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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4일 오전 10시쯤 제정구 기념사업회 박재천 상임이사와 함께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예수회 수도원을 방문했다. 고 제정구 선생의 사위인 김광호 대표가 촬영 팀을 이끌고 합류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얼굴빛이 붉고 넉넉해 보이는 정일우(미국 이름, 존 데일리) 신부님이 나오셨다. 1935년생이니 한국 나이로 77세다. 미국사람으로는 키가 조금 작은 편이고 한국사람으로는 보통 키인데 사람 좋아 보이는 잘생긴 얼굴이셨다. 밀고 다니는 지팡이에 의존해서 겨우 걸음을 내디디셨다.
'정일우 이야기'(제정구기념사업회 편)를 읽고 정 신부님은 거룩한 삶을 즐겁게 사신 분임을 알게 되었다. 정 신부님의 얼굴 모습이나 삶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정 신부님을 ‘예수 닮은 분’이라고 했다. 정 신부님은 제정구 선생과 함께 1970년대 초반부터 청계천과 양평동의 판자촌에서 그리고 경기도 시흥의 복음자리에서 빈민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셨고 말년에는 충청북도 농촌마을에서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셨다. 예수회 신부로서 20대 초반인 1960년대 초에 한국에 오셔서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영성지도생활을 하시다가 좋은 말만 하는 게 싫어서 청계천 판자촌으로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예수처럼 성인의 삶을 사셨다.
2004년에는 예수회 신부들의 영성수련 책임을 맡고 준비하기 위해 64일 동안 금식을 하여 건강을 잃으셨다. 걷기도 어렵고 말씀을 하시기도 어려운데, 귀한 시간을 내주셨다. 정 신부님으로부터 생각과 말씀을 이끌어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선문답하듯이 한 말씀 하시고는 말이 없으셔서 대화를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1시간쯤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대화의 녹취록을 푼 내용에 정 신부님을 소개하는 글을 조금 보충했다.
박재순: 제가 신부님의 책을 읽고 감동받은 것은 신부님의 생각이나 실천이 아주 맑고 투명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청계천, 양평동 같은 빈민촌은 아주 고통스럽고 어려운 삶의 자린데 그런데서 사신분의 생각이나 실천이 아주 맑고 투명한 것을 보고 신부님을 꼭 한번 뵙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얼굴을 뵙고 궁금한 것을 여쭙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우선 첫째로 신부님은 한국을 아주 사랑하셨던 것 같아요. 한국과 한국사람을 사랑하고 한국인들의 삶과 문화를 사랑하셨습니다. 신부님은 미국사람으로서 특히 어떤 느낌을 가지고 한국을 좋아하셨는지 어떤 점이 좋으셨는지 한 말씀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일우: 네 알겠습니다.
한마디로 정이 많아서 그랬습니다. 아주 개인적으로 사는 것보다도 이웃사람들과 한 가족같이 사는 것이 좋았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아주 개인적으로 사는 것이 분명해요. 공동체로 사는 것보다도 개인적으로 삽니다. 미국엔 결혼해서 아버지 어머니 집에서 나와서 또 가족 이루는데 대가족이 없어요. 그런데 한국엔 대가족이 있는 거죠. 그래서 혼자 따로따로 사는 것보다도 공동체를 이루면서 사는 거죠.
박재순: 한국사회도 대가족제도가 사라져가고 가정도 깨져가고 공동체가 약화 되어가고 있지요. 그러나 가난한 사람일수록 정이 더 많고 공동체적으로 살자는 생각이 더 많은 법이지요. 신부님은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공동체를 발견하고 정을 발견해서 거기서 평생같이 살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신부님은 탈춤, 풍물놀이 같은 한국사람들의 예술문화를 아주 좋아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엔 아마 공동체적인 신명 같은 것이 있지요? 함께 신나는 놀이를 아주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거기에 대해서 하실 말씀 있으면...
