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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득강(羅得康) 연보
나득강(羅得康; 1378년 고려 시대 후기 우왕(禑王) 4년 4월 3일 생~1444년 조선 시대 전기 세종(世宗) 26년 12월 3일 몰; 향년 67세)
조선 시대 전기 문신
이조좌랑•예조정랑•의금부지사•제 이조판서 역임.
최초의 나주인(羅州人; 조선 시대 나주 나 씨)
조선 전기 대표적인 호남의 학자
부 나중우와 함께 전북 김제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
고려 후기 충신 낙천와(樂天窩) 나중우(羅仲佑)의 3자
김제 지역 세거 나주 나 씨의 대표적인 인물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 관혼상제(冠婚喪祭) 상례(喪禮)의 대표적 인물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 예장 유가(세종조 예장, 북조산, 나소제, 원모재)
본관 나주(羅州). 나주 나(羅) 씨 금양군파
자(字) 경부(敬夫)
전북 김제(金堤) 출신
고조부 나윤명(羅允明)
증조부 나송기(羅松奇)
조부 고려 시대 금양군•사온서직장 영동정 나석(羅碩)
부 고려 시대 후기 예문관지제고•춘추관편수관•성균관교관•제 우의정 낙천와(樂天窩) 나중우(羅仲佑; 출생 연도 미상~1392년 몰)
부 나중우의 3자 가운데 셋째 아들
1자 조선 시대 태조 때 해남현감 나진강(羅晉康)
2자 조선 시대 태조 때 곡성현감 나치강(羅致康)
3자 조선 시대 세종 때 이조판서 나득강(羅得康)
나득강의 1자 내자사소윤 나인(羅寅)
나득강의 손자 사헌부감찰 나문서(羅文绪)
나득강의 증손 참봉 나맹담, 괴산군수 나숙담; 증손녀 안윤덕의 처
나득강의 고손 사헌부집의 나윤명, 현령 나윤철; 중종 계비 숙의 나 씨(괴산군수 나숙담의 여식)
나득강의 5세손 검정 나순, 사헌부지평 나전, 세자시강원보덕•양천현감 나흡
나득강의 6세손 진주목사•경흥부사•증 병조참판 나정언(羅廷彦)
나득강의 후손 효자 나승열•효자 나익열 형제 등
외조부 대구 출신 서일취(徐日就)
장인 음성 출신 박제(朴齊)
처 음성 출신 박제(朴齊)의 여식
집성촌(나중우•나득강 가문). 전북 김제군 김제읍 용동리
1378년 고려 시대 후기 우왕(禑王) 4년 4월 3일 생
1392년 조선 태조 1년 15세 부 나중우 사망, 3년 상복
1396년 태조 5년 19세 향시 진사시 급제
1419년 세종 1년 기해(己亥)년 식년시 문과 병과 급제(5위) 등과, 교도, 이정소윤(『국조문과방목』 권지2)
1420년 세종 2년 권지저작, 통사랑봉상녹사, 10월 계공랑직장 겸 승문원박사
1422년 세종 4년 선무랑, 임피현 현령, 선천군수, 오천군수
1424년 세종 6년 모 사망. 3년 시묘
1427년 세종 9년 정미년 통예문봉예랑 겸 한성참군, 7월 우정언지제고 승진
1428년 세종 10년 무신년 이조좌랑, 함길도경력, 봉훈랑군기판관; 10월 19일 사간원좌정언
1430년 세종 12년 8월 10일 무인년 이조좌랑; 호조에서 공법에 대한 여러 논의를 갖추어 설명
1431년 세종 13년 2월 29일 우헌납, 전농소윤, 11월 예조정랑
1435년 세종 17년 을묘년 봉상사소윤 겸 의금부지사; 관직을 버리고 귀향
1443년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1444년 이전 세종 26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세자시강원찬선 임명
1444년 세종 26년 12월 3일 지병으로 사망, 사후에 세종이 부제(賻祭) 하사; 향년 67세
1445년 세종 27년 세종의 지시로 김제 백산면 하리 북조산에서 국장 수준의 예장 거행
묘지. 전북 김제군 백산면 북조산(北造山) 예장(禮葬)(현 전북 김제시 흥사동 산42-17번지 흥사동 나주 나 씨 종중 묘역)
묘비. 묘지 비석에 "자헌대부 이조판서 나공지묘"(정경부인음성박씨부)라고 새김.
