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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외
등나무
그는 중증장애인이다
두 평 쪽방에서 희망요양원으로 쫓겨 오기까지 어지러운 삶을 살았다
목발을 짚지 않으면 잠시도 어둠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였지만
마음속엔 희망 같은 꽃술이 치렁치렁 늘어져 있다
말을 할 땐 얼굴 근육이 올라가고 입조차 돌아가지만
천성이 착해서 벌떼 같은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저보다 잘난 사람들이 와도 기죽지 않고
서슴없이 목발을 짚고 일어서서 인사를 하는
그의 허리엔 우락부락 옹이가 졌다
꽃나무 발전소
고향 마을이 일제히 꽃불을 켰다
꽃불은 산속에서 논둑 밭둑을 넘어 마을까지 집어삼켰다
산에서 마을까지의 길에는 전봇대 하나 없는데
꽃불은 맹렬하게 번져 내 마음까지 불붙게 하는가
번져가는 꽃불은 향기로워서 누구도 꽃불을 끄지 않는다
벌들은 집집마다 순찰을 돌며 꽃불 조심하라고 앵앵거리지만
꽃불 바라보는 사람들 너무 좋아라
어딘가에 발전소가 있을 거 같아
꽃나무 허리통마다 귀를 대보는데
땅 밑에서 웅웅대는 벌떼 소리 들린다
나무에게만 꽃불을 당겨주는 꽃나무 발전소
불러보는 이름 하도 예뻐서
동구에 꽃나무 발전소란 이름 하나 걸어두어도 좋겠다
황소
방죽에 퍼질러 앉아 풀을 씹을 땐
욕심 다 버린 보살의 얼굴이다
무슨 생각 저리 깊게 하는지
왕방울 눈 끔벅이며 되새김질만 한다
쇠파리들 시위하며 달려들어도
맘 좋게 꼬리만 살살 흔든다
그러다가 가끔은 방죽 너머 바라보며 목쉰 울음을 쏟는다
어미 옆에서 풀 뜯고 있던 송아지
허리춤에 바싹 달라붙어 꼬리 촐랑거리다가
마주보며 소리를 지른다
우걱우걱 풀을 씹는 눈길 속엔
땡볕 아래 쟁기 끌며 밭갈이 하던
아버지의 모습도 보인다
느려터진 마음속에는
아직도 평화 저수지처럼 출렁인다
엉겅퀴꽃에게
만만한 세상 약하게 살지 말라고
그는 매일 나에게 충고를 한다
가시투성이 대가리 쳐들고
당당하게 살면
어느 누구도 쉽게 대들지 못한다고 말한다
나는 들꽃처럼 살아서 살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예쁜 꽃을 피운들 한번 눈요기하면 그만이라고 한다
당당히 세상 맞서 꽃대를 세우고
가시 돋친 말로 매번 쏘아댈 때는
모두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고 한다
어저께는 까칠한 바람이 들쑤시길래
도깨비 방망이 같은 꽃대를 세게 후려쳤더니
겁을 먹고 멀리 달아났다고 한다
이발을 하며
지금쯤 고향 산속에 풀들이 짙은지
통 알 수가 없다
거기 누구 살고 있어 소식 전해주면 좋으련만
반갑지 않는 빗줄기만 창을 때린다
비는 고향 산소를 들렀다오는지 슬픔이 묻어 있다
생전의 어머니가 흥얼거렸던 노래처럼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간다
지금쯤 무덤에는 성긴 풀들이
빗줄기에 흔들리겠지
며칠째 깍지 않는 내 머리털보다
더 많은 풀들이 술렁이고 있겠지
내가 이발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렇게 조용히 흔들리면서
방아깨비
살아가는 동안 방아깨비처럼 힘이 있다면
