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담>
퇴계원교회 초창기 전 이야기
최순희 집사(사진)
퇴계원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나의 어머니 김옥순 집사의 이야기를 실마리로 하여서 몇 자 적어봅니다.
어머니의 말씀인즉, 장로교회에 다니던 김야곱이라는 분을 전도했답니다. 그는 “개인 빚이 많아 살기 어렵다. 빚을 갚아주면 안식일교회로 개종하겠다.”라고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때 신현철 목사의 아버지께서 빚을 갚아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안식일에 퇴계원교회에서 김야곱이라는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김야곱이라는 분을 잘 알고 그분 집에 가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김야곱 성도는 퇴계원교회 초대 예배소장 이었습니다. 편집장).
퇴계원 지서 옆에 사시던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방을 제공하여 주셔서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두 내외분만 사셨지만 돈이 많아 무서워서 지서 옆에 자리를 잡고 사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이라 지서 옆에 사는 것이 제일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삼육신학원 학생들이 와서 예배를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화요일과 금요일 밤에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차편이 좋지 않아서 오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제가 나가서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해 “신학생보다 순희가 더 잘한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잘 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한 말씀이셨습니다. 그 후에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 잘 생각이 안 납니다. (최순희 집사의 이야기로 볼 때, 산 밑의 첫째교회 이전에 가정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확실합니다. 박노선 장로의 증언에 의하면, 예배드릴 장소를 제공하신 분은 박동호한의사로 북한에서 넘어온 분이었으며, 돈 많은 부자로 부인이 교인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산 밑의 박흥식씨의 다 쓰러져가는 건물(첫째 교회)이 생각납니다.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 버팀목을 세워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얼마 동안 지내다가 정말 너무 위험한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몇몇 교인들이 의논하여 수리하기로 결정하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박경식씨가 맡아서 수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수리하던 중 건물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박경식씨의 엉덩이에 못이 박혀서 고생을 많이 하셨던 일이 기억납니다. 교회에 돈이 없어서 치료비를 드리지 못하였고, 본인의 돈으로 여러 달 동안 치료를 받았습니다.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고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박경식씨는 “사회에서도 그렇지 않은데, 교회가 이렇게 치료에 관심도 없고 치료비도 안주고 정말 너무 한다.”고 원망하는 소리를 직접 제가 들었습니다. 그 후 억지로 수리를 끝낸 일은 생각하기 싫은 교회일 중의 하나입니다. 교회의 경제 사정이 그때 그 정도였습니다.
그 무렵 저는 삼육신학대학 내에서 교환으로 5년 이상, 회계실에서 1년, 학교 매점에서 5년 이상을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였습니다.
대학에서 근무할 때라 대학의 도르가회에 이야기를 하여 퇴계원에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이웃 사람들에게 구호품(밀가루)을 전달하였습니다. 각 세대별로 각 가정에 신청을 받아 퇴계원에서 삼육동까지 걸어갔다가 이고 지고 걸어서 전달해 주었던 일도 기억이 납니다. 20여명 이상이 3차례에 걸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배고픈 시절에 주민들에게 정말 생명줄이었습니다. 그때 전도는 조금 쉽다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습니다.
교회 바로 아래에 박노선씨가 살았습니다. 안식일 예배를 마치고 내려오다가 황선옥과 함께 박노선 댁에 들려서 교회에 나오라고 전도한 기억이 납니다. 정말 한참 걸렸지만 박노선 장로님 온 가족이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지금도 감사할 일입니다.
퇴계원교회에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빌면서 두서없이 줄입니다. 감사합니다. (교적 10번, 학교교회에서 이전해옴, 제주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