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상사부(上士夫)를 위한 수행 단계
5.1 상사부(上士夫)를 위한 길의 단계
5.1.1 대승문(大乘門)으로 들어가는 보리심(菩提心)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과환(過患)을 수행하면서 일체(一體)의 생사윤회(生死輪廻)가 타오르는 불구덩이와 같음을 보았다. 번뇌(煩惱)와 고(苦)를 적멸하는 해탈(慧脫)을 얻고자 삼학도(三學道)를 배우면, 윤회(輪廻)에서 벗어나는 해탈(慧脫)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해탈(慧脫)의 공덕(功德)은 선취(善趣)에서 태어나는 복덕(福德)처럼 다시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과실(過失)을 끊고 공덕(功德)을 얻었을 지라도,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두루 원만(圓滿)하고자 한다면, 힘이 없는 두 가지의 승(乘)을 영원히 버리고 대승문(大乘門)으로 들어가야 한다. 능인(能仁, 석가모니 부처님) 불승(佛乘)의 자비(慈悲)로운 가르침에 따라 오직 이타(利他)를 자성(自性)으로 하는 대승문(大乘門)에 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모든 지혜로운 이들은 처음부터 구경(究竟)의 대승문(大乘門)에 들어감이 마땅하다.
자신(自身)이 생사고(生死苦)의 고해(苦海)에 빠진 것과 같과 같이 다른 사람들 또한 생사고(生死苦)의 고해(苦海)에 빠진 것과 같이 생각하고 사유(思惟)하여야 한다. 부처의 종성(種性)을 갖춘 이들이 모든 중생들이 취사(取捨)하고 분별(分別)하는 까닭으로 혜안(慧眼)에 눈을 감고, 위험을 벗어나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헤매는 중생을 보고도, 그들을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못한다면 이는 옳지 못한 것이다.
상사부(上士夫)의 안락(安樂)과 위덕(威德), 그리고 재능(才能)은 다른 사람들을 이익되게 하는 무거운 짐을 감당(勘當)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만의 이익을 얻기 위함은 축생(畜生)과 다름이 없다. 위험에 빠진 모든 이들에게 세간(世間)의 이익을 완성하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제자(佛弟子)라면, 어찌하여 마땅히 자비(慈悲)를 일으키지 않을 사람이 있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없애 주기 위하여 정진하지 않을 것인가.
불보살(佛菩薩)의 본래(本來)의 자성(自性)은 타인(他人)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구경(究竟)까지 정진(精進)하는 것이다. 타인(他人)들의 이익을 위하여 노력하는 모든 이들을 사부(師父)라 하고, 지자(智者)라고 한다.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사부의 위덕(威德)이요, 그 안락(安樂)은 사부(師父)의 우월(優越)한 재능(才能)이다.
그러므로 자타(自他)의 모든 이락(利樂)을 내는 근원(根源), 모든 쇠퇴(衰退) 함을 없앨 수 있는 묘약(妙藥), 모든 지혜(智慧)로운 사부(師父)가 다니는 대도(大道)의 견문각지(見聞覺知)로 모든 중생들의 자양분(滋養分)이 되고, 이타행(利他行)과 더불어 부족함이 없는 고도(高度)의 묘한 방편(方便)을 갖춘 대승(大乘)의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찾고자 하는 길을 바르게 찾았다고 생각하고, 갖가지의 문(門)으로 대승(大乘) 공덕(功德)을 관찰(觀察)하고, 큰 공경심을 일으켜 대승(大乘)에 들어가야 한다. 지혜와 청정을 성취하는 최고의 대승(大乘)은 일체(一體) 세간(世間)의 문(門)과 같나니, 빛나는 태양이 일체(一體)를 두루 비치는 것과 같다.
상사부(上士夫)의 수행 단계를 수심(修心)하는 데는 세 가지의 도리(道理)가 있다. 대승문(大乘門)에 들어감은 오직 발심(發心)뿐 임을 아는 도리, 발심(發心)하는 방법에 대한 도리, 발심(發心)한 뒤에 행(行)을 배우는 도리이다.
어떻게 대승문(大乘門)으로 들어가는 것인가. 바라밀승(波羅蜜乘)과 밀주승(密呪乘, 密敎)의 어디로 들어 가더라도, 모든 대승문(大乘門)으로 들어가는 문은 보리심(菩提心)이다.
