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9. 11
지난 40년간 미국 국채는 사놓으면 가격이 올랐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국채 금리가 40년간 꾸준히 내렸다는 이야기이다. 국채의 가격과 금리는 반비례한다. 그러던 국채 금리가 최근 들어 추세를 상승 쪽으로 바꾸었다. 제로금리 시대를 마감하고 연준이 기준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한 것이 시중금리 상승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시중금리가 오르다 보니 이제는 국채 가격이 떨어지는 추세이다. 국채를 갖고 있으면 손해 보기 십상이다. 사람들이 점차 국채시장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그간 미국 국채 매입의 큰손이었던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2020년 초 팬데믹 사태가 터지면서 일제히 미국 국채 매입을 거의 중단했다. 2020년 상반기 경우, 전체 미국 국채 판매액 3조3430억달러 중 세계 각국 중앙은행들이 구입한 미국 국채는 전체 국채의 1.2%에 불과한 40억달러어치에 불과했다.
2022년 IMF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각국의 외환보유고에서 달러화 비중이 지난 20년에 걸쳐 73%에서 58%로 감소했다. 달러화의 빈자리를 여러 다른 통화가 대체했는데, 중국 위안화가 25%, 나머지 75%는 상대적으로 준비통화로 위상이 높지 않은 한국 원화, 호주 달러, 캐다나 달러, 싱가포르 달러, 스웨덴 크로나 등이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는 유동성 홍수
미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8000억달러 내외였던 본원통화 발행액이 지금은 약 8조8000억달러로 10배나 급증했다. 이러한 통화량 급증 현상은 유로화와 엔화도 마찬가지다. 2021년 초 기준 3개 통화의 합이 24조달러에 달한다. 중국의 위안화는 미국 달러보다도 더 발행량이 많다고 한다. 한마디로 세계는 유동성 홍수에 잠겨 있다.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다. 이렇게 많은 돈이 풀렸는데 인플레이션이 안 일어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팬데믹 이후 미국에서 통화량 공급은 연준의 통화정책이 아닌 재무부의 재정정책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곧 유동성이 월스트리트 금융권을 통해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와 기업이 있는 메인스트리트에 직접 공급되는 것이다. 게다가 팬데믹 이후 기존 재정 집행에 소요되는 금액보다 재무부가 서민들에게 직접 쏘아주는 돈이 약 2배 이상 많아졌다. 이는 순자산이 거의 없는 하위 50%의 붕괴를 막기 위해 재무부가 서민들에게 실업급여, 기본소득 등 각종 복지 관련 자금을 직접 지급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민들에게 지급되는 돈의 증가는 필연코 소비자물가를 자극할 수밖에 없다.
미국 노동부는 지난 7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 동월보다 8.5% 올랐다고 밝혔다. 이는 전월의 9.1%보다 둔화된 모습이다. 변동성이 큰 에너지·식품을 제외한 근원CPI는 전년 동월보다 5.9% 오른 것으로 집계됐다.
곧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오른 유가와 식품 가격을 제외하더라도 근원인플레이션 지수가 전체 상승률의 3분의2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쟁이 끝나 유가와 식음료 가격이 안정되더라도 인플레이션이 쉽게 진정되기 힘든 상황임을 알려주고 있다.
게다가 많은 전문가들이 이번 경기침체는 L자형 경기침체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침체 기간이 길 것이라는 뜻이다. 인플레이션이 장기화되면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연속적인 금리 인상 등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여러 변수가 나타날 공산이 있다. 불확실성이 그만큼 커지는 것이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리면 다른 나라들도 기준금리를 따라 올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국 내 달러 자본이 유출되어 외환위기에 봉착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세계적 경기침체 시에는 미국과 같은 스텝으로 기준금리를 따라 올려도 외환위기를 피할 수 없는 개발도상국들이 속출할 수 있다.