정일우: 미국엔 그런 것이 없죠. 개인적으로 춤을 추지만 공동체로 춤추는 건 드물어요. 근데 한국에서 잔치 있을 때마다 그 잔치 후에 모여서 불 피워 놓고 새벽까지 춤을 추지요. 아주 맘에 들어요.
박재순: 같이 술 마시고 춤추는 것이 한국문화의 특징이라고 해요. 서양 사람들은 노래도 혼자 부르고 춤도 혼자 추는 경우가 많다지요. 술도 혼자 마시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우리나라사람들은 먹어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마시고 노래도 같이 부르고 춤도 같이 추고. 신부님 말씀하신대로 한국의 노래나 춤에 이미 공동체적 성격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부님 혹시 함석헌 선생님과 만나신 일이 있으신가요?
정일우: 다 까먹었는데 만나 뵌 것은 제정구 선생님 결혼식 주례 하실 때 만났습니다. 근데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
박재순: 함석헌선생님이 평생 얘기하신 게 씨알사상인데 사람도 씨앗이고 역사와 우주와 사회도 씨앗이고 씨앗처럼 살아야 된다고 하셨지요. 씨앗은 땅에 들어가서 자기가 깨지고 죽음을 통해서 새로 나는데, 겸손하게 밑에서부터 살아올라오지요. 정 신부님 책에도 씨앗얘기가 자주 나오고, 사람들을 만나서도 사람들을 교육할 때도 사람들을 기를 때도 씨앗처럼 그렇게 해야 된다는 대목이 나오더라고요. 신부님한테 씨앗이라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까?
정일우: 씨앗은 모든 것의 시작이죠. 거기서 생명이 나오는 거죠. 그래서 우주의 핵심적인 것이죠.
박재순: 씨앗은 억지로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줘야 하고 참아줘야 되고 더불어 있어줘야 되는 것이죠. 신부님의 씨앗(씨알) 정신이 양평동이나 청계천에 사실 때 많이 들어난 것 같아서 반갑고 좋았습니다.
신부님은 제정구 선생님이랑 평생 같이 지내셨지요. 제정구 선생님은 경상도 고창의 척곡(尺谷)이라는 깊은 산골에서 나고 자라신 분이고 신부님은 미국서부지역에 아주 광활한 들판에서 나고 자라분이라, 경험과 기질이 서로 다를 것 같기도 해요. 한분은 좁은 산골에서 하늘만 바라보고 사신분이고, 신부님은 농촌출신이지만 아주 넓은 들판에서 사신 분이지요. 그렇게 서로 기질이 다른 분들이 어떻게 서로 화합하면서 오래 같이 생활을 할 수 있었나요?
정일우: 아주 희한한 일이었죠. 맨 처음 판자촌에서 만났을 때 좁은 방에서 같이 잤는데 밤새도록 며칠간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얘기를 나누어보니까 사회에 대해서나 공동체에 대해서나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랐습니다. 한 사람은 젊고 한국사람이고, 한사람은 나이 많고 외국 사람인데, 어떻게 같이 통 할 수 있을까 아주 놀랐습니다.
박재순: 서로 기질은 다르지만은 생각이나 뜻이 같았군요.
두 분 사이에 서로 다툴 일은 없으셨어요?
정일우: 네 거의 안 다투었어요.
