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카가 된 옥수수
열차 소리에 민수는 퍼뜩 잠이 깼습니다. 매일 겪는 일이라 아무렇지는 않았지만 꼭 하필 식구들이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진 새벽에 눈이 뜨였습니다. 이제 철길 옆 마을로 이사 온 지도 몇 해가 흘러서 시끄럽게 달리는 열차 소리에도 신경이 무딜만도 한데 민수는 그렇지가 않았어요.
꼭 새벽녘 이 시간에 눈이 뜨이는 것은 그 동안의 습관 탓이기도 합니다. 민수는 눈을 뜨고서도 한참 동안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립니다.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해도 잠은 오지 않고 쓸데없는 공상만 머릿속에 쌓여갑니다.
작년에 민수 옆집에 살다 도시로 이사를 간 은지 생각이 간절합니다. 은지는 이름처럼 얼굴도 곱고 예뻐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가슴이 콩닥거립니다. 더욱이 무릎까지 드러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 공주처럼 뛰어오는 상상을 하면 저절로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민수가 이불 속에 누워 은지 생각을 하는 동안 또 육중한 열차 한 대가 무거운 쇠 바퀴 소리를 내며 어둠을 가릅니다. 그 바람에 철 길 옆 옥수수 잎들이 살랑살랑 몸을 부딪치는 소리를 냅니다. 아마 옥수수도 잠을 깼나 봅니다. 올 봄에 엄마가 심심풀이로 심은 옥수수들 입니다. 철길을 따라 골을 파고 심은 옥수수가 한없이 키를 늘려 하늘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아마 며칠만 더 있으면 옥수수 대궁에 달린 옥수수가 탄탄하게 익을 것 같습니다. 아직은 붉은 수술이 철없는 아이의 턱수염 같아서 보기에도 민망해 보입니다. 그 수술이 붉은 빛을 지우고 까맣게 변하면 비로소 옥수수 알도 누렇게 되고 딱딱하게 여물게 됩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도 오늘따라 참 곱습니다. 큰 항아리를 기울여 누런 꿀을 옥수수 밭으로 쏟아 붓는 것만 같습니다. 민수는 혼자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새벽녘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다 보니 아예 옥수수와 친구가 된 것입니다. 민수가 옥수수에게 말을 걸면 옥수수도 민수에게 척척 대답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옥수수야,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겠어?”
“뭔데”
“내 친구 은지가 보고 싶어죽겠어”
"그러면 하모니카를 불면서 마음을 달래면 되지”
“하모니카!”
“그래, 나중에 옥수수로 하모니카를 만들어 불면 돼. 하모니카 소리가 은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몰라”
민수는 눈웃음을 쳤습니다. “그러면 옥수수는 언제쯤 따지?” “조금 더 참고 기다려 봐” 옥수수는 민수를 안심시켰어요.
그리고 며칠이 흘러갔어요. 아기 손목만한 옥수수가 붉은 수염을 지우는가 싶더니 갈바람과 함께 토실토실 옥수수 알이 여물어가기 시작했어요. 옥수수의 붉은 수염은 까맣게 변하고 팔뚝만큼 부풀어 올라 대궁에 매달려 위험스레 흔들렸어요. 딱딱하게 여물었으니 빨리 꺾어가라는 표정 같았어요.
민수는 잘 익은 옥수수를 하나 뚝 땄습니다. 탄탄하게 여문 알들이 묵직하게 민수의 손에 잡혔습니다. 민수는 옥수수 껍질을 차례대로 벗겼습니다. 겹겹이 두른 껍질들이 말끔하게 벗겨지더니 누런 이빨 같은 옥수수 알들이 빽빽이 드러났어요.
민수는 옥수수 알을 한 줄씩 떼어내고 하모니카를 만들었어요. 그리고는 입에다 대고 입술을 좌우로 움직였더니 신기하게도 아름다운 하모니카 소리가 흘러 나왔어요. 하모니카 소리는 하늘로 퍼져 올라갔습니다.
그 바람에 하늘의 별들이 살랑살랑 춤을 추며 내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별빛들이 옥수수 밭에 서리처럼 물들었습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나야, 은지. 어떻게 지냈니?”
“아니, 네가 어떻게…”
민수는 정신이 아찔했어요. 은지가 전화를 걸어오다니 꿈을 꾸는 것만 같았어요.
“하모니카 소리 너무 아름다워”
민수는 가슴이 뜨거웠어요. 가슴이 불같이 달아오를수록 민수의 속옷도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어요.
민수는 그날 밤 꿈을 꾸며 몽정을 한 것입니다.
“아니 이 녀석 좀 봐, 아직도 안 일어났네”
어제 저녁 외할머니댁에 가셨다 아침에 돌아온 엄마가 민수를 흔들어 깨웠어요.
민수는 창피했어요. 혼자만이 간직한 비밀을 들켜 버린 듯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밤을 꼬박 새운 옥수수 대가 열차의 바람을 안고 술렁술렁 흔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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