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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람마다 과거가 있고 과거가 있었기에 지금 현재가 있다 하겠다.과거 어떻게 살아왔나 생각 해 보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 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겠다.
여기 나의 과거를 생각 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이 나를 아는 사람들이 또 내 자녀들, 손자가 -아버지는,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 이였고 어떻게 살았을까 이런 생각이 궁금할 때 읽는 글이 되면 좋겠다.
참으로 부끄러운 삶이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이 이렇게 살아 왔다는 것이다. 지우게로 지울 수도 없는, 이제는 어쩔 수 없는 과거이다.
우리집안의 내력
먼저 내가 자라면서 어머님으로부터 듣는 얘기가 많고, 겪은 얘기가 되겠다. 우리집은 나로서 증조부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겠다.
증조부는 약간 다리가 불편하셨다 하였다. 하시는 일은 지금 도룡리180번지에서 한약방을 하셨다. 생업으로 약방을 하시면서 약간의 전답을 마련하셨다. 자녀는 1남 2녀를 두셨다. 할머니 한분은 상림리 장씨집안으로 결혼하셔서 살고 또 할머니는 말을 잘못하셨으며 어디, 어느 집안으로 결혼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상림리 동생되는 할머니집에 사시고 계셨다. 나중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우리집에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5-6년후 함평(?)에서 딸이 찾아와 제사를 모셔가셨다고 어머니께 들었다. 할아버지는 나는 한번도 보지 못하였고 어머님으로부터 듣는 얘기가 전부가 되겠다. 할아버지께서는 이씨 집안으로 결혼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일제강점기시대였고 살기 어려워서 장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나로서 아버지를 포함 남매를 두었다. 어머니에게 들은 얘기로는 고모가 누나로서 아버지를 무척이나 생각하였다는 얘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사진으로 고숙의 모습은 볼 수 있었으나 고모님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장사 다니다 청진에 자리를 잡으셨다. 짐작컨대 나의 친할머니가 정신질환을 앓으셨다는걸-가끔 정신착란 증세를 보인는걸 기억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울증의 질환이 아니었나 싶어진다.
누구에게도 얘기 들은바 없지만 그래서인지 할머니의 친정어머니가 우리집에 함께 사시는 걸 기억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청진에 자리를 잡은 얘기는 장사를 다니다 청진에서 머물다 성실하게 일하는걸 보고 주인눈에 들어 그 집에서 눌러 살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할아버지께서는 지금으로 말하면 운송업을 하시었는데 관청배급물건을 운반하여주는 사업을 하시었는데 우마차(구르마)가 20여대 넘게 있었으며 말을 끌고 다니는 사람 말고 말만 관리하는 사람만도 여러명 두고 꽤 규모있게 운영하는 터여서 당시 이곳에서 고향을 떠나 만주로 가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신세를 지곤 했었다는 얘기를 들을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곳 청진에 또 한분의 작은 할머니가 계셨고 그러나 아버지,고모를 낳은 할머니가 여기 계시니까 이곳 병영을 자주 래왕을 하셨고 그러다가 친할머니말고 작은 할머니를 친한 분 소개로 알게 되어 이곳에 내려오면 그 할머니 집에 머무르시곤 하였다. 아버지도 이곳 청진에서 상업고등학교를 나오셨음을 알 수 있었다. 고모도 이곳에서 결혼하고 이곳에서 사셨고 고숙은 회사에 다녔다 하였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이곳에 계시니까 청진과 이곳을 래왕하였는데 이곳에서 할아버지의 누나- 상림리 장씨 집안으로 시집간 고모할머니의 중매로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였다.
어머니도 결혼 후 이곳-청진의 할아버지 집에 머물었었는데 해방 후 이곳 병영으로 내려 왔었다. 아버지는 자라며 좀 고생을 덜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해방 후 시골-병영에 사시면서 어려움이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사업을 하셨었다. 약품 중간상을 하신듯하다. 당시 생활물자가 부족한 시기라 약품도 마찬가지여서 당시 외국물자가 들어오는 부산에서 약품을 구입하여 이곳 장흥 강진 영암등 병원이나 약국에 판매를 하셨다. 시작한지 얼마 후 장사가 잘되어 마을사람 한사람을 고용하게 되었는데 이 고용한 사람이 중간에서 수금한 돈과 거래장부를 들고 도망 가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논 몇 십여마지기 지금으로 말하면 7-8000여만원이 넘는 금액이였다. 그 돈은 당시 우리집의 전 재산이였으며 이돈으로 장사를 하였는데 이런 사건이 일어나서 그 사람집에 가서 변상을 요구하며 따지자 그 도망간 사람의 형이 자살하고 말았다. 전 재산을 들여 한 장사가 일이 이렇게 되자 한마디로 생활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생활이 어려워지자 취직하기를 권하여 마침 면장이 아는 사람이여서 임시직으로 다닐것을 권하였으나 다니시지 않았었다. 나중 어머니 이야기로 출근하라고 도시락을 싸주니 출근은 않고 아는 사람 집에 가서 바둑을 두고 있더라는 말씀을 전 해 들을 수 있었다. 나중 이렇게 무작정 놀고 있을 수 없어 병영친척 나락장수하는 분에게 나락을 빌려서 부산으로 나락을 가져가서 팔아 돈을 만들어 전에 하던 사업-약을 사가지고 다시 약품중간상을 시작 할 생각으로 부산으로 나락은 다른 배로 보내고 다음배로 부산으로 출발 하였는데 지금의 충무앞바다에서 풍랑으로 난파하였다.
이로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셔서 어머니께서는 두 할머니와 나와 당시 뱃속에 여동생과 모든 살림을 떠 맡게 되셨다. 그때 내 나이가 여섯 살이였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러나 나를 무척 예뻐하셨다는 얘기는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아버지가 사고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께서 안전부절 하시던 모습-마을점쟁이 할머니집에 허둥대며 물어 보러 가시던거, 아버지 시신을 집안으로 모실 때 대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옆 담을 헐고 들어오던거며 ,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서 그냥 즐거워 뛰놀던 기억이며 산에가서 관을 하관하기 전 관판자에 소나무옹이 빠진구멍이 있었는데 관안에 아버지가 있다고 하여 구멍을 들여다 보던 기억이 난다. 당시 3년상을 지냈는데 마루에 모시는 상을 차렸고 어머니께서 한 달에 한번 제상을 차렸는데 그때 서럽게 통곡하시던 모습이 새롭다. 당시 어머니께서 살림을 모두 맡아 하셨는데 그 어려움을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을까 짐작이 간다. 그후 여동생이 태어났다. 여동생이 태어나 동생도 힘 겹게 자랐다.
그때 내 나이는 철없는 일곱, 여덟살이여서 많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철없이 사방으로 뛰어 놀러 다니고, 동생은 대문 앞에서 들에 나간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울고 있던 모습은 기억난다. 이윽고 나는 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아버지와 나
아버지는 앞 이야기처럼 내가 여섯 살때 일찍 돌아가셨다. 허지만 생전 나를 무척 사랑하신듯하다. 내가 태어나서 어머니이야기로 온갖 당시 유행하는 병은 빠짐없이 앓았다고 했다. 너무나 어린아이가 아파대니 어머니가 징글 -짜증스러울 지경이었다고 말씀 하시는것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한번은 소화기 계통의 병을 엄청 심하게 앓아 열은 나고 힘이 없어 이제 울지도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군동 화방마을에 용하다는 한의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와서 한밤에 나를 안고 약 4km 떨어진 그 곳까지 가서 치료를 받도록 하여 그대로 두었으면 그날 밤을 넘기지 못했을것을 응급처치하여 살 수 있도록 하였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으며 그 후 그 한의사께 아버지께서 아버지-이렇게 부르며 살아 생전에 자주 갔다는 얘기를 들었으며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 후 그분께서 찾아 오셨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돌아가시기 직전 부산으로 출발하기 전 마을의 사진관을 하는 사람집 에 가서 내 사진을 찍었었는데 찾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단 얘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사진을 보관하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그 사진을 못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이렇게 몹시 병약하여 자주 아팠고 나중에는 사고를 내기도 하였다. 나는 그 당시 유행하는 나이롱 옷감을 구입하여 그걸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는데 당시는 성냥이 귀하여 댓가지에 황을 뭍인 댓가지를 이용하여 화롯불에 불을부쳐 아궁이의 불을 때고 그랬는데 어른들이 잠시 눈파는 사이 그 황묻은 댓가지를 화롯가에서 가지고 놀다 옷에 불이 붙어 내가 우는걸 할머니의 어머니께서 쫒아와 불 붙은 나의 옷을 벗겼으나 이미 나는 오른쪽 가슴과 겨드랑이 부위에 보기흉한 상처가 남고 말았다. 이 사고로 나는 몇 개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여러 식구들의 속을 많이 상하게 하였다고 나중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시었으며 내가 말을 듣지 않고 속상하게 할때는 차라리 그때 가버렸으면 좋았을걸 지금 저렇게 속상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오죽 내가 맘을 상하게 하였으면 그런 말씀을 하였으리요. 이 상처는 나의 몸에 현재도 남아있고 자라면서 한때는 목욕탕 가며는 남이 처다 보는 게 싫어서 피한적이 있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당시 상업고교에 다니시면서 보시던 일본글의 책들이 몇 권, 있었으나 잦은 이사등으로 최근 눈에 띄지 않아 안타깝다.
그리고 다음이야기는 동네사람들과 어머니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6.25사변이 일어나고 공산군 치하가 되자 조금 재산있고 당시 유력인사는 다 찾아내어 처단을 하려하던 중 그 당시 아버지는 우리마을 이장을 하고 있었는데 억지로 리장에다 마을 인민위원장이라는 감투를 씌우고 자기들의 일을 시키며 좀 불순분자들이라며 자기들한테 협조하지 않은 사람들 명단을 어떻게 작성하여 어느 날 모아 처단하려 하는것을 알고 우리마을은 내가 모두 책임지고 처리 할테니 염려 말라고 하며 명단을 없에 우리마을은 피해가 없도록 하였다며 7-8명 목숨을 살렸다는 이야기를 동네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었다.
또 공산군들이 물러갈때 당시 면장-조00는 어디론가에 숨어버려 그 사람을 찾아 처단 할려고 백방난리였었는데 그 조00면장은 아버지와 친하였기에 야밤 우리집을 찾아 왔더란다. 그리하여 우리집 뒷 커다란 장독안에 들어가 있게 하여 이렇게 몇일을 지내다 그들이 물러간 후 나와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단다. 그들이 물러간 후 또 경찰들이 들어와서는 그 공산당들에 협조한사람들을 찾아 처단하는 상황 이였는데 그때 살아난 조00면장이 나는 이 사람 떼문에 살아 날수 있었다 하여 아버지는 피해를 면하였다고 이 이야기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작은아버지와 취직
그리고 작은아버지 얘기를 하지 않을수 없다. 해방 후 남북이 막하고 할아버지가 오시지 못하게 되자 혼자 작은아버지를 키울 수 없어 작은아버지의 어머니(작은할머니)께서는 어느분께 재혼을 하였다.
어머니께서 하루는 병영장을 갔다오는데 웬꼬마가 땀을 흘리며 병영쪽 으로가는것을 눈여겨보니 바로 작은아버지셨단다. 물어보니 엄마찾아간다며 걸어오고 있더란다. 왜 어찌 우리집안이 이 모양이 되었나-가슴아파하고 그리고 사오던 붕어빵을 준적이 있었는데 그때 보고 보지못하다가 .이렇게 수십년 서로 소식 없이 지냈는데 작은할머니의 형부를 우연히 추석에 집 앞에서 만나게 되었단다. 이분은 청진에서 할아버지가 계실 때 작은할머니 떼문 만나 얼굴을 아는 사이였으며 도룡리 갓돔 우리동네 최초 입향자로 알려진 함양여씨의 후손으로 성묘 다녀오는 길이였다. 이렇게 만나 그간의 소식을 듣게 되었단다. 나중 들으니 작은아버지는 할머니가 재혼한 그 분댁에서 도움을 받아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진도에서 인쇄소를 하고 있었는데 착실한걸 알고 할머니 형부들의 도움으로 진도군청에 근무하게 되었고 결혼도하고 인쇄소를 한 실력- 필경사 실력을 인정받아 광주도청으로 자리를옮겨 근무하게 되었으며 작은할머니께서도 작은아버지댁-광주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단다. 하면서 당시 나는 부산에 살다가 시골(도룡)에와서 참으로 어렵게 살고 있었는데 사정을 이야기하며 일자리를 부탁하였단다. 나중 이 어르신은 경찰직에 과거 근무하였고 아시는 분이 많아서 나의 취직자리를 쉬 만들어 줄 수 있었다. 드디어 나는 이 어르신 도움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바로 친구인 당시 강진교육장 조00께 부탁하였고 마침 당시 각 학교에 임시사무직을 배치하고 있는 터여서 9월17일부터 병영초등학교에 근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작은아버지를 찾게 되었고 작은할머니도 처음 뵐 수 있었다. 그때 처음 찾아오실 때 나에게 초록색 가을잠바를 사오셨는데 기억하고 있으며 작은아버지에 어머니, 작은할머니를 만나서 좋았고, 나는 더욱 취직하여서 좋았다.
이후 작은아버지는 도청에 근무하시다 주암댐추진사업소로 몇 년후 여수로 발령받게 되었고 여수에서 근무하다 건강을 잃어 퇴직을 얼마 앞두고 별세하셨다.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몇 년후 할머니께서도 돌아가시고 살아계실 때는 왕래가 있었는데 즈음은 소식 전한지가 오래된다.
국민학교(초등학교)이야기
입학 기념으로 어머니께서 비싼 공책 한권과 연필 한자루를 사주신기억이 나고, 처음만 그 공책을 사용하였고 나중에 어머니는 시장에서 백노지 한 장씩을 사오셨다. 돈을 아끼기 위함이였다. 그 백노지를 사오면 칼로 종이를 잘게 나뉘고 실로 꿰매어 사용하였다. 이렇게 공책을 만들어 쓰고 새 공책이 생겨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새롭다. 가방은 중학교 들어가서 사용하였고 초등학교 때에는 보자기에다 싸가지고 등에다 묶어메고 학교에 다녔다. 고학년때는 도시락까지 함께 싸서 다매고 다녔기에 걸음 걸을때마다 도시락 안에서 젓가락 반찬그릇 소리가 요란하였다. 또 초등학교에 다닐 때 기억으로는 소풍 갔을때 평소에는 먹기 힘든 계란을 싸주었는데 너무 맛 있었고 아껴 먹기 위하여 조금씩 떼어 먹던 일이며, 찐 고구마를 싸가지고 가서 먹던 일등 생각나며 지금 같으면 엄두도 못 낼 화방사, 금곡사, 수인산 꼭대기 등 먼곳으로 소풍을 갔었다. 특히 장흥읍을 벗어난 한 초등학교로 현장견학소풍을 갔었는데 2시간을 넘게 걸어가서 두시간 정도 밥 먹고 머물다가 다시 두시간을 넘게 걸어오는 - 너무 멀고 힘들어 정말 주저 안고 싶을 정도로 힘겨웠던 생각이 난다. 당시는 차량이 없어서 거의가 걸어 다니는 형편이어서 이런 소풍을 갔었다. 학교 생활 중에 기억 나는것이 있다면 방학을 마치고 숙제를 하여야 하였는데 어머니와 함께 만들어 공작숙제를 하여간 생각이 난다. 그것은 두꺼운 각대기 종이로 사람 몸통을 만들고 팔과 다리는 분리하여 만들어 몸통에 붙여가지고 실을 팔, 다리부분에 연결하여 밑에서 실을 잡아 다니면 팔다리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였는데 무척 재미 있었고 심심하면 만들어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또 방학숙제 중 크레욘으로 초가집에 박 넝쿨이 자라고 박이 열려 있는 그림을 그려가지고 가서 상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학교는 1,2학년은 지금 도룡리 공동리 옆 학교터의 건물로 학교를 다니고 3,4학년은 아래학교 명씨 산아래 학교터 건물로 다니고 4학년말 지금의 마을 앞 학교에 건물이 들어서고 이곳으로 다녔다. 공동리옆 4개교실로 기억되는 기와지붕 벽면은 판자로 붙여진 목재건물이였는데 얼마 후 앞으로 쓸려서 안 넘어지게 밭이던 기둥이 있던걸 기억나고 교실안에서 공부한 기억은 없고 천막교실에서 공부 하던것이며 날이 좋을때는 옆 묘지 벌갓 동백나무에 칠판을 매달아 놓고 공부하던것이며, 2학년 지금 이마산에 사시는 김동식선생님이 담임선생이었는데 살면서 예절을 지켜야 한다며 특히 하품을 할때는 그냥 입 벌려 하지 말고 벌린 입을 손으로 가리면서 하품을 하여야한다고 가르쳐주던것이 생각난다. 그리고 운동장에서 노는데 갑자기 운동장바닥이 꺼져서 보니 그 안에 사람의 묘지관 구멍이었으며 이 때문에 놀라 소란스럽던 것이 생각난다. 그때 우리반 학생수는 60명정도 되었으며 집안일로 안나오는 이들이 있어 평상시에는 40-50명씩 공부하던걸 기억난다. 집안일 이라는게 농번기에 바뻐서이기도 하였지만 집안이 어려워 월사금을 못내서 학교 못나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 당시 결석을 자주하던 친구들은 지금은 살림을 잘하여 이런 옛날이야기 하기가 미안할정도로 잘 살고있다. 나도어머님께서 오직 공부를 좀 하는 나를 위하여 악착같이 살아 오셨다. 즉 월사금을 재때 못낸 기억이 없다. 어머님께서는 바느질솜씨가 좋아 다행이 집에 미싱이 있어서 명절때 동네 아이들 명절옷은 다 만들어주고 삯을 받어 저축하여 밭을 사고 하였다. 초등학교 재학시 나의 성적은 좋은편이였다. 그리고 그림그리기에 솜씨가 있어서였는지 선생님께서 환경정리며 학습자료를 만들때 옆에서 선생님을 도와주고 시키는것을 그리고 하였다. 6학년때는 중학교를가기위하여 시험공부를 하였다. 시험공부는 학교에서는 정규과목 공부를 하고 학교수업을 마치고는 선생님집에서 6명정도 성적이 좋은 진학하는 학생들을 모아 함께 공부한 기억이 난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당시는 라디오라는게 엄청 귀할 때 였는데 선생님께서는 라디오를 구입하셔서 당시 우리마을에는 선생님집에만 라디오가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때 였기에 공부하는 우리방에 밧데리를 이용하여 라디오를 틀어 놓으셨다. 공부하는 우리들이 책은 보고 있지만 라디오소리 듣는게 너무 재미있었다. 선생님은 무슨 사무보고 사모님은 한쪽에서 바느질하시고 우리들 6명은 큰 밥상에 가운데 불 켜놓고 공부하였는데 글쎄 공부를 한기억보다 라디오 듣는것, 노래자랑, 연속극등 재미있게 듣는 기억만 난다.