나 굶지는 않으리
꽁무니 까닥이면 번져가는 율동처럼
디딜방아를 찧으면 벗겨지는 눈부신 쌀알처럼
그렇게 환한 날이 있었던가
살아가는 세상이 숨 막히게 답답하고
희망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
대체 이곳은 얼마나 모진 곳인가
풀숲에 살아도 여름만 되면 방아를 찧는 방아깨비
흉년에 굶는 산속의 생명들을 위해
제 한몸 바치는 방아깨비를 보며
매일 신나게 쿵덕쿵덕 살고 싶었다
사랑
통나무 의자에서 하트 잎 몇 개 솟아났다
그때의 고통과 슬픔 하나도 잊지 않았는지
통 크게 사랑의 손길 내밀었다
은행나무가 통나무가 된 건 순전히 제 잘못이다
뒤꼍에서만 줄곧 제 터를 지킨 50년생의 고목
소슬한 가을바람에
은행잎 어지럽게 날려준 것 까진 낭만으로 치자
그렇다고 원수처럼 은행 알 마당으로 던져
구린내 피우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홧김에 은행나무 밑동을
잘라 통나무 의자를 만든 것이 실수였다
그래도 내 엉덩이 받쳐주면서
그때의 고통과 비명 속으로 삼키며
하늘하늘 사랑의 손길 내밀었다
어쩌면 저리도 거룩하냐
토막 난 몸통으로도 나를 용서하고
세상과의 불화를 용서하고
그 옛날 무성했던 추억 못 잊어
사랑의 손길 흔드는 통나무의 여린 잎들이
그때처럼 따스하다
봄날
벌이 호박꽃에 들어 앉아
꽃가루를 퍼내고 있다
영락없다, 저 모습
황금덩이를 캐는 채탄부 같다
꽁무니 지켜 세우고
까닥까닥 곡괭이질을 하듯
한참 만에 나온 벌들의 다리엔
황금가루 덩이덩이 뭉쳐 있고
그것을 달고 날아가는
하늘 길에도 꽃향기 분분하다
혹시 중매 서로 가는 길이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이웃집에
꽃가루를 싣고
택배 가는 지도 모를
완성을 위하여
한 자국의 멍이 사과의 얼굴에 찍혀 있다
늘 주태백이 남편에게 맞아 생긴 멍처럼
지난 봄날의 태풍도 살갑지는 않았다
비바람이 휩쓸고 간 상처는
사과의 얼굴에 멍을 남겨 놓았다
완성을 위해 나아가다 생긴 상처였다
그 상처는 샘처럼 깊고 푸르렀다
소란스런 나비의 날개바람으로도
물리치지 못했던 태풍은
내년에도 올 거라고 확신을 했다
두들겨 맞아야 잘 크는 사과나무 가지에는
내년에도 열매마다
멍울멍울 멍들이 찍힐 거라고 상상을 했다
마네킹 같은 여자
날씬한 아가씨가 옷가게 유리창을 내다본다
한 점 미동도 없는 눈을 가진 여자
심장이 없고 체온도 없는 여자
마침 주인 여자가 아가씨를 무참히 학대하고 있다
눕혀놓고, 옆으로 세워놓고, 발가벗겨 놓고, 반쯤 죽여 놓더니
지체 높은 사람에게 술시중을 들게 하듯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혀 세워놓는다
손님이 오자 갑자기 주인 여자의 얼굴이 돌변한다
방금 독살스런 표정은 달아나고
생글거리는 눈웃음이 애교 있게 꼬리를 친다
수시로 안면을 바꾸는 일이 잦다보니
아가씨는 희망이 없는 듯 늘 멍한 표정이다
예전 같았으면 육신을 해체한 채 깜깜한 창고에서
견디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고
가슴을 치듯 싸락눈이 가게의 유리창을 때리고 간다
솔방울
화석처럼 굳기 전의 생은 화려했을 것이다
한평생 푸른 절개로 불의와 맞서 싸우다
인적 없는 산골에 송홧가루 뿌려놓고
저도 한 세상 멋지게 살았었다는 듯
