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을 그리며
김성문
김해 지역에 세운 가야를 『삼국유사』에는 대가락 또는 가야국, 『삼국사기』에는 가야국이라 했다. 나중에 금관가야라 불렀다. 금관가야의 시조는 수로왕이다. 수로왕은 건국 후 궁궐을 새로 짓고 나라를 다스렸다.
가야 건국 당시에 김해 지역에는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임금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아홉 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추장으로서 백성들을 통솔했다. 백성들은 7만 5천 명이었다. 대부분은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으로 살았다.
수로왕은 서기 42년 음력 3월 15일 즉위 후에 임시로 궁궐을 세우고 나라를 다스렸다. 궁궐은 꾸미지 않았고,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도 않았다. 궁궐에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90cm였다. 즉위 2년째, 서기 43년 음력 1월에 수로왕은 도읍을 정하려 했다. 임시 궁궐 남쪽에 있는 묵은 밭을 새로 경작하는 곳으로 나가서 사방으로 바라보았다.
수로왕은 “이 땅은 협소하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십육 나한이 살만한 곳”이라 했다. 나한(羅漢)은 일체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어 중생의 공양에 응할 만한 자격을 지닌 불교의 성자이다. 현재 우리나라 사찰에 있는 십육 나한의 모습을 보면, 우리 민족의 소박한 심성을 닮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넘어 파격적인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수로왕은 십육 나한이 살만한 곳을 개척해서 좋은 도읍으로 만들고자 했다.
도읍의 성(城) 둘레는 1,500보(步)로 하고, 궁궐과 전당 및 여러 관청의 청사, 무기고, 곡식 창고 지을 터를 마련한 후 임시 궁궐로 돌아왔다. 그 후 장정들과 연장을 잘 쓸 줄 아는 사람을 모았다. 서기 43년 음력 1월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음력 3월 10일에 공사를 마쳤다. 궁궐과 다른 집들은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한 음력 10월에 시작하여 서기 44년 음력 2월에 완공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궐로 짐을 옮기고, 여러 가지 일을 부지런히 보살폈다.
가야국 초기의 왕궁과 수로왕비의 중궁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곳은 현재 연화사 자리이다. 연화사는 김해시 구지로180번길 23-1에 있고, 입구에 ‘가락고도궁허’비만 세워져 있다. 그 당시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새로 마련한 궁궐은 김해시 가락로63번길 51, 봉황동으로 전해오고 있다. 왕궁터였음을 짐작할 만한 자취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까움이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조에 보면, 수로왕이 새 궁궐에서 일을 보던 중, 갑자기 탈해가 바다를 항해해 가야국에 왔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하니 수로왕은 “하늘이 나를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겨 왕위와 우리 백성들을 너에게 맡길 수 없다.”라고 하자.
탈해는 술법으로 겨루자고 했다. 수로왕이 좋다고 하자, 잠깐 사이에 탈해가 매로 변하니 수로왕은 독수리가 됐다. 또 탈해가 참새로 변하니 수로왕은 새매로 변했다. 그 변하는 시간은 잠깐 사이였다. 그 당시는 둔갑술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말로 사람이 동물로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의 대결은 당시 철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수로왕의 능력이 우수함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한다.
두 사람은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탈해는 엎드려 항복했다. 탈해가 죽음을 면한 것은 수로왕의 어진 마음과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정신이라 했다. 탈해는 곧 수로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교외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의 선박들이 항해해 오던 해로로 떠나려 했다. 수로왕은 혹시나 가야에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했다. 수군을 보내 쫓게 하니 탈해는 신라 계림의 땅 안으로 달아났다.
탈해에 대한 다른 기록은 다파나국의 함달파(含達婆)왕이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왕비로 맞아 7년 만에 큰 알을 하나 낳았다. 다파나국은 일본 규슈로 추정하고 완하국, 용성국, 정명국, 화하국이라고도 한다. 신하들은 사람이 알을 낳을 수 없다고 하여 큰 궤를 만들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가야국 바닷가에 배가 닿았다. 수로왕은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북을 크게 치면서 맞아들여 머물게 하려 했다. 배는 날 듯이 달아나 계림의 동쪽 아진포까지 갔다.
아진포는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천 하구로 추정한다. 아진 포구에 혁거세 거서간의 고기잡이 노파인 아진의선이라는 사람이 배를 끌어당겨 보니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 있었다. 배 안에는 큰 궤 하나가 있어서 열어보니 단정한 모습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가 탈해이다. 그는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따라왔으므로 까치 작(鵲) 자에서 새 조(鳥) 자를 떼고 석(昔) 자로 성을 삼았다. 궤를 풀고 알에서 나왔다 하여 이름은 '탈해(脫解)'라고 하였다. 나중에 신라 제4대 임금이 되었다.
수로왕의 정치는 백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린 민본주의 정신이 강하다. 농한기를 이용한 궁궐과 관청, 무기 창고, 곡식 창고 등을 짓게 한 것으로 보아 백성들의 삶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신을 가졌다. 백성을 수호하는 능력도 갖췄다. 탈해가 나타나 왕위 쟁탈전에서 탈해를 죽일 수 있었지만, 어진 마음과 인간 생명의 존엄함을 알고 살려 보냈다. 백성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정신이다. 작금의 우리나라 정치 상황을 보면 수로왕이 새삼 그리워진다.
첫댓글
찬란했던 가야 역사가
제대로 복원되기를 기원합니다.
일본 식민 사학자가 정신차리고
바른 우리의 역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