박재순: 신부님 책에서 아주 감동적으로 읽은 이야기 중에 제정구 선생님과 관련된 대목이 두 가지 떠오릅니다. 양평동에서 함께 사실 때 처음에 제정구 선생님이 혼자 허드렛일을 많이 하셨다고 해요. 문짝 고치고 부엌, 담장도 고치는 일을 했다는 것이지요. 제 선생이 속으로 “왜 나만 이런 힘든 일을 하나?”고 불평을 품게 되었답니다. 불평을 품고 지내다가 어느 날 신부님께 이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불평했다고 말씀드렸지요. 신부님이 “아, 그랬냐? 너만 힘든 일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신부님은 정색을 하고 “그랬냐? 그럼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냐? 그런데 제정구가 힘든 일을 해서 제정구에게 좋으면 좋았지 나쁜 일이 무엇이냐? 제정구가 손해 본 게 무어냐?”고 말씀하셨어요. 신부님 말씀을 듣고 제정구 선생은 크게 충격을 받고 다시 생각해 보니 자기가 힘든 일을 해서 자기에게 좋지 나쁠 게 없다는 깨달음이 왔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던 것은 마음이 잘못 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마음을 여는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 신부님을 ‘마음을 열어준 스승’이라고 제 선생이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 정 신부님과 제정구 선생님이 빈민들을 위해서 아주 힘을 다해서 희생봉사를 하셨어요. 양평동 주민들이 철거되어 갈 곳이 없자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으로 독일 가톨릭교회의 재정 지원을 받아 시흥에 땅을 사고 주민들은 주택 건축비용만 내고 입주하게 했습니다. 정 신부님은 주택 건축을 서두르느라고 직접 벽돌을 찍었는데 하루 10원을 아끼기 위해서 목장갑을 끼지 않고 벽돌을 만드느라고 손에서 피가 났지요. 그렇게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했는데, 주민들 사이에 오해가 생겨서 “정일우 제정구 두 사람이 건축업자와 짜고 집장사를 한다. 우리한테 집을 팔아서 우리를 착취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래서 밤중에 주민들이 몽둥이를 들고 두 사람을 때려죽인다고 쳐들어 왔을 때, 신부님이 제정구 선생한테 “우리 이 자리에서 같이 죽자!”고 말씀하셨다지요. 제정구 선생님도 그 말씀을 듣고 나서는 큰 감동을 받고 신부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됐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사례만 보더라도 신부님이 예사로운 분이 아니시고, 평소에 생각을 많이 하시고 마음 훈련을 많이 하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 신부님의 이런 정신과 태도가 기독교 신앙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나요? 아니면 신부님이 평소에 수련을 많이 하신 탓일까요?
정일우: 그렇게 가난하게 살고 공동체를 만든 원천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한테 배웠어요. 예수님은 가난하게 살았고 또 온 세계를 한 공동체 만들려고 하셨으니까. 그 예수님한테서 배운 거죠.
박재순: 한국에 기독교가 굉장히 발전했고 미국이나 유럽으로부터 많은 선교사들과 기독교사상이 들어왔는데 신부님같이 살고 행동하신 분은 신부님 밖에 없어요. 지금 한국교회 보십시오. 천주교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한국 개신교는 지금 신부님이 얘기하시는 그런 예수님의 정신이나 삶을 따르는 사람들이 별로 없잖아요. 미국교회나 유럽교회를 보더라도 지금 신부님이 얘기하시는 그런 예수는 없어요.
정일우: 제가 속한 예수회 있잖아요. 예수회는 가난한 예수님을 모시는 수도회죠. 예수회를 창조하신 이냐시오 성인은 가난한 예수님한테서 그 믿음을 배우셨어요. 예수님의 공동체생활 핵심은 가난에서부터 나온다고 믿었죠.
박재순: 예수의 정신이 가난에서 나온다는 그런 신념이 예수회에 있었네요. 그러니까 신부님의 실천은 예수님의 삶의 정신 예수의 가난 정신에서 나온 거네요. 그런데 세계에 예수회사람이 많을 텐데, 예수회사람들이 신부님처럼 예수의 가난한 삶의 정신을 그렇게 실천하나요? 그렇다면 세상이 많이 바뀌었을 텐데... 지금 기독교가 세상에 큰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거든요. 신부님만 그렇게 사신거지 한국의 다른 예수회 신부들도 외국의 예수회 신부들도 그렇게 안 사시는 것 아닌가요?
정일우: 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공동체가 가난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죠. 이냐시오도 그런 것을 발견했고 우리 예수회 회원의 삶에서도 가난함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죠.
