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1일 내가 소속된 역사클럽에서 백제의 古都 公洲를 탐방했다.
눈부신 오월의 공주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9년 전 에 부여를 탐방한 적이 있어, 하남위례성에서 遷都한
두 곳을 탐방하게 돼 감회가 새로웠다.
공주에 도착해서 공산성을 도보로 1시간 가량 돌아봤다. 공산성에 올라 공주 시내를 내려다 보니 한 나
라의 도읍이 되기엔 좁아 보였다. 아마도 그래서 도읍지를 공주에서 63년간 머물다가 부여로 옮긴 사유
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엔 무령왕릉을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탐방을 이어갔다. 고대 왕릉 중 실명이 확인된 왕릉은
무령왕릉이 유일하다고 했다. 1971년 발굴되었는데 역사적인 발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령왕릉
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백제에 대한 역사 기록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있는 기록 정도만 존재할 뿐이었는데, 삼국사기는 김
부식이 신라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라 편향성이 심하고, 일본서기는 그동안 학자들은 그다지 신뢰하지
않던 역사책인데, 무령왕릉 발굴을 계기로 상당 부분이 사실로 밝혀지기도 했다.
삼국의 건국 등을 자료가 별로없으니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토대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백제는 BC 18년에 건국되어 AD 660년 멸망 때까지 676년 간 존속했고, 고구려는 BC 37년에 건
국되어 AD 668년 멸망 때까지 703년 간 존속했고, 신라는 BC 57년에 건국되어 AD 936년 멸망할 때까
지 991년 간 존속한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의 천도에 대하여 살펴 보자.
우선 고구려는 장수왕 때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다. 신라는 금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통일
신라가 멸망 때까지 한 곳에 머물렀고,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 때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475년에 웅진(공
주)으로 천도했고 웅진에서 63년간 머문 후 538년 성왕 때 사비(부여)로 옮겨 660년 멸망 때까지 수도로
있었다.
삼국 중 수도를 옮긴 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인데, 옮긴 사정이 상이하다.
고구려는 전성기인 장수왕 때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평양은 경제적
으로 풍요로웠고 귀족 세력을 어느 정도 약화시키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백제는 고구려의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개로왕이 죽은 후, 문주왕이 웅진(공주)로 천도했다(475년).
538년 성왕은 사비(부여)로 천도했다. 성왕은 나제동맹을 배경으로 고구려에 빼앗긴 고토를 되찾기 위
한 계획된 천도였다. 결국 이루지 못한 꿈이 되고 말았지만....
멸망한 나라의 역사와 유적은 승리자에 의하여 사라지거나 왜곡된 형태로 남겨지게 마련이다. 전쟁에
패배한 집단은 떼죽음을 당하거나 멀고 험난한 유랑의 길을 떠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백제는 660년 나당 연합국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재위 19년 동안 신라의 북부
33개 성을 빼앗고 신라의 전략 요충지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등 호전적이고 출중한 인물이었지만, 이후
역사에는 3천 궁녀들과 방탕한 생활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무능한 군주로 그려지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의자왕은 효성과 우애가 지극해 '해동 증자'로 불렸다고 한다.
의자왕의 큰 실수라면 외교 실책인데 백제와 외교관계를 단절한 당 태종이 신라와 연합으로 백제를 멸
망에 이르게 한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둘러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4 강대국과의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 될 것이다.
의자왕이 3천 궁녀를 거느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삼천궁녀 설은 양귀비에 현혹되어 국정에서 손
을 떼다시피한 당나라 제 6 대 황제 현종에 빗대어 말하다 굳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나아가 그러한 정
서를 조장한 것이 白居易가 지은 '長恨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장한가에,
‘후궁에 미녀 삼천이 있지만 삼천의 총애가 한 사람에 머무니....’
그 한 사람은 楊貴妃이다.
계백장군도 능멸을 당하는 삶보다는 죽음을 택했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적의 노비가 되어 사는 것은
죽음과 같지 못하다며 처자를 모두 죽였다. 그는 전사하기 전까지 김유신과의 전투에서 4전 4승을 거
두기까지 했다.
궁녀들이 몸을 던진 곳을 낙화암이라고 부른다. 낙화암에 가보면 3천 명이 들어서기에는 너무나 비좁
다.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을 방탕한 임금으로 폄하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고란사는 낙화암과 좀 떨어진 낮은 곳에 있는 사찰이다. 따라서 백제를 얘기할 때 백마강, 삼천궁녀,
낙화암, 고란사는 한 묶음으로 등장하기 일쑤다. 어느 것 하나 곱게 봐주고 있지 않다. 승자가 패자를
왜곡하고 있다고 본다.
백제와 관계있는 노래는 '백마강'과 '꿈꾸는 백마강'이 있는데, 두 곡 모두 서러움과 이루지 못한 백제
꿈을 아쉬워하고 있다.
두 곡 중 ‘백마강’을 살펴보자.
백마강/작사 손로원, 작곡 한복남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에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꿈이 그립구나
아아아 달빛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한 편 신라와 관계있는 노래는 '신라의 달밤'이 있는데, 승리한 국가의 찬가로 희망에 차있다. 신라는
天壽를 다하고 행복하게 세상을 하직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신라의 달밤/작사 유호, 작곡 박시춘
아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옥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두 노래에서 보듯이 다 같이 달밤을 노래하지만, 백제의 달밤은 애닲은 곡조이고, 신라의 달밤은 옛
날을 그리워하는 경쾌한 노래이다.
두 노래에서 보듯 승리한 국가와 패배한 국가의 노래는 그 분위기가 극명하게 엇갈림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실패한 국가는 승리한 국가에 의해 폄하되고 왜곡됨을 이 노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패배한 국가 백제에 무슨 백제꿈이 소용있을 것인가. 그 꿈은 이루지 못할 뿐인 것을....
첫댓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여러 중요점과 흥망성쇠를 간단한 글로 멋지게 표현한 장주간님께 고마운 말씀드립니다.
마눌과 같이 지내다보니 바쁘기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자주 카페에 들어오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고마우신 댓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