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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접
1章 휘청이는 그림자
항주(杭州).
절강성(浙江省)에 위치한 낭만과 풍류의 고장이다.
예로부터 미인과 미주(美酒)는 항주에서 찾으라고 했듯이,
항주는 특히 중원미인(中原美人)의 집산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꽃을 무색케 만드는 가인(佳人)들,
향기가 천 리(千里) 밖까지 풍겨오는 미주(美酒)들,
더구나 밤이 되면 불야성(不夜城)을 연상케 하는 호화로운 기루(妓樓)들은
항주가 아니면 찾아볼 수 없는 낭만을 지니고 있다.
항주(杭州).
멋과 향락과 낭만이 도사린 항주에는 유명한 것이 너무나 많다.
하나, 그 중에서도 항주오기(杭州五奇)야말로 유명한 것 중에서도 더 유명한 것이었으니…
항주오기,
이들은 다섯 사람의 독특한 인물들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다섯 사람 모두 천하에 알려진 기인(奇人)은 아니다.
단지, 그 하는 짓과 행동거지가 보통사람과는 좀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하나, 항주에서는 항주오기야말로 절대적인 기인으로 생각되어지고 있으니…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 *
"끄윽!"
그것은 음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도도했다.
아니, 도도히 흐르는 장강(長江)마냥 여유가 있었고 멋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독한 술을 마시고 가끔씩 내뱉는 딸국질 같은 것인데,
그 행동과 음성이 그렇게 여유있고 자연스러울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상아교(象牙橋).
항주에서 가장 번화한 회류화(會流花)에 위치한 교각이다.
교각 밑으로 투명한 개울이 지나고 있고,
교각 자체는 백옥투명한 대리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교각이다.
소년(少年), 일견해도 이제 십 사오 세밖에 되지않아 보이는 앳된 소년이었다.
한데, 아름다운 상아교의 난간에 서서 여유있게 딸국질을 하고 있는 장본인이 바로 그 소년이 아닌가?
"끄윽… 좋군! 역시 술이란 마시면 취하는 것이야."
세상의 모든 술을 혼자서 다 마신 것처럼 소년은 주절대고 있었다.
도도한 흥을 돋구며…
그 태도는 실로 여유있고 흥에 겨운 것이었다.
문득, 이제까지 돌아서 있던 소년이 몸을 돌렸다.
그와 함께 소년의 모든 것이 드러나 보였다.
한데 이럴 수가?
서생(書生)!
그렇다. 소년은 분명히 서생차림을 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마땅히 학문(學問)에 전념하고 있어야 할 서생이 백주 대낮에 술이라니?
더구나, 새하얀 백의(白衣)와 여인처럼 새하얀 피부를 지닌,
그야말로 문약해 뵈는 서생이 아닌가?
그뿐인가!
새하얀 문사건 밑의 두 눈은 한없이 고요한 심안같아 보였다.
흑백(黑白)이 너무나 뚜렷하여 한 번 보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눈,
또한 오똑 솟은 콧날의 기개는 또 어떠한가?
거기에다 여인의 그것보다 더 붉은 입술은…?
인중용봉(人中龍鳳)이 바로 저러할까!
소년의 용모는 가히 천품(天品)이었다.
거기에다, 약간 가늘어 보이는 큰 키는 소년의 용모를 더욱 뛰어나게 받쳐주고 있으니…
하나, 지금의 소년을 보고 누가 천품이라 칭찬할 수 있겠는가?
그때, 벌겋게 주기(酒氣)에 달아오른 소년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스쳐갔다.
미소, 작은 몸짓과도 같은 소년의 미소는 실로 기이한 느낌을 받게 했다.
금방이라도 홀림을 당할 듯한 황홀한 느낌을 받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어딘가 모르게 자조(自嘲)적인 허황을 주기도 했다.
실로 종잡을 수 없는 기이한 미소.
소년은 다시 미소를 거두며 문득 신형을 움직였다.
서서히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그와 함께, 그의 입에서는 낭랑한 노랫가락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허라! 벗님네들, 내 술[酒] 한 잔 받으소!