박재순: 한국의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어떤 관심이 없으셨어요?
정일우: 그렇죠.
박재순: 불교도 가난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기독교 못지않죠. 불교의 출가자들은 집까지 다 버리고 빌어먹어야 된다고 하니까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한국에도 불교의 가난 정신이 없지는 않은데, 신부님처럼 빈민들의 삶속으로 들어가서 빈민들과 더불어 사는 그런 삶을 사시는 분들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정일우: 지금 이집은 좋잖아요? 지금은 가난하게 살지 않습니다. 옛날엔 가난하게 살았지만은 지금은 부자처럼 생활하고 있죠.
박재순: 신부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평생 사랑하시고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사셨는데 그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무얼 보셨어요?
정일우: 지키는 것이 없다는 것을 보았어요. 가지고 있는 것이 없으니까 지킬 것이 없죠. 그래서 나눌 문물(文物)이 없으니까 그냥 더불어 사는 것이죠.
박재순: 가진 게 없으니까 삶에 충실한 거네요. 삶에 충실하고 정이 많고.
앞으로 빈민운동을 하거나 공동체 운동을 하는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정일우: 어려운 질문인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판자촌이 없죠.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만, 흩어져서 살지요. 그래서 앞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박재순: 신부님은 한국에서 평생 사셨는데 힘껏 최선을 다해 사셨으니까, 만족스러우실 꺼라 생각하지만, 삶을 돌이켜보면서 아쉬움이라든지 보람이라든지 그런 게 있으면 좀 말씀해주시죠?
정일우: 보람 있는 것은 한국에 와서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생활 공동체생활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어요. 안 좋은 것은 별로 없습니다.
박재순: 한국에 와서 처음에는 철학교수였는데 신부님은 철학 가르치는 것이 재미없어서 가난한 삶의 현장으로 가셨다고 했어요. 그 당시에는 철학에 만족을 못 하신 거네요.
정일우: 네 철학 싫어합니다. 철학을 전공한 것은 한국에 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신부 되었을 때 예수회에서 서강대학교를 세웠는데 교수가 필요해서 예수회 양성소에서 철학을 3년간 배워가지고 석사 학위 받았으니까 한국에 와서 가르칠 수 있었죠. 그래서 철학을 싫어하면서 전공했습니다.
박재순: 그러니까 신부님은 철학보다는 삶이 좋으셨네요.
그런데 신부님도 사람이니까 젊어서부터 신부가 되셨으니까 인간적인 유혹도 많이 있을 수 있잖아요? 좀 편하게 살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기도 하고요? 또 남성이시니까 여자에 대한 생각이나 그런 유혹은 없으셨어요?
정일우: 아니 있었죠. 그런데 판자촌에서 살 때 너무 재미있었어요. 주민들이 굉장히 활발하게 살았었으니까 그래서 재미있었어요.
박재순: 2004년도에 예수회 신부들의 영성 수련 책임을 맡고 준비하기 위해 금식을 하셨는데 금식을 너무 길게 하셨어요. 64일 동안 하셔서 건강을 잃으셨는데 왜 이렇게 길게 하셨나요?
정일우: 여러 해 전부터 매년 금식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한 번 길게 하고 싶어서 21일간 하려 했습니다. 21일 금식 하다보니까 먹고 싶지 않아요. 먹을 것이 안 넘어가요. 그래서 계속 쓰러질 때까지 했죠.
박재순: 그때는 세상을 이렇게 끝낼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정일우: 아니요.
박재순: 세상을 끝낸다는 생각은 안하셨어요?
정일우: 물론
박재순: 근데 60일 넘게 금식하면, 사람이 못살지 않습니까?
정일우: 예 근데 살았잖아요.
박재순: 사시긴 사셨지만 그 때 건강을 많이 잃으셨지요. 그 때 왜 일찍 금식을 중단하지 않으셨어요? 금식이 좋으셨나요?
