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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원고는 2017년 6월 4일 다누림교회 주일예배 설교 원고였습니다.
본 문 : 에베소서 1:1-1:2
0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0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 에베소서 개요
오늘은 6월의 첫째 주일임과 동시에 에베소서를 설교하는 첫날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서를 처음 설교하기 시작하는 날, 여러분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예배에 임하셨는지 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듯이 여러분들 또한 제 마음을 잘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아주 큰 기대와 아주 큰 설렘을 품고 오늘 에베소서 설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기대와 설렘은 이번 에베소서를 통해 제가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더 많이 알아가고,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역사하실 것인지에 관한 기대와 설렘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각 권의 책을 설교할 때마다 하나님은 제가 하나님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아갈 수 있도록, 또 제가 하나님을 향해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제게 풍성한 은혜를 더해주셨음을 저 스스로 경험하고 체험한 적이 아주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 권의 책을 온전히 설교하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성경 본문도 반복해서 많이 읽어보아야 하고,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 성경 이외의 다른 성경들은 어떻게 번역해서 기록하고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영어성경을 보아야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원어 성경을 더듬거리면서 보아야 하기도 합니다. 또 다양한 해설서나 참고 서적도 많이 읽어보아야 하고, 다른 목사님들은 과연 뭐라고 설교했는지 그들의 설교를 찾아서 들어보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설교를 하다 보면 벽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준비가 완벽하다고 하더라도 설교를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것인지 알아내기가 참으로 힘든 성경 구절이나 사건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 때도 그랬고, 여호수아 때도 그랬고, 에스라 때도 그랬고, 느헤미야 때도 그랬고, 마가복음 때도 그랬고, 갈라디아서 때도 그런 일이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너무나 친절하게, 너무나 자상하게, 너무나 세밀하게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도와주셨기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여섯 권의 책 강해설교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렇게 도우시고 그렇게 역사하신 것처럼 이번에도 그런 하나님을 틀림없이 만날 수 있다는 기대와 설렘이 제 마음 속에 가득한 가운데 지금 설교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의 이 기대와 설렘이 에베소서 설교가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도 차고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오늘은 기독교의 모든 원천이 되는 성경 일반에 관한 이야기를 간단히 나누면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먼저 여쭈어보겠습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은 모두 몇 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모두 서른아홉 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흔히 오경, 역사서, 성문서, 예언서 등으로 구분이 되는 구약은 모두 서른아홉 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서른아홉 권 중에서 권수를 기준 삼을 때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책들이 어떤 책들이겠습니까? 그 책들은 예언서로 모두 열일곱 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 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는 모두 몇 명이겠습니까? 열일곱 명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모두 열여섯 명입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와 예레미야애가의 기록자는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 구약 예언서는 모두 열여섯 명의 예언자가 기록한 열일곱 권의 책입니다.
그런데 이 열일곱 권의 책의 핵심 내용이 같은 내용이겠습니까, 전혀 다른 내용이겠습니까? 1번) 같은 내용이다. 2번) 다른 내용이다. 몇 번이 정답입니까? 정답은 1번)입니다. 같은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서에 기록된 내용은 예언자들 각자의 생각이나 철학이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가 다르고, 예언한 시기가 다르고, 예언을 듣는 대상이 다르더라도 예언의 내용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언서에 기록된 핵심 내용은 당연히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신약을 살펴보겠습니다. 신약은 모두 몇 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신약은 모두 스물일곱 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흔히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계시록 등으로 구분되는 신약은 모두 스물일곱 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 스물일곱 권 중에서 권수를 기준 삼을 때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책들이 어떤 책들입니까? 그 책들은 서신서로 모두 스물한 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스물한 권의 서신서중에서 가장 많은 권수를 기록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은 모두 몇 권의 서신서를 기록했습니까? 히브리서를 치면 열네 권이고 히브리서를 빼면 열세 권입니다. 여하튼 서신서의 2/3를 바울이 기록했고, 나머지는 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가 기록한 서신서들입니다. 그런데 이 스물한 권의 서신서의 핵심 내용이 같은 내용이겠습니까, 전혀 다른 내용이겠습니까? 1번) 같은 내용이다. 2번) 다른 내용이다. 몇 번이 정답입니까? 정답은 1번)입니다. 같은 내용입니다.