세상의 부귀영화(富貴榮華)는 허공 속의 구름이요,
가인(佳人)의 굳은 언약(言約)은 아침의 이슬 같으니,
풍진(風塵)의 허황함을 무엇으로 메꾸려오?
술[酒]이란 신선(神仙)이 만들어낸 좋은 약(藥).
그대여! 취몽주사(醉夢酒邪)의 즐거움을 어찌 잊으려 하오?
소년의 노랫가락은 낭랑했다.
하나, 어딘가 모르게 허황함이 짙게 드리워진 것은 웬일인가?
소년은 걷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휘청이는 걸음걸이였다.
그때, 언제부터인가 소년을 유심히 지켜보던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백의(白衣)와 황의(黃衣)를 걸치고 있는 선녀처럼 고운 여인들이었다.
아마도 주인과 시녀 사이인 듯!
특히, 주인으로 보이는 백의여인의 자태는 그야말로 절색이었다.
가냘픈 목의 선과 둥그런 어깨, 덜익어 풋풋해 뵈는 가슴과 세류요(細柳腰)의 가는 허리,
그 밑으로 둥그렇게 받치고 있는 둔부와 쭉 뻗은 다리의 곡선,
어느것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미인(美人)의 자태 그것이었다.
하나, 아쉽게도 그녀의 옥용(玉容)은 새하얀 장의(粧衣)로 가리워져 확인할 수는 없었다.
시비차림의 황의소녀는 이제 겨우 열 서너 살쯤 되보이는 앳된 소녀였다.
한데, 앳된 시비의 두 눈에 가득 담긴 안타까운 빛은 무엇인가?
문득 시비차림의 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소년을 향한 채였다.
"아가씨, 천후(天侯) 공자님은 오늘도 또 술을 드신 것 같아요."
"……."
백의소녀는 시비의 말에 대꾸도 없이
휘청거리며 말없이 걸어 가는 소년의 뒷모습만 주시하고 있었다.
장의(粧衣) 밖으로 빠꼼히 드러나 보인 그녀의 두 눈은 너무도 신비했다.
안타까움과 연민, 그리고 애틋함 같다고 해야할까?
수없이 많은 빛이 가득 담겨 흐르고 있었으나,
그녀의 추수(秋愁) 같은 눈망울은 실로 아름다웠다.
시비차림의 황의소녀는 백의소녀가 대답이 없자 힐끔 그녀를 바라봤다.
"아가씨! 천후 공자님은 정말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이제 폐인이 되버린 것일까요?"
황의소녀의 음성에는 안타까운 감정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러자, 비로소 백의소녀가 입을 열었다.
"추국(秋國),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옥음(玉音), 백의소녀의 음성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은 천상옥음(天上玉音)이었다.
황의소녀, 즉 추국으로 불린 소녀는 백의소녀의 말에 일순 가볍게 아미를 찡그렸다.
"하…하지만, 천후 공자님은 지난 일 년 동안 단 하루도 취하지 않는 날이 없었잖아요.
더구나…"
"추국!"
백의소녀는 추국의 말을 막았다.
하나, 그녀의 두 눈에 가득 담긴 연민과 안타까움은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추국은 그런 그녀를 힐끗 본 후, 혼자서 예쁜 입술을 나불거렸다.
"천후 공자님이 안됐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천하제일의 학문을 자랑하던 공자님이셨는데…
어느날 갑자기 술주정뱅이가 되버렸고
, 더더구나 요사이는 기루(妓樓)나 도박장에서 살고 계시니…
그뿐인가요. 어젯밤에는 시중 파락호와 대판 싸움까지 했으니…"
"추국아! 그만 두지 못하겠느냐?"
백의소녀는 듣기 괴로운 듯 추국의 말을 다시 막는다.
하나, 추국은 여전히 꽃잎 같은 입술을 삐쭉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가씨, 뭐 소비(小婢)가 틀린 말을 하고 있나요!