옹골찬 주먹들을 가지마다 달아 놓았을 것이다
대못
큰놈은 늘 그것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명절날 집에 오면
늙은 엄마 가슴팍에
그것을 쾅쾅 박았다
술만 취하면
미친 놈처럼 고함만 지르는 그의 주둥이엔
게거품이 덕지덕지했지만
엄마는 조용히 가슴팍에 박힌 그것을
수없이 빼내곤 했다
돌의 비행술
돌은 비행술을 배웠다
중량을 줄여 몸을 가볍게 하는 법을 배웠다
이마빡 납작한 돌이 더 말을 잘 들었다
날개가 없어도 새처럼 나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꽁지로 물을 차며 튀어 오르는 제비처럼
제 풀에 지쳐 폴짝거리다가
저수지 중간쯤에서 고꾸라진다
돌은 파문을 낳고 죽는다
작은 파문이 큰 파문을 따라가면서 줄줄이 익사를 한다
줄초상을 당한 저수지가
수양버들처럼 퍼렇게 그늘을 내려깔고 있다
마네킹 같은 여자
하는 짓을 보면
아마도 그녀도 마네킹이었을 것이다
집에서는 기도 펴지 못하는 여자였을 것이다
남편 앞에서는 마네킹처럼 속수무책으로 맞았을 것이다
남편이 하는 대로
목이 꺾이고 팔이 뒤틀리고 급기야는 발가벗겨져
온몸 가릴 새 없이 거리의 여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도 아마도 남편에게 폭력을 배웠을 것이다
참고 있으면 죽을 것 같아 옷가게를 열고
늘씬한 아가씨를 들여놓았지만
서늘하게 쏘아보는 눈길이 남편처럼 보여
똑같은 흉내를 냈을 것이다
아가씨에게 옷을 입힐 때는
거친 완력의 남편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아가씨의 목을 꺾고 팔을 비틀고
급기야는 발가벗겨져 하늘하늘한 옷을 입힐 때는
극도의 쾌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집에서는 마네킹이 되어도
가게에서는 거친 남자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은행 터는 날
친구가 은행을 털자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것도 환한 대낮
대명천지에 은행을 털 수 있는 간 큰 사람이 있을까
친구의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간 게 잘못
대로변 은행은 위험하다고
두메산골에 있는 은행을 찾아갔는데
은행은 없고 주렁주렁 은행 알 달린 은행나무만 있어
친구에게 속았다, 속았다 깔깔거리며 은행을 터는데
뭐가 구린지 은행나무 구린내를 마구 풍긴다
은행 알 부지런히 주었더니 두 포대
남몰래 은행을 털어 돈 자루 지고 내려오듯
끙끙거리는 발길이 가볍다
울음의 투서
매미는 격렬한 울음으로 세월을 보낸다
검찰청 앞 왕벚나무 가지에 붙어 혼자 시위를 벌인다
매일 울음으로 투서를 넣지만
사람들은 시끄럽다고 귀를 털어막는다
울음이 소음이 되는 시대가 왔다
옷자락 훌렁 걷어붙이고
대청에서 잠들던 시절은 갔다
그 시절이 가고 나니 목청 높아지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울음은 차량 왕왕대는 거리보다
검찰청 앞이 투서 넣기 좋은 장소였다
제 가슴속 꽉 찬 불만을 털어낼 까지
매미는 울음주머니를 불룩거렸다
똥값 금값
두메밭에 냉이꽃이 쫙 깔렸다
언제 이렇게 꽃을 퓌었는지 뽀글뽀글 파마를 했다
