 다툼과 싸움이 없어야 하는데 교회에서 싸움이 끊이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사당 다음으로 가장 많은 싸움이 일어나는 곳이 교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 교회에서 이렇게 많은 싸움이 일어나겠습니까? 그 이유는 교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모양,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 하나님의 가치와 원리는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람의 성품과 모양, 사람의 심정과 마음, 사람의 가치와 원리가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상식, 사람의 지식, 사람의 지혜, 사람의 편견, 사람의 선입견, 사람의 신념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옳고 그름을 따지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요? 그 과정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하나님 스스로를 소개하는 성경을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상식, 사람의 지식, 사람의 지혜의 관점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게 이해된 하나님과 성경이 편견과 선입견의 단계를 거치면서 신념으로 발전되고, 그 사람의 신념에 따라 하나님과 성경이 또 다시 변질되고, 또 다시 각색되고, 또 다시 왜곡됩니다. 그 변질되고, 각색되고, 왜곡된 하나님과 성경을 기준 삼아 교회가 존재하고, 그 변질되고, 각색되고, 왜곡된 하나님과 성경을 기준 삼아 목사와 성도가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 내에 갈등과 시기와 다툼과 싸움이 넘치는 것이고, 오늘날 교회가 제 역할, 제 기능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 오늘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게 된 첫 출발점은 바로 성경에 대한 사람의 그릇된 인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사람의 오해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2.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오해
성경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지, 성경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그릇된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여러분께 여쭈어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하는 말이 맞는 말인지 혹은 틀린 말인지 여러분께서 한번 분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이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럼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즉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오롯이 하나님의 말씀만 기록한 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과연 그럴까? 그것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 오늘 ‘제2회 다누림교회 성경 골든벨’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성경 구절을 읽어드리면 그 말이 누구의 말인지 맞혀주시면 됩니다. 모두 일곱 문제를 드릴 터인데 가장 많이 맞혀주신 한 분에게는 올해의 맨 마지막 주일이 성탄주일인데, 그 성탄절에 푸짐한 상품을 준비해서 증정해 드리도록 약속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은 기대는 하지 말아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첫 번째 문제입니다. 끝까지 잘 들으시고 정답을 아시는 분은 자기 이름을 크게 외쳐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말은 누가 한 말일까요? 이 말은 뱀이 한 말로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간교한 들짐승 뱀이 한 말입니다. 예. 성경에는 말을 하는 짐승도 등장합니다. 어찌 보면 이솝동화 같기도 합니다.
두 번째 문제입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이 말은 누가 한 말일까요? 이 말은 아벨을 죽인 가인이 한 말로 창세기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인이란 존재가 얼마나 뻔뻔한 존재인지, 얼마나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존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문제입니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이 말은 누가 했을까요? 이 말은 모세가 한 말로 출애굽기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 즉 죄인은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는 존재이기에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문제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 문제는 조금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동안 탄 OO이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이 말은 누가 했을까요? 이 말은 나귀가 한 말입니다. 짐승이 한 말입니다. 민수기 22장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으로 오늘 오후 성경 통독시간에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짐승도 알아보는 하나님을 사람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다섯 번째 문제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이 말은 누가 했을까요? 이 말은 신접한 여인이 한 말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신접한 여인을 통해 사무엘이 한 말로 사무엘상 2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죽은 자까지도 불러들이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목격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여섯 번째 문제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말은 누가 했을까요? 이 말은 욥의 친구 빌닷이 한 말로 욥기 8장에 기록되어 있는 말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사업체 벽면에 액자 형태로 가장 많이 걸려있는 성경 구절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또 성공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로 걸어두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문제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이 말은 누가 했을까요? 이 말은 마귀가 한 말로 마태복음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내용이 모두 세 가지인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일곱 문제를 풀어보았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도 기록되어 있었고, 짐승의 말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신접한 여인의 말도 있었고, 마귀의 말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따져보면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 즉 죄인의 말이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기록되어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쭈어 보겠습니다. 