사실 천후공자님이 이렇게 된 것은 주인마님의 탓도 있어요."
순간 백의소녀의 두 눈에서 당황한 빛이 번뜩 스쳐갔다.
"추…추국아! 너 지금 무슨 말을…?"
"그렇잖아요. 작년에 천후공자님이 술을 조금 과하게 마셨다고
주인마님께서 그 다음날 파문(破門)시켜 버리셨으니…
천후공자님이 저렇게 되신 것은 어쩌면 그때의 충격 때문일 거예요."
추국의 말이 끝나자 백의소녀의 가냘픈 몸이 가늘게 떨렸다.
하나 추국의 그와 같은 말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볼 때, 그녀 자신도 추국의 말에 긍정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때, 추국은 백의소녀가 아무말 없이 가늘게 몸만 떨고 있자 안색을 가볍게 붉히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미안해요. 소비가 너무 심한 말씀을 드렸나봐요."
추국은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러자, 백의소녀는 비로소 심신을 안정시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다. 다만 조금 피로하구나.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듯하다."
그녀의 음성에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추국은 그와 같은 백의소녀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더니 그녀를 부축했다.
"아가씨, 소비가 부축할테니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그러자꾸나…"
백의소녀와 추국은 서서히 몸을 돌렸다.
한데 백의소녀는 몸을 돌리는 그 순간까지
소년의 뒷모습을 지켜본 후 안타까운 눈빛을 하는 것이었다.
'고…공자님, 소녀는 이제 어찌해야 하옵니까?'
그녀는 몹시 상심한 듯 걷는 발걸음이 몹시도 힘겨워 보였다.
그때였다.
천후라고 불린 소년이 돌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대저 인생이란 무엇이냐?
명예란 무엇이며 돈은 무엇이냐?
필요없다, 모두 필요없다.
오호라! 너 지금 나에게 우정이라 했느냐? 크하하핫!
우정은 흩어지고 바람과 같아 잡으면 정작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크하하핫! 사랑은 또 무엇이냐!
가인(佳人)의 정(情)은 물과 같아 그 담아놓은 그릇에 따라 변하니…
그것을…그토록 허망한 것을 나더러 섬기라 하느냐?
못한다… 나는 못해! 크하하핫!"
천후의 신형이 휘청했다.
그것은 결코 그가 취해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미쳤다는 말인가?
새파랗게 젊은 저 뛰어난 서생이 미친서생[狂書生]이란 말인가?
그때였다. 미친 듯 광소를 날리던 소년의 흐릿한 두 눈이 일시 하늘에 고정되었다.
마치 무엇인가 듣는 듯한 모습이었다.
천후야! 내 너를 나 추곡(秋谷)의 제일제자로 믿고 너를 정성으로 키웠는데…
이렇게 밖에 안되더냐?
오만과 방자함은 하늘을 뚫고…
스스로 광망스러워 천하제일기재라는 소문에 취해 자신을 돌보지 못하다니…
음성, 그것은 바로 천후의 심장을 후벼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음성의 주인이야말로 당금 천하에서 그 학문과 지식으로 가장 유명한
추곡(秋谷)선생이었으니…
천하제일석학(天下第一碩學)!
세인들은 추곡선생을 가리켜 천하제일현자(天下第一賢者)이자
천하제일석학으로 부르고 있다.
그때였다.
가만히 서 있던 천후가 또다시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스승님, 대저 학문이란 무엇이오이까?
낡아빠진 서책을 이르시면 제자는 그것들은 모조리 읽어 이제는 지겹다고 대답하겠습니다.
학문을 지혜라 일컬으시면 제자는 지금이라도 천하제일이라 자부하겠습니다.
하나, 학문을 견문(見聞)이라 일컬으시면 제자는 할말이 없습니다.
크하하하핫!"
광소, 폐부를 오려내는 듯 허황하게만 들리는 광소를 계속했다.
그러던 한순간, 천후는 또다시 삽시간에 얼어붙듯 광소를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그의 귓가에 또다시 추곡선생의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어리석은 놈, 내 언제 학문을 정의하더냐?
