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에 꽃비 날린다
나그네 길에 오르면 자기 영혼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제 발로 걷는다는 것은 땅을 의지해 그 기운을 받아들임이다-----법정스님
걷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복잡한 일상을 벗어나 처음 본 마을길이나 숲에 묻힌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쌓인 스트레스와 운명처럼 지고가야 하는 생의 무거운 짐을 스스로 내려놓는 길 앞에
어찌 발걸음이 가볍지 않겠는가. 천근 같은 발걸음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져 그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던 영혼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그런 면에서 지리산 둘레길이 던져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계절마다 색다르게 전개되는
둘레길의 풍광을 잊지 못해 나는 만사 제쳐놓고 또 다시 지리산을 향해 달음질친다.
지리산 둘레길을 걸은 횟수는 지금까지 세 번째다. 들레길 구석구석 내 발걸음의 흔적을 무수히 찍어 놓았지만
아직도 질리지 않는다. 산자락에 펼쳐진 다랑논이나 화사한 꽃빛으로 물들어가는 야생화들, 그리고 연봉위로
피워 오르는 뭉게구름의 여운이 꿈결처럼 내 마음을 붙잡아 주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번에는 동강마을에서 수철마을까지의 12킬로의 긴 여정을 택했다. 대전 안영동에서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곳이 여정의 첫 출발점인 경남 함양군 동강마을이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니 동강마을에서 수철마을까지의
구간은 걷는데 무리가 될 것 같아 구간을 조금 손보기로 했다. 동강마을의 다음 코스인 방곡마을에 차를 받쳐 놓고
그곳에서 상사폭포와 쌍재, 고동재를 넘어 수철마을에 이르는 여정을 밟기로 한 것이다.
방곡마을의 느티나무
묵혀놓은 밭
1박2일의 프로에 나왔던 그 길, 상사폭포로 오르는 그 길
방곡마을은 좌, 우 이념으로 얼룩진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산청, 함양 학살 사건의
추모공원이 눈앞에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 공비토벌 작전의 일환으로 주변 3개 마을의 민간인 수백 명이
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이다. 혹시나 민간인 중에 섞여 있을지도 모를 공비 때문에 무고한 민간인이
집단으로 학살당한 참상은 역사의 치욕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 당시의 아픈 사연을 가슴에 담고 좁은 산길로 들어선다. 상사폭포를 향해 시작되는 길이다. 험하지도
낮지도 않는 산길이 걷기에는 안성맞춤이다. 한참을 걸어도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조붓한 산길만
나타난다. 다랑논과 수수밭이 걸쳐있는 확 트인 산자락을 보며 걸었던 다른 구간과는 달리 오로지
숲으로 뒤덮인 산길만 헤쳐가야 하는 이 구간은 고달픈 여정만 계속된다.
그러나 산길 드문드문 함빡 웃음을 짓는 야생화 때문에 적적하지는 않다. 산딸기꽃, 국수나무꽃, 붓꽃,
때죽나무꽃이 무리를 지어 나그네를 반긴다. 더구나 야생화에 통달한 회화나무님과의 동행은 한동안
나를 매혹적인 야생화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게 했다. 야생화의 이름이나 생태까지 그 속을 환히 꿰뚫고
있는 회화나무님은 우리 모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보석 같은 존재다. 모임 때마다 길잡이를 하는
그의 역할 때문에 어느 정도 야생화의 이름정도는 알게 되었다.
찔레덤불이 있는 길
상사폭포로 오르는 길
붓꽃
울창한 숲에 가려 주변 산자락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숲길만 계속되는 길, 어찌 보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이 길이 그래도 산객들에게는 제법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1박2일의 프로에 출연한 개그맨 이수근이 걸었다고 해서 신바람을 타고 있다. 개그맨이 이 길을 걸었다고
해서 마음이 들뜬 사람들을 보면 1박 2일의 프로가 가져다 주는 영향력이 대단한 것 같다. 잘 알려지지
않는 길도 그들이 오면 활기차게 살아 움직이는 길로 변하는 것을 보면 연예인이 이 시대 최고의
직업군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틀림없다.