시골생활
나의 일생중에서 초등학교 졸업때까지의 시골생활은 나에게 하나하나 지워지지 않은 추억 덩어리이자 나의 삶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중학교 다닌다고 광주로 가서 유학생활, 졸업 후 2-3년정도 방황생활 군입대와 제대, 그후 취업, 또 방황생활 부산에서 직장생활----
학교를 다녀와서는 망태를 지고 풀을 하여와 돼지막에 넣었다. 그러면 조금 돼지가 먹고 퇴비가 되어 버린다. 당시 퇴비는 한톨의, 한뿌리의농산물을 더 생산하기 위해 누구나 하는 유일한 방법이였다. 당시 비료는 금비라 하였고 너무 귀한 물건이였으며 아껴가며 꼭 필요할때만 사용하였었다. 이러하였기에 길가에 소똥도 귀하게 여겨 삽으로 담아거름에 보태고 하였다. 당시 우리집에는 돼지막에 돼지, 그위에 닭장에는 닭과 토끼를 같이 키웠고, 오리를 키우다 말다 하였고 소와 염소는 키우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는 잠시 쉴 틈 없이 일하셨고 낮에는 밭일, 저녁에는 바느질, 작은 호롱불밑에서 팔 물건들 정리하기-콩에서 티줍기등 잠시 쉬는 시간이 없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토끼 풀베기, 돼지 풀베기등을 주문하였다. 시킨것은 후딱 해치우고 그냥 놀기 바빴다. 짱치기, 땅뺏기놀이, 다마치기(구슬놀이), 빠이치기(딱지치기)등, 그러다가 싫증나면 집 앞 또랑 고기잡기, 새내끼로 만든 줄넘기, 똘뚝(수로)에서 피리(송사리)잡기, 꼰(고누)두기, 팽이치기, 연날리기등 그때 그때 일년 열두달 놀거리를 찾아 놀았다. 학교 갔다 오면 숙제를 해 놓고 놀기보다 놀고 나서 저녁에나 그 다음날 학교가기 직 전 할 때가 많았다.
나는 당시 키 도 작았고 힘도 세지 않아서 무슨 일이나 남 앞에서 이끌어가며 하지는 못했다. 시킨 걸 대체적으로 착실히(?) 하는 타잎이라고 하겠다. 특히 여름 어머님은 밭 메다 해가져서 늦게 들에서 오셔서 손만 씻고 마당한쪽에 백솥에다 멸치 한 옹큼 넣고 나에게 불 때라 하시며 급히 밀가루 반죽을 해서 뚝뚝 뛰어 넣은 수제비를 끓여 먹던 생각이 눈에 선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이 엄니가 해준 수제비를 제일 좋아라 한다. 지금은 어머님이 아닌 아내가 해 주지만 자주 이 음식을 주문한다. 시골 생활 중에서 나에게도 작은 지게가 있었다. 어머니께서 이웃누구에게 부탁을 해서 맞추었으리라 생각한다. 이 지게를 지고 풀도 하였지만 나무를 더 많이 하러 다닌걸로 기억된다. 가을하고 나면 집집마다 마람을 엮으니라 바쁘다. 초가집을 해 잏어야 하기 떼문이다. 농사가 많은 사람은 문제가 없지만 적은사람은 집 해 잏을 짚이 부족하기 떼문에 일을 해주고 한짐 이렇게 삯으로받아 집을 해 잏었다. 당시는 전부 초가집이여서 너도나도 집을 해잏으기 위하여 마람엮고, 또 새내끼(새끼)를 꼬아야 하였다. 짚 해잏을양 정도 마람을 엮고 동네 솜씨좋게 집을 잘이으시는분에게 부탁하여 집을 해 잏었다. 당시는 지금은 대나무가 별로지만 당시는 추녀대로 꼭 대나무가 필요하였기에 대밭이 있는 집은 짭짤하게 소득을 올리기도 하였다.
또 이 짚은 소 키우는 사람들은 소먹이로 사용하여야했기에, 또 나무하는 새끼도 꼬아야 했기에 참으로 여러모로 사용 하였다. 이렇게 집을 잏은후 이제 나무하러 다녀야 했다. 나무를 해야 밥을 해 먹을 수 있고 방을 따뜻하게 할 수 있고, 바쁠때는 나무를 못하기 떼문에 겨울에는 될 수 있는데로 나무를 많이 해 두어야했다. 으레 아침밥 먹으면 나무하러 가는것이 일이였다. 비나 눈이 많이 와서 산에 못 갈때를 제외하고는 너도 나도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야 했다. 초등학교 때에는 작은 지게에다 갈쿠나무를 해서 지고 내려오면 많이 했다고 칭찬을 듣는 기억이나고 어떨때는 칭찬 듣고 기분이 좋아 아침때, 저녁때 두 번 하는걸 한번씩 더하기도 한적이 있었다. 나무 하는게 산에 가서 그냥 해 오는것이 아니라 산마다 주인이 있어서 지키지 않은 산-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산으로 하러 가야 하기 떼문에 빈걸로 갈때는 그냥 가는거지만 나무를 해서 올 때는 무거워 어깨랑 허리는 아프지, 정말 너무 힘들었다. 보통 마을 뒷골로 가서 해 가지고 올 때는 유치나무거리라고 나무꾼 쉼터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쉬었다가 집에까지 지고 와야 했는데 나무를 많이 해 두 고생, 적게 해도 남부끄럽고 영-너무 힘든 기억이 새롭다. 상황을 봐서 동네 옆 갓 돔, 냉수 골, 공동리 골창으로 나무를 하러 갔는데 주인이 쫓아와서 갈쿠, 지게도 뺏기고 사정하고, 빈 지게로 다른 곳으로 쫒겨 다니기도 했었다. 지금은 나무가 자라 울창하게 되어 들어가서 나무를 하려해도 들어 갈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다. 이렇게 겨울이 지나고 설이 되면 당시는 시장에서 옷을 팔지 않았기에 옷감을 떠다 동네 솜씨 있는 사람에게 맡겼는데 어머니께서 마을사람들의 옷을 상당수 해 주었다. 특히 인기 있는것은 검정색 교복이 최고인기였다. 학교에 갈 때 외출할 때 산소에 갈 때 이 옷한벌이면 다 해결 되었다. 추석에도 금방 추워질거니까 이옷이면 되었고 설에도 이옷이면 되었다. 그러나 오래 입기 위하여 좀 크게 만들었기 떼문에 그게 불만이였다. 신발은 검정고무신이였고 5-6학년때부터 운동화를 어머니께서 사오셨는데 너무 좋아 머리맡에 놔 두고 이 신을 신기 위하여 빨리 설날을 손꼽아 세기도 하였다.
우리 집 점방
자라면서 알게 된 것인데 우리집은 여러 가지 약을 팔고 있었다. 당시 아버지가 약 중간상을 하셨기에 아스피린, 설사약, 기침약, 진통제등이 집에 있었기에 그것이 단초가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 가게 볼 때까지 계속 되었다. 한밤에 집안에 환자가 발생하면 병영까지는 못가고 우리집에 와서 필요한 약을 사가지고 갔다. 캄캄한 밤 잠을 자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며 약 달라고 외치던 것이 귀에 선하다.
그리고 우리집은 땅이 적어서 어떻게든 소득을 올려야 했기에 어머니께서는 정말 악착스레 시장을 다니셨다. 고구마, 토란, 상치, 봄동, --돈이 되는 여러 가지를 그때그때 씨 뿌리고 키우고 가꾸어서 시장에 가지고 가셔서 파셨다. 나는 어머니의 이런 돈으로 학교를 다니고 공부 할 수 있었다. 나중 내가 시골로 내려와서 직장에 다닐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머님의 이런 것들은 나중 내가 작은 도막 땅들을 하나씩 장만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어머님께서 리어카를 가지고 언덕을 내려오다가 또 한번은 캄캄한 밤에 마을 앞 다리 옆을 지나다 다리에 떨어져 허리를 다치셔서 허리가 많이 굽으셔서 그런데도 이런 푸정가리를 해 가지고 기다시피하시며 장에 다니는 모습이 너무 보기가 좋지 않아 말렸으나 계속하심에 그때 마침 가게를 하시던 분이 가게를 정리한다하여 그 가게를 인수하여 도로변 친척의 빈집에서 가게를 보시도록 하였다. 10여년 이 가게를 보시다가 76세에 돌아가셨는데 지금 생각하니 차라리 시장을 계속 다니시도록 하였으면 더 오래 사시지 않았을까 생각 되었다. 즉 운동을 하지 못해 돌아가신 것 같아 죄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즉 어머니 또래 분들은 모두 살아 계시는데 계셔야 할 자리에 계시지 않을때 가슴이 아팠다.
중학교생활
지금은 중학교 가는데 무시험 입학이지만 당시는 시험을 봐가지고 합격하여야만 그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시골의 중학교는 입학을 별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나같은경우는 광주에있는 사범대학부속중학교를 시험을 보아 통과 할 수 있었다. 당시 기억으로 6:1수준이 아니였나 싶어진다. 당시 광주 전남에서는 내가 지원한 사대부중은 광주서중과 최고 인기 학교였고 그 다음이 그 외 다른 학교 들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 학교를 지원하게 된 것은 졸업할 때 운 좋게 도지사상을 받았는데 도지사상 받은 사람은 당시 강진 김향수장학재단의 장학금을 탈 수 있었기에 가능 했었다. 당시 병영동교는 나, 병영북교는 조병선이 타서 나란히 같은 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중학교를 입학한 해 그 해는 3.15부정선거의 해이고 입학하여 몇일 다니다 4.19혁명을 광주 학동에서 겪었다. 조병선과 같은 집에서 학교를 다녔고 상당한 거리를 우리는 도보 통학하였다. 우리 둘은 시골에서는 다들 좋은 성적이였지만 이곳 광주에 와서는 별로 좋은 성적이 아니였다. 광주에 와서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아서 이였고 우리보다 훌륭한 아이들이 광주 전라남도에서 모인것 떼문 이였으리라 생각 해 본다. 나는 다른 과목은 별로였고 미술의 그림그리기를 좋아 하였다. 썩 잘 그린편도 아니였다. 광주시내 사생대회가 있었는데 나도 나가서 그림을 그렸으나 다른 친구들은 입상을 하였지만 나는 입상을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그림 그리는것이 좋아서 계속 그렸다. 시내에서 전시회가 있을때면 구경 하는것도 즐거웠다. 2학년 때 이제까지 사범학교만 나오면 교사자격증을 주는 제도가 교육대학교를 나와야 주는 제도로 바뀌는 정책 발표가 있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들은 혼란스럽게 되었다. 그 중 나에게 묘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나는 서석동 삼촌 집에서 의대를 다니는 행욱이형과 같은 방을 쓰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충격적인 발표를하여 어머니를 포함 당황스럽게 한 사건이 있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시골로 가서 농사 짓겠다. 그리고 그림그리고 살겠다- 이렇게 하면서 학교를가지 않자 시골에서 어머니가 올라 오시고 한마디로 친척들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뭐 요런놈이 있나 그날로 친척 들중에서 유명해져 버렸다. 간신히 친척들이 달래고 미술선생님을 만나고 어쨌든 학교는 계속 다니게 되었다. 이런일이 있고 나서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실망 하였으리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 후로도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어머니를 가슴 아프게 한 일들을 골라가면서 하는 식의 삶을 살아 왔지 않나 생각되어 지금은 옆에 있지 않는 어머니께 정말 할 말이 없다. 공부에 재미를 못 부치고 놀러 다닌 것 -어머님께서 어렵게 마련해준 학비들을 헛되게 쓰고 다닌 적이 많았다. 극장에 영화보러 다니기, 빵집에 드나들며 등 헛돈을 너무 많이 쓴 셈이 되겠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짓들을 하고 다닌 듯 싶다. 용서를 빌고 싶어도 옆에 계시지 않으니 빌 수도 없다. 학교 다니며 미술실 들락 거리는게 유일한 낙이였다. 거기서 지금은 우리나라 쟁쟁한 화가들이 자라나고 있는 산실 이였고 그 화가들의 그림들을 옆에서 볼 수 있었다. 특히 양수아, 손동, 선생님들의 그림들을 옆에서 볼 수 있었다. 지금도 전남.광주 서양화단에서는 사범학교계통의 학교에서 자라온 미술인, 조선대학교 계통에서 자란 미술인 양 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바로 사범학교 계통의 미술인들의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처럼 미술에 빠지게 된 것은 중학교보다 초등학교시절 방학숙제로 그린 그림을 보시고 선생님들의 칭찬들이 점점 빠져들게 된 것 같다. 그 당시 나의 성적표는 미술만 우수하였고 다른과목은 완전히 바닥을 기었다고 볼수 있겠다. 이 엉망진창 중학교 생활은 졸업식에까지 참석하지 않고 졸업식에 가보니 별로 재미가 없을게 뻔하니 늦게 가자 졸업식을 하고 있는 그 시간 학교 앞 빵집에서 한반 친구-심00와 시간을 보내다 교실에 나중 들어가 졸업장, 앨범들을 타가지고 학교를 나왔다.
이렇게 학교 다닐 때는 속 썩이고 엉뚱한 짓을 골라 하는 학생 이였다. 그 예로 국어선생님이 작문(글짓기)원고지 5장 이상 써 오라는 숙제를 내 주었는데 참으로 답답하여서 궁리 끝에 제목을 -하기 싫은 작문숙제 라고 붙이고 그 다음은 -오늘 국어선생님이 원고지 다섯장이나 작문숙제를 내어 주었는데 참으로 쓸것이 없어 큰일이다. 어떻게 하던지 다섯장에다 무어라고 쓰긴 써야 하겠는데 ---이런식으로 원고지를 메꾸어 나갔다 그러다가 막혀서 산토끼 토끼야 노래가사도 쓰고 그래도 남아서 시골에 있는 친구들 이름도 쓰고 지금 시골에는 무엇을할까 그래도 남아서 하늘을 처다보고 구름이 떠있다 차소리가 난다 엿장수소리가 난다 이렇게 쓰다 보니 메꾸어 져서 야 드디어 다섯장 다 했다 이렇게 마감을 하여 그 다음날 숙제를 제출했다. 그리고 그다음 국어시간에 선생님은 나에게 그 작문을 아이들 앞에서 읽게 하였다.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웠는지-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서석동 집 옆에는 광주 공고가 있었고 그 사이 담 바로 옆으로길이 있었는데 담 위에 잠망경식으로 거울을 만들어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주사기로 물총을 만들어 하늘로 쏘면 그 지나가가는 사람이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입 막고 보면서 재미있어하며 놀았었다.
중학교 다니며 1학년때 소풍을 가서 보물찾기가 있었는데 색연필을 상으로 받게 되었다. 이 상은 초등학교 6년 동안 봄과 가을 수많은 소풍때와 여러 행사에서 수십 번 보물찾기를 하였지만 한 번도 상이라고는 타 본적도 없었기에 너무 기뻤다. 그런데 그 후도 보물찾기나 추첨이나 복권 등 경품으로는 상을 타 본적이 없이 내 일생에서 운으로 탄 상은 그 색연필이 유일한상이라 하겠다.
또 국어시간에 함께 공부하는 말본이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그 말본 교과서는 바로 한글학자 최현배박사께서 엮은 책 이였는데 거기에 뒤편에 한글 가로쓰기라는 것이 3-4면정도 소개 되어 있었다. 한글을 이렇게도 쓸 수 있으니 참고 하라는 것 이였다. 선생님께서도 이 과목을 가르쳐주지도 관심도 두지 않고, 한마디로 시험에도 나오지 않은 참고물이였다. 그런데 나는 이것에 푹 빠져 버렸다. 내용을 잠깐 소개한다면 한글을 풀어 영어식으로 사용 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인쇄체 대문자, 소문자 필기체대문자, 소문자로 분리되어 현재 글자가 한자 자음과 모음조합형이라면 이건 옆으로 자음과 모음을 풀어서 인쇄할 수 있고 필기로 할때는 이렇게 쓸 수 있다는 예를 들어 해 놓은 것을 이 시험에도 나오지 않고 선생님도 어느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은 이걸 수업시간에 연습하여 일주일정도에 마스터 하여 버렸다. 지금도 나는 이걸 쓸 수 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더 편하게 익히고 쓸 수 있는법을 몇 개월 연구(?)개량하여 같은 반 학생들은 열심히 시험공부 할 때 나는 이 짓을 하고 있었으니 시험성적이 좋게 나온다면 이상할 일이다. 옆에 앉은 친구도 공부도 지지리 못하는게 내가 이러는 걸 어느 누구도 관심도 두지 않았다. 나는 그때-공부시간에 내가 개발한 나만의 이 한글 가로쓰기를 자랑스럽게 지금도 50년동안 잘 사용하고 있다. 통장에 비밀번호를 써 놓을 때 또 일기장등에 혼자만 알아야할 사항을 메모 해 놓을때 사용하니 남들은 절대 알아 볼 수 가없다. 이 글씨는 중학교를 마치고 집에서 빈둥거릴 때 친구 0천이에게 한번 가르쳐주었는데 그 친구가 탄복하고 재미있다고 쉽게 배웠으며 지금도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지금 와보랑께박물관에는 최현배박사의 그 문제의 한글가로쓰기를 제안 발표한 -글자의 혁명-이라는 책이 보관되어있다. 이 책은 어느 분으로부터 10여년전에 기증을 받았다.
중학교를 입학하여 처음은 학동에서 친척 조00-고모부댁에서 다녔다.