그것은 네놈 스스로 자신의 광망함을 자랑하기 위해 정의한 것이다.
오호라! 천하의 기재로 여겼거늘 한갖 쓸모없는 파락호였을 줄이야.
나가라! 이후 너는 누구에게도 나 추곡의 제자란 말을 하여서는 안된다.
천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충격이 그에게 새삼 되새겨진 것이다.
그러나 또다시…
"크하하하핫! 태어난 곳도, 부모도 모르는 저올시다.
스승님은 내 아무리 광망하였다 해도 스승님의 하나밖에 없는 제자 천후 올습니다.
한데, 그 몇 잔의 술로 저를 버리시나이까? 크하하하핫!"
오오…그것은 절규였다.
그것은 차라리 비명이었다.
천후!
뼈아픈 일 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그의 얼굴엔
어느새 축축한 물기가 젖어 있었다.
그런 상태로 천후는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되새기는지 몰랐다.
다만, 그냥 서 있을 뿐이었다.
괴이한 인물…천후, 무엇이 그를 저렇게 만든 것일까?
아니, 혹시 그는 미친서생이 아닐까?
한데 바로 그때였다. 한 필의 말이 무서운 속도로 상아교를 건너오고 있었다.
백마(白馬)였다.
잡털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명마였다.
마상(馬上)에는 한 명의 준수하기 이를 데 없는 청년이 타고 있었다.
새하얀 백의와 인상적인 눈매,
오똑한 콧날은 절로 위엄있게 보이고,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에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청년.
하나 아쉽게도, 양미간에 서린 새파란 기운은 그를 몹시 냉막하게 보이게 했고,
입가가 위로 조금 솟구친 것이 그의 성격이 몹시 오만하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더구나, 옆구리에 차고 있는 새하얀 검(劍)은 청년의 기상을 더욱 품위있고 위엄있어 보이게 했다.
청년은 무서운 속도로 말을 몰아오고 있었다.
한데, 천후는 그것도 모른 듯 멍하니 길 한복판에 서 있기만 했다.
말은 청년을 싣고 무섭게 짓쳐 들었다.
여인, 말없이 천후를 지켜보고 있던 그 여인은 볼 수 있었다.
청년이 탄 말이 무서운 속도로 천후를 짓뭉개듯 다가오는 것을…
여인은 추수 같은 두 눈에 말할 수 없는 경악을 담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터진 날카로운 부르짖음!
"안돼요! 황보공자님, 그는 천후예요!"
그때였다.
흡사 천후를 금방이라도 깔아버릴 듯한 청년이 탄 말이 돌연 허공으로 솟구쳤다.
오오…저 기마술(騎馬術)!
말은 삽시간에 멍하니 서 있는 천후의 몸을 타넘고 있지 않은가?
하나, 천후는 전혀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한 듯 돌처럼 서 있기만 했다.
그러던 한순간, 나직한 독백!
"후후후… 추소연, 아직도 나를 그토록 생각해 주다니… 고맙군
. 하나 걱정하지 마라. 나는 최소한 말에 치어 죽지는 않는다."
그것은 천후가 아무도 모르게 나직이 읊조린 것이 아니던가?
오오…그렇다면?
천후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도 그냥 있었다는 말인가?
청년(靑年)!
영웅의 기상이 물씬 풍기는 그는 지금 막 말에서 내려왔다.
그와 함께, 여인을 향해 정중히 포권지례를 했다.
"소연낭자! 반 년만에 뵙는구려! 그간 별고 없었는지?"
사뭇 진지하고 정중한 그의 모습에서는 조금 전 그 사건의 흔적이 배어있지 않았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맑고 침착한 모습이었다.
여인… 추소연, 그녀는 그런 청년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답례했다.
"황보공자님도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그리고 황보세가의 모든 분들도…?"
그녀 또한 아무런 내색을 짓지 않는다.
"그렇잖아도 아버님께서 오늘 황보공자님이 오신다고 하여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뵙게 되다니…"
"하하핫! 그렇소이까? 그것도 모두 인연이구려!"