산길과 어깨를 걸며 쏟아져 내리는 계곡물소리에 맞춰 청승맞게 흐느끼는 뻐꾸기 울음은 내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옛날의 추억을 고스란히 끄집어낸다.
더구나 산길에는 때죽나무꽃이 군락을 이뤄 걷는데 더없이 즐거움을 준다. 나뭇가지를 뒤덮은
때죽나무꽃들이 이제는 서서히 꽃잎을 떨구는 중이다. 종처럼 꽃들을 조롱조롱 아래로 매달고 있는
때죽나무의 행렬이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상큼한 향기를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다. 산길은 오로지
꽃의 향기로 가득하다. 흙길에도, 계곡의 바위에도, 둥둥 떠내려 오는 물에도 하얀 꽃들이 지천이다.
뭉게구름 넘실대는
계곡의 바위에서 분분히 흩날리는 꽃비를 맞으며 정다운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고 싶은 생각에
불현듯 <꽃잎 하나 날려도 봄이 가는데>라는 두보의 시가 생각난다
꽃잎 하나 날려도 봄이 가는데
바람이 만점 꽃 펄펄 날리니 안타가워라.
보이는 눈 앞에서 꽃 이제 다 져가니
술 많이 마셔서 몸좀 상해도 저어 말지니라
강 위의 누각에 물총새 집을 짓고
긍원가 큰 무덤에 기린 석상 나 딩굴었네
세상 변하는 이치 잘 살펴서 즐기며 살지니
뜬 구름 같은 명리도 이 몸 묶을게 뭣이랴.
꽃잎 하나 날려도 봄이 가는데--두보
상사병으로 죽은 남정네는 어디로 가고, 힘찬 물줄기만
청승맞은 뻐꾸기 울음을 한귀로 들으며 닿은 곳이 상사폭포다.
반질반질한 벼랑을 매끄럽게 타고 굴러 떨어지는 물줄기가 시끄러운 울음을 쏟아낸다. 녹음에 젖은
물이라 물색이 참 좋다. 그러나 상사폭포에도 애절한 전설 한 자락 전해내려 있는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옛날에 한 여인네를 사랑한 남정네가 상사병으로 죽어 다시 뱀으로 태어나 여인의 몸속으로 들어갔는데
놀란 여인이 뱀을 뿌리쳐 떨어져 죽은 자리에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 어찌 보면 황당한 전설 같아
보이지만 온갖 꽃들이 어우러지는 계절에는 상사폭포의 넓적한 바위에 앉아 나누는 사랑이 더없이
애틋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사랑이 식어 이혼 위기에 처해있는 황혼들이여,
이 상사폭포에 와서 구구절절 사랑을 나누지 않으련, 아득한 옛날 여인네를 사모했던 남정네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아무리 매몰찬 여자라도 스르르 마음이 녹지 않겠는가. 뱀으로 변한 남정네를
뿌리치지 않고 기꺼이 사랑으로 받아준다면 살면서 쌓였던 회한이나 설움, 상처 같은 것들 한 순간에
때죽나무 꽃향기를 타고 먼 하늘에 퍼지지 않으리,
상사폭포, 한 여인네를 짝사랑하다 죽은 남정네의 혼이 서려있다
상사폭포위에서 낮잠을 즐기다
때죽나무꽃
상사폭포를 발치에 깔고 점심을 풀어 놓는다. 모두들 집에서 싸가지고 온 도시락 냄새가 진한 꽃향기와
어울려 입맛을 당기게 한다. 그러나 난 그 맛깔난 점심도 외면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
오는 그것이 무슨 병이라고 근 한 달을 생식하며 속을 비워내야 하는 엄청난 고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생식과 야채로만 근근이 이어가는 이 생식법을 고수하다간 나도 모르게 몸 한 자락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만큼 먹고, 마시고 싶은 것을 외면하고 살기란 힘들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어쩌랴, 무식하게도 내가 자초한일, 근 한 달 동안은 나는 하안거에 든 스님처럼 생식으로
고행을 해야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는데 모처럼 밞은 이 길의 풍광이 헛되지는 않을까.