그곳에서 채 일년을 못 다니고 서석동 삼촌집으로 옮겨왔다. 학동에서나온 이유가 거기에 우리를 가르치며 고시공부 하는 분이 계셨는데 엄격히 우리를 통제 하였다. 일과시간표를 짜게 하고 그대로 실천하여야했다. 또 마음의 샘터라는 명언집을 사서 하루에 한 구절씩 익히고 그분앞에서 외어야 했다. 나와 조00도 함께 그곳에서 이렇게 보냈다 아마 나는 그게 너무 질려 어머니를 졸라 서석동 집으로 옮겨오지 않았나 싶어진다. 서석동 집에 와서는 당시 의대 다니는 큰형과 문간방을 같이 쓰게 되었는데 너무 편하였다. 당시 삼촌은 전남대교무과장을 하시다 참의원 사무처로 근무하시어 일주일에 한 번씩 오시고, 숙모는 충장로에서 한복집을 하시었는데 집에서는 큰방-바느질방이있어서 바느질하는사람이 두 분 계시었고 작은형은 서울한양대에 다니고 방학되면 내려왔었으며 할머니께서 식모를 두고 살림을 하시었다. 할머니는 김씨성을 가진 친척이였지만 삼촌은 사촌 외삼촌집이 되겠다. 삼촌은 나중에 서울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계시다가 승주군수로 발령받고 근무하시다가, 나주군수, 광주시장을 하시었다. 삼촌은 그후 광주전남 적십자지사장을 하시었고 5.18광주 사태 후 광주 서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활동을 하신 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셨다. 삼촌은 그후 생전에 장대거리 닷마지기밭-이라는 회고록 책을 쓰시었는데 그 책을 읽고 삼촌께서 살아오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삼촌은 병영 삼인리 태생이다. 일제시대 대구사범학교를 나오시고 해방 무렵 옴천초등학교 초대교장을 하시고 도교육청 학무과장을 거친 후 내가 광주 삼촌집에 처음 들어 갈 때는 전남대학교에서 근무하고 계셨다. 나의 어린시절 뿐아니라 군 제대대후까지 이 서석동 집에서 사는 기간이 5-6년이 넘을 것 같다. 여기서 지내며 나의인격이 형성되었다 하겠다. 아무튼 중학교를 이곳에서 자유분방하니 다니었다. 나를 간섭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동생들이야기
나에게는 두 동생이 있다. 하나는 여동생이고 또 동생은 남동생으로 성이 다른 동생이다. 이 동생은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태어났다. 나는 동생이 태어난 걸 한마디로 좋다 나쁘다 생각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이 동생으로 인하여 나는 든든 할 때가 너무 많다. 똑 같이 우리집에서 운명이다 하면서 정면승부 부딧히며 살아왔으며 앞으로 그러할것이다. 여동생은 유복녀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나는 여섯 살이였고 여동생은 바로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 어머니 나이는 28세로 알고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동생은 태어나고 집에는 살림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은 두 노인네들은 계시고 몸이 불편한 친할머니와 그 어머니-할머니, 어머니는 정말 살기위해 남자일 여자일 가리지 않고 고생하셨다. 이렇게 나를 초등학교를 졸업시키고 중학교를 시골도 아닌 광주로 보내고 드는 교육비 마련에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또. 광주로 유학가서 성적은 바닥이고 학교나 얌전하게 다니는것도 아닌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고 학교 다니지 않겠다고 쇼를 하지 않나 어머니 마음이 어떠하였을까 짐작이 간다. 이때 어머니마음에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후 어쩌다 동생이 생기게 되지 않았나 싶어진다. 이윽고 남동생이 태어났다. 동생 아버지는 당시 마을 이장 이였다. 어머니는 부녀회장이였고-
동생들도 어렵게 자랐다. 동생을 억지로 낳아 키우는 상황이였으니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자녀들을 위해 애쓰셨다. 동생들도 고생을 많이 하였다. 시골에서 살면 누구나 하는 지게지고 나무하고, 풀 베고, 여동생도 나무해서 머리에 이어 나르고 지금도 나는 동생들에게 죄인이다. 내가 광주로 유학가지 않았으면 더 편하게 넉넉하니 살지 않았을까, 그 후도 논마지기도 넉넉하지 않았을까 생각 해 본다. 즉 내가 중학교다니는데와 학교를 마치고 2년정도 방황할 때 쓴 돈을 저축하였다면 어머니 역시 그처럼 고생은 덜 해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 해 보면 가슴이 메인다. 여동생은 내가 부산에서 살 때 결혼 하였고, 남동생은 내가 직장-학교에 다닐 때 결혼하여 지금은 경기도에서 살고 있다.
중학교만 다닌이야기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어머님께서 광주로 올라오셨다. 삼촌이랑 여러 가지를 의논하기 위함 이였다. 당시 어느 학교로 진학하고 싶냐고 나에게 물음에 나는 서울 서라벌예술고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삼촌도 그렇고 어머님도 기가 찰 일이다. 공부나 잘하나 우리형편에 광주로의 지금 다님도 간신히 다니고 있는 형편에 서울로 유학을 가겠다니 어처구니가 없을 수 밖에-
그건 좀 그렇고 광주 조대부고에 다니도록 해 보자 얘기가 나왔는데, 나는 싫다고 하였고 어머님께서는 장흥고를 얘기 한 듯 싶다. 그럼 일년 쉬는 셈치고 속 차리게 그냥 놔두어 보자는식으로 결론이 난 듯싶다. 중학교를 마치고 나는 유덕동 삼촌 집으로 나왔다가 학동에서 동명동으로 이사한 조00 고모부님댁으로 옮겨 살았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천방지축 날뛰니 어머님께서 삼촌께 부탁하여 광주 근대공예사라는 간판집에서 기술이나 익혀서 자립하면 좋겠다고 소개하여주었다. 그러나 나는 한 달이나 다녔을까 다시 나와 놀고 있으니 밥값이나 하라고 광주관광호텔 도안실로 들어가서 일하게 하여 주었다. 거기서는 구내식당이 따로 있어서 잠은 도안실 한 쪽에서 자고 밥은 그 식당에서 먹고 이러다가 한 달 쯤 다니다가 이곳에서도 나와 버렸다. 그런데 이제 집에서 돈은 부쳐주지 않지 내 밥은 내가 해결해야 했다. 그 다음 들어 간 곳이 대한일보 신문사지사에 들어가 배달 총무를 하고 배달도 하면서 그곳에서 묵고 자고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신문사 들어오기 전 지금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당시 도청의 보조원으로 다니는 작은고모가 있었는데 그 고모가 얼마 돈만 있으면 변두리 어느 고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 할 수 있다고 의견을 물어왔다 정식으로 다녔다면 3학년이니까 나는 맘에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께 얘기하고 그 돈을 부탁하고 나머지 학교는 내가 벌어 다니기로 하고 요청하여 어머님께서 돈을 마련하여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대로 한것이 아니라 이렇게까지 하면서 졸업장을 따야 하나 맘이 들어 포기하고 보내준 돈을 달리 다 써버렸다. 그리고 편입하지도 않았다. 만약 당시 편입하였더라면 나의 인생은 많이 달라져 있을런지 모른다. 그때 어떻게 해서든지 고등학교의 졸업장이 있었다면 나는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을 수 있었을 수 있었다. 당시 사범학교만 나오면 교사자격증을 주는 제도에서 교육대학교 졸업 제도로 바뀌다 보니 교사가 엄청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교 졸업생중에서 선착순으로 몇 명을 접수를 받아 몇 개월 정도 양성소를 다니도록 하여 교사 자격증을 주는 제도가 시행하게 되었는데 나는 뻔히 갈 수 있는이 신청을 알고도 할 수 없었다. 그때를 얼마나 후회 했는지- 생각해보면 그 후도 나의 인생은 잘못을 하고 후회하는 것의 되풀이였다고 할까-, 특히 내가 그 후 다른 직장도 아닌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너무나, 양성소 출신교사도 보고, 사범출신교사도 보고, 교대출신 교사도 보고 그들과 함께 근무하면서 같이 근무를 시작한터이지만 그들의 봉급은 나의2-3배나 되고, 더욱 평생 승진도 없는 사무보조직으로 20년을 넘게 그들의 봉급을 계산 해 주어야만할 때 그날은 봉급날이라 즐거운 날-이러면서 얼굴은 웃었지만 정말 슬픈 날이였다.
군대이야기
군대 가기 전 이렇게 풀어놓은 망아지마냥 천방지축 생활하면서 좋게는 피부로 겪으며 배우면서 살아 왔다고 할 수 있겠고 참으로 엉망진창생활을 하였다. 신문사 지사에 다니다 그곳도 이내 그만 두고 광주의 친척도 많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친척들이 소개 해 준 모든 직장들을 전부 집어치우고의 생활이니 막다른 가서 잘 곳도 먹을것도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밤늦게 시내를 헤메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지나는 거지가 말을 붙여왔다. 잘곳이 없다고 하니 따라 오라고 하였다. 안내한곳이 남광주역이였고 조심스레 철조망을 통과하여 지하굴로 들어갔다. 이렇게 따라간 곳이 당시의 남광주역 구내에 비어있는 과거 전쟁때의 땅굴-지하탄약고였다. 땅속이고 입구를 가마니를 뜯어 막아 놓고 역시 가마니조각을 깔고 이불도 역시 가마니였다. 이속에 들어가서 잠을 청하였다. 이곳에서 열흘정도 지내지 않았나 싶어진다. 이렇게 하고 다니면서도 스케취북은 꼭 가지고 다녔다. 지금도 당시 그곳에서 그린 그림 몇 장이 있다. 이때 호주머니에 약간의 동전짜리가 있어서 먹는것은 남광주역 바로앞에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식당이있었는데 당시 50원만내면 커다라양판에 가득국수를 주었다. 거기에 소세지도 들어있고 양이 엄청 많았다 하루 한끼 그걸 사먹으며 살았는데 그 사먹을 돈까지 떨어져 버렸다. 이리하여 굶고 있는걸 보고 나를 데려온 거지가 자기가 동냥하여 얻어온 돈을 주면서 밥이나 사먹으라 하였다. 그 거지가 준 돈으로 한끼를 떼우고 또 하루를 지탱할수 있었다. 거지밥을 얻어 먹고 나서 별 생각이 다들었다. 이건 아니다 싶어 고민하다, 그 다음날 어느 친척집에 가서 차비를 빌려 집에 내려왔다.
집에 내려오니 한마을 건넛집 친구가 면사무소에 병사계를 보는 사촌형님이있는데 지원을 부탁하여 자기는 군대간다고 하는얘기를 듣고 나도 해 주라 부탁하였다. 그리고 사흘 후 군대 가야한다는 날자를 전해받았다. 그 다음날 부랴부랴 광주 친척집에 보관시켜 놓은 짐을 챙겨가지고 내려와서 그 다음날 함께 군대에 가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도 말썽만 골라가며 피우는 나를 군대 간다니 어쩌면 군대 가서 사람 되어서 올런지 모르겠다 하셨는지 아무 말 않으셨다. 우리마을에서 세사람이였고 병영면에서는 약30여명 되지 않았나 싶어진다.
목포에서 소집하여 인원점검 후 야간에 입영열차로 논산으로 이동하여 훈련소에 들어가 신체검사를 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어렸을때 오른쪽 가슴에서 겨드랑이사이 불에 덴 상처가 있다. 이 상처를 보고 팔을 자유로 움직일 수 있나 몇 번이나 면접관이 해보라고 하면서 아프지 않느냐고 물었다. 6살떼 난 상처로 이렇게 겉모양은 당기기는 하지만 아프지도 않고 아무렇지 않다고 하니까, 그러나 미심쩍은지 다시 팔을 뒤로 돌려보라, 앞으로, 옆으로 해 보라시키더니만 ,군대가고 싶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그럼 되었다고 합격을 시켜주어서 입대할 수 있었다. 만약 팔을 움직이며 조금이라도 아픈체하였다면 영원히 군대는 가지 않았으리라 생각 해 본다. 군대가서 너무 힘들 때, 그때 아픈척 해 버릴 껄 생각하기도 하였다.
1966년 5.16일 입대 - 군번 11603768, 나는 진짜 군인이되어 여러 가지훈련을 받아갔다. 날은 덥지 정말 힘들었다. 같이 입대 한 아는사람들 중에서 너무 힘들어 자격미달로 유급 당하였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훈련소에서 특히 기억 난것은 식사당번 중 -배식을 마치고 밥먹고 식통과 밥주걱을 반납하기위하여 씻다가 수돗가에서 밥주걱을 잃어 버린것이다. 그리하여 잃어 버렸다고 소대원들이 보는 앞에 빳다-곡괭이자루로 엉덩이 8대를 맞은 일이다. 그다음 무조건 다음 식사때까지 채워놓지 않으면 두배로 때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질려 버렸다. 배식을 마친 후 밥도 먹지 않고 다른 소대 수돗가에 가서 죽기 살기로 기회를 노렸다. 나처럼 주걱을 옆에 두고 식통사이의 밥풀 빼는 사이 밥주걱을 드디어 훔쳐 달렸다. 우리내무반 옆을 지나며 열려있는 창문안으로 던저 놓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매점으로 들어가 옆에 사람이 들고 있는 빵을 베어물었다. 그 옆 소대식사당번도 나를 쫓아왔지만 밥주걱을 내무반으로 던진걸 보고도 나중 들어와 찾으니 네가 찾아 가라구 하니 그냥 나갈 수밖에 없고, 훔친 나를 찾고 싶어도 옷들이 같은 사람 속에 섰여 버리니 누군가 구분 할 수도 없고- 이렇게 밥주걱을 채워 놓고 그 다음은 맞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이런것 역시 군대훈련 아니였나 생각해보며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훈련을 받던중 특기자 신고가 있었다.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하니 그림 그린다는 사람 몇 명들에게 종이 한 장씩 주고 무엇이던지 그려 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 훈련소 막사를 그린 듯 싶다. 그린것을 걷어가고 아무연락도 없고 그 후로 남은 훈련을 마치고 의정부 보충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병영에서 같이 입대한 사람들도 다시만나고 동네친구도 만났다. 그곳에서 몇 일을 보내며 군번과 이름을 부르며 방송을 할때는 잘 들어야했다. 부른 사람은 떠불백을 싸가지고 구령대 앞으로 모이라는 방송이 하루에 여러 차례 있었으며 아는 사람-친구도 호명되어 어딘지 모르게 헤어져야했다. 그런데 다 부르는데 나는 부르지 않았다. 그 이튿날 오후 늦게 나 혼자를 부르는 방송이 있었다. 나도 드디어 가는구나 가슴 설레며 군장을 챙겨 지정장소에 가니 짚차 한 대가 있었다. 신원을 확인하고 무조건 차에 타라는 것이다. 그 운전기사가 하는 말-너는 인제 죽었다. 약 두 시간을 산속으로 차를 타고 들어갔다. 나는 새파랗게 질려 버릴 수밖에-옆에 아는 동료나 있나 나 혼자 드디어 도착한곳이- 5군단사령부 작전참모부 이곳에서 차드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훈련소 특기자 신고 한 것이 필요한 나를 지정하여 이곳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약3년을 보내게 되었다. 육군대령 작전참모실 당번겸 스라이드 차드병으로 근무하다가 몇 달 후 나보다 훨씬 실력이 좋은 -인쇄소 도안사로 일하던 사람이 들어와 나는 그곳에서 작전참모부-교육과의 교육 행정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곳은 고급사령부로서 장교들이 일반 병들보다 많았다. 훈련소에서 하늘같았던 소위, 중위는 이곳에서는 우리 병들보다 못한 신세임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사병들이야 시킨것만 하면 되지만 장교부터는 책임이 따르니 잘못 하였을 때는 심한 문책장면을 보아야 했었다. 그렇다고 우리는 편한 것만이 아니였다. 본 부대 입대 후 내무반에서 잘 때는 약 6-7개월 정도는 고참들의 시킴에 유의하여야 했고 밤마다 기합을 받지 않은 날이 없었다. 저녁밥 먹고 기합을 기다려지기까지 하였다. 한참 맛있게 자다가 일어나 맞기보다 아예 차라리 맞고 자는것이 낳아서였다. 이후 뒤에 졸병들이 들어오자 그들에게 인계하고 사무실에 잘 수 있었다. 당시는 사무실경비, 비상상황을 대비하여 사무실에서 자는것을 묵인하여 주었다.
내가 근무하던 사무실은 헬기장 옆에 있었다. 그리하여 이 헬기장으로 국방부에서 군사령부에서 서울에서 손님들이 자주 이용하였기에 주변이 잔디밭이 깨끗이 잘 관리되고 있었으며 당시 사령부지휘소 신축되기전에는 이곳이 야전지휘소로서 판넬로 건립된 건물 이였다. 대체적으로 시설이 당시로서는 지내는데 불편이 없었지만 한가지 화장실이 야외에 있었고 정말 엉망 이였다. 어쩔 수 없이 이용하였지만 이런곳이 있나 할 정도였다. 아무튼 나는 평상시 근무가 끝나면 잔디밭에서 딩굴며 시간을 많이 보냈다. 하늘을 쳐다보고 고향 생각도 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나 나중 제대하면 어떻게 살아가야하나 고민 해 보기도 하였다. 같이 근무하는 사람들 중에는 선임 병 중에는 경북울진이 고향인 직접 고참이 있었고, 또 경남-남해출신, 경남-김해출신, 부산출신, 거제출신이 있었고 경북 대구출신이 있었다. 그런데 고향출신으로는 광주광산출신 바로 나의 학교선배인 교사출신과, 순천출신 전직 교사가 같이 근무하게 되었다. 이들과 2년 넘게 부대끼며 군복무를 하였다. 당시 전화는 없어 통화할 수 없었고 오직 편지만이 사회와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중에서 여고생들의 위문편지는 정말 인기짱이였다. 그런데 읽기는 좋은데 아무리 답장을 잘 써도 답장을 받지 못하였다. 같은 부대에서도 여고생들로부터 위문편지 답장을 보냈는데 답장 받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남자에게는 편지를 보내면 심심하지 않게 답장이 와서 우리를 즐겁게 하였다. 나 역시 그러하였다. 몇 번편지를 주고받으면 고향이 어디고 휴가나오면 놀러 오라는 얘기까지 나오게 되었는데 나는 진짜 찾아가서 대접을 잘받기도 하였다. 휴가 나오면 의례 들린 마포에 형님댁-큰집이 있었는데 그곳 바로 옆의 동네에 살고 있어서 찾아 간적이 있었다. 이집에는 딸만3형제였고 언니는5학년 3학년 1학년짜리였는데 나는3학년짜리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저녁밥상이 흡사 사위밥상처럼 소고기신선로에 몇 가지 전이며 거창하였다. 또 두군데를 초등학생집을 휴가 때 찾아 간적이 있었는데 편지로 하다가 만나는 게 참 재미있었다. 또 근무 중 내 바로 밑에 졸병이 들어왔는데 신고를 받으며 억지로 소개받아서 그 졸병 동네아가씨-삼천포아가씨와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군대에서의 편지는 정말 유일한 즐거움 이였다. 답장을 쓰고, 내 편지를 받고 무슨 생각을 할까, 또 답장을 기다리고, 온 편지를 읽고 또 읽고, 또 그 답장을 쓰고- 군생활의 단조롭고 힘들고 정말 몹 쓸 유혹도 이 편지들을 읽으며 위안을 받았다고 보겠다. 밤샘근무, 추운 곳에서 취침, 항상 배 곺음, 허기진 하루들 - 그러나 제대 후 이런 편지교환- 펜팔도 생활이 바뀌고 자연 현실에 쫒겨 몇 번 서신을 교환하다 시들해져 버렸다.
군대가기 전 길가 여기저기 가게마다 앞에 라면을 소개하는 광고지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가게 앞 그 광고지를 볼 때마다 그 라면 맛이 궁금했다.
어느 날 나는 그 라면 두 개를 샀다. 그리고 당시 양림동에서 여고를다니며 자취를 하고 있는 친척 동생집에 가지고 갔다. 마침 학교에서 돌아와 있었다. 이거 사왔는데 요리 해 볼래 부탁을 했다. 그 동생은 별로 반가워하지 않고 알았어 기다려-하며 그걸 들고 부엌에 들어갔다. 잠시 딸가닥거리는 그릇소리를 들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밥상을 들고 왔다. 그런데 그릇에 삶은 마른 국수사리를 들고 오며 스푸를 가지고와 그 국수에 스푸를 뿌려 먹으라는 것이였다. 먹어보니 정말 맛이 별로 였다. 맛이 별로라니까 그러니 무달라고 이런걸 사왔느냔 얘기다. 라면이라는게 그러나 보다하고 얼마 후 군대를 가게 되었고 훈련을 마치고 내가 계속 근무할 부대 배치를 받고 그곳에서 또 다른 라면 맛을 보았다. 피엑스(매점)에서 라면을 팔고 있었다. 선임 병들이 최고로 즐겨 먹는게, 먹고 싶어 하는게 그 라면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 당시 입대 전 친척 여동생이 해 준 라면이 엉터리 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도 라면 맛을 보고 그 맛에 푹 빠져 버렸다. 당시 라면은 우리들 사이 최고 특식이였다. 당시 군대 매점에는 빵과 건빵 비스켓 사이다, 막걸리등을 팔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대로 먹을수있는 빵이 최고 인기였고 그 다음 이 라면이 인기였었다. 그러나 당시 군인 월급이라는게 라면 열 개값도 않되는 상황이여서 맘 놓고 먹을 수 있는것이 아니였다. 우리가 야간 점검 차 소속부대를 나갈때도 그 부대에서 대접하기 위해 내놓은것도 이 라면이었으며 이 야간 밤참으로 먹는 한 그릇의 라면맛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나중 이 친척 동생과 한자리 했을때 이 라면 이야기를 하였더니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듯 하였다.