정일우: 네 좋았어요. 마음이 아주 편했어요.
박재순: 저도 1일1식을 10달 가까이 하다보니까 몸이 나빠지는데 몸과 맘은 편하게 느껴졌어요. 안 먹어도 먹고 싶은 생각도 안 나고.
정일우: 단식해서 몸이 나빠지는 것보다 몸이 좋아졌다는 것을 느꼈어요.
박재순: 그래요. 그럴 수 있죠.
혹시 신부님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 안 해보셨어요?
정일우: 별로 생각 안 했어요.
박재순: 지금도 별로 생각 안 하시고?
정일우: 네.
박재순: 지금도 그냥 하루하루 즐거워하며 사시는 거고?
정일우: 네.
박재순: 아까 조금 말씀을 하시긴 하셨지만 젊은 사람들한테 공동체운동을 하거나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려고 하는 사람들한테 마음가짐이나 삶의 원칙이나 지침 같은 것이 있으면 말씀을 좀 해주시죠.
정일우: 별로 없습니다.
박재순: 어떻게 살면 좋다는 말씀이라도?
정일우: 그냥 자기만족만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온 동네 함께 공동생활 하면서 사는 거죠.
박재순: 빈민과 더불어 사는 빈민공동체 신학이라고 할까 사상이라고 하는 게 있을 수 있나요?
정일우: 사상 저 없었어요.
박재순: 그래도 신부님의 책 ‘정일우 이야기’에서 삶의 원칙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삶의 원칙이나 지침이 풍부하게 들어있지요. 정 신부님은 빈민들과 더불어 사는 원칙을 엄격히 지키셨어요. 빈민들을 상대로 먼저 계획을 세우거나 빈민들과 사업을 벌이는 일이 없었지요. 빈민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빈민과 더불어 산다’는 자세를 끝까지 지키셨어요. 빈민들에게 배운다는 정신으로 사셨어요. 자신이 할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하면서 한없이 기다리는 자세로 사셨지요. 그런 것이 놀라운 원칙이고 가르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신부님은 파울로 프레리의 ‘민중 의식화 교육학’도 공부하셨고 쏘울 알렌스키의 주민운동 조직론도 공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신부님은 민중을 의식화하려는 생각도 민중을 조직하고 자극하려는 맘을 일체 내지 않으셨어요. 파울로 프레리나 쏘울 알렌스키의 민중교육론과 조직론을 무시하고 그냥 가난한 주민들과 함께 사셨어요. 앞장서서 가난한 주민들을 끌고 가려 하지 않고, 주민들이 스스로 움직여 나갈 때까지 기다리셨지요. 주민들의 옆에서 그리고 뒤에서 사는 자세를 끝까지 지키셨어요. 이것이 놀라운 점이고 정 신부님의 원칙이고 정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씨앗이 스스로 싹트고 자라기를 기다리는 씨알정신과 일치합니다.
정일우: 저는 미국농부출신이에요.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다 농부였습니다. 그래서 농장생활하면서 그렇게 살았어요. 따로따로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사람들과 서로서로 도와주면서 살아온 거죠.
박재순: 그게 큰 차이 같아요. 이를테면 쏠 알렌스키의 주민조직이론이 전략적으로나 운동적으로 당장에 큰 효과를 가져 오고, 일시 성공을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폐해도 많이 있거든요. 신부님이나 제정구 선생님은 공동체적인 삶으로 접근하셨으니까 오히려 참 좋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빈민들과 더불어 사시다가도 말년에는 농촌에 들어가 사셨는데 농촌에서 특별히 더 느끼시거나, 배우신 건 없었습니까?
정일우: 배운 것보다도 원래 미국농촌 출신이니까, 한국 농촌에 가서 내 고향 같은 곳에 있다는 것을 느꼈죠. 그 농촌사람들이 더불어 삽니다. 서로 바쁠 때 서로서로 일도 해주고 그럽니다.