1882년 나득강 신도비 건립
묘역 재실. 현대식 건물로 된 재실 원모재(遠慕齋) 건립
* 최초의 나주인(羅州人): 조선 시대 전기 나주 나 씨 출신으로 과거 시험 과방록(科榜錄)에 본관을 나주인으로 스스로 명기한 최초의 인물로서 "최초의 나주인(羅州人)"이라고 알려져 있다. 나득강 이후로 전남 나주는 나주 나 씨의 관향으로 통용되었다. 또한 나득강이 조선 전기 최초의 나주인으로 과거 시험의 기록에 명기한 이후로 후손들이 대대로 나주를 관향으로 삼아 살고 있다. 그러나 나득강의 실제 출신 지역은 전북 김제였다.
* 예장(禮葬): 세종이 극진히 아끼던 이조판서 나득강이 향리에서 별세하자, 세종은 그의 장례를 왕과 왕비, 태상왕과 태상왕비,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세손과 왕세손빈에만 한정해 치르던 국장(國葬)이었던 예장(禮葬)으로 치르도록 하명했다고 한다. 묘지 소재지 전북 김제군 백산면 북조산(北造山)(현 전북 김제시 흥사동 산42-17번지 흥사동 나주 나 씨 종중 묘역)은 본래 묘지가 평지라서 후손들이 산을 쌓고 못을 파서 묘역을 조성했으며, 그 산을 조산(造山)이라 했고, 그 못을 나소제(羅所堤)라 칭했다. 이 묘지는 조선 세종조에 예장을 행했던 곳이며, 인공 산과 인공 못으로 조성된 우리나라 최고 유가의 예장 묘역이다.
* 낙천와(樂天窩) 나중우(羅仲佑): 부친 낙천와 나중우(羅仲佑)는 고려 시대 절신(節臣)으로서,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전북 김제에서 세거(世居)했다. 호는 낙천와(樂天窩)이며, 증조부 나중윤(羅仲允), 조부 나송기(羅松奇), 외조부 반영온(潘永溫), 부 나석(羅碩), 자 나득강(羅得康, 1378년~1444년)이다. 1362년 고려 시대 후기 공민왕 11년 임인방(壬寅榜) 진사시 문과에 과거 급제하여, 전교시령 겸 춘추관편수관, 예문관지제고를 역임했고, 1367년 공민왕 16년 성균관교관에 제수되었다. 고려 멸망 후, 전북 김제군 입천면 내호리로 귀향했으며, 조선 시대 전기 태조 때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나중우를 우의정에 3번이나 제수했을 만큼 높이 평가했던 인물이었다. 고려 절신 나중우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제의를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말로 고사했다고 하며, 1392년 고려가 멸망하던 해에 사망했다. 태조 이성계가 나중우를 우의정에 세 번 제수했고, 나중우는 후손들에게 신주(神主)를 “고려 지제고”라고 쓸 것을 유언했다는 말은 유명한 일화이다.
나득강의 부친 나중우의 묘지가 세인의 관심에서 잊혀져 풀숲에 가리었다가 후에 재정비되었다고 한다. 묘지 소재지는 전북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42번지이다. 나중우가 살던 집터는 현재 나주 나 씨의 대표적인 사당 가운데 하나인 팔효사(八孝祠)가 서 있다. 나주 나 씨 금양군파 나보중(羅甫重)의 효자 후손 3세 8효를 모신 팔효사의 위치는 전북 김제시 효자로 109-2이며, 1996년 3월 29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고, 김제시 향토문화유산기념물 제2호이다.
역사적으로, 낙천와 나중우와 아들 나득강은 전북 김제를 대표하는 조선 시대 전기의 유학자이며, 부친 나중우는 고려 시대의 절신이었고, 아들 나득강은 조선 시대 전기 세종조를 대표하는 최초의 나주인이었다고 평가된다.
