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악(張景岳)에 대하여}
장경악(張景岳: 1563년~1640년)은 명(明)나라 때의 명의(名醫)
그 이름(:名)은 개빈(介賓) 그 자(字)는 경악(景岳) 또는 회경(會卿) 그 호(號)는 통일자(通一子)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지은 조선(朝鮮)의 허준(許浚)(1539~1615년)보다는 20~30년 정도의 후대(後代) 사람
그의 아버지 장수봉(張壽峯)은 의술(醫術)의 이치(理致)에 정통(精通)한 사람
경악(景岳)은 (절강성) 회계(會稽)에서 살다가 14살 때 부친(父親)을 따라 명(明)나라의 수도 북경(北京)에 올라갔으며, 경전(經典)과 사서(史書)에 해박한 명의(名醫) 김몽석(金夢石)을 의학의 스승으로 모시게 됨
그러나 조상(祖上)들이 군대(軍隊)에서의 업적(業績)으로 출세(出世)하였기 때문에, 그도 그 위업(偉業)을 물려받기 위하여 군대(軍隊)에 들어가 북방(北方)을 평정(平定)하는데 힘씀
조선(朝鮮)의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하게 되자, 조선(朝鮮)을 구원(救援)하기 위해 명(明)나라 군대(軍隊)의 일원(一員)으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조선(朝鮮)에 진입(進入), 그 때 장경악(張景岳)의 나이는 29세
그는 참군(參軍)으로 복무(服務), 임진년(壬辰年)에서 정유년(丁酉年)의 7년간의 전투(戰鬪)를 치른 뒤에야 비로소 명(明) 나라로 되돌아감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음에도 불구(不拘)하고 그는 높은 관직(官職)을 수여(授與)받기는 커녕 오히려 모함(謀陷)을 받음
더구나 장경악(張景岳)은 귀국길에서 요동(遼東) 백성(百姓)들의 비참한 처지를 보는 한편, 명(明)나라 조정(朝廷) 내부의 격렬한 당쟁(黨爭)을 보고서는 어릴 적부터 나라를 위해 큰 공(功)을 세우겠다는 꿈은 깨어져버리게 됨
게다가 가업(家業)이 가난하여 생계(生計)가 어렵게 되었으므로 결국 그는 36세에 은퇴(隱退)하여 낙향(落鄕)
다행히도 그는 병법(兵法)과 의학(醫學)에 대한 관심은 놓치지 않음
군대(軍隊)에서도 의술(醫術)을 배웠고 전쟁터에서도 의술(醫術)을 단련한 덕분에 곧장 의사(醫師)의 길을 걷기 시작
그는 여러 의서(醫書)를 연구하고 널리 고명(高明)한 의사(醫師)들에게 자문을 구한 끝에 점차 고유한 의학(醫學) 이론(理論)을 정립
그가 처음에는 주로 주진형(朱震亨)의 '양(陽)은 늘 남아돌고 음(陰)은 늘 모자란다.' 는 이론(理論)을 믿고 따랐는데, 중년(中年) 이후에는 내경([內經])의 '음평양비(陰平陽秘), 정신내치(精神乃治)' 등 이치(理致)를 근거로 하여 주진형(朱震亨)의 이론에 대하여 크게 반대
이후 '양(陽)은 남아돌지 않는다.', '진음(眞陰)은 모자란다.', '인체는 허(虛)가 많고 실(實)은 적다.'는 등의 이론(理論)을 제기하고 진음(眞陰)과 원양(元陽)을 보익(補益)하고 한량(寒涼)과 공벌(攻伐)의 방약(方藥)을 주의하여 쓸 것을 주장
이로 임상(臨床)에서 온보(溫補)하는 방제(方劑)를 늘 사용하였으므로 온보파(溫補派)라고 일컬어짐
이러한 학설(學說)과 그의 저술(著述)은 후대(後代)의 의학(醫學)에 대하여 커다란 영향을 끼침
그는 또한 소문([素問]) 영추([靈樞])에 대하여 아주 많은 연구(硏究)를 하였고 잇따라 30년 동안을 공부하여 유경([類經])을 엮음
이는 종류(種類)대로 그 문(門)을 나누고 꼼꼼하게 그 아래에 주석(注釋)을 달았으니, 조리(條理)가 있었고 찾아서 배우기도 또한 매우 쉬웠음
이어서 유경(類經)을 보충(補充)하기 위하여 유경도익([類經圖翼]) 유경부익([類經附翼]) 질의록([質疑錄]) 등도 엮었음
늘그막에 지난날의 임상(臨床) 경험(經驗)을 결합(結合)하여 종합(綜合) 의서(醫書)인 경악전서([景岳全書])를 엮어 만들었음
병법(兵法)과 의학(醫學)을 절묘하게 결합(結合)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의서(醫書)라 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