상속(相續)으로 바로 대승인(大乘人)에 안립(安立)하여야 하나니, 만일 대승인(大乘人)을 떠난다면, 설사 공성(空性)을 통달하는 공덕(功德)이 있다 할지라도, 바로 성문(聲聞)의 지위(地位)에 빠져서 대승(大乘)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는 많은 대승경전(大乘經典)에서 설한 바이며 논리적(論理的)으로도 타당하다.
이와 같이 처음 대승(大乘)으로 들어가는 것은 발심(發心)으로 안립(安立)하는 것이니, 대승자(大乘者)는 발심(發心)이 있고 없음에 따라 그의 진퇴(進退)를 결정짓게 된다.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킨 찰나에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감옥(監獄)에 묶여있던 모든 수인(囚人)들도 선서(善逝)의 아들이라고 불리우게 된다.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킨 뒤로는 부처의 종성(種性)으로 태어남이니, 이 때부터는 부처의 아들이 되었다고 불리울 수 있게 된다. 이는 발심(發心)을 일으키자 마자 부처님의 아들(佛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금강석(金剛石)은 비록 부서졌다고 할지라도, 모든 빼어난 보석들을 압도(壓倒)하는 것과 같다. 금강석은 비록 작게 부서졌다고 할지라도 금강석(金剛石)이라는 명칭을 잃지 않나니, 모든 빈궁(貧窮)을 제거(除去)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대승으로 발심(發心)한 공덕은 모든 성문과 연각의 모든 공덕을 압도하고, 보살의 이름을 잃지 않고, 모든 생사윤회(生死輪廻)라는 빈궁도 제거할 수 있다.
위없는 깨달음(無上大覺)을 얻고자 하면, 그 근본은 더할 나위 없고(無等), 위없는(無上) 보리심(菩提心)을 일깨워야 하나니, 수미산(須彌山)처럼 견고(堅固)하여야 한다.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은 대다라니(大陀羅尼)의 만다라(曼陀羅)가 극히 광대(廣大)하고, 극히 심오(深奧)하여 측량(測量)할 수 없는, 제일가는 비밀장(秘密藏)이니, 모든 죄악(罪惡)의 유정(有情)에게 보여서는 안되는 매우 희유(稀有)한 보배이다.
만약 이것이 지금까지 아직까지도 미처 들어보지 못한 미증유(未曾有)한 일이라면, 이를 어떤 유정(有情)에게 어떻게 설하여야 할 것인가. 만일 모두가 보리심(菩提心)의 수행에 참가하고, 그들이 보리심(菩提心)을 성취한다면, 보살행(菩薩行)과 밀승행을 행하는 모든 보살들에게 대지혜의 관정(灌頂)을 베풀어 주는 대다라니(大陀羅尼) 만다라(曼陀羅)에 가입(加入) 시켜야 한다.
만일 보리심(菩提心)이 원만(圓滿)하지 못하다면, 그들을 만다라(曼陀羅)에 가입(加入)시키지 말아야 하고, 또한 만다라(曼陀羅)를 보지도 못하게 하여야 하며, 그들에게 법인(法印)과 비밀진언(秘密眞言)도 드러내 보이지 않아야 한다.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대승문(大乘門)에 들어간 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대승인(大乘人)은 보리심(菩提心)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 마음에 대한 이해(理解) 정도(程度)만 갖추고 있다 하여도 그 사람은 대승인(大乘人)과 마찬가지이다. 그 마음의 법상(法相)이 갖춰져 있다면, 대승인(大乘人)은 청정(淸淨)하고 진실한 자가 되므로, 이를 부지런히 닦아 익혀야(修習) 한다.
모든 성문승(聲聞僧)은 보살의 대서원(大誓願)과 대행(大行) 및 회향(廻向)을 말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보살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하는데, 이것은 견해(見解)로 분별(分別)하는 것이 아니고, 행(行)으로 분별(分別)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성(空性)을 깨닫는 지혜(智慧)라 할지라도, 대승도(大乘道)가 아니라면, 다른 도(道)는 더 말할 것이 없으므로, 보리심(菩提心)을 교법(敎法)의 요점(要點)으로 삼아 수행하지 않고, 약간의 문구(文句)를 기억하여, 다른 미세(微細)한 부분(部分)에 힘을 다한다(盡力)는 것은 정법(正法)에 대해 상세(詳細)하게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