군대생활 중 우리가 식사하러 식당에 갈 때 꼭 챙기는것이 있었다. 바로 조미료가 되겠다. 이걸 국물에 처서 먹으면 희한하게 맛이 좋아지는 것을 알고 우리는 이걸 자주 즐겨 넣어 먹었다. 그냥 먹으면 그저 그렇고 그런맛이 이거만 치면 맛이 훌륭하여서 밖에 외출 갈 때 휴가때면 이걸 사서 챙겨 부대에 들여와서 그대로 봉지채 식당에 가져가면 고참들에게 뺏겨버리니까 작은 종이에 조미료를 조금씩 소포장하여 책상안에 넣어두고 밥 먹으러 갈 때마다 그거 하나씩 챙겨가서 국그릇에 타서 먹곤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조미료 않치는게 건강에 도움이 되고 치는걸 꺼려하지만 당시 우리는 이 조미료를 치면 맛이 훌륭해지는것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당시는 이 조미료가 점점 우리 식생활 속에 퍼져가고 있는 중 이였기에 상당히 우리들은 이렇게 즐겨먹었다.
군대에서 또 나의 즐거움은 그림 그리는 것 이였다. 당시 그린 그림들이 상당수 있다. 그리고 심심풀이로 당시 우리나라 군인들이 모두 보는 전우신문에 컷 삽화를 투고하였는데 내 그림이 전우들의 시, 수필, 소설등 소개될떼 단골로 내 이름과 함께 소개되었다. 당시 그림스타일은 보고 그린 사실그림이 아니라 역시 반 추상- 심상의 표현방식의 그림이 되겠다.
군생활중 내가 가장 크게 얻은 소득은 지금 생각 해 보면 그 당시 우리부대 경례 구호 인 실천-!이 아닌가싶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알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걸 근무하며 가슴속에 심어졌지 않았나 싶다. 그럴것이 3년 가까이 인사 구호가 실천-! 이렇게 하루에도 수십번 인사경례하며 외치고 외쳤던것이다.
입대한지 일년쯤 되었을까 내가 상병계급을 달고있을때 집에 휴가 가서보니 신체검사 받으라는 통지서가 와 있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면사무소에 지금 군대가서 계급이 내일모래면 병장인데 무슨얘기냐-연락하니 미안하다고 사무착오로 그리하였다고 하였다. 그처럼 나는 지원하여 군대를 일찍가서 나의 초등학교 동창들은 내가 제대하고 나니 군대를 가는걸 볼 수 있었다. 또 어이 없는것은 제대무렵 1.21사태가터져 -즉 김신조일당이 서울을 잠입 청와대를 습격코자 한 사건이 되겠다. 이후로 군 복무기간이 32개월에서 36개월로 연기되었다. 마침 그 무렵 또 의가사 제대신청을 하라는 공문이 왔다. 2대독자는 의가사 제대를 할 수 있다는것 이였다. 혹시나 하고 신청을 하였는데 이것이 결재되어 그대로 있었으면 1.21사태 후 한층 엄격해진 군생활을 하여야 했을터인데 32개월 복무기간 연장 전 근무만 하고 제대를 할수 있었다. 한편 생각해보면 군대 안가고 있었다면 군대도 면제 받았을터인데 지원해서 갔다 온 셈이 되겠다. 나는 절대 지금도 이렇게 군대 다녀온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고 있다. 군대에서 많은걸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첫째- 참고 인내하는것, 둘째- 실천하는 것이라 할까. 이 군에서의 생활은 정말 어머님께서 사람 되어 나올 려나 하는 기대처럼, 지금 생각 해 보면 조금 사람되어 나온 셈이 되겠다.
제대 후 광주에서이야기
제대 후 집에 왔으나 할 일거리는 없고 막막하였다 마침 광주 삼촌집에서 연락이 왔다. 작은형이 학교를 마치고 군대도 마치고 그 형도 무슨 사업을 생각하던 차 그 형은 전기과를 나왔기떼문에 한양전기라는상호로 전업사를 차려 같이 해 보라는 것이였다. 나도 순 경험도 없고 그 형도 경험 없고 정말 어려운 일이였다. 자기가 주도적으로 무엇을 개척해야겠다는 의지가 없다보니 사업이 잘 될 리 없다. 공사재료 판매에 등 기구가설 설치등이 주요사업이었으나 1년정도 이곳에서 근무하다가 나는 장사가 잘 된것도 아니고 영 재미가 없어서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전기를 다루는 법 전기구 설치하는 법 등을 익힐수 있었다. 나중 이 기술로 나는 상당기간 먹고 사는 기반이 되었다. 그 가게는 내가 나온 몇 년 후 문을 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나와 또 방황길에 나설수 밖에 없었다. 무작정 집을 나와서 간곳이 제주도가 되겠다.
제주도에서 이야기
목포에서 오후 늦게 배를 타니 그 다음날 새벽에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누구하나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이곳에서 나의생활은 시작되었다. 도착하고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형광등 2개 조립품 구입 가격이 되었다. 지금 돈으로 3-4만원쯤 될까 싶어진다.
시내 전기구파는 전업사 가게를 찾았다. 육지에서 왔는데 일할수 있냐니까 지금 일하는 사람이 있어서 안되겠다 하였다.
그럼 장사를 하고 싶은데 물건을 좀 저렴하게 달라고 부탁을하고 전구 몇개 쵸크 전구 형광등 부속 한두가지 도라이버하나와 펜치하나를 사정이야기를 하고 구입 하였다. 구입한 물건을 형광둥 박스에 담아 이 박스를 들고 장사를 시작하였다. 형광등 고치세요- 골목 골목 집집마다 다니며 형광등 고치세요 묻고 다녔다. 처음 이일을 시작할 때 얼마나 망설였는지 그러나 이거 하지 않으면 오늘 굶는다, 잠 잘 수 없다 막다른 생각에 용기를 내어 망설이다 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다니다 보니 형광등 손 봐주라는 사람이 있기 시작하였다. 당시 제주 및 우리나라 전압이 100v였는데 전압이 고르지 못해 쉬 고장 나는점이 있어서 형광구를 갈아 끼우는 집이 많았고 스위치를 편리하게 달아 달라는 집이 있어서 몇 일 이렇게 돌아 다니다 보니 밥값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방 값 이였다
해변가 건입동 싼 여관에서 묵었는데 주인이 하루는 나를 보고 제안하였다. 자기 집 손님방이 20개정도 되었는데, 또 옆에 이규모의 여관이 또 하나 여동생이 관리하고 있었다. 외아들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쩔수 없이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 하고 있는 터였다. 여기 두군데 여관의 전기고장을 손봐주고 저녁 잠은 빈방에서 자면 어쩌냐 하는것이였다. 전기부속품 재료값은 주겠다는 것이였다. 나로서 이보다 고마울수가 없다. 사실 주인은 나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나를 도와주기위해 제안을 한것 이였다. 나는 이 여관 2개소 관리를 맡아 하면서 잠은 이곳에서 해결하고 아침밥은 가까운 식당에서 먹고 낮에는 장사 다니다 때 맟추어 해결하였다. 이렇게 지내다보니 상당히 저축까지 하게 되었다.
아침 집을 나서서 골목을 돌아다니며 계속 하는 일 형광등이나 전기고치세요. 참으로 서글픈 일이였다. 오늘은 밥값이나 하려나- 이렇게 다니던 중 부산으로 떠나오기 20여일전 쯤일까 나는 상당히 큰 공사를 맡을 수 있었다. 신축한 정모공장의 전등을 설치하는 공사가 되겠다. 형광등박스만 들고 다니며 장사하는 나에게 그 사장이 자기집에 등을 다는 나를 잘 보아서 자기공장 등까지 부탁 한 것이다. 공장은 약 50평정도 되었으나 돼지털를 가즈런하니 하는작업을 하는 일이다보니(-이털로 브럿쉬를 만든다) 작업대 위에 많은등을 설치 하는것이 되겠다.
일주일정도 이 공사로 정신없이 매달렸다. 공사를 마치고 상당한 돈을 만져 볼 수 있었다. 장사의 묘미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침마다 형광등박스 메고 다니며 집집마다 소리치는 내 모습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그때도 스케취북은 소지하고 있었으며 저녁 숙소에 돌아와 무언가 맘에 엉켜 있는것을 스케취북에 글적거림으로 풀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의 생활중에 기억에 남은것은 같은 여관에 있는 어느 여인의 죽음을 겪음이다. 어느 날 태풍경보가 내려 몇 일 장사를 할 수 없을 때였다. 꼼작 없이 빈 방에 갇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같은 여관에 있는 안면이 있는 여인이 밥을 내가 끼니때만 되면 밥을 사먹으러 나가는걸 보고 자기가 저녁을 차릴테니 같이 먹자 청하였다. 그 여자는 배가 제법 부른 임신한 여자로 여관에서 손님을 받는 여자였다. 망설이다 하두 권하여 밥상에 앉았다. 그 여자는 이곳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터라 상당히 신경써서 밥상을 준비한것을 알 수 있었다. 밥을 먹으며 자기사정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남자가 길거리에서 싸움을 하다가 육지교도소에 수감 중 이라는 것이였다. 이 뱃속에 아이도 그 사람 아이라며 한번 면회를 가야 할터인데 마음데로 되지 않는다며 신세를 한탄 하는것 이였다. 나는 우쨌든 않되었다며 살다보면 좋은날이 오겠지요. 위로하면서 고맙게 잘 먹었다 인사하며 일어섰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시간이 새벽 한시쯤 되었을까 밖이 시끄러운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내용인즉 경찰의 단속이 나온것이였다. 그 여자도 단속되어 끌고 갈려니 안가겠다고 버티고 그런데 상황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여자가 쓰러지니 경찰이 발길질하며 강제로 태우고자 하는것이였다. 그런데 경찰이 그여자 배를 찬 것 같았다. 그러니 여자는 배를 안고 뒹굴었다. 누가봐도 임신한 여자의 배를 차버렸으니 무슨 일이 일어 난것 같았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경찰차에 실어 가버렸다. 눈을 뜨고 밖에 나와 바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였다. 나는 들어와 별일 없기를 빌며 다시 잠을 청하였다.
그 다음날 장사를 다녀오니 여관 주인이 그 여자가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말하였다. 엊저녁 그 밥 한끼 얻어 먹은 죄로 그냥 있기가 뭐하였다. 병원에 들려보니 -엊저녁 그 사건으로 뱃속에서 아이가 죽었고 배수술을 하여 꺼냈으며 이제 회복중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여자도 제주에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고 내가 문병을 가니 갑자기 내가 보호자가 되어 버렸다. 병원에서 당장 죽은 아이를 처리 하여야 하는데 어떡하느냐며 부탁을 하는 것이였다. 도대체 그걸 어떡해야 하니까 남모르게 저녁에 산에 묻으라는 것이였다. 좀 어이가 없었지만 크게 힘들것 같지 않아서 알았다고 나올 때 박카스박스만한 그것을 들고 나와 인근 공원-사라봉에 가서 묻어 주었다. 또 그 다음날 장사를 다녀오니 여관주인이 몇 가지를 사주면서 내가 가야하는데 자네가 좀 갖다주게 부탁하여서 별 수 없이 그걸 들고 다시 병원을 찾았다. 어제보다 형편없이 몸이 좋지 않아 보였다.
하면서 내가 죽기 전 감옥에 있는 그 사람을 꼭 보고 싶은데 어쩔런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였다. 얼마를 앉아 있다가 그 눈물 흘리는것을 보면서 자리에 일어서서 숙소로 돌아왔다. 가슴이 여간 짠한게 아니였다. 그 다음날은 가지 못하고 그 다음날 장사를 다녀오니 여관아저씨가 그 여자가 숨졌다고 얘기 하는것을 들었다. 그러며 화장하였다며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었다.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살고 죽는것이 이처럼 허망 한 것인가를 - 나는 뒷산에 올라 못 먹는 술 한잔을 마시며 그 여자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또 이 일이 있는 얼마 후 주인은 나에게 한가지 권하였다. 자네 그렇게 돌아 다니며 장사 하는것도 좋은데 우리집 가게 할만한 자리를 그냥 빌려 줄테이니 꽃가게를 하여 보게나 하며 권하였다.
내가 원예고등학교를 나와서 좀 알고 있어 도와 줄터이니 생각 해보게나- 그것은 나중에 나에게 엄청난 기회였던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러나 당시 나는 꽃가게가 너무 생소 하였고 그 후 내가 제주 시내를 장사하며 돌아 다녀도 시내에는 꽃가게는 한군데도 없었고 딱 한군데 칠성통 어느 할머니가 길가에서 어디선가 꽃을 받아다가 물 바께스에 꼽아놓고 파는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장사가 될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이 지금 보이는것만 보고 지금의 화환, 꽃꽂이, 화분등은 생각할수 없었던 것이다.
이점의 이 때가 기회였던것 임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사는 일생에 세 번 기회가 있는데 다른것은 잘 모르겠고 그것이 그 중 한번의 나에게 기회였음을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다.
그 여관주인은 나를 관찰 해 보고 이 역시 나를 도와주기위해 하는 의견 이였는데 나는 이 깊은 뜻 -사업계획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가 약 보름 후 부산행 배를 타고 말았다.
여관아저씨는 인사하는 나에게 아쉽다며 잘 살게나 손을 잡아 주었다.
약 2개월여 제주도에서의 생활은 들어올때는 거의 빈손이였지만 호주머니에 상당한 지금 돈으로 1백오십만원쯤 될까 모아 가지고 부산배를 탔다.
제주도에 있으면서 감명 깊은것이 있었다. 그들의 검소함이랄까. 여관아저씨께서 서울 볼일이 있다고 올라 가는것을 보았는데 시간이 없어 비행기로 갔다가 비행기로 온다며 입고 가는 복장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양복에 넥타이 메고는 고사하고 잠바의 평소 입던 옷에 스리퍼를 끌면서 비행장에 가는걸 보고 무슨 일을 보러 가는지는 몰라도 너무 소탈하였다. 아무렇지 않게 그 차림으로 다녀 오시는 것이였다. 또 한번은 제주의 번화가 3층 방 숫자만도 40여개되는 한 여관에서 전등수리 일을 하였는데 마침 점심때라서 점심을 같이 먹자는 것이였다. 그때 나는 밥을 매끼 사먹고 다니는 형편이라 은근히 기대 하였다. 이런 부잣집이니 반찬이 잘 나오겠지 하면서 기대를 하였는데 막상 그 여관 주인과 상을 받았는데 배추 삶은것 한 양판 간장 한종재기 바다에서 나는 파랜가 뭐 무침하나 달랑이것이 전부였다. 그 주인 되신분은 그 배추 약간 데쳐 삶은것을 간장에다 찍어 너무 잘 잡수셨다. 나두 먹을수 밖에 사실 다른걸 먹으려 해도 먹을게 없으니 이걸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소탈하고 검소한 밥상은 너무 인상 깊었고 이때 처음 먹어본 이 배추 데친걸 간장에 찍어 먹는것은 너무 맛있게 먹었고 두고두고 가슴에 남았으며 나두 지금도 그 배추 데친걸 가끔 일부러 해 달래서 즐겨 먹는다. 그처럼 부자이면서 이처럼 실용적 소탈한 삶의 자세의 제주도인의 모습이 지금도 남아 그때가 그리워 진다.