* 나득강의 효성: 조선 전기 문신 나득강은 고려 후기 충신 나중우의 셋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똑똑했다고 한다. 또한 나득강은 효성이 지극했으며, 부친상에서 3년 상복을 입었고, 모친상으로 3년 시묘살이를 했다.
* 관리로서의 활동은 1430년 호조에서 공법(貢法)에 대해 갖추어 설명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활동이 알려져 있지 않으며, 1435년 귀향해서 1444년 향년 67세로 별세하기까지 향리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가에 대해서도 알려져 있지 않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 검색되는 나득강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세종 9년(1427년) 8월 6일 신유년 나득강이 사간원우정언에 임명되었고, 9월 24일 기유년 세종이 우정언 나득강에게 가을철 강무의 뜻을 이르고, 이를 동료들에게 전하라고 했으며, 11월 13일 정유년 사간원우정언 나득강이 세종에게 가정의 사치를 방지할 목적으로 금과 은의 사용 금지와 마찬가지로 "능단"(綾段; 비단)의 사용 금지를 건의했으나, 세종이 그럴 목적으로 새 법을 만들 필요까지는 없다고 했다.
세종 10년(1428년) 10월 19일 정유년 나득강이 사간원좌정언에 임명되었고, 세종 12년(1430년) 8월 10일 무인년 이조판서 권진과 이조좌랑 나득강 등 여러 관리들이 호조에서 농지의 전대에 세금으로 적용하는 공법(貢法)의 불공평한 폐해에 대해서 갖추어 설명했으며, 세종 13년(1431년) 2월 29일 갑자년 나득강을 우헌납에 제수했다(『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 참조).
* 나주(羅州) 나(羅) 씨 세보(世譜)―1세~5세: 나주(羅州) 나(羅) 씨는 한국 고유의 성씨이다. 금성(錦城) 나(羅) 씨가 라말여초에 시작되었다면, 나주 나 씨는 여말선초에 시작되었다. 『나주나씨대동보』(羅州羅氏大同譜)에 따르면, 나주 나 씨의 시조(始祖)는 나부(羅富)이며, 고려 시대 정의대부(正義大夫)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을 역임했다. 정의대부는 정3품이며, 감문위는 고려 6위의 제1위로서 상장군이 감문위 수장이다. 묘역은 1953년 봄 관향(貫鄕, 본관, 선향) 나주 송현동(松峴洞)에 시조묘를 설단(設壇)하고 매년 3월 13일 세일제(歲一祭)를 시행하고 있다. 1977년 가을 묘역을 보수했다. 2008년 시조묘 설단을 나주 보산동으로 이설했다.
1세(世)는 나득규(羅得虯)이며, 고려 시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2세는 나중윤(羅仲允)이며, 고려 시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3세는 나송기(羅松奇)이며, 고려 시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4세는 나수영(羅守永)이며, 고려 시대 진사(進士)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1세~4세의 묘역은 실전되었으며,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고,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5세 나위(羅位)는 고려 시대 제 호조전서를 역임했으며, 세칭 금양처사라고 했고, 말년에 나주로 퇴거했다. 전서공파(典書公派)의 시조이며, 후에 2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계(羅桂)는 고려 시대 중서시랑을 역임했으며, 처는 창원 황 씨이고, 후손들은 경기도에 살았다. 시랑공파(侍郎公派)의 시조이며, 후에 4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석(羅碩)은 고려 시대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 영동정(令同正) 금성군(錦城君)을 역임했고, 처는 남평(南平) 반(潘) 씨이며, 후손들은 전북에 살았다. 금양군파(錦陽君派)의 시조이며, 9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세(羅世)는 고려 시대 문과 한림 상원사 연안군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고, 전북에 후손들이 살았다. 연안군파(延安郡派)의 시조이며, 5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원(羅源)은 고려 시대 사온서직장 영동정을 역임했고, 묘역이 나주 송현동에 있으며, 후손들이 나주에서 세거했다. 직장공파(直長公派)의 시조이며, 27개 파로 분파했다. 나주 송현동 개발로 2008년 7세 묘역이 있는 나주 보산동으로 5세 묘역 일부가 이장되었다.