아랫마을 아지매 시퍼렇게 눈뜨고 어린 냉이를 찾지만
새끼 냉이는 눈씻고 봐도 없다
냉이는 일단 꽃이 피면 호시절이 끝난다
먹지 못해 여자들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
꽃핀 냉이가 똥값이라면 새끼 냉이는 금값이다
노파의 직장
판로가 없는 것을 고민하다
도로변에 바가지를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가뭄에 콩 나듯 자두를 사가는 손님들이 고맙기는 하지만
이렇게 팔다 올 겨울 굶어죽을지 몰라 가슴이 떨린다
자두를 위해 공을 들인 날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반이다
비가 오나 궂으나 꼭 과수원에 나가 갓난 아기 다루듯
오만 정성을 쏟았던 고생을 생각하면
자두꽃과 밀월을 즐겼던 벌들이 생각난다
그렇다고 그 은혜 모두 벌들에게 돌리지 마라
자두가 익어갈 때 애타던 노파의 눈빛도 있지 않았더냐
아랫배 아파 본 사람만이 안다
자두나무가 싱싱한 알 낳기 위해
봄날에 얼마나 많은 꽃을 피었는가를
강
산자락 굽이치며 집 나온 천리 길
그 길 아득해 물굽이 따라가던 새들도
갈증이 도져 날개를 접는다
부리 콕콕 찍어 물맛을 볼 때
꼬리치며 흘러가던 강이 뒤돌아보며
나지막이 물새처럼 흐느낀다
무작정 두고나온 집이 아득해서
흐느끼는 소리 더 크게 메아리쳐 흘러간다
강이 산속에서 나올 때는
별이 쌀알처럼 뿌려진 밤이었다
다시는 얼굴 볼 수 없다며
강변길 억새풀이 은빛 손을 흔들었다
꼬리 치며 흐르다보니
곧 수심 깊은 바다에 안긴다는 생각에
강은 마음이 설레듯 찰랑거리기만 했다
밥줄 1
흔들리는 내 삶의 불안처럼
종일 유리창에 붙어 흔들거린다
산입에 거미줄 치지 않기 위해 동아줄 타고 부유한다
몸뚱이 하나 외줄에 묶여 흔들리다 보면
천길 벼랑에서 제 육신 날리는
허기진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래도 동아줄이 가족의 희망이 된다는 믿음에
지겹도록 이 일에 매달렸다
빌딩 벽을 타면서도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 것은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삶이 지겨워
불나방처럼 제 몸을 불사르기도 하지만
아찔한 이곳을 희망의 빛줄기라 생각한다
유리창 속 웃음 띤 사람들의 얼굴이
불빛처럼 흔들리지만
그들도 마음 한 구석에
절망의 짐을 어둠처럼 껴안고 살지 모른다
그들의 웃음이 밝아지도록
걸레에 세제를 담뿍 묻혀 세월에 찌든 흔적을 닦는다
한평생 불안에 찌든 내 삶의 흔적들을 말끔히 지운다
밥줄 2
저기는 구십도 숨찬 절벽 담쟁이들이 오른다
중년의 나이에도 가슴에 환한 희망 밝히려
한 땀 한 땀 바위벽을 타고 오른다
허공을 부유하는 날것들도 뿌리 내릴 수 없는 절망의 지대지만
엎어질 듯 아득한 날망이를 향해 흠뻑 땀에 젖어 오른다
튼실한 동아줄에 몸뚱이를 걸고 빨판처럼 붙어 푸른 희망을 연다
석이버섯 채취하는 산꾼처럼 어금니 잔뜩 깨물 때마다
머리 위로 하늘이 내려앉는다
먹구름 속에 언뜻언뜻 스치는 푸른 희망 보고 싶어
구십도 숨찬 절벽은 종일토록 담쟁이들 차지가 된다
추석
뒤란의 감들이
분기탱천 종주먹을 쥐고 있다
감꽃 목에 걸고 다닌 지 엊그제 같더니
벌써 추석이 코앞이다
이번 추석엔 보름달도 쟁반만 하고