미국과 반대 행보 보이는 중국
그런데 중국 같은 나라는 미국과 반대 행보를 보이고 있다. 오히려 기준금리 격인 1년 만기 대출우대금리(LPR)를 내리고 은행 지준율 축소로 시중에 유동성을 풀고 있다. 중국은 지금 부동산시장에 빨간불이 켜진 상태이다. 중국 중앙은행이 지속적으로 금리를 내리고 유동성을 풀고 있음에도 부동산 경기는 살아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주택 가격이 10달 이상 계속 떨어지고 있다. 약 3000만채가 미분양이고 1억채의 집이 비어 있다고 한다. 중국 경제에서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4분의1 이상 되다 보니 중국 정부로서는 경기 활성화를 위해 세계 경제와 방향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국의 기준금리가 2.25~2.50%인데 중국 1년 LPR이 3.65%이다. 이런 추세라면 머지않아 양국 금리는 역전될 수 있다. 과연 중국이 미국보다 저금리로 자본 유출을 막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특히 중국 부동산 기업들의 달러 부채의 롤오버가 쉽지 않을 전망으로 기업 부도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본도 정부 부채 비중(GDP의 247%)이 워낙 크다 보니 기준금리를 쉽게 못 올리고 있다. 참고로 우리 정부 부채 비중은 45.6%이다. 게다가 일본은 세계적 기조와 달리 초완화적 통화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은행은 지난 6월 17일 단기금리를 -0.1%로 동결하고, 10년물 국채 금리를 0%로 유지하기 위해 장기 국채도 상한 없이 매입하기로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엔저 현상이 심상치 않다. 9월 1일 현재 달러당 138.8엔으로 140엔을 향해 가고 있다. 앞으로 미국과의 금리 격차가 더 벌어지면 엔저가 더 가속화되어, 세계 2위 자원수입국인 일본의 경상수지 적자가 크게 악화되고 이는 일본 경제를 더 어렵게 만들어 악순환에 빠질 공산이 크다.
이처럼 세계 주요국 간의 금리 괴리는 어떠한 종류의 혼란과 재앙을 불러올지 모르는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현재와 같은 고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같이 오는 스테이그플레이션 상황에서 전문가들이 예상하는 경제 지각변동 리스크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EU의 재정위기 재현 가능성, 개발도상국의 외환위기, 기업 부실채권의 급증, CLO 파생상품 부도, 부동산시장 등 자산시장 버블 붕괴’.
▲ 현재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달러의 패권은 브릭스통화, 암호화폐, 각국 중앙은행 CBDC, 스테이블코인 등 다양한 통화들의 도전을 받을 전망이다./ 뉴시스
진짜 위험은 ‘돌발 악재’
그러나 진짜 위험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섹터에서 발생하는 돌발 악재이다. 예컨대 계속되는 미국의 헛발질로 브릭스가 강력한 통화 공동체로 거듭날 수도 있다. 2011년 이란 은행들의 SWIFT(스위프트·국제결제시스템)를 미국이 차단하면서 러시아의 루블화와 중국 위안화의 독자적인 결제 시스템을 탄생시켰다면,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루블화의 SWIFT 시스템 차단은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인도가 주도하는 브릭스의 공동 통화시스템을 발족시키고 있다. 여기에 브릭스에 동조하는 국가들도 추가될 전망이다. 시진핑이 주도했던 이번 브릭스 화상 정상회의에 기존 5개국 이외에 13개국이 추가로 참가했는데 그중 이란과 아르헨티나 2개국은 이미 브릭스 가입신청을 했고 사우디·터키·인도네시아·이집트 등 몇 나라는 가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가 신냉전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달러에 대항하는 새로운 기축통화 움직임이 거세게 꿈틀거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특히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목받고 있다. 미국의 맹방이었던 사우디가 중국으로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이번 브릭스 화상 정상회의에 참가했을 뿐 아니라 조만간 중국과의 원유 거래를 위안화로 할 공산이 커지고 있다. 만약 사우디가 원유의 위안화 거래를 선언하면 ‘페트로 달러’ 체제의 균열로 달러로서는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우디는 중동 산유국의 대부로서 아랍 세계의 디지털화폐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아랍어로 ‘경계를 넘다’라는 뜻을 가진 ‘아버(Aber)’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아랍에미리트(UAE)와 합동 디지털화폐 시범사업을 운영해왔다. 이제 사우디는 브릭스 가입도 적극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게 되면 브릭스 공동통화가 더욱 힘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브릭스 공동통화를 새로 만들어 쓰기보다는 중국 위안화를 브릭스 대표 통화로 쓸 가능성도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현금거래 비중이 낮은 스웨덴은 GDP(국내총생산) 중 현금 유통 비중이 2%도 안 된다. 심지어 성당·교회에서조차 카드리더기를 설치해 헌금이 가능하다. 덴마크에서도 모든 결제의 85%가 신용카드로 이뤄지고 있다. 이 밖에도 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 등은 일정금액 이상 거래 시 현금 사용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과태료를 부과하고 있다. 앞으로 현금 사용이 점차 줄어들면서 머지않아 ‘현금 없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특히 각국 중앙은행이 CBDC(중앙은행디지털화폐)를 발행하게 되면 그 시기가 앞당겨질 것이다.
