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靑瓦臺)
경복궁 후원, 북악산 바로 밑에 자리잡은 청와대
청와대의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청와대로1
북악산을 뒤에 두고 있으며
시청과 종로·을지로 등 사무실이 밀집한 도심지역의 북쪽에 위치
일제 강점기인 1911년 12월 20일에
청와대의 주소가 ‘광화문 1번지’로 처음 정해짐
광복 다음 해인 1946년 1월 1일에
한국식 주소인 ‘세종로 1번지’가 됨
2014년에 도로명 주소 체계로 바뀌면서 지금의 주소가 됨
출처 : 역사 | 청와대, 국민 품으로 (opencheongwadae.kr)
경복궁(景福宮) 사적 제117호(북궐 : 北闕)
조선의 정궁으로 정연한 배치체계를 갖춘 궁궐로 북궐이라고도 한다.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면서 건설한 것으로 〈시경〉의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의미를 따 이름을 지었다.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임금이 거주한 기간은 길지 않다.
궁궐 내부는 정문인 광화문으로부터 홍례문과 근정문과 향오문을 일직선 상에 배치했다.
이 사이 공간은 정사를 보고 의식을 행하는 업무공간이다.
향오문 뒤에는 제반시설이 자리한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여러 차례 화재 피해를 겪어 이에 대한 복구가 거듭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원래 건물을 해체하는 등 본래 모습을 잃었으나 1996년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면서 일부가 복구되었다.
현재 다양한 국보·보물급 건축물과 석조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경복궁 둘러보기
사적 제117호 경복궁은 왕이 공식적인 국가 업무를 처리하던 조선왕조의 중심 왕궁이다.
태조3년(1394) 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왕궁을 짓기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완성하였다.
왕과 왕비, 왕족이 생활하는 거주 구역인 침전 지역의 건물은 각각, 강녕,연생,경성으로 불렀고, 왕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편전은 사정이라 하였으며, 공식적인 국가 행사가 이루어지는 정전은 근정이라 이름 지었다.
경복궁이 왕궁으로 사용된 실제 기간은 조선왕조의 네 번째 임금인 세종때부터 임진왜란 전까지이다.
건국 초기에는 개성으로 다시 수도를 옮기기도 하고 창덕궁을새로 지어 왕궁으로 쓰기도 하여 경복궁이 왕궁으로서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린 이후 273년간 왕궁으로 사용되지 못하였다.
경복궁은 고종 4년(1865)부터 2년 동안 다시 지어졌다. 근정전, 사정전,자경전,강녕전, 교태전, 함원전, 흥복전, 만화당, 수정전, 연길당, 함화당, 집경당 등이 이때 다시 지어졌다.
그러나 고종15년(1876)에 큰 화재가 나서 강녕전, 교태전,자경전 등의 건물들이 불에탔다.
이들 침전은 고종25년(1888)에 다시 지었졌다.
경복궁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간악한 침략정책에 의하여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일제는 1915년에 조선물산 공진회를 경복궁안에서 개최하면서 기존의 건물을 헐고그 자리에 18개소의 상품진열관을 설치했다.
1917년에는 창덕궁에 화재가 나서 침전들이 모두 불타 버리자 1920년에 이를 복구한다는 구실로 경복궁의 강녕전, 교태전, 연길당,함원전, 경성전 등을 헐어서 창덕궁 복구 공사의 재목으로 이용하였다.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까지 경복궁의 근정전을 막아서는 자리에 세워져 경복궁의 본 모습은 완전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경복궁의 본격적인 복원은 최근에 들어서야 시작되었다.
1990년부터 추진된 복원 공사로 침전 지역에는 강녕전, 교태전 등이 다시 세워졌고, 왕세자의 생활 공간인 동궁 지역에는 자선당, 비현각등이 다시 세워졌으며, 1996년에 철거된 조선총독부 청사 자리에는 홍례문,영제교 등이 다시 세워졌다.
| | | |
광화문 | 궁내부 | 회원전 | 경회루 |
| | | |
궁내부 | 교태전 | 강녕전 | 경회루 |
| | | |
궁내부 | 흥례문 측면 | 경복궁 뒤편 | 민속박물관 |
| | | |
민속박물관 앞뜰 | 민속박물관 | 민속박물관 앞뜰 | 민속박물관 |
| | | |
근정전 | 자경전 | 건춘문 | 경복궁 광장 |
근정전 (勤政殿) (국보 제223호)
경복궁의 수조정전(受朝正殿)이며 문무백관의 조하(朝賀)를 비롯한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법전(法殿)으로 태조 4년 (1395)에 창건 하였다. 그후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고종4년 (1867)에 재건하였다. 근정전은 상 하월대위에 2층으로 지은 거대한 건물이다. 건물 내부는 상하층의 구분을 없이하여 넓고 높다. 중앙에 임금님이 좌정하시던 어좌가 있다. 실내에 가득 의장기물이 장치되어 있었던 것이나 지금은 없다.
