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4. 29.
하노이 참사에 대한 김정은의 반응으로 처음 나온 것이 지난 12일의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이다. 세 개의 키워드가 시선을 끈다. 자력갱생 강조, 남조선당국의 “오지랖 넓은 중재자 행세” 핀잔, 북한이 패권 쟁탈전이 치열한 지역에 위치한다는 지리(geography) 인식이다.
김정은은 미국이 3차 수뇌회담을 하자고 하면 연말까지 한 번은 더 해 볼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서둘지 않겠다고 한다. 그래서 김정은은 국제 제재 하의 북한이 자력갱생으로 버틸 각오를 천명했다.
김정은은 남조선당국이 오지랖 넓은 중재자나 촉진자 행세를 하지 말고 민족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라고 주문했다. 북한의 『조선말 대사전』은 ‘오지랖이 넓다’를 “더 얻어 가지려고 염치없이 행동한다”로 설명한다. 김정은의 몰염치가 도를 넘는다. 그런 말 듣고도 아무 말 못 하는 문 대통령이 더 답답하다.
김정은의 지리 인식은 동북아 국가들의 친소(親疎) 관계가 재편되는 오늘의 상황에 대한 대응이다. 김정은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는 당장의 목적은 대북 제재 완화 지원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은 하노이에서 중국의 후견만으로는 미국을 상대하기 버겁다는 현실을 실감하고 후원 세력 강화가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아시아·태평양 진출에 시동을 건 푸틴으로서는 환영할 일이다.
이런 변화를 냉전 시대 남방 3각 대 북방 3각의 부활로 해석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한·일 관계 악화와 미국 조야의 문재인 정부 불신으로 남방 3각은 이름에 값하는 실체가 없다. 트럼프 정부가 촉발한 무역 갈등으로 중·일이 밀착하고 있다. 아베는 지혜로운 양다리 외교를 한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 욱일승천기를 날리는 자위대 호위함을 칭다오(靑島) 중국 해군 관함식에 파견하고, 자신은 미국으로 가 퍼스트레이디 생일을 축하하고 트럼프와의 골프로 미·일 관계 건재를 과시한다.
트럼프도 5월 일왕 즉위식과 6월 오사카 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다. 이 기간 트럼프가 한국을 패스하고, G20 정상회의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불발된다면 한국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할 동력을 잃고 동북아의 외톨이가 된다. 한국 외교가 갈라파고스의 블랙홀로 빠져드는 비상상황이다. 상황 극복의 첫걸음은 한·일 관계 복원이다. 일본은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물밑 접촉을 쉬지 않는다. 한·일 관계를 벼랑 끝에 몰아넣은 문 대통령의 상황 인식에 문제가 있다.
3차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켜야 문 대통령의 힘이 살아난다. 김정은은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북한과 공유할 수 있는 방법론을 가지고 조·미 수뇌회담을 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임기는 2020년 말까지다. 그때까지 한 번 더 만나 하노이의 실패를 만회할, 북·미가 공유할 방법론이 찾아질지는 의문이다.
4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이 트럼프로부터 북·미 대화 재개를 위한 마술지팡이 같은 제안을 받아온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대북특사 파견이 늦어지고, 남북 정상회담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것도 김정은이 문 대통령이 가져올 트럼프의 제안에 끌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김정은이 북·미 협상자들을 물갈이하는 것도 뜻밖의 장애물이다. 미국 폼페이오 국무장관, 한국 서훈 국정원장의 협상 파트너였던 김영철을 리용호·최선희의 외교 라인으로 교체하면서 폼페이오를 배제하려 한다. 미국 제일의 북한통이 북한에는 갑자기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 것 같다. 그 두 사람의 한국 파트너도 바꿔야 하는 사태가 올지 모른다. 하노이에서 판을 뒤집어 위세가 당당한 존 볼턴만 건재하니 한동안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게임을 하는 사태가 걱정된다. 문 대통령이 전대미문의 협상가를 기용해야 하는 이유다.
김영희 명예대기자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