또 바울이 쓴 열세 권 혹은 열네 권의 서신서의 핵심 내용이 같은 내용이겠습니까, 전혀 다른 내용이겠습니까? 1번) 같은 내용이다. 2번) 다른 내용이다. 몇 번이 정답입니까? 정답은 1번)입니다. 같은 내용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신서에 기록된 내용은 서신을 쓴 발신자들의 생각이나 철학이나 주장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발신자가 다르고, 수신자가 다르고, 서신을 쓴 시기가 다르더라도 서신의 내용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서신서에 기록된 핵심 내용은 동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에베소서의 핵심 내용은 로마서나, 고린도전후서나, 갈라디아서의 핵심 내용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쓴 에베소서의 핵심 내용은 다른 사람이 쓴 베드로전후서나, 야고보서나, 유다서의 핵심 내용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발신자는 다르더라도, 수신자는 다르더라도, 서신을 쓴 시기가 다르더라도 서신서의 핵심 내용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똑같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고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은 열일곱 권이나 되는 예언서를 구약 성경에 포함시켰고, 스물한 권이나 되는 서신서를 신약 성경에 포함시켰느냐는 것입니다. 구약 예언서는 죄인 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구원의 약속이 핵심 내용이고, 신약 서신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성도를 향한 권면이 핵심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 내용은 이렇게 동일한 내용인데 하나님은 왜 예언서와 서신서를 여러 권의 책으로 나누어 엮어서 성경에 포함시켰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궁금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한번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밝히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계속해서 말해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딴청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여러 차례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사람들의 상황과 형편과 처지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상황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자기 속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상황과 형편과 처지 탓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주 다양한 형편과 상황과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향해 동일한 말씀을 하심으로써 결코 그들이 핑계치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책의 권수가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일이 예언서 시대의 죄인이나 서신서 시대의 성도에게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인에게도 성도에게도 하나님은 똑같이 반복적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죄인만 한번으로 알아듣지 못하고 금방 까먹는 존재가 아니라 성도도 여전히 한번으로 알아듣지 못하고 금방 까먹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또 죄인만 상황과 형편 탓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성도도 여전히 상황과 형편 탓을 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성도가 되기는 했지만 성도에게는 죄의 습성, 죄의 습관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배우고 익혀야 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에베소서가 성경에 포함된 의도도 동일합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서신입니다. 그러나 이 에베소서를 성경에 포함시킨 하나님의 의도는 결국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즉 작년 이맘때 성도인 우리가 열심히 공부했던 갈라디아서를 다 까먹었기 때문입니다. 또 까먹은 이유가 이런 저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성도인 우리가 그저 상황과 형편과 처지 탓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에베소서를 성경에 남기신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잘 이해하신 상태에서 이제 에베소서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1:1] 전반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이라는 기록이 있고, [에베소서 3: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에베소서 1:1] 후반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에 따라 에베소서의 발신자는 사도 바울이고, 수신자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연대는 주후 61년경입니다. 이 무렵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었는데 에베소서는 바울이 옥중에서 쓴 편지라고 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와 더불어 보통 옥중서신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바울의 옥중서신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서신서들은 어느 정도 공통적인 양식을 가지고 있는데,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인사입니다. 서신의 앞과 뒤에 위치하고 있고 외형상으로는 수신자와 발신자의 소개, 그리고 수신자를 향한 발신자의 문안인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소개와 문안인사 속에 내용상으로는 자기 정체성의 선언이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발신자가 어떤 존재인지, 수신자가 어떤 존재인지, 또 발신자와 수신자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으로 잠시 후에 자세히 살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서신서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양식 두 번째는 바로 하나님의 사역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지으셨는지, 사람이 어떻게 죄인이 되었는지, 죄인 된 사람을 향해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셨는지, 죄인 된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지,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서신서 내용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서신서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양식 세 번째는 바로 권면입니다. 두 번째 양식, 즉 하나님의 사역선언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에게 임했고 그 은혜로 인하여 사람이 변화되었습니다. 즉 사람 스스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주셨기 때문에 세 번째 양식, 즉 성도들을 향한 권면이 언급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해준 게 없으면서 권면을 하면 사람은 웃기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예. 대부분의 서신서는 이렇게 인사, 하나님의 사역 선언,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경우 시작하는 문안인사는 [에베소서 1:1-2]이고, 끝내는 문안인사는 [에베소서 6:21-24]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선언은 [에베소서 1:3-3:21]이고, 성도를 향한 권면은 [에베소서 4:1-6:20]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중에서 시작하는 문안인사인 [에베소서 1:1-2]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런데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하고, 에베소서의 첫 구절이기도 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오해가 성도들 가운데 아주 넓게 확산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 사이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도 사람에 따라 모두 제 각각이라는 사실입니다.