부산-세전사이야기
나는 저녁에 배를 타서 그 다음날 부산항에 내렸다. 제주와는 비교되지 않은 큰 도시였다. 물론 부산은 내가 처음 온 셈이 되겠다. 그런데 제주에서처럼 장사를 시작하였는데 이곳은 영 장사가 되지 않았다. 하루걷기는 골목골목 집집마다 고치세요하고 다녀도 수확이 없었다, 처음이니까 그러겠지하며 내일은 되겠지하며 계속 다녀도 하루 종일 다녀 기껏 형광등 전구 하나 바꿔 끼우는것이 하루의 전부 였을때가 많았다. 보름정도 이러구 보니 가지고 있는 돈 상당액을 써저 버렸다. 별수없이 생각을 바꾸어 취직하기로 하였다 . 당시 범일동 어느 전기구공장-세전사앞을 지나다 직원모집공고를 보고 안에 들어갔다. 그곳은 형광등기구를 만들고 안정기를 생산하는 공장이였다. 내가 하고 있는 장사와 비슷하고 알고 있는 것과 같아 흥미 로왔다. 숙식을 이곳에 해결 할 수 있는게 제일 맘에 들었다. 제주도에서부터 이곳에 부산에 와서까지 먹는것도 먹는것이지만 잠자는게 제일 신경 쓰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상당기간 약 4-5년을 근무한것 같다. 이곳에 들어가니 편해 버렸지만 제주도에서와는 수입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었다. 그런나 편한 맛 재미있는 맛으로 계속있게 되었지만 수입이 적고 대신 여유시간이 많아 그 시간에 소비가 되어 그러니 저축이 되지 않았다. 1년을 근무하다보니 생산반장이되고 공장이 좁아 사상으로 이사 후는 생산주임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감투만 좋지 빛좋은 개살구라고 할까 정말 저축을 할 수가 없었다. 월급도 적었지만 나의 돈 씀슴이가 크다 할까 흥미로운 -호기심을 자극하는곳에 지출하고 보니-한마디로 쓸데 없는곳에 지출을 하다보니, 도대체 저축을 할 수 없었다. 하면서 이 생활에 이미 젖어 버렸고 제주도에서의 장사 같은 탈출방법은 생각 할 수 없었다. 장차 언젠가 결혼도 생각해보고 여러 가지로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어 안타까웠다. 여름에는 하드장사도 시도 해 보았지만 역시 손해만보고, 또 다른 장사를 시도 해 보았으나 이 직장 근무시간과 맟추어야 하니 되지 않고 퇴근하고는 돌아다니는게 일이였다. 이때서야 제주에서 여관아저씨가 내게 권한 꽃집이 얼마나 좋은 사업인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직장에서 살아 남을려면 전기에 대해 지식을 많이 알아야 하는데 이론적기초가 없다 보니 여기 저기 생산주임직 수행하기도 벅찰때가 많았다. 책을 사서 보기도 하였지만 기초실력이 없다보니 이해가되지 않아 안타까웠다. 당시 더욱 ks제품인증을 받고나니 그러하였다. 그 당시 내 책임으로 ks규격의-10w, 20w. 30w, 40w의 100v용과 200v용 의 각종안정기 또 라피드안정기를 생산 해 내었다. 3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그때 작업을 기억하고 있다. 처음 코일에 어느 굵기의 규격 에나멜선을 규격횟수로 권선하여, 코일에 코아를 삽입하고 그다음 실험대에서 실제, 점등을 하면서 누전, 전류, 전압을 체크- 조작한 후, 그 나온 물건을 늬스에 침전 건조하는 작업을 거치고, 케스에 아스팔트에 석회를 섞어 끓여 부워 케스를 조립하고 라벨을 붙여 제품을 생산 해 내었다. 이 작업중 불량률을 줄이는게 나의 임무였으며 나온 제품을 두고 실험연구실 직원과 마찰, 납품하고 나서 불량이 발생 하였을때 질책-, 작은 보수 등, 직장은 다녔지만 마음은 딴데있는 생활이였다. 그 공장생활은 그냥 하루 살기 위한 생활과 별 다름 없었다. 내가 다닌 공장 뿐 아니라 당시 거의 다른 공장도 비슷한 수준의 급료을 지급하였다. 지금이야 노조가 조직되고 임금인상 데모도 하지만 그 당시는 내가 이곳에서 일 할수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는 시절이였다. 그에 따라 외국기업들이 우리나라 싼 인건비에 매력을 느끼고 마산 부산 외국인 공업단지가 들어서서 돌아가고 있었으며 시골에서 너도 나도 도회지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들고 있는 상황이였다. 그 당시에는 국제화학, 동명목재, 한일합섬, 금성사 이런 공장들이 다른 공장보다 작업환경이 나아 선호하는 직장이였으며 많은이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특히 국제화학은 신발공장으로 3교대로 수천명 거의가 여자들로 작업하고 있었으며 교대시간은 몇 백명 들어가고 나오고 볼만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부산에서의 생활은 나는 철없고 그야말로 하루살이 생활이였다. 그러나 나는 이때도 스케취북을 놓지 않았고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한번은 광복동 근처 전시장에서 밀레의 작품전시회가 있었는데 돈은 없고 보고는 싶고 차고 있던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고 그 돈으로 그 전시회 구경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근무하다 명절이 가까워 지면 저마다 고향에 가기위하여 선물준비를 하고 ,작업하면서 우리고향은 -이런얘기로 이야기가 끝일줄 몰랐다. 명절때는 명절앞날부터 명절날 그 다음날까지 대게 지금과 같이 비슷한 휴가를 주었는데 당시는 지금처럼 차가 있는 것이 아니여서 오직 기차를 이용하였다. 도시의 모든 직장들이 쉬는 날들이 비슷하여서 고향을 찾고 돌아오는 길들은 말 그대로 전쟁 이였다. 정기열차를 앉아 가는것은 정말 천운이고 원하는 차에 타서 서서 갈수만 있어도 다행이고, 그렇지 못하면 임시열차를 타야하는데 차시간이 일정치 못하기떼문에 기다리느것은 정말 고역이였다. 열차에 내려서 또 일반 버스를 타고 나머지를 이동해야 하는데 이것도 많은사람이 몰리는 형편이라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특히 아이들까지 같이 이동할때는 그 불편이 상상을 초월한다. 내 경우 새벽 세너시 집을 나서서 밤늦게 9-10시경 집에 도착하였다. 그 다음날 명절을 지내고 그 다음날은 다시 돌아와야 했다. 어머님께서 이제까지 속만 썩히다 내발로 나가서 밥벌이하다 명절이라 찾아오는 나를 대견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를 키울때, 광주로 학교 보낼때 얼마나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을터인데 기껏 공장에나 다니는 나를 보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리- 당시 같이 중학교를 다니던 조병선이는 서울00은행 본점에 근무하고 있다는 얘기를 멀리 들을 수 있었다. 이 역시 내가 어머님께 얼마나 가슴 아프게 하였을까 생각하면 참으로 한스럽다. 그 당시는 이런 마음이 없었다. 참으로 철 없이 살아왔다 하겠다.
이렇게 힘들게 고향에 다녀와서는 고향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리고 당시 작업하며 너무 심심하면 당시 유행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즐겨 불렀는데 남진과 나훈아, 문주란, 이미자들의 노래가 인기였다.
공장에 다니며 나는 범일동에서 약1년은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였지만 같이 이곳 합숙소에서 자다보니 관리-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아 너무 지저분하고, 일 마치고 시간 보내는데 너무 불편하여 싼 방을 구하여 자취를 하기 시작 하였다. 일 년 기한 사글세 될 수 있는 싼 방을 구하여 시작 한 듯 하다. 아침 점심 저녁-세끼를 직접 취사하며 해결 하는것이 불편 하였지만 퇴근하면 나만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수 있다는것이 너무 좋았다. 가까운 가게에서 외상으로 갖다 먹고 월급타면 갚는식이 되풀이 되었다. 그러며 좀 더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라면에 국수를 넣어 먹는 법, 밀가루 한포를 사다놓고 수제비를 끓여먹는 법, 별 시도를 다 해 본듯하다. 자취하며 사실 쌀로 밥 해 먹는것은 극히 드문것 같았다. 쌀은 있었지만 반찬하는것이 귀챦아 국수, 라면, 빵, 수제비등으로 한끼를 떼운것 같다. 쌀로 밥을 할 경우 김치를 사다먹을수 있었지만 김치값도 무시 못 할 돈 이였기에 양파, 파, 간장, 감자등을 잘게 썰어 후라이판에 볶아서 거기에 밥을 얹어 고추장이나 간장을 넣어 비벼 먹는식이 되겠다. 그리고 라면 하나만 먹으면 양이 부족하고 두 개먹기는 많고 그래서 라면 끓일때 국수를 넣어 같이 끓여먹으면 돈도 아끼는 식이 되어 좋았다. 그리고 수제비는 제일 돈 적게드는 식사법이다. 물을 끓인 후 반죽한 밀가루를 떼어 넣어 끓인 후 간장을 넣어 간을 마추어 그냥 먹기만 하면 되었다. 이렇게 먹다가 질리면 도마도가 나올때면 도마도를 사서 씻어 잘게 썬 후 설탕을 두어 술 넣고 뒤적인후 한끼를 떼운적도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식사를해결하며 생활하였다. 한편 자취하면서는 여유 공간이 있어 물감을 사서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좋았다.
자취를 혼자 하다가 맘에 맞는 동료와 같이 지낸 적도 있다. 산청이 고향인 이 친구는 나보다 한 살 아래 였으며 나를 형하고 불렀다. 조용하고 착실하여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이 친구가 이곳 부산에 까지 와서 사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이 친구는 산청 시골 마을에 정미소에 있었는데 그 집은 시골에서는 제법 부자라고 했다. 일 년 쯤 그곳에 있었는데 주인아저씨가 노름에 여자까지 두고 가정 살림이 말이 아니였다고 했다. 한 번은 정미소로 찾아 오기까지하여 집안 싸움이 나고 난리가 한 번 일어난 적이 있었을 정도 였단다. 이 친구는 정미소는 마을 앞에 있고 밥은 안집으로 먹으로 다녔는데 그때도 아저씨가 몇 일 어디론가 가서 연락이 되지 않을 때 였단다. 저녁밥을 먹으로가서 이상하니 어쩌다 그 주인 아줌마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단다. 그 아줌마는 몇살인가 아이도 있었는데 이 친구와 가까운 사이가 된 후 아저씨가 하던것처럼 자기도 해야겠다며 아이도 버리고-시부모님께 맡기고 둘이 야간에 집에서 나와 이곳저곳을 2개월 정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재미있게(?) 호강하며 지냈단다. 이렇게 지내다 결국은 뒤 쫓아온 남편에게 붙잡혀 여자는 다시 집으로 끌려가고 자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여기 공장에 들어 왔다는 얘기였다. 당시 이이야기는 참으로 재미있고 흥미 로왔다. 그런데 이 친구는 이후 공장에서 손가락하나를 절단하는 사고를 당하였다. 공장에서 치료는 해 주었으나 치료후 그냥 나가라는 식이 되니까 법원에 우리공장을 고소하여 재판을 진행하였다. 이 친구는 소송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억울하여 고소를 하였으나 한달 정도를 쉬면서 경찰서 법원을 들락거리는걸 보았다. 결국에는 회사에서 얼마인지 모르는 약간의 보상비만을 받고 내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 한때 나는 작은 철공소 이층에서 그 산청친구와 지낼 때 였는데 바닥이 온돌도 아니고 다락방식 나무판자 로 되어있어 한겨울 추위를 오직 이불속에서 견대며 살아야 했었다. 그리하여 그 산청친구가 꾀를 내어 당시 회사에서 우리가 날마다 만지는 에나멜 전선을 베니야판에 지금 전기장판식으로 배열하고 테프로 부치면 훌륭한 전기장판이 되는것을 알고서 만들어 덕분에 따뜻하니 두세달정도 잘 사용하였다. 그런데 밑에 철공소아저씨한테 갑자기 전기요금이 많이 나오는것을 알고 우리가 회사 출근한 후 우리 방에 들어와 보고 들켜 버려서 우리는 그 아저씨가 보여준 전기요금의 배로 변상하고 그곳에서 쫒겨나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 적도 있었다. 쫒겨 날 때는 그 산청친구도 가버린 후 마침 혼자여서 한 달 월급을 그대로 방주인아저씨 갖다 드려야 했다. 그 달은 외상도 못 갚고 더 외상도 주지 않고 밀가루 한포를 사서 세끼를 수제비 먹어가며 버텼다. 가불도 월급 탄 후 보름이 지나야 해 주었기 떼문에 그 달 한달은 참으로 힘들게 보낸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안정기반장 이였는데 여자 6명 남자 7명 정도 밑에 두고 함께 작업 하였다. 그중 갖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에서 일하기 시작한 어느 한 여자 아이가 마침 김장철 내가 자취하는 이야기를 하였는지 할머니가 주었다고 햇김장김치를 한 바께스 자취방으로 가져 왔었다. 그때는 고향에서 명절때 같은 마을 동생 뻘 몇 년 후배를 부산에 오게 하여 그 후배와 나. 그때 산청친구, 이렇게 셋이 지내고 있었는데 그 김치 한 바께스를 일주일도 않되어서 다 먹어 버렸다. 너무 맛 있었다. 그 김장김치는 내가 이제까지 먹어본 김치 중에서 제일 맛있었고 김치를 그렇게 맛있게 먹어 본적이 이후도 없었던 같다.
이 공장에 다니면서 어느 아가씨와의 만남을 적지 않을 수 없다. 때는 가을 이였다. 퇴근하고 밥을 먹고 나서 심심하여 집을 나왔다. 집 바로 앞이 버스정류장이여서 할 일없이 정류장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아가씨가 눈에 띄었다. 버스가 몇 대 지나갔는데도 타지 않고 서성이는 한 아가씨가 이상해 보였다. 그아가씨도 계속 차를 타는것도 아니고 나를 이상히 보았나보다. 자연스레 어디가시죠하고 말을 나누게 되었다. 얼마후 우리는 같은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연인즉 그 여자는 수영에서 베니야 합판을 생산하는 태창목재에 다니는데 누구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한참 후 사실대로 여기 부근 사는 자기 애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자기애인은 버스기사며 몇 번을 만났는데 만났다 헤어졌다 그러다가 지금은 보고 싶어 자기가 찾아왔다는 얘기였다. 오늘은 마침 근무가 아니여서 이렇게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는 얘기였다. 애인집도 요 근처며 이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다고 했다. 이 여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었다. 키도 나보다 크고 엄청 예뻐보이는 아가씨-,
나는 그녀에게 아가씨, 그녀는 나를 총각, 이렇게 호칭하며 이처럼 깊은 얘기까지 나누고 있었다. 나는 밥을 먹은터였으나 이아가씨는 밥을 못 먹은듯하여 밥먹기를 권해 내방에 들어가서 라면까지 하나 끓여먹고 이런얘기, 저런얘기 혼자 자취하기 힘들겠다. 자기는 그리우면 왔다가 싫어지면 가버리는 당신의 이름은 길 잃은 철새 진정코 내가 싫어 그러시나요------- 이렇게 부르는 철새라라는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는 얘기까지 나누며 그 때는 밤11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또 밖에 애인이 오나 나가 본다고 하여 밖에 나가서 잠시 있으니 저만치 버스에서 내리는 어떤 남자를 보고 오빠-하고 달려간다. 같이 저만치 걸어가며 돌아보며 나에게 손 한번 흔들고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이날 나는 누구에게 홀린듯 너무 기분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잠잠한 호수에 잔뜩 물결만 내고 떠나간-, 이름도 모르는 아가씨, 진짜 나도 애인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으며 이대로 잠들것 같지 않아 못 먹는 소주를 한병 사가지고 와서 먹고 골아 떨어졌다.
그 후도 그 철새라는 노래를 들으면 그 아가씨가 생각났었다.
-그리우면 왔다가, 싫어지면 가버리는 ,당신의 이름은 길잃은 철새 ---
그림이야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모든게 변하고 그랬지만 내가 꾸준히 내가 지켜오고 있는것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스케취 북 한권 검정색 연필이 되겠다. 어디 있어도 그건 내 옆에 있었다. 죽도록 괴로울 때, 배고플 때,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래도 이 두 가지는 옆에 있었다. 이 두 가지는 내가 나를 지탱하게 해준 힘이 되기도 하고 나를 위안물이 되기도 하고 내가 괴로움을 푸는 도구이기도 했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서 나의 한분신이기도 했다.
학교에 근무 할 때 였던가 나는 이제까지 그려온 이것들 중에서 추려 책을 엮어 낸적이 있다. 마음의 옷을 벗고-이제까지 나의 모든것을 속속히 보여준다는 의미이겠다. 파는것도 아니고 내가 그려온것을 가까운이들과 함께 나를 소개하며 나를 보여주고자 함 이였다고 할까. 언젠가 남도예술회관에서 개인전도 하여보았지만 전시 기간이 끝나고 나니 너무 허무하여서 이제 이렇게 책을 엮어보았다고 할까. 전시회하고 이렇게 책을 엮어낸 것하고 어느것이 효과적일까 나는 이렇게 책 엮어 낸것이 좋았다 하겠다. 도대체 전시회 해 보아야 그림 한장 팔리지도 않을것은 뻔한거-그에 따른 경비 지출한것 보다는 이렇게 책이 더 오래동안 나를 소개하고, 나는 이런 사람이요 알릴 수 있을것 같았었으며 사실 그러 하였다.
당시 광주 도청앞의 남도예술회관에서 전시회를 한번 가진적이 있었다. 경비가 넉넉하여 액자를 멋있게 맞추어 하는 것도 아니고 문짝을 만드는 병영가구점에 액자를 맡겨 전시회를 가졌다. 그림들 이라는게 캰바스에 그린것이 아니고 당시 깍대기 장판에 그린것 들이여서 캰바스에 그린 그림하고는 너무 비교가 되지 않은 엉성한 그림이였다고 하겠다. 그림 내용 역시 어느 누구에게 지도 받은적도 없고 내 혼자 맘내킨대로의 작품 들이여서 보는 사람들도 황당하였으리라 참, 요런 실력으로 요런 그림으로 이렇게도 전시회를 하기도 하는구나. 하였으리라. 개인전을 하는 사람들 다 그러겠지만 끝나고 철수할 때 마음은 너무 허탈하였다. 그 당시 전시회 모습을 사진이나 찍어 놓았으면 좋았을걸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것은 그 전시회 기간동안의 방명록이 전부다. 그 방명록에 허심탄회하게 도움말씀 주신 글들이 너무 고마웠고 이렇게 써준 글은 나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지금이야 밖에서 이젤 펴 놓고 그림 그리는 걸 별 생각없이 하지만 잘 그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학교다니는것도 아니고 혼자 어디 가서 그림을 그리면 지나는 사람들이 보게 마련이고 부끄럽다할까 옆에 와서 구경 하는것이 부담스러워 밖에서 그림 그리는것을 자제 해 왔다 할까 그러나 같은 회원끼리 어느곳에 가서 자리를 펴고 그리는 걸 자주하다보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게을러서 그리지 않지 밖에나가 그리는 걸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는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별히 나는 꾸준히 누구에게 그림지도를 받은적이없다. 기껏, 당시 전남대학교 김종일교수의 배려로 드로잉회에 가입하여 활동-야외 스케취 나가서 동료들에게 또 지도교수에게 구도며 색 사용법을 배웠으며 특별하다면 당시 김종일교수, 목포과기대 손영선교수로부터 그림(유화)의 기법을 배울 수 있었다. 한 달에 3-4차례 스케취 다니며 -스케취를 많이자주하라 뎃쌍실력이 좋아야 좋은그림을 그릴수있다는말을 새겨 들었다. 그리고 그림 그리는 이들과 접촉하면서는 많은 그림그리는이들이 자기만의 기법을 개발,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것을 두고 고민하는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그림 그리는 이들과 어울리다보니 자연히 많은 그림 그리는 이들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림 그려서 생활 한다는것이 너무 힘든다는것을 알 수 있었다. 하는 얘기가 그림을 사는 이들을 분석해보면 투자목적, 생활공간 장식목적 이중에서 투자목적이 우세하고 구태여 생활장식의 목적이라면 자기가 그려서 개성있게 장식하는걸 선호한다는 얘기였다. 학력수준, 취미활동 등으로 일반적으로 그림 보는 눈들이 높아지고 그림에 관심을 갖고 그린이 들까지 많아져 자기역시 그려보는걸 좋아 해 직접 그린다는 것이였다. 이러니 그림 그린이들이 배 고플 수 밖에 없다 하겠다. 내노라 하는 화가들도 그림 판매는 정말 힘든다는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쩔것인가 그림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들은 그래도 오늘도 죽어라고 그림을 그린다. 그들은 파는것을 떠나서 사는것 자체가 그림 그리는 것이기에 그들은 그린다 하겠다. 이런 전업작가들을 가끔 만날때면 정말 존경스럽다.
가끔 내가 그림만 그리면서의 생활이였으면 지금 나는 어떻하고 있을까. 글세 그림이 잘 팔려서 지금보다 넉넉하게 살고 있을까. 그랬을것 같지는 않다. 도대체 인생이라는것이 정답이 없는 것이여서 그림만 그려서 밥을 먹고 생활을 지탱한다. 무슨 일이나 초지일관 한 우물을 파면 길이 있고 좋은 일이 생긴다는 법은 있으나 이 일은 참으로 쉽고 어려운 일 인것이다. 이랬을지 저랬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찌됐던지 사는것 자체가 어떻게 사는것이 보람되게 사는것인가 생각하며 오늘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 하는게 가장 좋은것이지 않나 생각 해 본다. 어찌되었던 뒤돌아보며 가정을 하여보면 그림만 그리며 의식주를 해결 하였을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시이야기
학교에 근무 할 때다. 같이 근무하던 선생님한분께서 문학-시에 관심이 많으셔서 시를 쓰셔서 문학지에 응모하고 수상하고 그후 활발히 작품을 쓰시고 발표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게 너무 좋아보였다. 그 후일1년쯤 지나서였을까 내가 소묘집을 발간 했을때 뒤에 낙서로 몇줄 끌적거린것을 게재 출판하였는데 출판사 아가씨들이 그림은 잘 모르겠고 글들이 가슴에 와 닿은다는 얘기 하는것을 들은적이 있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나두 그 선생님께서 소개한 문학지에 나의 작품을 보내어 보았다. 그랬더니 얼마 후 연락이 왔었다. 신인상에 당선되었으니 소감을 써서 보내라는 것이였다. 나중 출판된 책의 시평에 시 공부를 계속하고 좀만 다듬으면 좋은작품-시가되겠다는요지의 글이 써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이제까지는 그림으로만 글쩍거렸는데 이제 그림과 함께 글로서도 내 마음을 표현하고 다독일 수 있겠다 싶어서 였다. 이로서 그 문학지-동양문학에 나 역시 신인상을 받음과 동시 문학계-시단에 등단을 하게 되었다. 이것 역시 내가 그저 좋아서 하는 것이지 이것으로 출세하고 생활을 바뀌어 볼 생각-욕심도 없다 사실 실력이 되지않아 어림 없는일이기도 하겠지만은- 이리하여 틈틈이 글적 거리게 되었다. 그리고 읍에서 활동하는 문학 동아리에 가입하고 말석에서 같이 생각하는 이들과 함께 즐기기 시작 하였다. 이렇게 온누리문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지금은 강진 문협 동아리에만 적을 두고 나가고 있다. 그리고 한국문협에 가입하여 흡사 시인같이 폼만 내 보고 있으나 그러나 작품은 가면 갈수록, 보면 볼수록 부끄럽게 느껴져 난감하기만하다.
