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대~2대 면조(冕朝) 종약장
--- 최초 종약소 창립, 전국 통일 전씨종보(갑자보)를 발행
○ 시조로부터 44세손( 정선군 복야공파 )
○ 1871년 안산리제(安山里第) 출생
○자(字)는 헌경(軒卿), 호(號)는 만제(晩齊)
의왕(義王) 이강(李剛) 제호(題號) 돈애당(敦愛堂)
○ 1906년 육군 참령
○ 고종, 순종 국장시 별배종(別陪從) 및 장의원(葬儀員)
○ 강릉군 월호평(月乎坪)땅 ‘일만평’을 사패지로 하사받아 이 땅을 숭인, 서운 양재에 기증
○ 전씨종약창립, 초대 종약장(1917.9~ 1927.1)
○ 1919년 8월 20일, 전씨종약휘보 창간
○ 1942년 1월 8일 향년 72세로 졸하시다.
○ 최초로 전씨대동종약 총칙 24조와 세칙 16조를 제정하였다. 그리고 전씨 가장(家章)마크(1916. 9. 22 백시용씨)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전씨종약증을 발행하는 한편 종약원을 3종으로 구분하여 1)특별유공종약원 2)유공종약원 3)통상종약원으로 구분, 휘보를 구독, 임역원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며 언권과 결의권을 주었다.
1919년 전씨종약휘보를 발행키로 하고 1918년 지난 2년간의 종약소의 “수입지출보고서”를 작성하고 종약소의 “자산부채표”를 만들어 발표함은 놀라운 결단으로 공명함을 기록하고 공신력을 보여준 점은 발전적인 종친회 미래상을 약속한 것은 좋은 실적이다.
○ 면조(冕朝) 종약장은 제2기 연임에서는 전씨총보(全氏總譜)의 발행을 위해 대결단을 단행하고 평의원을 설득하고 지방대표들 300여 명을 소집하여 3일간 역사적인 총보의 발행을 역설하고 이들 난제를 종약장의 위임으로 결의안이 통과되어 드디어 전씨총보(全氏總譜: 2700면 13권) “1924년 발행 갑자보(甲子譜)”를 성공적으로 출판하는데 이바지한 면조(冕朝) 종약장의 업적은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종약소 최초로 전국 13도(1896년 8도에서 13도로 개편)의 산재한 전씨종인은 물론 당시 중국의 간도지방(間島地方) 북간도, 서간도까지의 전씨종인(全氏宗人)을 망라한 족보수단(族譜收單)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 상상된다. 그야말로 전국 통일족보(統一族譜)나 다름없다는 사실이다.
갑자보에서 볼 때 시조 환성군(歡城君) 정립은 ‘정선집과 천안집’의 갈등 요소를 난상공론하고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는 내용의 구전(口傳)이 수긍이 된다.
초대에서 2대 종약장을 연임한 전면조(全冕朝) 종약장의 업적은 길이 종약사(宗約史)에 빛날 것이며 후세에도 깊이 각인되고 있으며 청사(靑史)에 기리고 있다.
○ 1925년 종약 제 46회 평의회에서 면조(冕朝) 종약장의 제의로 합의하여 만장일치(滿場一致)로 가결(可決)하여 설단수비(設壇豎碑)키로 하였다.
지금의 시조 단소(壇所)내에 좌편 단비각(壇碑閣)의 시조 환성군(歡城君) 단비와 삼충공 이갑, 의갑, 락(三忠公 以甲, 義甲, 樂)의 단비(壇碑)가 세워지고 숭인재(崇仁齋)를 건립 향사를 매년 10월 3일 지금도 전국에서 후손이 모여 제사를 올리고 있다.
[출처] 全氏를 빛낸 아름다운 사람들(사단법인 전씨중앙종친회)
▶ 추기
당시 수단에 참여한 각 파 대표
--- 완산파 全洪燁
① 복야공파
파조는 전길(佶)이고, 평북 정주군(定州郡)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전길(全佶)
정선전씨 28세로,
공께서 밀직부사로 재임 시인 고려 고종18년(서기 1231년) 8월에 몽고 태종은 고려국을 침략할 계략을 세우고, 몽고의 장군 살례탑으로 하여금 고려국을 치게 하였다.
몽고 장군 원수(元帥) 살례탑이 별군을 이끌고 우리나라 의주 땅에 침범하였을 때, 문무를 겸비한 공께서는 이들 침략자를 좌시할 수 없어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정신으로 휘하군졸을 거느리고 용약출정(勇躍出征)하여 의주에서 몽고병을 맞아 격전 끝에 몽고군 다수를 살육하고 포로로 붙잡아 크게 전공을 세워 고려국의 위맹을 떨친 바가 있었다.
그 후 조정에서 논공행상하는 데 공의 훈공을 인정하고 첨의부좌복야(僉議府左僕射)로 제수하였다.
---좌복야
고려시대에는 백관(百官)을 총관하던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정2품 벼슬이었다. 상서좌복야의 줄인 말이다. 문종 때에는 상서령(尙書令) 다음가는 차관직이며, 1275년(충렬왕 1) 상서도성이 첨의부(僉議府)로 개편될 때 폐지하고, 1298년(충렬왕 24)에 다시 첨의부에 두었다가 곧 폐지되었다. 1356년(공민왕 5) 상서성이 다시 설치됨에 따라 여기에 다시 두었다가 폐지되었다.
② 전씨총보(全氏總譜)
기본정보
서지
분 류 :사부
작성주체 :전면조(全冕朝) 편집(編輯)
작성시기 :1931
형태사항 :크기: 33.3x22.0 /
판 본 : 신연활자본(新鉛活字本) /
장 정 : 선장(線裝) /
수 량 : 12권(卷) 12책(冊) /
인장정보 : 藏書閣圖書印
청구기호 : K2-1781M/F
번 호 : MF35-4824~4825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③ 참령[參領]
1894년(고종 31)의 군제개혁에 따라 정한 주임관(奏任官) 3등급, 즉 3품관에 해당하는 영관급으로, 부령(副領)의 다음이고 정위(正尉) 위이며 지금의 소령과 같다.
‘육군 장관직제(將官職制)’에 의해 개편된 12계급 중 제6위에 해당되는 계급으로서, 기병대 ·포병대 등의 대대장에 보임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령 [參領] (두산백과)
④ 사패지지[賜牌之地]
나라의 임금이 내려 준 땅. 사패땅. 사패지
⑤ 월호평동[月呼坪洞]
강원도 강릉시 월호평동
---명칭 유래
월호평동(月呼坪洞)은 두 형제가 집에서 일하는 여종인 월이에게 서로 일을 시키기 위해 “월아, 월아”하고 불렀다 하여 ‘월이를 부르는 들’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마을에 어정걸·어정직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월이란 여종이 있었다. 월이는 여러 노비 가운데 일도 가장 잘하고 예쁘고 상냥하여 두 형제의 신임을 얻었다. 그래서 두 형제는 월이에게 자주 일을 시켰다. 형이 “월아”하고 부르면 이어서 동생도 “월아”하고 불러 마을에는 월이를 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월호평동은 예전에는 갯벌이어서 오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오리들’이라고도 한다.
---자연환경
월호평동은 불하산(佛下山)에서 내려다보면 반달 모양으로 둥글게 모여 있는데 사방이 5리[1.963636㎢]나 되는 넓은 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월호평동 [月呼坪洞]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