낭랑한 웃음으로 청년이 대답을 대신하자 추소연이 가볍게 손짓을 한다.
"자… 가시지요. 아버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아하고 정중한 추소연의 몸짓에 황보웅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뭐랄까! 그것을 소유(所有)라고 해도 될까?
아니면… 남모르게 감추고 있는 연민의 끄나풀?
하나, 그 눈빛은 너무나 빠르게 사라지고 대신 호탕한 대소가 터진다.
"하하하핫! 소연낭자의 영접을 받다니, 이것참 영광이오이다."
짐짓 호탕하게 웃던 그는 문득 말고삐를 쥐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그의 두 눈은 천후를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다.
'천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내심 천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황보웅(皇甫雄)이다.
무림상에서 무림이대세가(武林二大世家)로 불리우는 황보세가의 소가주이기도 하다.
지금은 비록 나이가 어리나
당금 무림명숙들로부터 절대적인 칭찬과 기대를 한몸에 모으고 있는 인물,
황보웅.
그는 이렇게 천후 앞에, 추소연 앞에, 그리고 운명 앞에 나타났다.
*
걸인, 형편없이 구겨진 거렁뱅이 노인이었다.
커다란 호리병과 취한 눈,
그리고 평생 빨아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의복,
그는 상아교의 난간에 비스듬히 누워 천후가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천후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나직이 입을 열고 있었다.
"크으… 모두가 미쳐버린 세상… 거꾸로 돌아버린 이 세상은
그저 자신도 거꾸로 돌아야만 살아 갈 수 있지… 암!"
하나, 그 말을 끝내고 노인은 곧장 길게 누워 잠에 빠져 버리고 있었다.
노인, 그저 흔히 있을 수 있는 평범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는 상아교 바로 건너에 있는 길다란 노송 밑에서 길게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 또한 앞서의 걸인과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괴이한 말을 꺼내고 있었으니…
"크크크…대저 운명이란 참으로 묘한 거야.
인연도 마찬가지지.
제아무리 인연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거든.
또, 그런 몸부림은 악연(惡緣)일수록 더하지!"
도무지 그 말 자체로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괴이한 말!
또한, 노인 역시 말이 끝나자 길게 누워버린다.
천후는 들었다.
하나 그는 그때 아무런 표정도 눈빛도 없이 휘청이듯 그냥 걷고 있었으니…
천후, 사람들은 그를 광서생이라고 부른다.
항주의 소호(巢湖) 옆 천향소축에서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천하제일 석학인 추곡선생과 그의 딸 추소연과 함께 살던 그,
한때 천하제일기재라고도 불리던 그가 지금은 저렇듯 걷고 있다.
그에 관한 세인들의 평(評)은 다양하나 이것 하나는 맞는 것이다.
쯧쯧…아까운 인재(人才)가 안됐어.
추곡선생에게 파문당한 이후 저렇듯 술로 세월을 보내니…
아까운 일이야.
세인(世人)들의 평은 그렇다.
그리고 지금,
그런 평을 받고 있는 천후는
휘청이는 걸음으로 어디론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디론가…휘청이며…
* * *
월하루(月下樓),
항주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화려한 주루(酒樓)다.
서호(西湖)를 끼고 있는 회류하에서도
가장 넓은 도박장과 기루(妓樓) 등을 가지고 있는 월하루!
지금, 월하루의 삼층누각으로 비틀거리며 올라가는 인영이 있다.
새하얀 백의에 휘청이는 몸짓으로 계단을 하나씩 밟아가고 있는 인영, 천후였다.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듯 계단의 난간을 붙잡고
간신히 한발 한발 내딛는 모습이 안타깝다.
하나, 휘청이면서 어느새 그의 신형은 이미 주루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낭랑하던 웃음과 흥겨운 악이 끊이지 않던 월하루,
한데 그것이 돌연 거짓말처럼 끊어진 것이 아닌가?
그것도 천후가 막 주루의 주렴을 헤치고 들어서는 순간에 말이다.