경회루 (慶會樓) (국보 제224호)
경회루는 중요한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경복궁 창건시 태조가 지은 후 태종, 세종, 성종을 거치면서 확대 개수가 이루어졌다. 네모 반 듯한 섬을 장대석으로 호안하여 경회루를 세우고 돌다리 셋을 가설하여 뭍과 연격시켰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고종 4년 (1867)에 중건하였다. 다락집 건물로는 경회루가 국내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
강녕전 (康寧殿)
경복궁은 왕이 정무를 보는 치조, 왕과 왕비의 침전인 연조, 그리고 신하들이 집무하는 관청인 외조로 구성되는데 강년전은 연조의 으뜸 전각으로서 왕의 침전이다. 강녕전 뒤에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이 있는데 이 건물도 강녕전과같이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었던 것을 1994년에 복원하였다.
자경전 (慈慶殿)(보물 제809호)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조대비를 위하여지은 건물이다. 준공후 불이 나서 다시 지어 고종25년(1888)에 완성한 것이 지금 남아있는 일곽이다. 후원에는 보물제810호인 십장생무늬가 새겨진 벽과 위에 연가를 설치한 굴뚝이 있고 서편에는 여러 가지 무늬를 새긴 꽃담이 남아있다.
향원정 (香遠亭)
1867년에 고종이 건청궁을 축조할 때 그 남쪽에 못을 파 중앙에 섬을 만들고 육각형의 2층건물인 향원정을 지었다.향원정은 보통2층이라 하지만 누마루 밑의구조까지 치면 3층이 되는셈이다. 구름다리인 취향교는 1953년에 개조되기 전까지는 향원정의 북쪽에 가설되어있었는데 6.25때 부서진 것을 복구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새로 가설하였다.
동궁 (東宮)
북궐도(北闕圖)에 의하면 동궁은 세자가 백관으로부터 조회를 받던 정당인 계조당,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로 쓰인 내당인 자선당 비현각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강학을 받던 춘방, 세자를 호위하는 군사가 머물던 계방 등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일제에 의해 모두 파괴된 후 1999년에 자서당과 비현각이 복원되었다.
출처 : 인사동 변천사 (insadong.info)
인사동
변천사
지금의 인사동 거리는 종로 2가에서 인사동을 지나 관훈동 북쪽의 안국동 사거리까지를 말한다. 그러나 예전의 인사동길은 종로에서 인사동 네거리 즉 태화관길과 만나는 곳까지였다. 인사동의 명칭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에서 가운데 글자인(仁)과 사(寺)를 따서 부른 것이라 한다.
인사동 축제마당
1987년부터 시작된 인사전통문화축제는 충분한 볼거리와 흥미 거리를 제공하여 전통문화 명소로 인사동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인사 전통문화축제는 인사동 지역의 번영을 기원하는 장승제로 시작되며 행사중에는 관람객들이 직접 참여 할 수 있는 이벤트도 많이 마련되어 있다.
인사동 문화장터
민족 문화라는 것은 그 민족의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에 활용 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과거의 것을 무조건 추종하거나 배타적인 태도로 대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문화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현대 생활에 필요하지 않는 죽어있는 옛 문화도 진정한 의미의 문화라고 볼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민족 문화는 옛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변화 발전되어가는 것이다. 그런 살아있는 민족 문화는 대중의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 발전되어 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사동은 살아 있는 전통문화의 거리라고 알려져있다. 특히 일요일마 다 형성되는 전통문화 장터는 그 현장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갖가지 전통문화 행사와 함께 전통문화 예술품들을 사고파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문화 장터에서 거래되는 품목들은 다양하다. 각종 골동품, 그림, 소장품, 수공예품, 먹거리, 그리고 곱게 채색된 부채, 물레, 삼태기, 절구, 짚신, 고무신 등 각종 우리 전래 생활용품에서부터 도자기, 보석류, 장신구가 지나는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옛 생활 모습을 어린 학생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 문화의 뿌리를 알게하는 현장학습의 장소로서의 역할도 허고 있다.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직접 만들어보게 하거나 잔칫날 떡을 치는 흥겨움을 직접 느끼게 해주는것,옛날 사람들이 사용한 등잔불과 짚신, 곰방대, 갓 등 우리 선조들이 사용한 생활도구들을 직접 대하고 만져봄으로써 한국인다운 한국인으로 만드는 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인사동 문화 장터는 우리민족의 전통을 지켜가기 위해 시민들의자발적인 참여 속에 형성되고 발전하고 있는 현장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런 특정한 구역을 형성하기도 어렵지만 하루 10만명에 달하는 동원 인력을 끌어모으기도 힘들 것이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살아있는 인사동 문화 거리는 우리시대가 만든 우리의 소중한 문화이다.
출처 : 인사동 변천사 (insadong.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