결혼이야기
사람이 참 인연이란 것이 참으로 묘하다 다시 한번 생각 해본다. 27살 이었던가 그때였다. 당시 세전사에서 사상공장으로 이사와서 주임으로 근무 할 때였다. 당시 사귀는 것은 아니였지만 몇 아가씨와 극장구경 정도 함께 다니는 사이 정도까지의 아가씨가 몇 사람 있었다. 그 정도 가까워젔다가 더 이상 가까워지지 못하고 멀어지고 이런 관계였다고 할까. 이러고 있을 즈음 자취하고 있는 집주인이 어느 날 나를 보고 내가 중매해줄까-하고 말을 건네는 것이였다. 총각이 누가 중매 해 준다는 말을 싫어 하겠는가 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였다. 자기처가 동네에 참한 아가씨가 있는데-하며 한번보세-하였었다. 이런지 얼마 후 그 아저씨가 시골 처가집에 제사 모시러가서 이야기를 당시 장인께 이야기하였었다나- 그런데 더욱 황당한것은 그 아가씨와 그 엄마가 함께 나를 본다며 올라 온 것이다. 퇴근하고 오니 주인아줌마가 건너 오란다 가서 보니 이런 상황 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지금 아이엄마- 23살 아가씨를 만나게 되고 얼마 후 나는 자취방에 신혼살림을 시작 하였다. 이러고 나서 나는 어머니께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이렇게 한 여자와 살림을 차리게 된것은 사정얘기를 하며 편지로 알려 드렸다. 어머니께서도 얼마나 황당하였으리요. 이 역시 지금 생각하면 불효스럽기 한이 없는 짓이 아닌가. 나는 지금 아이엄마와 함께 생활하기 전 나의그림을 보여 준 적이있다.
그림을 보고 일체 아무 말 않고 나를 믿어주고 열심히 하라 지원, 응원하여 주는 말이 너무 고마웠고 맘에 들었다 할까. 어머니께서 편지가 왔다. 가서 보고 싶으나 시골의 바쁜 농사일 떼문에 못가니 아무튼 열심히하여 잘 살아라하는 내용이였다. 이 편지를 받고 좀 홀가분한 마음으로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드디어 명절에 함께 명절을 지내러 고향에 내려왔었다. 어머님께서는 눈치가 좀 맘에 들지 않은 눈치였지만 이제 어쩔수 없는 상황인지라 그저 잘 살아라 이 이야기만 하여 주었다. 생각하여보면 어머니께서는 나를 공장에 다니다 이렇게 결혼하여 살게 하기 위하여 그 고생을 하고 키우지는 않았으리라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셨을까 가슴이 메어진다.
귀농이야기
부산에서 직장생활은 너무 힘 들었다. 말이 생산주임 직은 그럴듯하지만 보수가 작으니 생활-저축이라는것은 너무 생각할수가없는지경이었다.지금도그렇지만 방값에 전기세, 물세에 온갖 돈 들어가는 투성이다. 혼자 살때는 그럭저럭 넘겼지만 더욱 결혼까지 한 상황이래서 들어가는 돈이며 태어날 아이까지를 생각하니 너무 막막 하였다. 당시 아이가 태어나기 전이라 아이엄마도 부근에 일자리를 구해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희망이 내다 보이지 않았다. 당시 새마을사업이 한창 일 때였다. 시골에서도 잘하면 살수 있다는 방송이 나오고 있을 즈음이였다.
그리하여 시골 고향을 생각하게 되었고 시골에서 열심히 해 봐- 생각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다. 더욱 내가 전기 계통 학교를 나왔나 직장에서도 바라는 한계가 막막해 보였다. 그리하여 시골로 짐을 싸가지고 내려왔다. 어머니의 놀라움이란 어떻게 얘기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참으로 너무 철 없는 행동 이였다 할까. 내려오니 어머니의 실망은 이만 저만이 아니였다. 다들 시골에서 못살겠다고 모두들 도회지로 올라가는 상황에 이렇게 살다가 내려오니 참으로 한심 하였으리라. 시골이래야 좀 땅이 많기를 하나 당시 논두마지기-400평와 밭8마지기-560평이 우리 재산 전부였다. 더욱 아이엄마를 어떻게 남자가 이런생각을가지면 여자가 좀 이 지경까지 오지 않도록 하여야 할테인데 이랬다고 원망과 함께 이뻐보일 리가 없다. 이러는 어머니와 아이엄마 사이에서 괴로웠다. 여기 와서 이렇게 힘들게 지내고 있을 무렵 부산 다니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나가고 어려움이 있자 나를 찾게 된것이다. 어머니와 아내역시 다시 부산가서 살자는 얘기를 듣고 혼자 먼저 회사를 찾게 되었고 그후 방을 얻고 하여 다시 부산생활이 시작되었다. 이곳에 와서 몇 개월후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지금의 큰아들이 이곳 부산 사상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당시 산파를 불러 출산을 하려고 하다 하다가 힘들어 병원으로 가서 복개수술을 하고 출산을 하였다. 어머니께서 이때 처음으로 부산에 오셨다. -서독의원 지금도 병원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병원비가 있을턱이 없다. 일부 어머니의 도움, 회사에서 빌려 병원비를 계산하였다. 지금처럼 의료보험제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병원비가 나의 당시 네달치 봉급과 맛먹는 큰돈이었던 걸로 기억되고 있다. 이후 나는 회사에서 빌린 돈을 몇 개월에 나누어 갚았으며 병원에 있을때 회사 사장 사모님께서 당시 고급 담요보자기 하나를 사가지고 병원에 찾아 오신걸 기억하고 있다. 그 후 1년여 직장생활을 하며 빌린 돈을 갚아 나갔다. 작은 봉급에서 빌린 돈을 제하니 더 작은걸로 어렵게 생활을 하여 나갔다. 이렇게 보대끼다보니 빌린돈을 갚자 너무허탈하였다. 이런생활을 계속하여야 하나 갈등이 생기기 시작 하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때가 고비였던것이다. 그 고비만 넘기면 그 빌린 돈 갚듯이 그 액수를 저축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 전 직장에 다니기전 부업할것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돌공장 돌을 가공하여 건축자재로 만드는 곳 앞을 지나다 그 돌로 벼루도 만드는 것을 보고 그 벼루두껑에 조각을 해 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곳 사장에게 벼루두껑에 조각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벼루 두껑 할 만한 돌 두 개를 얻어가지고 왔다. 그 돌에 퇴근하고는 조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한달여 이 두개를 조각하여 가지고 그 돌공장에 가지고 가니 잘하였다면서 여기서 일 해 볼 생각이 없느냐 묻는것이였다. 지금 다니는 공장보다 3분의일 정도 더 주겠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다니는 공장은 시골집에 일이 있어 몇일 쉰다고 얘기하고 이 돌 공장으로 가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이 돌 공장에 조각실을 만들어 조각실장으로 근무하게 된셈이라 할까 그러나 집에서 퇴근하고 취미삼아 하는 것 하고는 영 상황이 말이 아니였다. 손이 아프고 저쪽직장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제일 나 혼자 이 돌공장 구석 한쪽방에서 지금의 조각도로 파는것이 아니라 갉아내는 일이였다. 하루종일 혼자 이렇게 조각하는게 보통 일 아니였다 그리하여 이곳에 다니는것도 그만두었다. 지금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할일이다. 직장에 다니며 하나 조각하는데 얼마 이렇게 받고일을하던지, 그조각실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배겨내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여야 했을터인데 힘들고 재미없다고 그 조각해서 돌공장에 준것 값도 못 받고 그만 두다니- 그 조각실에서 지금의 핸드드릴로-치과용 그라인더방법 - 조각하는 법을 왜 생각 못했을까 생각 해 본다. 이 돌공장에 나와 다시 공장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 후 두달이나 다녔을까 그러나 나는 또다시 철없는짓을 되풀이하기 시작하였다. 좀 더 느긋하게 생각하고 좀 더 버텼으면 지금쯤 나는 부산 사람이 되어 있었을런지 모른다. 다시 나와 간판집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월급은 안줘도 되니 일 좀 배우게 해달라고 사정하여 간판집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간판기술을 배워 시골에 가서든지 자립-개업 해 보고자였다. 이렇게 나와 20여일을 다녔을까 그러나 이것도 배우는것이 참으로 갑갑할일이다. 학교에서 수업하듯이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일이 있을때 그 일 하나 하는 것을 보고 배우는 식이며 당시 썩 일거리가 많이 들어오는 집이 아니여서 진짜 기술을 배울려면 도대체 얼마 걸린런지 알수가 없다. 이 식이라면 일년도 훨씬 더 걸리겠다싶어졌다. 그때까지 출산한아이와 가족의 생계는 어떤단 말인가 참으로 갑갑하기 그지없다. 고민 고민을 하다 또 이거도 아니다 싶어 그 간판집에 다니는것도 그만두고 말았다. 나와서 몇 일을 고민하였다. 골목에서 신발수선하는것도 배워 하고 싶었지만 그 곳견습생으로도 받아 줄것같지 않았고 그냥 시내를 헤메고 다니다 어느 가내공업공장에 공원모집공고를 보고 들어갔다. 이곳에서 일할수없느냐니까 내일부터 나오랜다. 그공장은 철판으로 당시 얼음공장의 하드틀을 철판으로 만드는 공장이었다. 내가 들어가서는 그 주문한 작업을 마치는 중이였고 곧 고급 도어문의 장석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사장하고 또 한직원과 나 이렇게 세사람이 작업을하였다. 알미늄 재료를가지고와서 일정크기로 자르고 나사못박을자리를 고정기계 드릴로 구멍을 내고
그다음 조립하는일이였다. 한 보름정도 다녔을까 재료 절단작업을 프레스로 하면서 좌측 가운데 손가락끝을 절단하는 사고가 나고 말았다.
이리하여 집에서 치료나 하라며 보름정도 일하였으나 한달분 급료를 계산하여주는걸 받고 그 직장에서 쫒겨 나오고 말았다. 지금은 언뜻보면 이 손가락 절단부위 상처를 잘 모른다. 그러나 그당시는 손톱이 뭉게지고 손톱이나서 원상 회복되기까지 이 떼문에 고생을 많이 하였다. 이 손가락 끝 절단사고를 당하고는 드디어 다시 시골에 내려오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참으로 한심하고 어이없어 하셨다. 다니던 직장에 나 계속 다니지 무슨짓을 하다가 다쳐서 오느냐는 식이다.
돌아온 시골생활
시골에 내려와서의 생활도 만만한 것은 아니였다. 우리집에 땅이라도있었으면 다행 이었을텐데 당시 우리집은 논400평하고 밭560여평이 전부였다. 이땅에서 어머니께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물고 뜯는식으로 일하셔서 나를 광주까지 학교에보내고 살림을 사셨던것이다. 이땅에 시골로 내려와 살겠다고 식구까지 데리고 내려오니 얼마나 한심하였으리 이웃들도 어처구니 없어 하는 눈치였다. 그 다음해 나는 도로변 4마지기밭-280여평에 수박을 심었다. 그러나 관리를 잘못하여 풀밭이 되고 말았다. 길가라 수박을 찾는 사람은 있었지만 풀밭이 되고 보니 수박이 따서 팔 수박이 부족하여 새벽차로 장흥에 가서 수박을 사다가 팔기까지 하였다. 차가 있는것도 아니고 광주에서 내려오는 첫차를 타고 장흥을가서 자루에다 사 넣어가지고 매고 정류장으로 옮기고 다시 병영오는 차를 타고 오는 고생은 엄청하였으나 만지는 돈은 그야말로 쥐꼬리였다. 그 다음해는 그 곳에 담배를 하여 약간의 목돈을 만지기도 하였다. 그러며 생각해낸것이 마을에서 1500미터 떨어진안골 마을소유 산밭등에 밤나무를 심어보면 어떨까하여 당시이장께 부탁하여 동리사람들의 허락을받아 처갓집에서 실생묘- 밤나무를 가져와 심기도하였다. 그리고 냇가 280여평 모래밭에 역시 처갓집에서 밤나무묘목을 가져다 심었다 처음 많지도 않는땅에 당장 수확을하여 돈을 만들수있는 작물을 심어야 할테인데 하두 밤나무 노래를 부르는걸 듣다 못해 어머니께서 승낙을 하여 주셔서 였다. 이것도 지금 내가 생각해도 이런 말도 않되는걸 하려고 하는걸 보고 어머니께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을까 짐작이 된다. 어머니께서 하는 방식-시키는데로 하는것이아니라 엉뚱한 돈도 될 것 같지 않는것만 골라 가면서 하려고만 하니 매일 일하면서 이런 상황이었으니 참으로 갑갑하고 애가 탔으리라. 내가 내려와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시간은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으리라.
그리고 아이엄마도 나를 믿고 이곳에 내려와 시골생활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어떻게 했길레 도회지에서 버티지 못하고 이렇게 내려왔나하는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의 생활은 인고의 세월이라하겠다. 밭메기, 나무하기, 부엌살림, 빨래 등 집안살림을 힘들게 하였다. 그런 눈치에 그러기에 더욱 열심히 힘껏 애를 쓰는 생활이었다 하겠다. 당시 내려와 이렇게 어려운 살림이다보니 필요한 무엇하나 사지도 못하고 어려운 생활이였다. 한번은 어디를 다녀오니 못보던 화장품하나가 눈에 띄었다. 물으니 화장품 외판원아줌마가 와서 외상으로 돈 생기는데로 주기로 하고 샀다는것이였다. 그때 나의형편은 너무 어려웠었고 말두 없이 샀나 하는 마음으로 큰싸움이 일어나고 이윽고 마당에 던져 깨버리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아이엄마도 울며 불며 난리가 나고- 깨버린 내 마음이 편할 리가 있나 이러고나서 미안한 마음에 이사건 내용을 글로적어 새농민 잡지에 투고하였다. 못난 남편으로서 부인 화장품하나 사주지 못하고 부부싸움 한것을 전국에 공표를 한 셈이 되겠다. 나중 처갓집에 갔더니 글 잘 읽었다고 하는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쑥스러운적이 있기도 하였다. 그 당시 나의 수입은 kbs-라디오 농촌통신원으로서 보낸 원고가 방송되고 나며는 기념품대로 보내오는 그 당시 한달 전기세 정도의 돈이 전부였었다.
당시 그때 마을에는 집집마다 지붕개량하는 붐이 일어 났었다. 우리집도 스레트로 개량하기위하여 지붕을 벗겨보니 워낙 옛날 집이고 지붕 서가래 라는것이 지게 작대기처럼 가는 형편이고 지붕에 사람이 지붕에 못올라갈 형편이라 고민 끝에 집을 다시 짓기로 하고 모래를 들여 세멘트를 사들여 브록크를 찍어 내었다. 당시 우리집에 재산이라는게 돼지한마리가 전부였다. 배짱좋게 시작은 하였으나 짓고 나면 남의집이 되겠구나 마을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생각 하였었다. 어머니께서는 앞 마을분 한테서까지 부탁을 하여 빚을 내어 마무리를 하였다. 말이 마무리리지 앞면은 미장하였으나 집 뒤면은 그냥 브록으로 쌓은체 놔둔 마무리도 이런식으로 마친 집이 되겠다. 이집을 짛을때 많이 도움을 준 마을에 형님한분이 계신다. 일은 시작하였으나 집에 얹을 서끌(서까레)이 없어 애타는것을 보고 마을 형님한분이 자기산에서 베어 사용하도록 하여 주었다.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을수가 없다. 172번지의 이 집은 나로서 첫 번째 짛은집이 되겠다. 그 형님은 내가 고맙다고 하자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자기머리에 곰발(상처)이 나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약 장수를하고 있던 터라 약을 주어서 낳은 고마움이 있었다고 얘기 하는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이집을 짓기 전 나에게는 큰일이 있었다. 나의 큰딸이 태어난 것이다.
아들은 부산에서 수술하여 태어났고 딸은 시골에서 수술 않고 병영병원에서 태어났다. 바로 집을 짛은 해가 되겠다. 집을 짓기 위하여 몽땅 집을 헐어 버리니 잘곳이 없어 식구들은 집 앞 담배건조장 하우스안으로 살림 짐을 옮기고 그 속에서 살고 아이엄마는 이웃집 또래 친하게 지내던 아줌마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바로 이해 9월 나는 학교에 취직을 하게 된다.
매실이야기
내가 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 어느날 처가집 다니러 갔을때 매실의 가치를 볼 수 있었다.
매실이 약이되고 술을 담기위하여 보해회사에서 처갓집마을의 매실을 모두 사가지고 간다
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을 끈 것은 꽃이 피었을 때 사군자의하나이고 매화꽃의 화사함이 너무 좋았다. 지금 홍쌍리의 청매실농장을 보고 집주위에 매화가 피었을 때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시골에서 저렇게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생각에 젖게 되었다. 그리하여 묘목을 몇그루 얻어다가 심기시작하다가 지금의 집자리에 이 매실을 몽땅 심었다. 그 당시 이곳에서는 감나무심기는 것이 유행되고 있었다. 이러니 어머니께서는 감은 먹기나 하지 그 시고 술이나 담고 약으로나 쓰는 매실을 한 두그루도 아니고 저렇게 많이 심으니 어떨 셈이냐며 너희 살림 너 알아서 해라- 염려가 대단 하셨다. 나두 속으로 좀 겁도 났지만 한번 심은 것 두고 보자 사실 섬진의 매화꽃의 인상이 도저히 지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심은 후 이곳에 집도 짛고 3년쯤 지났을까 매실이 달릴 즈음 당시 동의보감의 허준이 방송되고 있었다. 이 방송에서 매실의 효능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매실을 찾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많아지게 되었다. 값이 올라가고 어머니의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의 이것을 보고 뭘 알고 심었다고 하였으나 나는 그저 매화꽃이 좋아서 심었을 뿐이였는데, 하여튼 모처럼 농사지어서 재미를 볼 수가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 할까-. 나는 이것을 보고 사람이 살면서 먼저 무슨일이나 계산을 하면서 하는 것보다 자기가 좋아하는것을 하면서 계산은 나중에 하는것이 좋은 방법이 아닌가 생각 해 볼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매실이 생산되자 전용 배송박스와 선별기가 필요하게 되어 마련하였고, 또 매실로 장아찌나 액기스를 만들어 팔기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정식으로 식품제조가공 허가를 얻어 생산하여 홈피에 올리고 주문에 응하며 팔고있다.