천후, 그도 그것을 감지(感知)한 듯 일순 멈추어 섰다.
이어, 숙였던 고개를 서서히 들어 주루 안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미소, 흐릿한 미소가 어느새 그의 입가에 악마(惡魔)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주루 안[酒樓內], 지금 주루 안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웬만한 저택의 두 배만큼이나 넓은 실내,
그곳엔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아 있었다.
대다수가 서생차림이거나 화려한 화복(華服)을 걸친 풍류객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모두가 이제 막 들어선 천후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천후, 그는 흐릿한 시선으로 그 많은 인물들을 쭈욱 훑어봤다.
조금도 두려움이나 당혹함을 느끼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일순, 한차례 쓰윽 훑어가던 그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새나왔다.
"후후후…모두 귀 접힌 토끼눈이군! 왜들 이러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나 천후를 오늘 처음 보나?"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겨 주루의 점소이에게로 다가갔다.
이미 이십은 훨씬 넘어 보이는 청년의 모습을 한 점소이였다.
"이봐, 노칠! 말해봐라. 본 공자가 누구냐?"
천후는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매우 부드럽고 조용한 질문이었다.
한데, 노칠이라는 점소이는 갑자기 번들거리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당황해 하지 않는가?
아니, 그는 이미 천후가 그에게 다가갈 때부터 안전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말 한마디 못하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수밖에…
천후는 씨익 웃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악동의 모습이었다.
"노칠, 오늘 저녁식사는 꿀로 했나?"
노칠의 얼굴에 일순 의아함이 어렸다.
"고…공자, 꾸…꿀이라니요?"
"그렇지 않으면 왜 본 공자가 묻는 말에 대답이 없지?"
"그…그것은…그것은…"
노칠은 극히 부자연스럽게 몸을 가누며 말을 잇지 못했다.
"거봐! 그대는 분명히 꿀을 먹은 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천후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자신의 말에 대단히 만족하는지 그렇게 다시 묻는다.
노칠은 여전히 우물쭈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이 순간,
노칠 뿐만 아니라 주루안의 모든 인물들도 말 한마디 못하고 그대로 있지 않은가?
천후는 노칠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돌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칠!"
순간, 노칠은 화들짝 놀라며 급히 대답했다.
"아…예…예…소인은 오늘 저녁 틀림없이 꾸… 꿀을 먹었습니다."
"흠…!"
천후는 그때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다시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네가 꿀을 먹었다니 본 공자의 물음에 벙어리 행세를 하는 것을 용서해 준다."
그는 크게 관용을 베푼 듯 그렇게 중얼거린 후 몸을 돌려 몇 발짝 걸어갔다.
하나 다음 순간, 그는 다시 홱 돌아섰다.
그 순간, 한숨을 내쉬던 노칠은 크게 놀란 듯 몸을 부르르 떨고야 만다.
"고…공자님…!"
그의 놀란 두 눈은 왜냐고 묻고 있었다.
천후는 그런 그의 모습에 재미있다는 듯 씨익 웃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노칠, 이번까지 아흔 아홉 번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본 공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월미옥(月美玉)의 낭군되시는 분이다.
알겠느냐?"
"예…엣? 예…
"좋아, 이제야 통하는군.
그렇다면 너와 내가 통했다는 것을 기념으로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천일백로홍(千日白露紅) 한 근씩 전하도록,
그리고 본 공자에게는 한 말을 가져오는 것도 잊지말고."
천후는 말을 마친 후 여유있게 돌아섰다.
하나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돌아서며 한마디 더했다.
"물론 계산은 모두 월미옥(月美玉) 앞으로 달아 놓도록."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정말 돌아서서 서서히 창가로 걸어갔다.
순간, 이제까지 쥐죽은 듯 조용히 앉아있던 창가의 주객들 서너 명이 벼락같이 일어섰다.
이어, 후다닥 다른 자리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 천후가 그들에겐 마치 징그런 벌레라도 된 듯한 모습이었다.