짐승이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이 자체로 옳은 말입니까, 옳지 않은 말입니까? 옳지 않은 말입니다. 마귀와 신접한 여인이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이 자체로 바른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다. 사람이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이 자체로 진리입니까, 진리가 아닙니까? 진리가 아닙니다. 예.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자체로 옳은 말, 자체로 바른 말, 자체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말은 맞는 말이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별로 없고, 죄인의 말이 가장 많은데 어떻게 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말이 바른 말이 되는 것일까요? 짐승의 말도 있고, 신접한 여인의 말도 있고, 심지어 마귀의 말도 있는데 어떻게 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말이 옳은 말이 되는 것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표현할 때, 여기서의 말씀은 ‘말’이 아니라 가르침, 교훈, 원리, 진리의 의미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즉 성경 창세기 맨 처음부터 요한계시록 맨 마지막까지 나오는 전체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궁극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가르침, 하나님의 교훈,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3. ‘성경은 위인전’이라는 오해
지금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경에 관한 편견, 선입견, 그릇된 신념을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첫 번째가 사람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말을 오해해서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전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짐승의 말, 마귀의 말도 있고, 특히 사람의 말이 가장 많이 있는데 그 말들이 자체로는 옳은 말, 바른 말, 진리가 될 수 없고, 그 말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전체로 묶여서 하나님을 드러낼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관한 두 번째 오해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성경을 위인전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 인물이고, 이스라엘이라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열심을 낸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왜 그 사람을 사용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그 사람이 한 일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게 엄청난 오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께 여쭈어보겠습니다. 사람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위인을 찾아 그 위인으로부터 어떤 삶의 교훈을 얻기를 원한다면 굳이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애국심을 배우고, 성실함을 배우고, 용기를 배우고, 인내를 배우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게 좋습니까, 그냥 위인전을 읽는 게 좋습니까? 그냥 위인전을 읽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 속 인물들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 인물들이 훨씬 더 위대하고, 훨씬 더 숭고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 인물들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 인물들이 훨씬 더 고결하게 살았고, 훨씬 더 많은 업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솔로몬이 알렉산더보다, 칭기스칸보다, 이순신장군보다, 세종대왕보다 나은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하나도 나은 게 없습니다.
아예 예수님의 삶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여쭈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위인의 기준에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합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라를 세운 인물도 아니고, 나라를 지킨 인물도 아니고, 영토를 확장한 인물도 아닙니다. 세종대왕처럼 이것저것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긴 것도 전혀 없습니다. 글자 그대로 빌빌하게 태어나서, 빌빌하게 살다가, 빌빌하게 죽으셨습니다. 위인의 모습이라고는 한 치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즉 성경은 위인전이 결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자꾸 위인전으로 접근합니다. 아무리 봐도 위인이 아닌데도 그 사람을 위인이라고 주장하니 자꾸 억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자꾸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본받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본받자고 하니 혼동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절대로 위인전이 아닙니다. 성경은 위인을 다룬 책이 아니라 죄인을 다룬 책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이익과 권리와 행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유익과 이익과 권리와 행복을 무참히 짓밟는 죄인의 모습을 다룬 책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4. 기도에 관한 오해
성경에 관한 세 번째 오해는 기도에 대한 오해입니다. 교회에서 워낙 기도가 강조되다 보니까 성경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다 옳은 사람, 다 바른 사람이고, 기도의 내용도 다 바른 기도, 다 옳은 기도일 것이라고 사람들이 지레 짐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위대한 신앙의 사람도 아닐 뿐더러 기도의 내용도 결코 바른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금 전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은 위인을 다룬 책이 아니라 죄인을 다룬 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의 유익과 이익과 권리와 행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유익과 이익과 권리와 행복을 무참히 짓밟는 죄인의 모습을 다룬 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합니다. 그 사람의 기도가 위인의 기도이겠습니까, 죄인의 기도이겠습니까? 죄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유익과 이익을 구하기 위한 기도이겠습니까,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구하기 위한 기도이겠습니까?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기도입니다.