세계 각국 중앙은행의 86%가 CBDC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 그 가운데 바하마와 동카리브 국가기구 그리고 나이지리아, 캄보디아는 이미 CBDC를 도입해 쓰고 있다. 중국과 우크라이나, 우루과이는 시범 운영 중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 지난 3년간 시범 운영을 거쳐 이미 사회적으로 상당한 파급력을 지니고 있다. 디지털 위안화(e-CNY) 사용 지역을 중국 인구의 5분의1을 차지하는 23개 도시로 확대하여 상용화 실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중국 인구의 20%인 2억1600만명이 인민은행 앱을 통해 디지털위안화 사용을 위한 전자지갑을 만들었다.
일본도 2년 전부터 자체 CBDC인 디지털엔화를 시범 발행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도 바이든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개발 속도를 높이고 있다. 보스턴 연방준비은행과 MIT(매사추세츠공대)는 2월 초에 초당 170만건의 거래를 처리할 수 있는 CBDC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공개하면서, 미국은 이미 디지털 달러 기술 토대는 충분하다고 밝혔다.
신냉전 시대로 들어서면서 기축통화로 달러 이외에도 브릭스 통화가 급성장할 것으로 보이며 특히 중국의 디지털위안화가 달러의 대항마로 세력을 불릴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인터넷이 없이도 거래와 결제가 가능한 디지털위안화의 부딪치기 기능으로 인해 인터넷 환경이 여의치 않은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급속도로 전파될 가능성이 크다.
디지털유로화도 디지털화폐 시대의 패권통화로서 위치를 노리고 있다. 또한 아랍연맹의 통합 디지털화폐가 선보일 가능성도 있다. 브릭스 경제동맹체와 아랍 지역화폐가 탄생된다면 그간 초인플레이션이나 외환위기에 시달렸던 중남미 국가 등 지역별·경제공동체별 통화의 탄생도 가능성이 있다.
통화 4파전 최종 승자는?
앞으로의 통화는 기존의 법정화폐, 가상자산으로 불리는 암호화폐, 각국 중앙은행 CBDC, 스테이블코인의 4파전이 될 공산이 크다. 이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CBDC와 스테이블코인의 우세를 점치고 있다. 우선 송금수수료 측면에서는 4가지 중 스테이블코인이 가장 저렴하고 디파이와 메타버스 세계에서 유통력이 가장 좋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CBDC는 국가라는 공권력을 등에 업고 자본 유출과 테러 자금을 막기 위해서 각국이 적극 보호하고 권장할 통화라는 것이다.
지금의 외환거래는 전문가의 영역이다. 리스크가 크다. 하지만 앞으로 누구나 클릭 한 번으로 자기가 원하는 통화를 손쉽게 거래할 수 있는 날이 온다. 지금은 패권국이 통화 공급의 중심에 있는 공급자 중심 시장이지만 앞으로는 통화 소비자가 주도하는 소비자 중심 시대가 올 것이다.
우리가 눈을 들어 좀 더 멀리 본다면, 과학 기술의 발전을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패러다임의 변화를 좀 더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다면, 화폐 혁명의 변곡점에 서 있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독자들 모두의 행운을 기원한다. 그동안 연재를 보아주셔서 감사드린다.
홍익희 /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