제사 지내러 오는 아들놈 있어
감은 보름달빛으로 부풀었다
벌써 몇 놈은 홍시로 변해 속까지 물렀다
홍시 몇 개만 제사상에 올려놓아도
환한 추석이 될 것 같은 밤
큰절을 올릴 때마다
홍시가 철퍼럭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고향
그리움에 취해 걷다보니 강둑이다
강둑 저편에는 눈 내린 마을이 보인다
마을은 저녁밥을 짓는지
굴뚝 연기 꼬리치며 올라가고
연기를 쳐다보는 염소의 눈망울엔 그리움이 깊다
그러나 저 마을에는 가고 싶지 않다
꿈속 같은 고향이지만
사람들은 아마 나를 모를 것이다
꽃들이 분분할 때 집을 나와
눈발이 흩날릴 때 강둑에 오기까지
스쳐간 세월이 수십 년이다
내 그리움은 여기까지다
시계풀을 찾아서
산길을 잃으면 시계풀을 찾는다
한 번도 본적 없지만 모양을 보면 안다
둥근 꽃 속에서 암술과 수술들이
시침 초침처럼 시간을 잰다
길을 잃어도 시계풀만 만나면 위안이 된다
불안한 세월이 어느 시간대를
달리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시계풀마다 시간은 달라도 마음으로 안다
벌들도 시간이 헷갈려 난리를 치지만
무작정 시계풀이 알려주는 곳을 찾아간다
상처도 울분도 없는 세상이
팔을 벌려 기다리고 있다
시계풀처럼 암술 수술을 벌려
너를 품에 않은 세상이 있다
나비춤
어맘가 물동이를 이고 비탈길 오를 때는
흰비처럼 춤을 추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출렁이는 물동이
물이 넘쳐 이마로 흘러내릴 때마다
손과 손을 맙바꾸어 엄마는 이마의 물을 훔쳐냈다
흰 고무신도 춤을 추듯 흔들렸다
어디선가 날아온 흰나비도 팔락팔락
엄마의 흰고무신과 보조를 맞추ㅕ
춤을 추는 흰 나비의 날개도 한층 가벼워보였다
봄날
뻐꾸기 울음 한방에 봄 한철 지나간다
풀 바람처럼 일어서는 울음
흐느끼는 소리마다 무슨 곡절 저리 깊은지
산비탈 뒤덮은 꽃들마저 놀라 후득후득 떨어진다
꽃들은 붉어서 사연 투성이고
풀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꽃잎을 떨어낸다
꽃잎이 계곡물에 실려 떠나갈 때
이빨 갈 듯 와글대던 청개구리 한 놈
오줌 찔끔 내지르며 펄쩍 한세월 건너뛴다
활어
활어들은 제 고향을 바다에 남겨두고
수족관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독방 같은 공간에
마지막 생을 풀어놓고
힘없는 지느러미를 마구 살랑거렸다
푸들푸들한 비늘 더 싱싱하게 보여주기 위해
숨 가쁘게 지느러미를 흔들었다
쉼 없이 움직여야 하는 일이
한평생 노동으로 찌든 삶처럼 느껴졌다
어쩌다가 미식가들 눈에 찍히면
금세 황천길로 떠날 운명이지만
활어들은 이미 그 길 아는 듯
고단하게 흔드는 지느러미들이 애처롭다
제 고향 돌아가라 풀어놔도
바다까지는 먼 길이라는 것을 아는 듯
아가미를 뻐끔거리기만 한다
남은 생 모질지라도
바쁘게 움직이는 것만이 사는 길이다
성체성사
성당 앞뜰에서 천상의 화음 묻어난다
사제가 허공을 향해 두 손을 쳐들자
성체 하나가 낮달처럼 떠오른다
원래가 사랑하는 이의 몸이었으니
난 몸을 먹기 위해 행렬 속에 파묻혔다
사제가 허공을 향해 다시 두 손을 쳐들자
포도주잔이 노을처럼 출렁거렸다
원래가 사랑하는 이의 피였으니
난 이 피를 마시기 위해 행렬 속에 파묻혔다
성체와 포도주 속에 하늘길이 있어
백발성성한 사제의 로만칼라만 봐도