천후, 그는 그것을 보자 더욱 흥이 난 듯 흐뭇하게 웃었다.
이어, 노칠에게 다시 큰소리로 명령했다.
"좋아, 좋아! 모두들 이제 나를 알아보는군.
기분이다. 노칠, 이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독한 죽엽청 닷 근씩을 추가로 주도록.
그리고 누구 하나 그것을 다 마시지 않는 한
이곳을 나갈 생각은 말 것을 따로이 당부하고 말이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조금 전에 앉아있던 주객들이 남긴 술을 병째 홀짝 마셨다.
"크으… 역시 술은 월하루의 천일백로홍이 으뜸이다.
흐흐…오늘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대작을 하니 더욱 술맛이 나겠군!"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안주로 가져가 덥썩 집어서 입에 쳐넣었다.
실로 지저분스런 행동이었다.
한데, 실로 모를 일이었다.
그 많은 주객들,
그들은 천후의 이런 안하무인격인 행동에 조금도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뿐인가?
거의 백여 명이나 되는 주객들은 저마다 천후의 눈치를 살피기에 정신이 없으니…
한편, 조금 전 천후와 상대하던 노칠은 주방에서 혼자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어휴… 저… 저… 개망나니 같은 자식을 봤나.
뭐, 나더러 저녁식사 대신 꿀을 먹었다고?"
"어휴…콱 내질러 버릴 수도 없고, 그냥 어휴!"
그는 연신 허공에다 주먹을 휘두르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의 그의 행동은 조금 전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때 주방에 있던 덩치가 크고 배가 불룩 튀어나온 인물이 그를 달랬다.
"노칠, 또 천후공자에게 당했군?"
그의 말에 노칠은 발끈해서 버럭 고함을 쳤다.
"공자? 공자 좋아하네. 추곡선생에게 쫓겨나 거지가 다된 게 무슨 공자야
. 개망나니에다 미친 놈에다 팔푼이에다… 뭐 그런 놈이지…
보아하니 노칠은 천후에 대해서 몹시 감정이 많은 것 같았다.
그러자 예의 그 덩치 큰 인물이 입을 열었다.
"이봐 노칠, 너무 그러지 말게나.
천후공자도 얼마나 타격이 컸으면 저렇게 망나니짓을 하겠는가?
아까운 인물이야.
작년까지만 해도 천하제일기재(天下第一奇才)로 명성이 높던 그가 아닌가?"
덩치 큰 인물의 말에 노칠은 일순 멀쑥해졌다.
하나 다음 순간, 그는 다시 분노했다.
"뭐 좋아.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 망나니가 도대체 뭐라고 그러는 줄 아나?
뭐 제놈이 월미옥낭자의 낭군이 된다나?
그뿐인가? 오늘도 황금 아홉 냥이나 되는 술값을 모두 월미옥낭자 앞으로 달아놨어."
"월미옥낭자 앞으로? 오늘 또 그랬단 말인가?"
"그래, 오늘도 주루 안의 모든 손님들께 술을 나누어 주고
다 마시지 않으면 못나간다고 공갈이나 치고, 어휴 그러니 내가 속이 안터지나?"
일순 덩치 큰 인물이 신비롭게 웃었다.
"노칠, 멋있지 않나?
월미옥낭자라면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고 재능있는 화중화(花中花)로 유명한데
, 더구나 그녀는 이곳 월하루를 단 육 개월만에 항주제일,
아니 천하제일 기루로 만든 장본인이 아닌가?"
순간, 노칠의 두 눈이 무섭게 치켜졌다.
"이봐 홍삼,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멋있다고?
그런 미인 중의 미인인 월미옥낭자를 제놈의 부인이라고 주절대는 그놈이 멋있어?
자네 혹시 돈 것이 아닌가?"
"하하하… 자네 이제 나한테까지 화를 내는군!"
"그럼 그런 말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나?
언감생심 감히 제놈이 월미옥낭자를 부인으로 생각하다니,
더구나 제놈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본 적이 없지 않아?"
그때 홍삼이라는 인물이 넌즈시 물었다.