우선 많은 성도들은 현재의 부모를 만나고, 현재의 형제자매를 만나고, 현재의 배우자를 만나고, 현재의 자녀를 만난 것이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수원에서 살고 있는 것, 현재의 직업을 갖게 된 것, 현재의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이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사업이 잘 되지 않는 것도, 현재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것도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과연 사람의 생사고락과 길흉화복을 결정하는 그런 의미의 뜻이겠냐는 것입니다.
더 섬뜩한 경우도 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많은 교회에서 많은 목사나 많은 성도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세월호 침몰은 패역한 세대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라고 하면서 세월호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었습니다. 정말로 섬뜩한 주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과연 그런 의미의 뜻이고, 그런 방식으로 사람에게 전해지겠냐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은 홍길동이란 사람이 목사가 되는 것인데 그 홍길동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더니 결국 하나님께서 홍길동을 치시더라는 식의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홍길동이 목사가 되었다는 식의 말을 자주 듣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무조건적인 복종과 순종을 요구하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과연 그런 의미의 뜻이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송가나 복음성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오해할 수 있는 노랫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하늘 끝까지 따르리라.’ 이런 노래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또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사명이라는 노래의 노랫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사명이나 의무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과연 그런 의미의 뜻이겠냐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까지 합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지 못하면 하나님은 존재조차 할 수 없는 것인지 헷갈리기까지 합니다.
여러분께 여쭈어보겠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사람이 자신의 뜻을 이루어주기를 바라기만 하는 그렇게 무능력한 존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의 뜻을 먼저 이루기 위해 경쟁하고 대립하는 관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지시하는 존재이고 사람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존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 사람은 무조건 자신의 뜻을 거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만 하는 그런 존재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창조주이시지만 결코 사람 위에 군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배하지도 않으시고, 사람을 통제하지도 않으시고, 사람을 속박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 어떤 지시나 명령을 내리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하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천하 만물의 소유주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얻을 유익과 이익이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 인한 사람의 불편이나 어려움, 제한, 속박 등은 일체 존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사람에게 온전한 자유와 완벽한 의지와 완전한 선택을 보장하십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사람을 배려하시고, 사람을 후원하시고, 사람을 보장하시고, 사람을 책임지시고, 사람을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목적은 이처럼 사람의 안녕과 사람의 평안과 사람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기에 하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운명을 하나님 마음대로 조정하거나 바꾸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에베소서 1:1] 전반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이라는 구절이 우리를 조금 혼란스럽게 합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바울이 사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께서 기어이 이루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의 뜻도 사도가 되는 것이었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바울이 사도가 되고 싶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바울의 꿈을 무참히 짓밟은 잔인한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런 분이실까요?
여쭈어보겠습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저의 선택입니까? 저의 선택입니다. 저는 목사가 될 수도 있었고 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제가 선택해서 목사가 된 것입니다. 두 분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두 분이 교사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두 분의 선택입니까? 두 분의 선택입니다. 바울이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바울의 선택입니까? 바울의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만들기 위해 바울의 삶을 강제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사도가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 삼으시겠다고 뜻을 세우신 적이 없는데 왜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라고 표현하면서 마치 자신의 사도됨에 하나님의 뜻이 개입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은혜’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바울이 죄인이었을 때에,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배려와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알지 못했을 때에, 바울이 죄를 벗어나 성도가 되고 하나님의 사도가 되고 싶다는 일말의 인식도 뜻도 의지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 그래서 바울 스스로는 하나님의 사도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 너무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뜻으로, 너무나 감격스럽게도 하나님의 뜻으로 바울이 죄를 벗어나 성도가 되고 사도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바울을 사도 삼으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목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 간결하게 압축해서 표현하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에베소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뜻, 사람의 의지, 사람의 선택을 꺾은 하나님의 고집, 하나님의 독선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죄에 사로잡혀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이 사도임을 절대로 자랑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도라고 해서 다른 성도들과 결코 차별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고, 은혜는 결코 자랑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사도된 바울은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라는 존재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서신서의 저자들이 자신을 소개하는 신분은 사도, 종, 장로입니다.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고 기록하면서 자신이 종임과 동시에 사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이서 1:1], [요한삼서 1:1]에서 요한은 ‘장로인 나는’이라고 표현하면서 자신이 장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울이 주로 사용하는 종과 사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여쭈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사도가 되고 싶으십니까, 종이 되고 싶으십니까?’ 1번) 사도가 되고 싶다. 2번) 종이 되고 싶다. 3번) 생각해본 적이 없다. 몇 번이 정답입니까? 아마 대부분 1번) 사도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사도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와 종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사도는 아주 귀한 존재로 느껴지고 종은 아주 천한 존재로 느껴집니다. 솔직히 사도는 아무나 될 수 없는 존재로 느껴지고 종은 누구나 될 수 있는 존재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사도와 종이 이렇게 서로 충돌하는 의미일까요? 정답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 사도와 종은 상충되는 의미가 아니라 각각 성도의 다양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우선 종은 성도의 감격을 표현합니다. 