아멘, 아멘
죄의 욕망 죄다 털어낸 손바닥에
아멘과 함께 놓여지는 성체 하나
이것을 몸 안에 모시기 위해
서른 몇 해의 고단한 길 밟아왔으니
긴 행렬에 섞여 내놓는 헌금 몇 푼으로도
감히 성체의 값 매길 수는 없었다
숲들이 휴식에 들 무렵
숲들이 죄다 열매 달고
휴식에 들 무렵 할아버지한테 간다
꿩들이 낮은 포복으로 도망가는 길 따라
굴참나무가 절구통 허리를 틀고 있다
족히 백 살은 넘어 보였으나
생식은 청춘다웠다
나뭇가지마다 굴밤들이 다글다글 매달려
내 정수리를 겨누고 있다
그때 참나무 밑에서 퍼뜩 잠이 들었던가
할아버지 꿈을 꾸었던가
어디선가 굴밤 한 개 날아와
우지끈 내 정수리를 쳤다
정수리가 깨질 듯한 통증
예끼, 이놈,
할아버지 걸걸한 목청 넘어가는 고갯길 따라
꿀밤 하나 또 정수리를 쳤다
할아버지에게 꿀밤 두 대 맞고
퍼뜩 잠이 깼다
밥
묵은 송판을 대패질 한다
더깨더깨 쌓인 먼지 속에서도 속살 싱싱해
무지막지 밀어붙이는 대패질에도
대팻밥은 눈발처럼 흩날린다
생전의 소나무도 밥을 먹고 살았던지
풍우와 구름, 낙뢰, 새소리까지
죄다 받아먹고 속살을 불렀으니
대팻밥 속에서 솔향기가 난다
저 송판으로 집 한 채 번듯하게 세우면
생전의 소나무처럼 푸른 솔향기 가득 고이겠지
뭉게구름도 스쳐 지나가고
폭우 속에 낙뢰도 치고
숲이 맑아지면 새소리도 들려오겠지
이것들 어깨 걸고 노래하면
아주 예쁜 집이 되겠지
꿈속에 빠져다는 예쁜 집이 되겠지
만월 1
5월엔 비밀이 많아 달맞이꽃이 핀다
달맞이꽃엔 노란 접시 안테나가 있어
은밀한 사람들의 사생활을 캔다
노란 접시에 포착되면 끝장이다
내 마음속 비밀들이 외부로 유출되면
내 생애의 절반이 끝난다
무덤까지 비밀을 안고 가야 한다
달맞이꽃 피는 밤이면 그래서 무섭고
밤길 걷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도
그래서 무섭다
만월 2
그 옛날 샘가에서 훌쩍이던 아이가
지금은 보름달만치 배가 불렀다
그때 샘가에 서 있던 앵두나무는 없고
앵두나무 대신 앵두 빛 달빛이
두레박에 걸려 있다
괴상한 울음소리로
샘 속을 오르내리던 두레박은
잔뜩 녹슬어 있고
그 샘물에 얼굴 비추던 아이는
샘가에 와서 훌쩍이고 있다
질질과 훌쩍 사이에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으나
샘가에 번지는 이끼 같은 사랑이 그리워
옛날 아이처럼 달을 보며 훌쩍거렸다
칠월 칠석날
못 견디게 보고 싶은 날은
오작교에 와서 본다
까치가 설레는 마음을 알고
그리움을 놓아 준다
은하수를 죄다 들이킬 정도로
목마른 사랑이라면
일 년에 단 한 번이라도
오작교 위에서 죽고 싶다
서로가 깍지 낀 손으로 울먹이며
은하수가 넘쳐도
부서지지 않는 다리처럼
탄탄한 사랑을 하고 싶다
초가을
가을이 익었는지
밤톨 툭 떨어져 뒹굴고 있다
다람쥐 놀라 쪼르르
나뭇가지로 오르고
쭈그러진 밤송이
허전한 잇몸으로 배시시 웃으면
아이들 한 무리
장대 들고 달려와
신나게 밤송이를 턴다
풀여치의 노래
달빛이 풀밭을 누를 때마다
풀여치가 노래를 한다
저 작은 가슴에도
노래주머니가 있나보다
한세월 짜 넣었던 한을 풀어
올올이 비단자락을 짠다
구슬픔이 풀빛을 휘감아
풀빛그늘 온통 근심투성이다
누구에게 전하려고
풀여치는 긴긴 밤 설치며
베틀 노래 부르는가
폭우
올 여름 소나기가 독해졌다
