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중사부(中士夫)를 위한 길의 단계
4.1.1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에 대한 사유(思惟)
죽음을 기억하고 죽은 다음에 악취(惡趣)에 떨어지는 도리(道理)를 생각하면, 현세(現世)에서 내세(來世)의 선취(善趣)를 바라는 마음을 일깨울 수 있다. 공동(共同)의 귀의(歸依)와 선악(善惡)의 업과(業果)에 대한 확실(確實)한 이해(理解)로 악(惡)을 끊고, 선(善)을 닦는데 힘쓴다면 선취(善趣)의 지위(地位)를 얻을 수 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하사부(下士夫)와 똑같은 의요(意樂)을 일으키고, 중사부(中士夫)에서도 모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염오(厭惡)하는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이러한 인연(因緣)에 의지하여 최상의 보리심을 일깨우는 상사부(上士夫)로 들어가기 위한 중사부(中士夫)의 의요(意樂)를 닦아야 한다.
이렇게 인천(人天)의 지위(地位)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행고(行苦)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안락(安樂)에 안주(安住)한다는 것은 진리(眞理)에 어긋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천법계(天法界)와 인법계(人法界)는 절대(絶對)의 안락처(安樂處)가 될 수 없고, 결국(結局)에는 다시 악취(惡趣)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선취(善趣) 또한 악취(惡趣)와 같이 극히 염오심(厭惡心)을 내야 한다.
범부(凡夫)가 생사(生死) 윤회(輪廻)의 바퀴에서 잠깐의 휴식을 만나 안락(安樂)에 안주(安住)하게 된다면, 그는 분명히 다른 중생들과 같이 다시 갖가지의 악취(惡趣)에서 표류(漂流)하게 될 것이다.
모든 현자(賢者)들은 선취(善趣) 또한 지옥과 같다는 두려움으로 어떤 생사윤회(生死輪廻)일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육도윤회(六道輪回) 가운데서 안락을 버리고, 육도윤회(六道輪廻)의 고(苦)에 염오심(厭惡心)을 일으킨다면, 어리석은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게 된다.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윤회계(輪廻界) 내에서 안락에 집착하고, 갖가지 즐거움의 허망(虛妄)에 집착한다면 윤회계(輪廻界)를 벗어날 수 없다. 만일 수행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음과 탐착(貪着)이 늘어나 삼유(三有)의 수레바퀴에서 구르게 되므로 삼유(三有)의 과환(過患)을 수행하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
중사부(中士夫)를 위한 수행 단계에는 네 가지가 있다. 의요(意樂)를 바르게 닦는 것, 그것을 생기게 하는 자량(資糧), 이에 대한 삿된 분별(分別)을 없애는 것, 해탈(解脫)로 가는 길에 대한 자성(自性)을 결정하는 것이다.
의요(意樂)를 바르게 닦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해탈(解脫)을 추구하는 마음을 명백히 지니는 것, 그것을 일으키는 방편(方便)이다. 해탈(解脫)이란 육도윤회(六道輪廻)의 속박(束縛)에서 벗어남이다. 업(業)과 번뇌(煩惱)는 생사(生死)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업(業)과 번뇌(煩惱)의 원인(原因)이 되는 계(界)에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가 있고, 취(趣)로 분별하여 보면, 천취(天趣) 인취(人聚) 등의 육취(六聚)가 있다.
다시 태어나는 방식으로 분류한다면, 태란습화(胎卵濕化)의 사처(四處)가 있다. 또한 온(蘊)의 입태상속(入胎相續)이 속박(束縛)의 자성(自性)이요,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解脫)이요, 이러한 자유(自由)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해탈심(解脫心)이다.
이러한 혹업(惑業)을 일으키는 행위(行爲)에서는 적정을 얻을 수 없으므로, 생류(生類)가 죽은 다음 제이시(第二時, 소승법을 주로 설한 때로 아함(阿含)의 도리가 설해진 때를 말한다)에 안주(安住)하지 못함은 대응(對應)을 수행하는 연(緣)으로 대치(對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계속하여 정진(精進)하지 않음은 해탈(解脫)의 허물이 된다. 그런 까닭으로 미래(未來)로 입태상속(入胎相續)하게 될 때는, 대응(對應)을 일으키는 강력한 힘의 작용(作用)으로 입태상속(入胎相續)을 멈출 수 있게 된다.
대응(對應)을 일으키는 방편(方便)의 예를 들면, 갈증(渴症)의 고통이 일어나면, 갈증을 해소하려는 대치(對治)에 대한 방편(方便)에 달린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취온(趣蘊)의 고통을 제멸(除滅)하기 위한 해탈(解脫)을 얻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은 취온(趣蘊)의 고통에 대한 본성(本性)을 모든 과실(過失)로 보는 데 달려 있다.
만일 삼유(三有)의 과환(過患)을 수행(修行)하면서, 이것을 버리고자 하는 마음을 일깨우지 못한다면, 그 고통을 없애고자 노력하는 마음이 충분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한 염리심(厭離心)이 없다면, 어떻게 적멸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해탈(解脫)을 추구하는 방편(方便)은 두 가지로 나뉜다. 고집(苦集)의 방식으로 사유하는 방법과 십이연기(十二緣起)로 사유하는 방법이다. 고집(苦集)의 방식으로 사유하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다. 고제(苦諦)로 생사윤회의 과환(過患)을 사유하는 방법과 집제(集諦)로 생사윤회의 단계(段階)를 사유하는 방법이다.
고제(苦諦)를 사유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고제(苦諦)가 사제(四諦)의 처음이라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니, 먼저 고제(苦諦)를 바르게 닦는 것이다.
집제(集諦)는 인(因)이 되는 것이고, 고제(苦諦)는 그 과(果)가 되므로, 집제(集諦)가 먼저이고, 고제(苦諦)가 뒤에 있어야 하겠지만, 어찌하여 세존께서 이 뜻의 순서(順序)를 따르지 않는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왜 고성제(苦聖諦)를 먼저 말씀하시고, 다음에 집성제(集聖諦)를 말씀하셨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인과(因果)의 선후(先後) 단계를 바꾸어 말씀하신 이유(理由)는 수행의 중요한 요점(要點)이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처음부터 윤회(輪廻)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이 없고, 해탈(解脫)을 바라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고, 스스로의 덕성(德性)의 근본(根本)을 끊어버렸으니, 어찌 사람들을 해탈(解脫)로 이끌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무명(無明)에 덮이고 가리워서, 윤회(輪廻)의 고통(苦痛)에 대한 본질(本質)을 정확(正確)하게 인식(認識)하지 못하고, 오히려 안락(安樂)으로 잘못 오해(誤解)하여 생각이 전도(轉倒)되었기 때문이다.
윤회(輪廻)의 고통(苦痛)의 바다는 끝이 없지만, 어찌하여 어리석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인가. 결국(結局)에 윤회란 원래(原來)부터 안락(安樂)이 아닌 고품(苦品)이므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먼저 수 많은 고상(苦相)을 설(設)하고, 염리심(厭離心)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까닭으로 먼저 고제(苦諦)를 배열하신 것이다.
중생들이 고(苦)의 본질(本質)을 먼저 알아야만 고해(苦海)에서 벗어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무엇보다 고(苦)를 반드시 제멸(除滅)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 차리게 된다.
여기서 먼저 고(苦)의 인(因)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고(苦)를 소멸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인(因)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이로부터 비로소 집제(集諦)의 본질(本質)에 대하여 바로 알고자 하게 된다. 그런 까닭으로 고제(苦諦)를 설한 뒤에 집제(集諦)를 설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