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충무공 이순신이 남긴 말로 호남의 자긍심과 역사적 정체성을 알리는 계기이기도 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만약에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라는 글이 담긴 서간첩은 본래 영암군의 연주 현씨 문중에 200년간 보존되어오다 이순신 장군의 8대손인 영암군수 이능권에 의해 확인, 현충사에 옮겨졌다.
"국보 제76호 이순신 서간첩에 대해 관심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장첩된 간찰 중 지평(持平) 현덕승에게 보낸 글 때문"이라면서, "이 간찰에는 '가만히 생각해보면 호남지방은 나라의 울타리라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是無國家)'라고 했다. 이 간찰은 호남지방의 병참기지로서 중요함을 그대로 역설한 것으로, 호남의 자긍심과 역사적 정체성을 높이는 주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국보 제76호 이순신 서간첩은 9편의 글로 이뤄져 있으며 이순신이 쓴 7통의 간찰, 아들 이회가 현건에게 쓴 1통의 간찰, 10대손 이규대가 쓴 근기 1건 등이다. 특히 이순신이 쓴 7통의 간찰은 조카 온에게 1통, 현건에게 3통, 현덕승에게 3통 등으로, 현덕승에게 보낸 간찰에 '약무호남 시무국가'의 내용이 담겨있다.
당시 이순신이 현덕승에게 극진한 예우를 갖추어 심중의 말을 전한 이유에 대해 "현덕승은 천안에서 태어났고 천안에 명망가로 이름이 있는 인사였다.
그러나 영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1564년(명종19년) 출생으로 이순신 보다 20살가량 나이가 어렸다. 그러나 이순신과는 척하(戚下)의 관계였다. 즉 외가의 친척 중에 항렬이 높은 손아래 사람이었다. 인척 사이의 깊은 정의(情誼)와 세의(世誼)를 나누는 사이였다. 그리고 마음과 덕으로써 사귀는 도의지교(道義之交)까지 맺고 있었다.
"연주 현씨(延州玄氏)는 고려 의종 때 대장군을 역임했으며, 명종 때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던 현담윤을 시조로 하고 있다. 현윤명은 현담윤의 12세손으로 충청도 천안에 거주했는데, 선략장군부사직을 임명받아 영암에 내려오게 됐다. 이를 계기로 군서면 구림리에 입향했으며, 후손들은 영암읍, 시종면 내동마을, 학산면 광암 등에서 번성했다. 현윤명의 증손 현건(玄健)은 감역, 군자주부를 지냈다.
구림 대동계(鳩林大同契)는 1565년에서 1580년 사이 박규정, 임호, 이광필, 박성정, 유발, 박대기, 임완 등이 주축이 되어 설립,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구림대동계지 계중수좌목을 살펴보면 현건은 1613년 계축(癸丑) 만력 41년 12월 초 임신(壬申)년 출생이다. 자가 여강(汝强)이며 본이 성산(星山)이다. 현건은 지역 사림 박이충, 조행립 등과 함께 구림 대동계를 중수했다. 또 대동계 집회장소 회사정(會社亭) 건립에 힘써 구림 대동계의 보존에 기여했다. 이때 현건은 대동계 초대 동장으로 추대됐다. 현씨 가문은 영암 재지사족들과 결속을 꾀하며 대동계를 통해 향촌사회 안정에 기여했다. 현건의 손자인 현징은 1660년(현종 1년) 사마시에 급제해 주부를 지내고 영암으로 돌아온다. 그는 1678년(숙종 4년) 시종면 내동리에 있던 취음정(就陰亭)을 군서면 서구림리 서호정 마을로 이건하고, 죽림정(竹林亭)으로 이름을 고쳐 다시 중수했다.“
현제 남아있는 죽림정이다. 그리고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이 연주현씨 출신이다.
"이순신은 1596년 9월 1일 영암군을 방문했다. 이날 강진 성전을 나서 오후에 영암에 이르러 향사당(鄕舍堂)에서 잤다. 정랑(正郞) 조팽년을 만났으며, 군량수송을 책임지도록 했다. 조팽년은 전의현감(全義縣監) 여산군수(礪山郡守)를 지냈으며, 이순신이 전사하자 한산도를 선유하면서 추모시를 짓기도 했다.
이순신은 영암 향사당에서 정랑 최숙남도 만난다. 난중일기 1596년 9월 초2일(양력 10월 22일) 이순신은 향사당에서 전략을 논의하며 이곳에 머물렀다. 영암 향사당에서 3일간 유진한 이순신은 이곳 유림들과 병참, 물자 지원을 의논했다. 이처럼 이순신과 영암은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지금은 죽림정 앞에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어록비가 세워졌다.
첫댓글 좋은 정보입니다. 영암의 연주 현씨 후손들이 잘 보관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서간첩도 없었을 것입니다.
구림리에 있는 그곳을 답사 리스트에 올려 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