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명을 썼는가? 요셉을 생각하고 참아라
며칠 전, 일기장을 뒤적이다 믿음의 어머니에 관한 일기를 발견했습니다. 일기장에 적힌 내용은 이런 겁니다.
어머니는 주의 종을 극진히 섬김은 물론이고, 성전건축이라면 아낌없이 헌금을 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에서 누군가 성전건축헌금에 손을 댔고, 이 사실이 들통나자 어머니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통에 어머니가 곤란한 지경에 처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진실을 밝히자.’라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목사, 그 사람이 살겠다고 나를 밟은 건데, 내가 살아보겠다고 그 사람을 다시 밟으면 나는 과연 하나님의 사람일까?”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대구 어느 목사님의 사모님이 돌아가신 후 교회 집사가 밥을 해주기 위해 사택을 드나들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집사의 배가 점점 불러왔습니다. 교회는 웅성거렸고, 공공연히 목사님의 아이라는 소문까지 돌자 장로들이 그 집사를 불러 “목사님 아이지?” 하고 추궁했는데, 아뿔사, 그 집사가 “네.”라고 대답한 겁니다. 당연히 목사님은 내쫓겼지요. 그리고 대구의 앞산에 텐트를 치고 생활하셨습니다.
드디어 그 집사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교회의 장로들이 핏덩이를 목사님에게 던지듯 넘겨줬습니다. ‘네 자식, 네가 거둬라’ 이거지요. 그래도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어린 것을 암죽을 끓여 먹이며 정성껏 키웠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고, 부흥사가 모두 회개하라며 통성기도를 시켰는데, 이때 밥을 해주던 그 집사가 성령에 이끌려 방성대곡하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이는 목사님의 아이가 아니라 시아주버니의 아이’라고 실토한 것입니다.
다급히 교회에서는 긴급회의가 소집되었고, 사죄하는 심정으로 다 같이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장로들은 ‘왜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잘못했으니 이제 교회로 돌아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허허 웃으시더니 아이를 엄마에게 보내며 지금 계신 목사님이나 잘 섬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교회를 개척하셨는데, 지금 대구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실화입니다.
저도 괜한 누명, 오해로 억울한 일이 많았습니다. 제 성격 같아서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처했겠지만,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그들을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주위에서 ‘맞고소해라’ 했지만 안 했습니다.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찌니라”(잠24:29)는 말씀도 저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누명을 썼습니까?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까? 요셉을 생각하며 한번 참아보지 않으시렵니까? 형제들에 의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가정에 들어가 신임을 얻게 되어, 가정제반사를 위임받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디발의 아내가 아무도 없는 틈을 기해 젊은 요셉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창39:9). 그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되레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누명을 씌웠고, 결국 요셉은 옥에 갇힙니다. 그래도 요셉은 해명 변명 안 했습니다. 분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잠15:3)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때가 되매 하나님이 바로의 꿈을 해몽케 하셨고, 실세 총리가 되어 나라를 건지는 영웅이 되게 하셨습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윤회가 젊은 시절 시골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자 어느 집 마당에 머물고 있는데, 마침 주인집 아이가 대청마루에서 진주를 가지고 놀다가 떨어뜨리니 그 밑에 있던 거위가 냉큼 삼켜버렸습니다. 윤회가 봤지요. 아이가 마구 울어대자 주인은 윤회가 훔친 것으로 의심하고, 그를 결박 지어 아침에 관가에 고발하려 했습니다. 윤회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윤회는 거위에게 가서 구슬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구슬이 거위의 배변에서 나왔지요. 이를 본 주인이 사죄하며 “어제는 어째서 말하지 않았는가?” 물었더니 그 왈, “어제 말했다면 당신은 거위 배를 갈라 구슬을 꺼냈을 거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은 임금 귀에까지 들렸고, 임금은 이런 자가 백성을 돌봐야 한다며 그에게 도승지라는 직분을 하사했습니다. 그가 잠시의 욕을 참고 변명하지 않았기에 영광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억울한 일, 모함을 참아내고 하나님만 의지하면 요셉처럼, 윤회처럼 영광의 보좌가 당신의 것이 됩니다.
다윗도 요셉 못지않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쳤고, 이스라엘의 장군이 되어 가는 곳마다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외치며 다윗을 칭송했습니다. 이런 백성들의 외침이 커질수록 사울의 시기도 커져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다윗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억울했지요. 공을 치하해도 모자란 판에 죽이려 하다니요. 그러나 다윗은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왔어도 절대 해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삼상24:4). 그러자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사울과 그의 아들까지 한꺼번에 하나님이 손을 보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12:20),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롬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까지 하셨습니다. 억울해 죽겠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이럴 때 우리 주님을 생각해봅시다.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시 소리 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막15:12~15).
여러분, 이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슨 악행을 행하셨습니까? 병든 자 고쳐주고, 귀신 들린 자 쫓아내서 자유케 하고, 천국 복음을 전하셨을 뿐인데 살인마인 바라바보다 더 죄인 취급을 받은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주님이 해명하셨습니까? 아니요.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잠잠하셨습니다(사53:7). 그리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결과 하늘과 땅의 권세를 하나님께 부여받았고 (마28:18), 만물이 그 이름 앞에 복종하게 된 것입니다(빌2:10).
여러분,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인의 소행이요, 선을 선으로 갚은 것은 보편적인 사람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합니다. 이것이 악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그럴 때 공의의 하나님이 우리를 신원해주십니다. 나 대신 악인을 벌하시고, 내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내 잔이 넘치게 하십니다.
역대하 24장에 하나님이 여호야다의 아들 제사장 스가랴를 통해 요아스에게 경계의 말씀을 보내자 요아스는 그를 죽여버립니다. 스가랴는 죽으면서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라고 했고, 1년 후, 하나님은 요아스가 전쟁에서 참패하게 하셨고, 요아스는 신하에 의해 살해되고 맙니다. 신원하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20:22).
여러분, 억울해서 가슴에 화가 쌓이면 내 몸만 축납니다. 요셉처럼, 다윗처럼, 제 믿음의 어머니처럼, 그리고 저처럼 원수를 바라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주님이 다 해결하시고,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실 겁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시37:5~9). 할렐루야!
나 살자고 남을 죽이지 말고
요셉처럼 주님을 바라보자
너 자신부터 마음을 넓히면
못 담을 사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