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1:1~5 참 자유의 대헌장
사순절 복음의 메시지가 강렬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것에 있다.
예를 들어 어른이 애기 옷을 입는다고 생각해보라 답답해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께서 사람이 되신 일은 천지를 지으신 이가 자기를 인간수준으로 낮추신 일이었다.
사람이 되신 것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 대속물로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드리셨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人子)란 말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인자라고 부르셨는데, 또한 인자는 구약에서 희미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두고 부른 것이다.
단7:13~14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구약에서도 아주 가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났는데, 사람 같이 보였다는 것이다.
겔1: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그런데 그 분은 바로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로서 메시야를 대망하였다. 또한 그것은 모든 히브리인들의 대망이었다. 다윗같은 메시야가 오길 대망했다. 바울은 베냐민 지파였는데, 베냐민 지파는 사울왕 곧 하나님께 뼈아픈 매를 맞고 몰락했다가 구약 후기 모르드개를 필두로 다시 대나무 같은 지조로 일어선 지파인데, 모르드개는 조상 사울왕이 주의 계명을 가볍게 여기고 사람을 두려워하여 폐위되었던 실책을 거울 삼아, 권세가 하만의 압박에서도 사람에게 굴복하지 않는 지조를 가졌을 것이다. 아무튼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부림절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또한 이스라엘은 애굽 종살이 같은 바벨론 유수기를 경험하였는데, 포로기 이후 모세의 예언을 상기하며 계명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숭배를 하여 벌받은 것을 깨닫고, 이 때 모세가 신명기나 레위기에서 일찍이 예언했던 가르침을 기억하여 율법준수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는 베냐민 지파와 더불어 이스라엘에게 계명준수를 너머 자리잡은 갑옷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이사야가 말하였던 것처럼 내 의는 누더기로구나! 옷이 바람에 벗겨지듯이, 그의 율법주의가 단번에 벗겨지고 말았다. 바울이 복음을 받아 깨달은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 민족을 위한 유월절 어린양이였구나! 예수가 유월절 어린양이셨네! 그런데 예수님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메시야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때부터 메시아가 예수이신 줄 알고, 이후 급진적으로 이방인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율법에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가 깨달은 것은 율법으로는 구원받지 못하는구나. 바울은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바울이 받았던 충격은 엘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대속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건이다. 이는 우리를 죄와 죽음과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케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자기 자신을 버리신 사건으로 바울의 삶에 강렬하게 각인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렇게 말한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바울은 이것을 사람을 통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다메섹 도상에서 ‘직가’라는 거리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위~잉 비행기가 착륙하듯이 바울 위로 착륙하셨는데, 이 때 바울이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이때 바울은 영적으로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마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바울은 마치 다윗의 물매돌에 맞아 앞으로 고꾸라진 골리앗 같이 쓰러져 삼일을 식음을 전폐하고 복음을 묵상하였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우리를 죄와 죽음과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 자유케 하시고 자유를 주신 예수님이 바로 주님이구나!
율법은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존재한다. 그리고 율법은 우리가 육체가 있어 땅에 매어 있을 동안 필요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 그리고 다시 올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의 삶이 예약되어 있는 것이므로 자유가 있고 기쁜 것이다. 감사한 것이다.
그런데 대속물로 오신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웃으신 모습이 보이지 않으셨다고 한다. 기뻐하는 것은 있으셨으나,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비장한 각오와 진지하심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메시야의 십자가 사건을 생각하면 엄숙해지는 것이다.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 보통 거듭나는 것은, 대개 개인 전도나 또는 성경을 읽다가 또는 교회에서 예배시간 중에 구원의 계시를 받아서 구원을 받는데, 바울은 성경을 읽은 것도, 전도를 받은 것도, 예배당에 들어간 것도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넣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 직가라는 거리에서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행9:4~5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갈라디아는 1차여행 때의 행선지에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과 가까운 지역인 것으로 보인다.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길 원하노라. 은혜와 평강이 없으면 교회는 못산다.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 바울의 충격은 메시야가 바로 전능자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대속물로 드리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배라면, 뱃머리와 뱃고물은 다 예수 그리스도인데, 바울은 갈라디아서 서두에서부터 십자가 사건을 선포하고 있다.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송축한다.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주의요소가 들어와서, 복음이 약해지거나 또는 복음에서 떠나는 혼합주의 혹은 이단처럼 되는 흐름이 있었던 것 같다. 할례를 강조하거나, 율법을 강조함으로 인하여 복음을 은혜를 잊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스데반처럼 변론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기한 것은 율법주의는 유대인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이방인인 우리에게서도 때론 의식이 복음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질 때가 많다. 나부터 경건이 중요하지만, 복음이 아니라 행위를 붙잡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새벽기도가 중요하지만, 복음에 대한 감사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새벽기도를 마쳐야 마음이 편한 것이다. 물론 습관적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당연하고 중요한 것이지만, 자칫 행위가 복음보다 앞설 때에, 그것 자체가 딱딱하게 화석화 될 때, 본질이 가려진다. 그러면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잊게 된다. 물론 의무가 중요하다. 그러나 내면에서 우선순위가 뒤바뀔 때, 이방인도 똑같이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하여간 율법주의는 평생 바울을 거머리같이 그림자같이 따라다녔는데, 갈라디아지방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서두부터 십자가를 자랑으로, 십자가로 옷입고 오직 예수 십자가만 믿음으로 십자가를 강조한다. 사실 예수 십자가를 놓치면 다 놓치는 것이다. 아무리 율법으로 90점 맞고, 구제와 봉사를 95점 맞고, 교제를 97점 맞아도, 새벽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를 99점 맞아도 십자가를 놓치면 밑빠진 독에 물붓기인 것이다.
율법과 복음이라는 논쟁에서, 종말론적으로나, 삶으로 보나 언제나 우위는 복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갈라디아서를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독립선언서 혹은 대헌장이라고 말한다. 율법이 폐위 되었다는 말은 폐위 되었다기 보다는 갈라디아서에서 논증하듯이 율법이 초등교사로 초등학문으로 내려가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메시지의 역사성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모세는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볼 때 율법은 폐기될 것이다. 그리고 처음의 에덴동산 같이 계명이 한 두 개로 축소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새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예수께서 율법과 복음을 두고 새 포도주와 새 부대 낡은 가죽부대로 비유하셨는데,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것은 율법이 필요없어서 폐기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새 부대가 생겼기 때문에, 낡은 가죽부대는 밀려나게 된 것을 말한다. 율법은 역사성에서 복음의 뒤로 밀려났고, 초등교사같이 되었다. 율법이 부족해서라기 보다 더 나은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율법이 마침이 되고, 율법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려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고등수학선생이 생겼기 때문에, 초등산수선생이 내려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배우는 입장에서 고등수학을 하더라도 삶에서 초등산수 구구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도는 복음을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고 자유를 얻었고, 율법 아래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차원을 능가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 안에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의 차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는 내용 곧 자유를 갈라디아서에서 먼저 제시하고 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갱신되었고 마침이 되었고 완성되었다.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요19:30 다 이루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구원받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과 율법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다. 자유를 주셨다. 이 가장 큰 터 반석 위에서 성도는 나머지 율법도 지키고 구제도 봉사도 할례도 감사로 자유로 모든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거꾸로 되면, 율법도 지키고 구제도 봉사도 하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아틀라스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복음의 자유를 붙잡고 감사하며 믿음으로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