4세까지는 묘역이 실전된 실전 선조이며, 5세부터 묘역이 현존하는 현존 선조이다. 당시 나주 나 씨 선조들은 본관이나 관향을 표기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으나 조선 시대 전기 세종 1년 전북 김제 출신 나득강(羅得康, 1378년~1444년)이 과거 시험에 급제하면서 본관을 나주로 기재(나주인)함으로써, “최초의 나주인”이 탄생했다. 판서공 나득강은 세종의 신임을 받아 이조좌랑, 예조정랑, 의금부지사를 역임했고, 이조판서를 제수받았다. 이후부터 전남 나주(羅州)가 나주 나 씨의 관향으로 정착되었고, 조선 시대 후손들은 나주 또는 나주인이라고 출신지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판서공 나득강의 부친은 낙천와(樂天窩) 나중우(羅仲佑)이며, 고려 시대 후기에 예문관지제고, 춘추관편수관 등을 역임했고, 조선 시대 태조 이성계로부터 우의정을 제수받았다. 나중우와 나득강은 전북 김제를 대표하는 유학자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와 대한민국 시대를 거치며 나주 나 씨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조선 시대 중기 사대부 시조 문학을 대표하며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초 「겸춘추일기일사」(兼春秋日記一事)를 기록한 호조정랑·승정원좌승지 송암 나위소(羅緯素)는 또한 호남 제일의 부호였다. 전남 나주 출신으로 대대로 이어받은 나위소 가문의 재산은 후손 나만치(羅晩致)에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조선 시대 후기 전북 정읍 출신 백봉(白鳳) 나용균(羅容均, 1895년~1984년)은 독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정치학의 아버지이다. 일본 와세다대와 영국 런던대에서 정치학을 유학하고 독립운동을 거쳐 제헌의회와 대한민국국회에서 5선 의원을 역임했으며, 장면(張勉) 정부에서 보건사회부장관과 박정희 정부에서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나용균 가문은 전북 정읍 제일의 부호였으며, 일제 강점기 이후에 남은 재산이 삼천석꾼이었다. 대한민국 3개 정부에서 4선 국회의원과 재무부장관, 상공부장관, 경제 부총리, 통일 부총리 등 장관직 5회, 부총리직 3회를 역임한 나웅배(羅雄培)는 또한 서울대교수와 아주대총장 그리고 중앙대특임교수와 목원대초빙교수를 역임한 우리나라 정관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또한 나웅배는 대전중학교와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경제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석사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경영대학원 경영학박사를 마친 경영학자로서 고도 성장기 한국 경영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나라 경영학의 아버지이다. 나웅배의 동생 나중배는 육군대장으로 예편했으며,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역임했고, 후에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한국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참고 자료: 『나주나씨대동보』(羅州羅氏大同譜)).
* 나득강은 세종 원년 과거 급제로 등과했으며, 과거 시험 과방록에 최초의 나주인으로 기록되어 나주 관향에 기여했고, 세종의 예장(禮葬) 하사와 효성스런 후손들의 묘역 정비로 우리나라 최고의 유가 예장 묘역을 남겼다. <끝> <작성자: 나종혁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6세손>
* 『나주나씨대동보』(羅州羅氏大同譜); 「나득강」, 「나중우」,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http://people.aks.ac. kr/>); 「나득강」,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나주나씨 종중 묘역」, 향토문화전자대전; 『조선왕조실록』<http://sillok. history.go.kr/>; 기타 인터넷 자료 참조.
* 나종혁 출판예술문화 후원금을 모금합니다. 출판예술인 나종혁의 후원금은 금액에 관계없이 후원이 가능합니다. 후원금 계좌 국민은행 012-21-0653-488 (예금주 나종혁), 우체국 100073-02-217008 (예금주 나종혁). 많은 후원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