성경 속 인물의 기도가 얼마나 황당한 기도인지 얼마 전 에스라 설교를 할 때 한나의 기도와 솔로몬의 기도를 통해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다윗의 기도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해서 임신을 시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나단을 보내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의 징계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일어날 일을 먼저 말씀해주시고, 그 다윗의 행동을 통해 죄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여하튼 아이가 죽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단으로부터 들은 다윗은 금식기도에 들어갑니다. 그 내용이 [사무엘하 12:16-17],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입니다. 예. 다윗이 식음을 전폐하고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아이는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즉각적으로 기도를 거둡니다.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한 후에 왕궁으로 돌아와서 음식을 먹습니다. 이것을 본 신하들은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아이가 죽자마자 돌변하는 다윗의 행동이 신하들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된 일이냐고 다윗에게 묻습니다. 그때 다윗이 하는 이야기가 아주 압권입니다.
그 내용이 [사무엘하 12:22-23],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시험해 본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겨서 혹시 아이를 살려주실지 하나님을 시험해 보았다는 말입니다. 즉 다윗의 기도는 죽어가는 아이를 위한 간절한 기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이를 반드시 살려야겠다는 간절한 기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만약 아이를 반드시 살리고 싶었다면, 그리고 그동안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했다면 다윗은 기도를 그만 두어야 합니까, 아니면 죽은 아이라도 부여잡고 하나님께 더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당연히 후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죽자마자 바로 기도를 그만 두고 다시 먹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이 왜 그랬을까요? 다윗은 왜 아이가 죽자마자 즉각적으로 기도를 거두었을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여쭈어보겠습니다. 다윗에게 그 아이가 꼭 필요한 아이였을까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아이였을까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아이입니다. 아니 어쩌면 없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다른 아내를 통해 얻은 아이들이 많이 있는 상황에서 한 명이라도 아이가 더 태어나면 후일에 왕위를 둘러싸고 복잡한 일이 벌어질 게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예. 다윗은 그 아이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기도를 올린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다윗의 행위를 책망하며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니까 가만히 있기가 그렇습니다. 뭔가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보이기 위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도, 간절한 기도, 진심의 기도가 아니라 그냥 꼼수로 기도를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 죄인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기도했다고 해서 신실한 게 아니고, 기도의 내용 또한 바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 기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5. 느헤미야의 말이라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관한 대표적인 오해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성경이 위인전이 아니고, 성경 속 기도라고 해서 다 옳은 기도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오늘부터 시작되는 느헤미야 강해설교의 방향을 여러분께 바르게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여러 가지로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이런 때일수록 대한민국의 기독교 성도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기도해야 한다는 문자메시지나 카톡이 제게도 제법 들어옵니다. 그중의 한 토막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우게 하소서. 느헤미야와 같은 심정으로 나라와 민족, 교회와 가정, 나 자신을 위한 기도에 참여합시다.’ 이런 메시지를 얼마 전 한 목사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 메시지 속에 들어있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느헤미야는 위인, 즉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자라는 의미입니다. 또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문자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느헤미야가 그런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생각을 잘하셔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땅의 역사를 다룬 구약 역사서의 맨 마지막 책입니다. 즉 연대기적으로 보면 느헤미야에서 구약의 역사가 끝나고 약 400년 후 신약의 복음서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쭈어보겠습니다. 느헤미야 당시와 예수님께서 오시는 당시의 이스라엘을 비교해 보았을 때 이스라엘이 나아진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나아진 게 있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 이스라엘은 바사와 헬라를 거쳐 여전히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복음서에서 드러나듯 백성들의 삶은 고단 그 자체였습니다. 예.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더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렇게 간절히 기도를 했는데 이스라엘은 더 엉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야 할 정도로 더 망가져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두 가지 방식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간절한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 즉 느헤미야의 기도를 외면하셨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느헤미야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기도가 아니었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두 가지 결론 중 어느 결론을 취하시겠습니까? 첫 번째입니까, 두 번째 입니까? 