무너질 듯한 몸을 일으켜 다시 산길을 오른다. 천남성이 눈에 뛴다. 사약의 재료로 쓰는
독성 식물이다. 사극을 보면 임금에게 사약을 받고 죽어가는 후궁이나 신하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띄는데 그 사약이 바로 천남성 같은 독성식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 옛날 장희빈이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나 송시열 모두 이 천남성을 먹고 죽은 것이 아닐까 궁금해졌다.
고동재에서 방곡마을까지 걷다
이제 쌍재와 고동재 두 고개를 넘으면 수철마을에 닿는다. 쌍재는 그다지 높지 않아 걷기에 편한 길이다.
여기서 부터도 드문드문 때죽나무꽃과 국수나무곷이 지천이다. 은방울 군락지도 나타난다.
쌍재에 올라서니 지리산 자락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좁은 산길로만 다니던 답답함이 한순간에
씻어진다. 저 너른 전답과 실핏줄처럼 늘어진 산길들, 따순 햇살에 반사되는 산뜻한 집들이 한 혈육처럼
서로 의지한채 지리산을 아름다운 산하로 만들고 있다.
쌍재를 넘고 도착한 곳이 고동재다. 제법 넓은 임도로 닦여진 고동재는 산객들이 지친 심신을 내려놓고
다리품을 쉬어가기 딱 알맞은 곳이다. 주막이 있고 벤취도 있다.
쌍재 오르는 길
쌍재에서 내려다 본 지리산 마을의 전경
천남성
왼쪽으로 내려가면 수철마을에 닿는 길이고 오른쪽으로는 방곡마을로 가는 길이다. 일행은 여기서
잠깐 가뿐 숨을 몰아쉬며 애초 계획했던 여정에 손질을 가한다.
마지막 종착점인 수철마을 대신 방곡마을을 선택한 것이다. 모두들 기진맥진한 탓에 방곡마을에 도착해
그 부근에 주차해둔 차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혹시 산길에 은방울꽃이 많던가요”
자가용에서 내린 한 여자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덩치가 큰 카메라를 챙긴 남자를 보니 야생화 사진을
찍으로 다니는 사진 애호가인 모양이다. 그래도 그 많은 꽃들 중에 하필 이 먼 곳까지 흔한 은방울꽃을
찍으러 오다니, 쌍재 부근엔 은방울 군락지가 지천이라고 하니 고맙다는 인사가 늘어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은방울꽃이 조금씩 지고 있어 꽃빛깔이 그다지 싱싱하고 곱지는 않다.
고동재에서 방곡마을까지의 산길도 오직 침묵의 연속이다. 뱀꼬리처럼 굽이치는 황톳길이 부드러워
걷기에 좋았고 산길 주변으로 손을 내미는 야생화의 손길이 있어 심심하지는 않다. 오직 보이는 것이라곤
하늘의 뭉게구름과 녹음방초뿐이다.
(야생화 상식)
붓꽃(붓꽃과)
쭉 뻗은 꽃대에 핀 꽃봉오리가 붓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민간요법으로 피부병에 사용,
각시, 노랑, 부채. 제비 등 그종류가 다양하다
때죽나무꽃(때죽나무과)
반질반질한 회색의 열매가 떼로 몰려있는 스님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에는 때중나무에서 때죽나무로 이름이 바뀜
줄기나 잎을 찧어 물에 풀어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여정) 방곡마을- 상사폭포--쌍재- 고동재--수철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