손바닥 같은 잎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서야 매질을 그쳤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랐지만
단지 느낌으로 알았다
독해진 세상을 닮아 그럴 것이라고
마음으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꽃나무의 길
꽃나무는 저절로 붉어지는 게 아니다
꽃불을 피우기까지 독한 시련을 견뎌야 했다
계절을 넘기면서 수없이 고뇌를 했다
봄을 맞을 일과
잎과 꽃과 열매를 맺고 떨어낼 생각을 하다보면
꽃나무는 세상의 무게에 눌려 쓰러질 정도였다
꽃나무에게 쓰러진다는 것은
눕는 것이 아니다
서 있어도 꽃불을 피우지 않으면
이미 쓰러진 거나 다름없는 거다
안화리
고향은 늘 마음속에 있지만
어쩌다 갈 때는
꽃들이 피었을 때 간다
동구에 들어서면
엄마가 내손을 덥석 잡으러 오듯
꽃잎이 도랑물 따라 떠내려온다
꽃잎을 건져 내 볼에 대 본다
안녕, 나를 많이도 기다렸구나
어릴 적 뛰놀던 앞산 뒷산에서
술래잡기하던 짐승들 모두 떠났지만
꽃들은 도랑가에 무리지어
꽃잎을 아랫녘까지 흘러보낸다
내 마음도 꽃잎을 싫고
도랑물 따라 길게 흐른다
가을 숲
뒷산이 타오를 땐 가을 한 때다
숲속에 누가 숨어 있어 막무가내 불을 지피는가
활활 타오르는 잎에는
여름날 연두로 인내했던 격정이 숨어 있다
그 격정으로 터진 울음보가
가을 숲을 뜨겁게 물들인다
산불이 꺼지려면 오로지 가을을 넘겨야 한다
산둑 밭둑 넘치게 타오르다
힘에 부치면 숲은 저마다 가을을 접고
깊은 겨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산불에 데었는지 장기 몇 놈이
괴팍스레 소리를 지르며
밭고랑으로 미끄러진다
얼마나 많은 그리움 남아 있어
먼거리에서 날아왔는가
하필이면 바람 마저 자는
콘크리트 틈새에 날개를 접고
수북히 꽃씨를 내려놓는다
그곳이 꽃씨의 구들장인가
따사로운 햇살 한줌 받아
연한 마음속에 뜨거운 그리움 무럭무럭 키운다
그리고는 담장에 연한 줄기 걸칠 준비를 한다
줄기 마디마디 연분홍 꽃 줄줄이 피우면
목숨 걸고 안착한 저 자리,
더는 외롭지 않으리
뜨거운 그리움이
얼마나 아득한 거리 날아가게 하는지
바람이 자는데도
꽃씨는 제 몸 가볍게 하늘에 띄을 준비를 한다
풍장
쓰러진 고목이 살아있을 날은 단 열흘이라고 했다
바람과 햇살의 말로는
아무리 영양을 주고 진료를 해도
기사회생하지 않으리라고 했다
그 소식 어떻게 알았는지
산 속의 친구들 병문안을 왔다
방아깨비가 죽음의 고통을 안다는 듯 끄덕거리다 갔고
귀뚜라미도 날개에 젖은 이슬 떨어내며
청승스레 찬송가 부르고 갔다
불개비도 온몸 열 올라 줄지어 몰려왔고
쇠똥구리도 느린 걸음으로 찾아와
고목의 가슴팍에 얼굴을 문지르다 갔다
하나같이 친구들은 고목의 가슴마다 따스한 잎 트기만을 바랬다
그러면서도 죽어가는 육신이 바람에 풍장 되길 바랐다
풍장이 산을 지키는 일이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고 했다
새순
땅속에 숨어 있다
흙을 뚫고 고물고물 세상 밖으로 나왔네
봄 인줄 알았더니
세상은 맵찬 꽃샘바람, 긴 어둠,
찬바람 몰아치는 동토를 누군들 좋아하리
봄 햇살 다소곳이 흙문 두드리는 새벽녘,
빨리 꽃불 뿜으라고
따사로운 입김 내 뿜지만
아직도 산자락은 눈발 쓰고
성난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네
그 울음소리 들으며