저는 두 번째 결론을 취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다면 그것을 외면할 하나님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의 바른 기도는 반드시 들어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결론, 즉 느헤미야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기도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도 이 결론이 바른 결론이라는 것을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 [느헤미야 1: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라는 구절입니다. ‘느헤미야의 말이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느헤미야 전체에 기록된 내용은 그저 느헤미야의 말일 뿐이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 전반부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성경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말도 있고, 짐승의 말도 있고, 신접한 여인의 말도 있고, 심지어 마귀의 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에서는 아주 공개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느헤미야의 말일 뿐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말이기에 바른 말이 아니고, 느헤미야의 말이기에 자체로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을 우리는 성경에서 더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잠언입니다. 잠언은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가는 ‘솔로몬의 아가라’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언서들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이사야는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라고 시작합니다. 이사야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고, 에스겔은 ‘서른째 해 넷째 날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라고 시작합니다. 예. 대부분의 예언서들은 이런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분명히 알려주시는데도 사람이 혼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고, 사람의 말은 분명히 사람의 말일 뿐이라고 확실히 알려주시는데도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다 하나님의 말씀일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느헤미야의 말이라’라고 선언하는데도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고, 오늘날 교회가 목회자가 성도가 자꾸만 엉뚱한 길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쭈어보겠습니다. 느헤미야는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라고 시작합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느헤미야에서 느헤미야란 인물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인물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은 인물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은 인물입니다. 느헤미야가 위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에는 느헤미야의 기도가 참 많이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바른 기도이겠습니까, 자신만의 유익과 이익을 구하는 죄인의 기도이겠습니까? 죄인의 기도입니다. 예. 앞으로 진행되는 느헤미야 강해설교 속에서 이 세 가지 사실을 잊으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한 말씀만 더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주 성경의 열다섯 번째 책, 에스라 강해설교를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의 열여섯 번째 책, 느헤미야 강해설교를 시작하는 첫 날이었습니다. 제가 열다섯 번째, 또 열여섯 번째라고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날의 성경은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두 권의 책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 원본은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원래 한 권의 책으로 묶여져 있었습니다.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 같은 시대의 이야기이고, 또 그 흐름이 한 연결선상에 있기 때문에 한 권으로 묶인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BC 3세기에서 2세기 사이에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두 열두 지파인데, 한 지파에서 여섯 명씩 추천해서 모두 일흔두 명이 성경번역에 참여했다고 해서 보통 ‘칠십인역’으로 불리는 성경이 이때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일흔두 명이 사전 토의 없이 각자의 방에서 성경을 번역했는데 나중에 비교해보니까 그 내용이 모두 동일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두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분리해서 두 권의 책으로 나누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사람의 상식으로, 사람의 능력으로, 사람의 지식으로, 사람의 지혜로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을까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즉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분리되어 두 권으로 나뉘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분리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에스라에는 하나님의 사역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을 본토로 돌아오게 하셔서 다시금 하나님의 원리로 살아갈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 토대를 에스라가 망치는 과정까지가 에스라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에스라가 망친 토대를 이제 느헤미야가 더 망쳐놓는다는 내용입니다. 예. 에스라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느헤미야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분리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가 전혀 들어있지 않은 느헤미야는 느헤미야의 자서전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자기가 한 일을 느헤미야 자기가 기록한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서전에서 자기 자신을 나쁘게 묘사하는 일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이런 자서전에서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는 내용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오로지 자랑만 넘칠 뿐입니다. 오로지 업적만 넘칠 뿐입니다. 오로지 교만만 넘칠 뿐입니다.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될 느헤미야 강해설교를 충만한 기대감으로 기다려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