학교-근무이야기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어머니께서 추석에 성묘 다녀오는 작은할머니 형부(여씨)를 집 앞에서 만나 나의사정을 이야기하고 부탁하여 병영국민학교에 사무보조 잡급직원으로 근무 하게 되었다.
그분은 그분의 친구인 당시 강진군 교육장 -조00에게 부탁하여 마침 잡급직원을 학교에 배치하던 중이라 쉽게 근무 할 수 있게 된것이다.
학교에 들어가 사무보조- 공문접수, 발송부터 업무를 시작하여 1년후엔가는 학교 서무, 재산관리, 봉급 회계업무까지 보게 되었다. 군대에서 행정업무를 본 터라 빨리 적응하여 쉬 학교생활에 적응하여 갔다. 마침 동교 학교선배가 선생님이셨고 친 외삼촌이 교감, 병영사람선생님이 몇분 계셔서 모르는것을 묻고 학교생활을 참으로 즐겁게 하여나갔다. 이때 나의월급이라는게 당시 쌀 한가마니 가격 이었다. 이 돈은 당시 나로서는 큰돈 이였다. 집을 지으면서 엄청 많은 빚이 있는 터라 이 월급은 빚 갚는데 참으로 유용하게 사용 할 수 있었다. 생각하여 보면 나도 고등학교만 나왔었다면 교사 강습을 받고 정식으로 교사가 될수도 있는 그런 직장에서 어머니께서 광주로 유학시켜 주시며 그처럼 바라던 교사가 되지못하고 이처럼 물거품 된 상태에서 왜 하필 학교라는 직장에서 생활을 하여야하나 서글프기도 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 바쁜 일을 하면서 일하는 즐거움으로 생활하여 갔다. 그러나 봉급날은 괴로운날이였다. 교사직은 초임이 당시 나의 월급의 2-3배였고 경력있으신 분의 나 또래는 4-5배정도였다. 당시 월급은 통장지급이 아니고 현금을 찾아다 일일이 세서 봉투에 넣어 주는 것이여서 계산을 하는일 30여명의 직원의 봉급을 지급 하는 일은 서글프고 괴로운 일 이였다. 2년 후엔가는 잡급직에서 고용직으로 바뀌고 십여년후에는 기능직으로 바뀌었다. 이 학교에서 근무한 20년의 기간은 참으로 나에게 소중한 시간이였다. 수 많은 선생님들을 만나고 내 학력은 중졸 이였지만 이 선생님들과 생활하면서 나는 계속 배우는 생활 이였다라고 하겠다. 한사람에게 배우는게 아니라 많은 선생님들로부터 각 그들의 장 단점을 보면서 모르는것은 묻고, 배우고 그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의 생활 자세를 바로잡고 어떻게 사는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 생각하며 하루하루 생활을 하였었다. 지금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배운것은 컴퓨터라고 하겠다. 컴퓨터 기능을 가지고 계시는 선생님으로부터 배워 지금의 홈페이지를 만들고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부자 되는 법을 배운것이 되겠다. 그것은 다른것이 아니라 돈이 있으면 부동산에 투자하라는 것이였다. 그 방법도 배울 수 있었다. 돈을 꼭 모아서 부동산을 살 것이 아니라 돈을 반 정도 모이면 부동산을 사서 생활하면서 갚으라는 것이였다. 빚이 있으면 자연히 생활이 검소하여질 수밖에 없고 그리하여야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가르쳐주신 김00선생님, 부자 되는 법을 가르쳐준 정00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지금의 내가 좀 남보다 다른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사는것은 오직 이렇게 학교에서 배움 떼문이였다 하겠다. 정말 학교에서의 생활은 나에게는 돈을 버는 생활의 장소-직장이기도 하였지만 배움의 장소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욱 20여년 수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참고 근무함으로서 지금의 공무원 연금을 수령하게 된것이다. 학교근무 중 가끔 싫증을 느껴서 벗어나고 싶은 유혹을 수차례 있었다. 그리하여 실천 한적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운전면허만 따면 차하나 사서 장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운전면허를 땄었다. 따고나니 차가 없어 차 살돈만 마련하면 하겠다, 차 살돈이 되자 물건값만 -어떤 장사할까 궁리하다가 세월을 보내는 세월이기도 하였었다라고 하겠다.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사는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끊임없이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한 몸부림의 세월을 보내는게 인생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또 모든 많은 사람이 꿈을 꾸고 이처럼 실천하다가 실패하고 또 일어나고 또 도전하고 이렇게 사는게 우리네 삶이 아닌가-. 같이 연습하며 운전면허를 딴 사람중에 이렇게 열심히 살아 논을 10,000평 넘게 장만하고 큰 부자가 된이가 있고, 또 한사람은 소를 키워 군의원에 도전 당선 된이도 있고 그 분은 지금도 계속 소를 키우고 있다.
문화이야기
학교에 근무할 때 이야기다. 당시 병영성을 복원하기 전이었고 병영에관한 자료도 별로 없었다. 당시 근무 하던 곳이 병영초등학교 지금의 병영성자리에 있던터라 병영성에 자연히 관심이 많아지게 되었다. 더욱 그 당시 전남대학교 김태진교수가 외국인을 데리고 병영성을 방문하고 성터주위를 들러 보는 것을 보고 병영성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속 시원하게 자료를 정리한 책이 없었고 여기 저기 몇 페이지씩 적어 놓은 것이 전부였는데 이 자료들을 눈에 띄는데로 모으기 시작하였다. 모으면서 수년전에 병영분이며 병영중학교장을하던 정00교장선생님이 나처럼 일부 자료를 모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자료도 나는 손에 넣을수 없었다. 하여튼 강진군에서 발행한 책들, 장흥군에서 발행한 책들을 수집 할 수 있었고 이 자료를 스크랩하여 그 당시 복사기가 막 보급된터라 이것을 10여부 복사하여 면내 기관에 나누어 주었다. 이 분야 -문화에 이렇게 관심을 갖고 발을 딛게 되었다. 그 당시 이처럼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이들의 모임이 있는것을 당시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최창권씨와 가깝게 하게 되었고 그의 권유로 강진의 탐진향토문화연구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회원들은 강진군의 각 면에 문화에 관심있는 이들의 모임으로서 마침 강진군 마을사를 조사 해보자는 의견이 무르익어가고 있으며 그 조사방법을 배우고자 목포대사학과 이해준교수를 초빙하여 강의를 듣기도 하였다. 회에서 첫 번째 마을사 조사에 들어갔다. 나는 신기, 동령마을을 맡아 서투르게 조사를 하였다. 조사 시작한지 일년 후에 책이 엮어 나오게 되었다. 하면서 장흥에서 용반마을에서 단위마을지가 엮어 나오는걸 보고 나도 우리 마을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추진하여 2년후 마을지를 엮어 낼수가 있었다. 이 마을지는 그 당시제법규모있게 자료를 수집하여 편집하여 발간되어 조선일보, 서울문화방송에서까지 취재를 와서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 마을지는 시작과 추진은 내가 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발간한책이라 하겠다. 특히 그당시 몸담고 있었던 탐진향토문화연구회 회원들 그중에서 목포대 사학과를 나와 함께 회에서 같이 활동을 하던 강0성을 비롯하여 군청의 김0성, 향토사학자양0식, 윤0근님들의 협조가 컸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나도 참 겁도없이 추진한일이 아니었었나 싶어진다. 이 책은 우리마을의 족보이자 앞으로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후세들에게 우리의선조들의 삶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자료가 되리라 믿어본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것처럼 말이다. 그 이후계속 마을사조사를 하여 군내 각 읍면 마을지를 출판하는데 작은힘을 보탯었다. 조사를 하면서 낮에는 출근하여 근무하고 퇴근하고는 담당마을에 찾아가서 어쩔때는 식사도 거르고 빵 한조각 우유한개로 때우고 밤1시 넘게 조사를 하고 돌아오다 졸음으로 운전 중 큰일 날 번 한일이 여러번 있었다. 이조사를하면서 무슨 수당을 받는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좋아서 한 일 이였다 할까. 그 당시 우리회원들은 이 어려움을 헤치고 군내 여러면의 마을조사를 마칠수있었다. 그리고 당시 탐문회원들은 관내 문화유적지답사, 발굴과 해마다 개최되는 청자문화재에 민속품전시관을 운영하였다. 이 민속품전시는 강진읍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윤0근회원의 물심양면 헌신적인 도움으로 운영되었다. 많은노력, 재정부담을 감수하고 수집하고 전시하고 하였으나 몇 년을 전시후 군에 전시관과 물품을 인계하였는데 때마침 그 이듬해에 폭우로 전시관이 침수되고 관리부실로 이제까지의 이 노력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나중 전시관 철거 후 그 자리에 정각을 건립한다는 계획이 수립되고 이후 철거 전 군의 연락을 받고 돌제품등 훼손이 심하지 않는 얼마의 물품은 이곳 박물관으로 수습해서 가지고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강진문화원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언제부턴가 이사로 선임되어 병영을 알리는데 신경을 쏟기도 하였다. 이사로 선임된 활동하는것이 약 10여년쯤 된가 싶다 해마다 발행되는 강진문화지에 병영소개 관계 원고를 써서 실었다. 내가 병영을 대표하는 이사로서 할 수 있는것은 읽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병영을 알리는 것 뿐이였다.
이렇게 문화활동을 하면서 계속 병영에 관해서 또 하멜에 관하여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당시 전남농업박물관장, 전남대학교 김태진교수님 들과도 교류를 할 수 있었다. 그분들이 찾아와 자료를 물었고 알고 보관자료를 교환할수 있었다. 특이 한것은 하멜표류기책을 문화활동을하면서 광주에 갈때마다 책방을 돌아다니며, 학교도서관을 뒤적이고 그렇게 구하고자 5-6년정도를 애를 썼는데 구해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교육청에서 폐지로 팔려고 묶어놓은 헌책꾸러미속에서 이 책을 발견하였다. 그때 기쁨은 말할수 없었다. 당시 탐문회에서 이 책을 복사인쇄하여 회원끼리 나눠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책이 회원말고 시중으로 유출되어 강진읍 모 사찰스님이 보고 우리회원들에게 고소를 하려고 하는등 혼난적이 있었다. 가서 사죄를 하기도 하였다. 내용인즉 그 책내용에 사찰을 비하하는내용을 문제 삼은것이다. 회에서는 약20년전에 발간된 도서를 그대로 복사 인쇄하였는데 이 사실을 문제 삼았던것이다. 아무튼 이런일도 있었다. 그 후 김태진교수와 교류하고 김교수의 하멜관계 책 발간하는데 참여하기도 하였다. 병영에서 7년간 머문 하멜일행들의 사실로 외국인들의 관심등과 더불어 지역에서도 점점 병영성에 관심을 갖는이들이 많아지고 그 한 예로 지금의 모개나무거리에 병영성지 표석건립 등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고 얼마 후 사적지로 지정되고 복원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즈음에 이르러서야 병영성관계 단행본 책들이 몇 권 출간되었다. 이렇게 당시 좀 하멜관계로 서울랜드에서 기획행사 네덜란드 하멜이 우리나라에 온 350주년 전시행사에 참여, 핸리-샤브나이에교수와도 교류하였고 이 당시 군에서는 네덜란드 호루쿰시와 자매결연을 맺게 되었고 호루쿰시에서 개최되는 행사에 군청직원들과 참여할수 있었다. 이 네덜란드 방문은 앞으로 하멜기념사업을 추진하게될 실무팀 위주 참석하라는 당시 군수의 지시에 따라, 기념관설계자, 공사사업 예정자,나는 하멜 향토사학자로 참가하게 된것이다. 이때 -호루쿰시박물관 그곳에서 미술전시회를 하고 있던 이화여대 조덕현교수를 만나기도 하였다. 조교수는 핸리교수와 우리집을 한번 찾은적이 있어 아는 사이였었다. 이때 난생처음 유럽여행을 한셈이 되겠다. 그 후 군에서 추진한 홈페이지-하멜사이트 개설의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의 홈피에는 하멜관계 그간 수집한 많은 자료들이 상당량 소개되고있으며 하멜기념관에 없는 수점 자료들을 와보랑께에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이야기
이제까지 나는 172번지에서태어나 자랐고 살아왔으며 이곳에 재건축을하였다. 그러나 집이 협소하여 생활이 여간 불편한게 아니였다. 경운기 들어오기 나가기가 작업 할때마다 불편하기 짝이 없었고 마침 지금집자리 땅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곳에 집을 지어볼까 뜻을 가지게 되었다. 여러사람 한테 물어보니 집자리가 괞챦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집을 신축하게 되었다. 처음 물어 본 사람이 당시 전남대학교 영문학과 김태진교수였고 집방향은 정해준 이는 이용희 당시 청자사업소 연구실장이였다. 이리하여 지금 살고 있는 도룡리 596-1번지로 1996년 신축하여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집공사를 마을에서 공사를 하는 것을보고 작천사람에게 집공사를 맡겼는데 기초 공사한 부분이 허물어지고 공사가 너무 지지부진하고 부실하여 그 사람과 계약을 파기하고 직영하게 되었다. 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추석에 입주하기로 한집이 12월 연말에야 공사를 완료하여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우여 곡절 끝에 집을 짛고 나서 창고가 없다보니 여간 불편한게 아니였다. 당시 마을 앞 학교- 병영동교는 폐교가 되어 송전철탑을 세우는 공사를하는 사무소가 사무실및 창고를 운동장에 지어져있었는데 마침 공사를 마치고 철거를 앞 두고 있었다. 이를 알고 철거하는 건물을 구입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예 철거하여 우리집에 지어주기로 계약을하여 집 앞 규모있게 40여평 창고를 마련하였다. 이렇게 창고를 짛은후 172번지-전에살던집에서 필요한물건을 새 창고에로 시간이 되는데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40여평 창고가 넓다보니창고의 벽에 줄줄이 세워놓으니 어느 누군가 흡사 박물관같다고 말하는걸 들을수 있었다. 그때 떠오르는 생각이있 었다. 당시 병영성 복원을 추진하고 있었고 병영성을 복원하면 볼거리가 있어야 할텐데 생각에 이르러 한번 여기에 시작하는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았다. 그리하여 눈에 띄는데로 한점씩 모아볼까 생각하였다. 그런데 당시 내가 몸 담고 있는 탐진향토문화연구회에서도 옛날 민속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한약방을 운영하던 윤0근님이 주도적 수집하고 있는터여서 좀 흡사 한집에 살면서 딴살림 차리는 식이 되어 죄 없이 미안하였다. 나는 병영성복원을 앞두고 볼거리를 준비한다는 마음이 너무 커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 꺼름직하여 그분에게 사실을 이야기 하였다. 병영성이 언제 복원 될 런지는 몰라도 이렇게 민속품을 모으는것도 필요 할 것 같아 나도 모으고 싶다고 말하였더니 그것도 뜻 깊은일이 겠다며 이해를 하겠다면서 열심히 하라는 말까지하여 주어 너무 고마웠다. 이렇게 한 후 홀가분하게 한점씩 모을수가 있었다. 쓰레기통에 버리는물건들, 폐기처분하여 고물상에 넘어간것들 눈에 띄는데로 수집하다보니 주위에서 내가 수집하는 것을 알게 되고 -아나 너희집에나 갔다 놔라하고 주시는 물건들이 점점 불어나게 되었다. 주신물품 관리대장을 만들어 관리하다가 지금은 와보랑께박물관 홈페이지에 올려 관리하고있다. 이렇게 하다보니 박물관의 이름을 붙일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궁리하게되었는데 그당시 막내딸이 난데없이 부산 해양대를가고 싶다는것을 할 수 없이 아이엄마가 부산으로 학교원서를 사러가게되었는데 당시 자갈치시장 앞을 지나며 보았다며,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이야기를하면서 우리집은 와서 보라고 와보랑께라고하면 어떠냐며 하는것이였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여 박물관이름을 와보랑께라고하고 유리창에 와보랑께라고 써놓았다.이리하여 와보랑께박물관이름이 탄생하게 된것이다.