새순 뾰족뾰족 고갤 내민다
뻐꾸기
새끼만 퍼질러 놓고
허구한 날 통곡하는 너를 탓하지도 못 하겠다
집도 절도 없이 방황하는 너를 욕하지도 못 하겠다
세상은 너를 독한 년이라고 욕을 하는데
나도 도통 네 속을 모르겠다
새끼를 남 집에 슬쩍 밀어 넣고
두 눈 물러 터지도록 흐느끼는 네 심정 진짜 모르겠다
가냘픈 울음소리
강변 벼랑에 부딪혀 돌아오면
마을 사람들도 가슴이 찢어져 벽보고 돌아눕는다지
차라리 흐느끼지나 말지
네 새끼 그렇게 불쌍하면 차라리 데리고 가던지
할 일없이 울기는 왜 울어
이 잡것아
칡꽃
지난밤이 얼마나 간절했기에
황홀하게 꽃을 피우나
넝쿨을 오랏줄처럼 엮어
황홀한 꽃을 피웠다면
필시 험한 인생길도 밝다는 뜻이겠지
가다보면 어디쯤인가
보랏빛 그리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살면서도 신이 난다
벌들은 좋겠다
엄마 같은 품에 안겨
매일 달콤한 꿈만 꾸고 있으니
가을 끝에서
대추나무를 키운 건 팔 할이 아버지다
맞으면서 커는 아이들처럼
가을이면 늘 아버지에 학대를 당했다
얼굴 붉어 수줍어 할 겨를도 없이
장대를 들이대는 아버지
그 못된 손버릇으로 사정없이 장대를 휘둘렀다
우박처럼 떨어져 피울음으로 나뒹구는 대추알들
저러다간 온몸 성한 데가 없을 것 같아
바닥에 그늘만한 가마니를 깔아주었다
대추나무 늙어 이제 아버지 나이만큼 되었는데
둘이 손잡고 잘 어울릴 나이가 되었는데
대추알이 붉어지면 아버지는 저절로 장대를 들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대추알들은
절반이 벌레 먹은 것들이다
대추나무도 아버지처럼 험한 인생을 살았구나
봉숭아
마당의 봉숭아들이 난리가 났다
꼭 가을이면 저랬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씨방을 총탄처럼 터뜨려
따글따글 실탄을 쏘아대는가
아마 서편 하늘에서
번지는 노을을
선전포고로 알았나보다
총구조차 없어
사방팔방으로 튀는 실탄들
저런 오합지졸로
어떻게 전쟁을 치르겠나
고향이 날 외면한다
오십 줄에 찾은 고향은
숫제 날 외면한다
초가집은 양옥집으로 날 외면하고
흙길은 포장도로로 날 외면한다
아이들은 낯선 얼굴로 날 외면하고
밭고랑은 트랙터 소리로 날 외면한다
산마루 끝에 걸린 보름달만
날 감싸줄 뿐
고향은 이제 어디로 사라지고 없다
진달래꽃 꺾으러 휑하니
달아난 발길처럼
어디로 도망가고 없다
봉숭아
길 가던 처녀애들
봉숭아 옆에 서서 꽃잎을 딴다
빨리 꽃잎을 따지 않으면
봉숭아 꽃대 아래는
전쟁으로 어지럽다고 부지런히 꽃잎을 훑는다
씨방들이 폭탄처럼 터지기 전에
붉은 꽃잎을 손톱에 꽁꽁 묶고
옛 애인을 기다려라
전쟁이 터지면 누구도 이 땅에 오지 못하리니
꽃잎 한 장 손톱 붉게 물들이는 날
하늘에도 노을이 뜨고
소곤소곤 평화를 이야기하는 이 땅이
봉숭아꽃만큼 아름답다
금낭화
금낭화들이 길가에
어미의 마음으로 나와 섰다
등이 구부러진 마음으로 나와 섰다
꽃을 등불처럼 밝히고 있는 이 밤에
누구의 발소리를 듣고 있는지
꽃의 마음이 초조하다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등불 속엔
기다리다 지쳐 누운
어미의 눈물이 들어 있다
밤새도록 합장하고 있는
간절한 기도가 들어 있다
그래서 금낭화는 더욱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