박재순: 미국농촌에서도 그런가요?
정일우: 옛날엔 그랬었지만 요새는 안 그래요. 어렸을 때 그렇게 했죠.
박재순: 신부님의 미국농촌생활이 한국에 와서 가장 고통스러운 빈민의 삶을 사는 원동력이 되었네요. 미국 농촌의 삶과 예수의 가난 정신이 있어서 제정구 선생도 만나고 한국의 가장 고통스러운 빈민현장으로 들어가서 평생을 사셨네요.
정일우: 원래 서강대학교 가르치다가 공동체생활 다시 하고 싶어서 청계천 들어갔죠.
박재순: 1970년대 초의 청계천 판자촌은 보통사람이 들어가서 살 수 없는 곳이었지요. 미국에서 어려움 모르는 중산층 생활을 하고, 또 대학공부도 한 지식인인 신부님으로서 한국사회의 밑바닥에 들어가서 살려면, 자기를 완전히 버리기 전에는 어려운 일인데...
정일우: 하루 공동체를 맛보고 싶어서 들어간 거죠.
박재순: 하루 공동체 맛보려 들어갔다가 눌러 사셨던 거네요. 그 가난한 사람들이 지식인들이나 잘사는 사람들보다 더 좋던가요?
정일우: 네. 왜냐면 가면이 없죠.
박재순: 있는 그대로?
정일우: 네.
박재순: 신부님한테 가난한 사람들이 서운하게 한 것도 많잖아요? 섭섭한 것이 많을 텐데?
정일우: 별로 없어요.
박재순: 그렇게 빈민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헌신하고 희생했는데 몽둥이 들고 때려죽이겠다고 쫓아오면 서운하잖아요?
정일우: 네.
박재순: 배신한 거잖아요, 빈민들이?
정일우: 괜찮아요.
박재순: 어떤 점 때문에 괜찮아요?
정일우: 서로 통하니까.
박재순: 어떤 점이 통하는거죠?
정일우: 정이.
박재순: 그렇게 서운하게 하고 욕하고 싸우고 그래도 속에는 정이 있네요.
정일우: 정을 늘어나게 하는 것이 사는 것이죠.
박재순: 삶의 핵심은 정이네요?
정일우: 네.
박재순: 그러나 정이라고 하는 것도 변덕이 있을 수 있거든요. 정이 끝까지 가려면, 정을 끝까지 유지하는 비결이 있을까요?
정일우: 통하고 싶은 것,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
박재순: 한국인의 심성의 특징이 통하는 거래요. 중국 사람들은 도를 찾고 진리를 찾고 일본사람들은 성실하고 한국사람들은 통하는 것을 좋아 한 대요. 통하고 싶어서 삐삐 나오면 모두 삐삐 차고 다니고, 핸드폰 나오면 핸드폰 다 가져야하는 게 한국사람의 특징이래요. 신앙의 핵심도 통하는 거겠죠. 예수님과 통하고 하나님과 통하는 게 신앙이 아닐까요? 예수님과 통하면 가난한 사람들하고도 통하게 되겠지요.
저는 신부님 책을 읽고 신부님은 생각과 실천이 맑고 투명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 제자들은 신부님 별명이 ‘능구’라고 하더라고요. 능구렁이는 모호하거나 음흉한 것을 나타내는데 신부님의 맑고 투명한 이미지와 능구렁이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왜 ‘능구’라는 별명이 붙으셨어요?
정일우: 능구렁이가 집안으로 들어갈 때도 소리 안 나게 슬그머니 담장을 넘어가고, 나갈 때도 담장을 슬그머니 넘어가잖아요? 사람 맘으로 들어갈 때도 슬그머니 들어가고 나올 때도 슬그머니 나와야지요.
박재순: 능구렁이 같은 데가 있어야 삶 속에서 정이 늘어나겠군요.
말씀을 길게 나누기 어려운 건강상태이신데 긴 시간 귀한 말씀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