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좌도시 동인지
테마 산문)
어우리에는 그리움이 들어 있다
어우리란 말이 있다. 금산을 비롯한 일부 지방에서 통용되던 말이다.
좌도시 글감이 아니면 들어보지 못했을 토박이말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어우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고향에 살면서도 어우리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기에 헷갈렸다.
어우리는 마을에 일손이 부족할 때 서로 어울려 일을 해주고 이익을 나누는 것이다.
제주도 방언에 “어울렁더울렁”이란 말이 있다. “어우러져 더불어” 어울더울 살아가라는 뜻이다.
어우리 속에도 이런 뜻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 농촌에서 보리밭을 매거나 모를 심거나
탈곡기로 타작을 할 때 어울더울 일을 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우리는 옛말이 되었지만 그 속에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이 들어 있다.
테마 시)
어울더울
그리움은 마당에서 볏단을 털던 탈곡기 소리다
퍽퍽 콩 다발을 털던 도리깨 소리다
아버지 엄마, 논일 들일에 뼈가 부서져도
힘든 노동 멈추지 않는 건 저 소리들 때문이다
저 소리가 배고픈 가족과 들판을 먹여 살렸기 때문이다
아버지 엄마, 삭신 쑤셔 방바닥 베고 누울 땐
이웃들 천사처럼 다가와 덥석 손을 내밀며
어울더울 들판을 쓸고 가는 바람처럼 노래 불렀다
빈 들판에 가슴이 아린 것도
그 옛날 호흡으로 박자 맞추며
어울더울 폐달을 밟아대던 탈곡기 소리 때문이다
가슴 치듯 어울더울 콩을 털던 도리깨 소리 때문이다
동인 시)
엘리베이터 유령선 1
철문이 관 뚜껑처럼 닫히고
공중열차가 위로 올라간다
보턴은 사람들이 도착할 행선지를 알려주지만
그곳까지 갈 동안에 서로는 침묵한다
간혹 바닥을 내려다보며
혹은 여자의 목덜미를 보며
그러나 짧은 순간 모두가 약속한 듯 생각에 잠긴다
철문이 잠깐 열릴 때
약속한 듯 얼굴 한번 쓱 스캔하지만
단지 그것뿐
사람들은 다시 생각에 잠긴다
생각은 생각을 낳고 꼭대기 층까지 올라간다
아마도 콘크리트 건물 속을 오르내리는 공중열차가
웜홀을 통과하는 유령선 같다는 생각에 잠길 때
공중열차가 잠깐 관 뚜껑을 활짝 연다
저 멀리서 흰 옷을 입은 여자들 머리 푼 채 달려온다
잠깐만요
꼭 관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유령들처럼 섬뜩하다
엘리베이터 유령선 2
공중 열차의 문이 살짝 열리고 닫힌다
마치 관 뚜껑이 열리고 닫히듯
난 소리 없이 닫히는 열차 속에 덜컥 갇힌다
없던 공항장애가 생겨났나
누가 목을 조인다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 머리채를 확 낚아채는데
맙소사, 꿈이었구나
밤새도록 해부학을 공부하다 눈 비비며 나온 길
시간은 새벽에 닿아
침묵으로 버튼을 누를 때
어인일인지 열차는 안치실 옆에 머문다
아직도 불 켜진 안치실
도대체 저곳을 맘대로 들락거리는 간 큰 이는 누구일까
죽은 엄마의 얼굴을 보지 못하던 내가
해부학 의사가 된 건 운명이었다
운명은 그렇게 무서움도 이기는 거라고
또 생각에 잠길 때
관 뚜껑이 열리듯 다시 열리는 철문
새벽을 밟으며
걸어가는 내 구두 속에서
여자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틀니
노모는 틀니로 세상을 버텼다
돌이라도 씹을 것 같은 젊은 날의 이빨은 몽땅 빠졌다
그래도 생 이빨만한 게 없다고
늘 뭔가를 우물거렸다
암소처럼 되새김질하는 엄마가 신기했지만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잇몸으로 우물거리는 엄마의 얼굴은 쓸쓸했다
그러다 잇몸마저 망친다고 틀니를 해주었지만
그것도 답답한지 틀니를 물그릇 속에 담가 두었다
물그릇 속의 틀니는 귀신처럼 허허 웃고 있었다.
소리 없는 웃음에 놀라 손을 대기도 싫었지만
잇몸으로 견뎠던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엄마, 엄마 붙들고 통곡해도 시원치 않다
틀니는 물그릇 속에서 조개껍질처럼 입을 벌리고 있지만
틀니가 없던 날을 생각해보라
잇몸으로 어떻게 거친 밥을 먹고 살 수 있겠는지를
입 딱 벌리고 자고 있는 엄마의 입 속이
동굴처럼 허전하다
직립의 정의
침엽수는 서늘한 정의로 자란다
오직 직립만을 고집한다
이분법에 기대지 않는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침엽수는 두 손 벌려 구걸하지 않는다
양손 벌려 자라는 활엽수룰 봐라
그들은 오지랖이 넓어
가을이면 온 산을
단풍으로 물들이고 낙엽을 덮어준다
침엽수는 그런 아량이 없다
사시사철 서늘한 정의를 부르짖으며
짙푸른 마음으로 살기에
산속은 더 젋어진다
장대비 소리치는 밤
칠월의 비가 장대처럼 굵게 내렸다. 끊기지 않고 후려치는 빗방울이 하늘에 닿아 있겠지, 아마 별이 울고 있는지도 몰라. 장대로 하늘에 늘어진 별 나무를 후려쳐 떨어진 별들이 서러워서 지상에 뿌리는 울음인지도 몰라. 비는 양철지붕을 앙가슴처럼 때리는데 이때 오는 비는 아암, 굵은 장대비지. 그 옛날 엄마와 감을 따던 장대도 굵긴 굵었지, 감 따기 힘들어 장대로 감나무를 후려치면 주먹 감들이 우르르 떨어지는 소리, 그 소리 장대비처럼 아득히 비에 젖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