이렇게 박물관이름을 붙이고 한점, 한점 눈에 띄는데로 계속 모으기 시작하였다. 내가 재력이 있어서 돈을 주고 모을 수는 없는 형편이었으나 박물관이라는 간판을 부치고 나니 이래서는 안되지 욕심이 생겨 자연히 돈을 주고 구입하는 물건이 늘어났다. 아이엄마한테는 그냥 얻어왔다 그리하였지만 자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너무 큰돈을 주고 할 수는 없어서 망설이기만 한 적이 많았다. 더욱 박물관을 하다가 우연히 함평 박현순사장님을 알게 되었다. 이 함평 박사장은 큰 하우스를 시설하여 꽃, 관엽식물을 재배하시는분으로서 수입금을 옛 물건 수집하는데 투자를 하시어 전시장을 하우스에 설치하여 운영하고 계셨는데 끼리끼리 논다고 이 박사장을 알게되어 서로 왕래하는 사이가 되고 그때 막 조직되어 운영중인 골동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광주, 전라도사람들의 모임인 -민고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박사장께서는 나중 물건을 함평군에 물품대금을 받고 넘기고 함평군에서는 폐교를 매입하여 전시관을 짓고 박사장님 자제분이 학예사로 취업 근무하고 있으며 그 후도 꾸준히 물건을 모으시고 계신다. 또 민고회에는 이 옛 물건을 취급하는 장사하시는 분이 두 분이 계시고 화순에 농장을 운영하시며 옛 물건을 박사장님 못지않게 엄청 많이 모으신 이동근사장님도 계시고 한복집을 하시는 분, 한복인간문화재 이신 분, 식당, 농장등을 하시며 옛것을 좋아 하시는 분, 공무원으로 퇴직하시면서, 한약방을 하시면서, 사업을하시면서 이렇게 옛것-물건들을 좋아하시는 분들의 모임에 끼어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도움을 주고 활동하고 있다. 이회에 가입하고서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노라니 여러 방송국에서 자주 찾아 오게 되고 소개되고 특히 kbs-2tv 당시최고 인기프로그램인 스펀지에 소개되었다. 그 프로그램은 당시 국민 50%가 시청하는 엄청난 인기 프로그램이였는데 거기에 -전라남도 강진군에는 □ 박물관이있다- 이렇게 소개되고 mbc-라듸오의 손석희 시선집중에 소개되자 엄청나게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방송을 보고 멀리서-광산, 해남등 기증하시는 분이 있어 가서 가져오기도 하고 가져다주시는 분도 계셨다. 그리하여 40여평 공간이 물품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들어가서 구경하고 나오기도 힘들 정도로 통로까지 차지한 전시장이 된것이다. 그런데 좁은것까지는 좋은데 창고건물이 재 사용 건물이다보니 천정에서 누수가 되는것이다. 비가 올때면 뚝뚝 물이 떨어지고 바닥에 고이는 형편이되고 비만오면 걱정을하는 형편이 되었다. 지붕누수를 막기 위하여 지붕에 올라가서 콕킹으로 막는작업을 하여 보았으나 도대체 어디서 세는줄 알수 없었다. 짐작컨대 헌 철판 판넬이라 콕킹으로 땜질한 부위가 세는것 같았는데 한두군데가 아니니- 결국 수리를못하고 세월을 보내는차 한번은 이날도 비오는날 서울에서 온 손님들을 맞게되었다. 청자문화제를 앞두고 강진군에서 서울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들을 초대하게 되었는데 그분들이 방송에 소개되는 우리박물관이야기를 하여서 우리집으로 모시게 된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딱 할일이다. 물건은 40여평 공간에 가득 쌓여있고 비가 새서 바닥에 빗물이 고여 있고 뭐 이런곳이있나 하는 눈치였다. 모시고 오는 사람도 미안하고 보여주는 나도 미안하고 이번 일로 차츰 우리박물관 형편이 알려져 이래서는 안된다는 공감하는 분들이 생겨 지방신문에도 알려지고, 나 역시 어쩔 수 없어 강진군수님께 편지를 띄우게 되었다. 군수님께서 특별한 배려로 어려운 군 재정형편임에도 도움을 받게 되었다. 나도 이 형편을 알고 있기에 지금 공사를 마치고 운영하면서도 최대한 자료 확충, 친절안내, 오신 분들이 최대한 즐겁게 관람하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공사를 마치고 우리박물관은 산뜻하게 2층으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80여평 좀 더 너른 공간에 전시를하여 찾아오시는분들에게 덜 미안하게 되었다. 그러나 1여년 운영하다보니 이 박물관 이라는것이 계속 돈이 들어가기만 하지 소득이 없다보니 소득을 올리기 위하여 사투리를 정리하여 책을 만들고, 스카프도 만들어 팔아보았으나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민 끝에 해남-땅끝에서 해양박물관을 운영하고 계시는 관장님을 찾게 되었고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박물관은 몇 년하고 싫다고 그만 두는 사업이 아니고 내가 죽더라도 또 누군가 계속되어야 하는 사업이고 모아진 소장품은 개인것이 아니고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부터 이 지역 여러분의것이 되는것이며 돈을 버는사업이 아니라 내가 살면서 이지역에 봉사한다는 즐거움으로 계속해야 사업이기에 최소한의 운영비정도의 돈을 받는것이 좋을것이라는 조언을 들을수있었다. 그리하여 결론은 박물관 관람료를 받기로하는 것으로 결론을내고 2개월전 사전에 공지하고 받는 지금에 이르고있다. 어른 1000원 어린이 500원, 청소년 800원을 받고있다. 지금 이글을 쓰는 4월 중순, 3월1일부터 받았으니 입장료 받은지 한달하고 보름이 되었다. 그 전하고 상황이 많이다름을 느낀다. 꼭 올사람이 와서 본다, 무조건와서 시간 떼우기식으로 보는 사람이 없어 졌다는 것이다. 대신 조금 부담을 느껴서인지 와서 그냥 가는 사람이 생기기도 하고-
경제적 기준으로 보면 입장료금 받는금액이 사람 인건비는 커녕 전기,관리비에도 훨씬 못 미치는 사업이다. 그러나 언제 내가 돈 벌자고 이 짓을 하였던가 하고 오는 분하고 옛 이야기하고 노는 재미로 소일하고 있다.
사투리이야기
먼저 나는 사투리-방언 전문가도 아니다. 사투리관계 국문학을 전공한것은 더 더욱 아니다. 참으로 우연스레 사투리에 빠져 든것 같다. 당시 옴천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을떼 장흥용산이 고향이시분과 같이 근무하게 되었다. 그 분은 나보다 5살연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분이 평소 사투리를 엄청 사용하였다. 처음 들으며 생활하면서 별나게 그라네이- 정도로 알고, 좀은 듣기 싫은 마음이 들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내가 박물관 이름을 붙이고 본격적으로 물건을 모으면서 나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물건들에서 향수를 느낀다면 말-사투리 속에서도 향수를 느낄 수 있음을 알게 되고 물건들처럼 고물이 되어가고 사용하지 않게 되는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고장에서만 사용하는 -사투리 말의 소중함, 가치를 인식하게 된것이다. 그리하여 공책을 책상옆에다 매달아 놓고 그 분이 사용하는 말을 적기 시작하였다. 한달이 지났을까 상당한 양이 됨을 볼 수 있었다. 옆의 동료들도 그것 재미있다 읽어보고 이것도 빠졌네이-하면서 적어주고 이렇게 사투리와 만나게 되었다. 하면서 인터넷을 뒤적이며 사투리를 수집하고 점점 사투리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하게 귀중한 자료를 습득하게 되었다. 어느날 한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내가 옛날 고물을 수집한다는걸 알고 헛간을 정리하다 옛날 고서-해방전후 그분의 형님께서 교사직에 계실 때 사용하던 책들을 보시고 나에게 연락을 한것이다. 자네 필요한것 있으면 가져 가게나- 이렇게 한자루의 책들을 구하게 된것이다. 이 책들은 해방전, 후 국문학, 책들이 많이 있었으며 정말 보물같은 자료들이였다. 이속에 바로 나비박사 석주명씨의 제주도방언집, 표준말 모음집, 한글의바른말-등이 있었으며 특히 석주명씨의 제주도 방언집에는 제주도 방언은 말할것도 없고 전국 각 지방 방언과 비교하는 자료가 있어서 정말 나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 도서들의 자료와 이제까지 모아둔 자료를 함께 정리하여 당시 관리-운영하고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 여러 사람들이 읽어볼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보완작업을 계속하여 나갔다. 이리하여 지금은 방언하면 전국에서 많이 찾아들어오는 정말 각지방 사투리까지 수집되어있는 유명한 사이트가 된것이다. 와보랑께박물관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전국에 알려지게 된 동기가 된 것이다. 지금도 빠진 것이 많다. 그때 같이 근무하던 선생님 중 이제는 교장선생님이 되셔서 이것도 빠졌네요 하고 자주 일러 주신다. 너무 고맙다. 사실 나는 정리만 하였지 실제는 모든 이웃 분들의 도움으로 이렇게 수집하게 된 것이다.
컴퓨터와 홈페이지이야기
내가 컴퓨터를 만지게 된것은 학교에 근무하고 있었기에 가능한일 이였다고 하겠다. 70년대말이 아니었나 병영국민학교에 근무하고 있을때였다. 어느 출향 독지가가 후배들을 위하여 컴퓨터를 기증하였다고 학부형까지 다 모인 운동회 식장에서 발표하고 얼마 후 학교에 컴퓨터라는 물건이 도착하였는데 이건 나중 보니 비디오나 라듸오식을 지금처럼 작동되는것이아니라 작동을 하기위해서는 베이직이라는 컴퓨터 언어를 배워야 작동하게 된것이다. 그 언어로 무엇을하라 입력하여야 그렇게 작동되는것이였다. 참으로 답답 할 노릇이다. 거의 선생님들도 교육청에서 강습을 받고 엄청 노력을 하는분들이나 간신히 토닥거리지 거의가 손을 들 지경이었다. 베이직언어를 배우는것도 어렵고 응용하여 명령을 내리는것은 더 더욱 어렵고 그런데 당시 프로그램이 하나씩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봉급 지급 하는 프로그램, 물품관리프로그램, 경리프로그램 그러나 이것역시 이걸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용하는 방법을 익혀야 하였는데 이 역시 여간 고역 이였다. 지금도 컴퓨터를 다룰 줄 알기위해서는 공부를 하듯이 당시도 그러하였다. 확실히 익히기만 한다면 엄청난 능률을 올릴 수 있는 기계 란 것을 접하면서 느낄 수 있었다. 배우기 위해서 노력하였으나 한계가 있었다. 정식으로 컴퓨터강습을 받고 싶었으나 당장 업무추진을 하여야하고 말단직인 내 차지가 올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학교선생님 중 교육청 관리과장하고 같은교회 다니는 분이 계셔서 자주 통화 하는 걸 듣고 그 선생님께 부탁하였다. 컴퓨터 교육을 받게 해달라고 - 그 선생님의 수고로 드디어 컴퓨터교육을 처음부터 받을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지금의 전라남도 과학교육원에서 1주일 강습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기초실력이 있어야 하는 형편인데 중졸인 내가 학교공부를 잘 하기나 하였나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강습을 마치고 학교업무로 돌아와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지는 못하지만 따라 가는데는 별탈이 없었다 할까. 그때 나는 이것하나를 배워가지고 나왔다. 지금부터의 시대는 컴퓨터안에서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며 컴퓨터에서 홈페이지를 하나 갖게되면 4층짜리 빌딩 한 채 갖고 있는것보다 낫다는것을 소개 하는것 이였다. 참으로 경이로운 세계가 펼쳐지게 되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배우며 반신반의 할 수 밖 에 없는 좀 황당한 내용 이였다. 수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정말 사실임을 확인 할 수 있다. 바로 내가 운영 하고 있는 홈페이지가 증명 할 수 있다 하겠다. 하루에 100명 넘게 찾아 오는 집 - 4층짜리 빌딩보다 났다 하겠다. 이렇게 홈페이지 중요성을 배운 터 그러나 당장 아는것이 없으니 엄두도 나지않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당시 병영문화관계에 흥미를 느끼고 자료를 모으로 있는터라 만약 기회가 오면 사용해야겠다고 자료를 사진,-내용, 하나씩 챙기기 시작 하였다. 이러기를 일년쯤 될까, 당시 근무하던 학교는 옴천초등학교였고 그곳에 젊은 컴퓨터박사 선생님이 전입하여 오셨다. 김정호 선생님이셨다. 그선생님은 홈페이지를 만들어 도 과학 경시에 최고상을 수상하신 실력가이셨다. 한달이 지나고 어느날 수업이 끝난 오후 그선생님을 찾았다. 이제까지 모아온 자료를 보이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자료를 보신 선생님은 그 자료 모은 성의에 감동했는지 알았다고 하며 놓고 가라 하였다. 몇일 후 선생님께서 찾아서 가보니 내가 준 자료로 멋진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신것이였다. 이제부터 계속보완을 하여야하니 하다가 모르면 이야기하라는 것이였다. 너무 고마웠다. 지금 운영하고 있는 홈페이지 와보랑께박물관 홈페이지가 이렇게 탄생하게 된것이다. 그후 계속 자료를 보완하고있으며 도시민들이 병영을 알고 , 가보고 싶은곳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나는 홈페이지 만드는법을 배우게 되었고 이윽고 마을홈페이지,매실나무집(우리집)홈페이지, 내그림방 홈페이지등을 만들게되었다. 당시 홈페이지를검색하여보면 전국에서 옥천사랑이란 홈페이지가 정겨운 시골모습을 담고있는 홈페이지가 있었으며, 그 다음 내가 운영하고있는 홈페이지가 되겠다. 이 옥천사랑-홈페이지 운영자는 당시 갓 결혼한 청년이였으며 그 후 옥천신문사 홈페이지를 만들더니 본격적으로 전국 각 지역신문사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고 관리하는사업에 뛰어들어 지금은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회사로 성장시켜 운영하고있는것을 보며 젊은이의 도전정신과 번득이는 아이디어에 경의를 표하며 발전을 빌어본다. 나중 옥천사랑은 바쁨떼문이었나 문을 닫았었다. 우리지역 강진신문도 이 옥천 젊은이의 회사에서 운영하고있음을본다.
농촌관광 -마을이야기
박물관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 창고를 지어놓고 박물관을 생각하고 물건을 수집하는걸 보니 저 사람 무어하는거냐 웃긴다고. 쓰다 버리는 쓰레기들을 주어다 모아 놓으면서 왠 박물관이냐고 집 앞을 지나며 힐끗거리며 지나며 마을 사람중에 관심을 갖고 갖다 주는이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나는 민박도 시작했다. 이 민박을 운영하게 된 동기는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자연스레 하멜에 관한자료를 수집하게 되었고 이 자료들을 정리하여 홈피에 올리게 되었는데 이게 주위사람들이 하멜의 자료는 이 와보랑께에 가면 있다 는식이 되어 박물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외국인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한번은 찾아오는 외국인들을 군청에서 오신분이 안내하여 왔는데 이곳에서 잠자도 되겠다며 그럴것이 아니라 민박을 하면 좋겠다고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그러면 군청에서 홍보-도움을 주겠다고 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민박을 시작하게 되었다. 민박은 살고 있는 집 유리창에 민박이라고 작은 간판을 부쳐놓으니 사람들은 웃긴다 여기 누가 민박 할 것인가 의아 해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민박손님 오느냐고 그러나 날마나 오는 손님이 아니라 어쩌다가 박물관 구경 오는 손님이 머물러가는 형편이였다. 그렇다고 자주 오는것은 아니고 한달에 -몇가족 , 묻고 이용하였었다. 그러나 민박을 이용하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엿볼수 있었다. 하루저녁 자고 가면서 먹는 반찬을 보고 자연스럽게 농산물이야기가 나오고 된장 시레기, 팥, 깨, 고추, 들깨등 구입하여 가는 것이였다. 한마디로 전기세는 나오겠구나 생각 해 볼수 있었다.
나는 퇴직한 다음, 다음 해부터 마을일을 -이장을 하기시작하였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이로서 무언가 마을발전에 기여하고싶은 욕심이 발동하였다 할까, 첫번째 시도한것이 당시 한참 붐인 농촌관광-농촌에 사람을 오게하여 그들에게 쉬고,먹고,자게하며, 사가게하여 소득을 올리는
사업이되겠다. 이것을 보고 어쩌면 이것이 우리마을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다 싶어 그리하여 마을사람들에게 당시 농림부에서 추진하고있는 녹색농촌사업을 유치 해 보고자 신청하자고 하고 신청서류를 놓고 씨름하며 신청하였으나 첫해 떨어지고 말았다. 그 다음해에는 떨어진 이유를 알아보고 분석 보완하여 서류를 접수시켜 통과되었다고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돈이 2억이라는 돈이 마을로 온다고 하니 이제까지 가만이 있던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사업을 추진하던 중, 몸 한 쪽이 마비증상을 느껴 광주 조대병원에 20여일 입원을 한 적이 있었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건강에 나쁜가를 실제 체험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농촌 관광사업을 마을주민들에게 얘기하고 시작한지 4년- , -그 안에 전국에서 2개마을만 추진하는 문화마을 사업도 유치하기도하고 -, 마을 일보기 8년, 지금은 마을일을 귀농한 후배에게 인계하고 이 농촌관광사업에서 손을 뗀지도 몇 개월이 되어간다. 허지만 이 사업이 우리마을을 많이 바뀌게 하였다고 자부하고 싶다. 몇 동의 마을소유 건물이 들어서고 이 건물을 이용하여 소득도 올릴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하겠다. 그리고 이렇게도 돈을 벌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심어 놓았다 하겠다. 밭에서 논에서 농산물을 생산해야만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서 민박-농촌관광 이라는걸 이용해서 소득을 올릴수도 있다 라는것을 느끼게 하였다 하겠다.
최근
기술센타에서 운영하는 녹색문화대학에 다니며 여러 가지를 배울수 있었다. 농촌발전의 바람직한 방향과 어떻게 살아 가는게 바른길인가를 생각 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을일에서 손을 뗀 후,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었다. 마을일을 볼 때는 무언가에 시간이며 내 자신의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노끈에 묶여 있어서 그림 그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 해방감을 느끼고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하겠다. 광주전남현대작가회에 가입도 하고 드로잉회 작품전에도 신경을 써서 이제까지의 화법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스타일의 그림을 회원전에 선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박물관의 발전을 위하여도 생각 해 볼 수 있게 되었다. (2011.10)
-오늘은 2018년 12월16일이다.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나는 박물관 한쪽에 전시장 증축공사에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런데 약 한달전부터 언젠가와 같은 한쪽 힘이 풀리고 끊김현상이 발생되어 긴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대병원에 가서 약을 타다 먹은 후 그 증상이 덜해서 한 숨 놓고 있다고할까. 몇일 후 24일날 조대병원에서 뇌파검사를 예약 해 놓은 상태라 검사하면 알수 있겠지 하고 있는 상태다.
그림은 그 후 화풍이 많이 변했다. 2012년 그때부터 한글그림에 관심을 갖고 그런식의 그림을 모색하며 작업하여 왔다. 최근에 와서는 한글어휘를 조형화하여 그리는 그림에 관심을 갖고 작업하며 그 작품들을 관람 오신분들과 그 그림을 설명하며 즐기고 있다. 사실 그 분들은 너무 생소한 이런 그림에 어이없어 한다. 나는 그걸 즐긴다고 할까? 좀 내가 생각해도 미쳤다(?)할까 그러나 언젠가는 알아줄날 있으리라 믿어본다. 지금 짓고 있는 전시장도 내 일생 살아오면서 그린 그림들과 최근 그림전시를 하여 찾아오신 관람객들과 그림의 향기를 공유하고 싶어서라고 할까, 더욱 최근에는 김학장의 조언- 차라리 사투리 어휘를 이용하여 그려 보는것이 어떤가 - 말을 듣고 이곳이 사투리박물관이다 보니 그것도 괞챦겠다 싶어 작업을 시도하여 보고 있다. 보시는 분들은 더 어이 없어 하는것이 - 내가 생각해도 내가 어이가 없는짓을 하고 있는것 같다. 그러나 한편 재미있는것도 사실이다. 그림이 선, 색, 명암, 형태 등으로 자기의 감성을 표현 하는것이라면 나는 기호를 그 지방만의 기호(사투리)로 그림으로 표현해보는것이라고 할까, 물론 켈리그라피란 방법으로, 글자를 그림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분들이 몇 분 계신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방법면에서 서로 상이하지 않나 싶어진다. 하여튼 이 작업은 많이 고민스러운 작업이다.
오늘은 2023년 10월 마지막날이다 금년 8월 7일 나에게는 큰일이 있었다 바로 나의 그림작업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학장의 별세였다 ,4월달 화실을 찾았을때 여기박물관에서 서유나샘과 2인전 할때 좀 건강이 이상이 있구나 느끼긴 하였으나 이렇게 가실줄은 정말 몰랐다. 일본전이 있어서 일본에서 건강이상이 생겨 그곳에서 치료받다가 이곳으로 오셨으나 지병이 있는터라 악화되어 결국은 나의 곁을 떠나게 된것이다. 늘 내그림을 보고 여러이야기를 해주시고 그리는 방법에대해서도 좋은말씀 해주시고 하셨는데 그 고마움을 다 표시하지도 않았는데 너무 가슴아프다. 얼마전 kbs- 동네한바퀴팀 촬영이 있었다 그전에도 방송에 나오면 너무 기뻐하셨는데
얼마전부터 강진일보에 나의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하고있다.처음 오 국장에게서 제의를 받았을때 좀 어이가 없어서 거절을 하였지만 박물관을 하는이로서 어떻게 박물관을 하게 된이야기를 알리는것도 으의있는일이지않겠느냐는 거듭된 부탁을 받고 그럴까 연재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의 이야기가 참고되지만 내가 이야기를 하여주고 그것을 글로 써서 연재하는 방법으로 연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