종은 하나님께서 규정한 사람의 신분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자원한 신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종 삼은 것이 아니라 사람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왜 사람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구원받은 성도가 자신이 죄인이었을 때 어떤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되고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 너무나 감격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을 낮춘 표현이 바로 종입니다.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신분과 소속이 바뀌어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감격적인 표현이 종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표현하는 종 안에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 종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이 아니라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주체하지 못하고 너무나 감격한 마음에 자원하여 스스로에게 붙인 호칭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구약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종이라고 부르신 적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묻고 싶은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여호수아 1: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 1: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라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고 싶은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예. 구약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종이라고 부르신 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생각하는 종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종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사람은 일꾼의 의미로서 종을 떠올리지만 하나님은 보호의 대상으로 종을 언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은 주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책임과 하나님의 역할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한 반어적 표현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을 종 삼는 일은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종 삼으시고 종이라고 불러주시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바울이 표현하는 사도라는 신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포스톨로스’인데 ‘파견하다, 보낸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포스텔로’에서 파생한 말입니다. 즉 사도는 어떤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송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사도에 대한 오해가 발생합니다. 사도는 파송을 받은 사람이니까 파송을 한 존재가 있을 터인데 그 파송을 한 존재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를 귀한 직분, 아무나 할 수 없는 직분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도라고 표현할 때 사도의 존재적 의미를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의 기능적 의미, 사도의 역할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즉 바울이 말하는 사도는 계급이나 직급이 아니라 성도의 역할을 표현하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즉 사도는 내부적으로 다른 성도들과 차별된 권위와 신분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으로 불신자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의 근거로 사용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성도들은 복음을 소유하고 있고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소유하고 있고 불신자들에게 전하고 있는 복음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또 성도들이 불신자들을 위해 행하는 사역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또 성도들이 불신자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은 사람의 보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신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은혜를 선언하는 성도는 모두가 하나님의 사도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사도라는 표현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고 바울이 바로 그런 자가 되는 것입니다.
4. 성도들과 신실한 자들에게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에베소서 1:1] 중반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헬라어로 ‘하기오스’라고 하는데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카보드’로 표현되고 있고 의미는 거룩한 자, 구별된 자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단독적 호칭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나님께로 구별된 자, 하나님에 의한 자,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성도는 사람 스스로 이루어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이루어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말 속에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가 있음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또 바울은 성도를 신실한 자라고 부릅니다. [에베소서 1:1] 후반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실한 자는 믿음이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쭈어보겠습니다.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까, 누군가가 주는 것입니까? 누군가가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믿을 수 있도록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성도를 신실한 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은 자,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신실한 자라는 말 속에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가 있음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만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그 은혜를 영원무궁토록 누릴 수 있도록 보장을 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성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신실한 자의 완전성, 영원성을 확증해 주는 표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존재함으로써 성도됨이 안전하게 보장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 삼은 교회로 연합되어 하나님의 책임 안에 있음을 아주 많이 강조합니다. 즉 성도는 장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이미 온전한 성취를 이룬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죽어서 천국 가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천국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5. 은혜와 평강
지금까지 [에베소서 1:1]에 등장하는 여러 표현들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의미를 살펴보았고, ‘사도’의 의미를 ‘종’의 의미와 연결하여 살펴보았고, ‘성도’의 의미, ‘신실한 자’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표현들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였고,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성도였고, ‘성도’와 ‘신실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로 구별된 자, 하나님께로 속한 자의 의미였습니다.
이 내용을 토대로 [에베소서 1:1]을 풀어서 기록하면 이렇게 됩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자의 길을 택한 나 된 바울은 나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신실한 믿음을 소유하게 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노니’가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은 온통 하나님의 은혜의 선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선언합니까? 그 이유가 [에베소서 1:2]에 나오는데 바로 평강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율적으로 행하기를 기대하시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은 도우십니다. 그런데 사람 스스로는 결코 평강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평강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내용이고, 그 평강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우시는 방법이 바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전개될 편지의 내용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의 사역을 확인하여 에베소 성도들에게 선포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평강의 사역을 에베소 성도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포는 오늘날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떻게 일하셨는지,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변화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앞으로 펼쳐질 에베소서 설교를 통해 하나하나씩 점검해 나가시는 우리 다누림의 성도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