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민족 문화 유산의 수문장,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상징
전형필(全鎣弼)
정의
1906∼1962. 문화재 수집가.
개설
본관은 정선(旌善).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지산(芝山)·취설재(翠雪齋)·옥정연재(玉井硏齋).
서울 출생. 중군(中軍, 西班, 정3품) 계훈(啓勳)의 증손으로, 내부주사(內部主事) 및 참서관(參書官)을 지낸 명기(命基)의 아들이다.
증조 때부터 배우개(지금의 종로4가) 중심의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10만 석 부호가의 상속권자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를 거쳐 일본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 말살되어 가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우리 민족 문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말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 문화의 결정체인 미술품이 인멸되지 않게 한 곳에 모아 보호하여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오세창(吳世昌)을 따라다니며 민족 문화재 수집 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물려받은 막대한 재력과 오세창의 탁월한 감식안 그리고 이런 문화적 민족 운동에 공명하는 많은 지식인들의 후원으로 이러한 소망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갔다.
그래서 장차 우리 미술사 연구의 요람을 건설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당시에는 한적한 교외이던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필요한 부지를 확보하고(1934년), 1938년 일제의 강력한 물자 통제령에도 불구하고 북단장 내에 보화각(葆華閣)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설립하였다.
그 사이에 그는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서화에 일가를 이룬 오세창의 측근 문사들과 교유를 가졌다. 권동진(權東鎭)·민형식(閔衡植)·고희동(高羲東)·지운영(池雲英) 등의 전배(前輩)들과 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이마동(李馬銅)·김영랑(金永郎) 등의 동년배들이 그들이다. 이들과의 교유 속에서 그의 탁월한 예술 감각은 자신의 서화 자체를 가경(佳境)에 이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감식안을 청람(靑覽)의 경지로 향상시켜 놓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자신의 능력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10만 석 가산을 탕진한다는 비방을 들을 정도로 오직 문화재 수집에만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우리 미술사에서 서성(書聖)·화성(畫聖)으로 높이 추앙할 수 있는 김정희(金正喜)와 정선(鄭敾)의 작품이 집중적으로 수집되어 그에 대한 올바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심사정(沈師正)·김홍도(金弘道)·장승업(張承業)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적은 물론, 서예 작품까지 총망라하였고, 고려 및 조선 자기와 불상·불구·와전 등에 이르는 문화재들을 방대하게 수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미술사 연구를 위한 인접 자료인 중국 역대 미술품을 수집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문헌 자료의 구비를 위하여 1940년부터는 관훈동 소재 한남서림(翰南書林)을 후원, 경영하면서 문화사 연구에 필요한 전적을 수집하여 한적(漢籍)으로 1만 권의 장서를 이루어놓았다.
그리고 당시 국내외에서 발간되는 문화사 관계 서적들도 가능한 한 수집하여 장차 연구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인재 양성이 또 하나의 절실한 문제임을 통감하고 1940년 6월 재단법인 동성학원(東成學園)을 설립하여 재정난에 허덕이는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인수하여 육영 사업에 착수하였다.
광복 후에는 잠시 보성중학교장직을 역임하기도 하고(1945.10.∼1646.10.), 문화재보존위원회 제1분과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으나(1954년), 항상 공직에 나가는 것을 피하고 시은(市隱)을 자처하였다.
1960년 김상기(金庠基)·김원룡(金元龍)·진홍섭(秦弘燮)·최순우(崔淳雨)·황수영(黃壽永) 등과 같이 고고미술동인회(考古美術同人會)를 발기하여 운영의 핵심을 담당하면서 1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1월에 죽자,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문화포장이 추서되고, 1964년 대한민국문화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그 뒤 그의 자제와 동학들이 북단장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韓國民族美術硏究所)를 설립하고 그가 마련해 놓은 연구 자료를 토대로 미술사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해 감으로써 그 유지를 계승하고 있다. 보화각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으로 개칭되어 연구소에 부속되어 있다.
전형필
참고문헌
『정선전씨총보(旌善全氏總譜)』
『간송문화(澗松文華)』 1(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72)
「간송선생(澗松先生)의 서거(逝去)를 애도(哀悼)한다」(고고미술동인회, 『고고미술』19·20, 1962)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08,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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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澗松美術館 ]
정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사립 미술관. [연원 및 변천] 1966년 전형필(全鎣弼)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민족미술연구소(韓國民族美術硏究所) 부설 미술관으로 발족하였다.
전형필은 1929년부터 우리 나라의 전적 및 고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서화·도자기·불상 등의 미술품과 국학 자료를 확보한 뒤 1936년 지금의 미술관 건물인 보화각(寶華閣)을 지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및 8·15 광복, 6·25전쟁 등을 겪으며 일반 공개를 위한 미술관은 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업은 아들인 성우(晟雨)·영우(暎雨)에게 이어져 1965년 가을부터 한국 고미술품 및 전적의 정리 작업을 시작, ≪고간송전형필수집서화목록 故澗松全鎣弼蒐集書畵目錄≫ 상·하권을 간행하였고, 1967년에는 수만 권의 도서 중 2천여 질의 한적(漢籍)을 정리하여 ≪간송문고한적목록 澗松文庫漢籍目錄≫을 간행하였다.
이 정리 작업을 준비, 진행시키며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및 간송미술관이 1966년에 발족하였다. 미술관은 연구소의 부설 기관 형식으로 되어 있어 미술관은 미술품의 보전·전시 업무를, 연구소는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 사업을 맡고 있다.
현황
미술관의 규모는 1층과 2층의 전시실을 가지고 있으며 소장품은 전적·고려청자·조선백자·불상·그림·글씨·부도·석탑 등에 걸쳐 다양하다. 그중 ≪훈민정음≫(국보 제70호)을 비롯하여 10여 점이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많은 유물들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전시 활동으로는 1971년의 개관 전시회 ‘겸재전(謙齋展)’을 시작으로 해마다 봄·가을에 한 번씩 수장품전을 여는 동시에 전시회와 함께 논문집 ≪간송문화 澗松文華≫를 발간하고 있는데, 2000년 현재 57호가 발간되었다.
전시회는 회화·서예·도예·서화로 분류, 개최하며 일반 공개는 봄·가을의 정기 전시회 이외의 상설 전시는 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30여 회의 전시회를 통하여 약 1천점의 수장품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는데, 최근(2000년 10월)에는 ‘단원·혜원특별전’을 개최하였다.
또한 수장품들을 모아 ≪혜원전신첩 蕙園傳神帖≫·≪추사명품첩 秋史名品帖≫·≪겸재명품첩 謙齋名品帖≫ 등을 편찬하였다.
간송미술관
참고문헌
澗松文華 1∼32집(한국민족미술연구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