"하하하…노칠, 그렇게 감정이 많은 걸 보니 오늘 천후공자와 한바탕 할 기세로군?
정말 그런가?"
"뭐라고?"
순간 노칠의 두 눈이 상큼 치켜졌다.
하나 그보다도 더욱 빠른 속도로 그의 눈은 내려 깔렸다.
"뭐…꼭 그렇다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그것이…"
"하하하… 알았네 알았어. 자네는 추소연낭자와 증오서생(憎惡書生) 때문이군?"
"뭐… 꼭… 그들 때문만이…"
"후후… 알았네, 알았어. 자… 이제 그만 이것을 들고 나가게!
지금쯤 어쩌면 자네가 두려워 하는 증오서생이 와 있을지 모르니 말이네…"
"뭐! 그가 왔단 말이냐?"
노칠의 두 눈에 금새 공포의 빛이 충만해졌다.
아니, 공포라기보다는 진저리라고 해야 옳을 것 같았다.
홍삼은 그런 그의 태도에 슬며시 웃었다.
"아니…아니 내 왔다고는 하지 않았네. 그저 전례(前例)로 보아 지금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그러니까 홍삼의 말이 채 끝나기 바로 직전,
주방 밖에서 낭랑한 일성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노칠!"
순간, 노칠은 순식간에 안색이 변하며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아이쿠…"
"와…왔네! 이봐 홍삼, 미안하지만 자네가 나갈 수 없겠나…나는…나는…"
노칠은 간절한 애원의 표정으로 홍삼에게 그렇게 말했다.
한데 홍삼이 막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前),
주방의 문이 왈칵 열리며 한 명의 서생이 들이닥쳤다.
"노칠…!"
서생(書生),
새하얀 문사건과 비단장의가 멋들어지게 어울리는 준수한 인물이었다.
나이 십 육칠 세쯤 되었을까?
마치 옥(玉)을 깎아 놓은 듯한 피부와 여인처럼 섬세한 이목구비.
그뿐인가? 가냘픈 몸매까지도 영락없이 여인을 방불케 하는 절세미공자(絶世美公子)였다.
하나, 옷차림과 음성, 그리고 행동거지는 영락없는 쾌남아였으니…
"노칠! 너는 본 공자의 말을 듣지 못했는가?"
서생의 여인처럼 고운 눈썹은 상큼 치켜떠져 있고,
흑백이 뚜렷한 두 눈에는 무서운 화염이 치솟고 있었다.
노칠, 그는 그 순간 서생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 태도는 조금 전의 그 당당함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서생, 그는 한순간 성큼 한 발을 노칠쪽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노칠, 그대는 또 혼이 나야겠군."
순간, 노칠의 얼굴이 다시 사색으로 바뀐다.
"고…공자님, 소생은…잠시…"
"뭐? 그래도 할말이 있나? 노칠, 너 내가 가장 증오하는 것이 뭐지?"
노칠의 고개가 순식간에 직각으로 꺾였다.
"예… 그것은 여인입니다. 그것도 아름답게 치장한 여인!"
노칠의 대답은 힘이 가득 들어찼다.
그것은 서생의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한데, 서생의 눈은 더욱 무섭게 타올랐다.
"노칠, 너는 그것을 알고도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
이제 네놈 눈에 본 공자는 비치지도 않는 건가?"
순간, 노칠의 얼굴이 다시 확 변했다.
"그…그럴 리가…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루에는 여인이 없었는데?"
다음 순간, 그는 미처 말을 끝내지도 않고 후다닥 밖으로 뛰쳐 나갔다.
서생은 그때서야 분노를 거두고 그도 따라 서서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때, 혼자 남은 홍삼이 신비롭게 씨익 웃었다.
"후후… 노칠이 열댓 번 혼나더니 이제는 증오서생을 보기만 해도 사색이 되버리는군.
후후… 더구나 천후공자와 증오서생은 결의형제(結義兄弟)이니
천후공자가 뭐라고 그래도 찍소리 못할 수밖에…"
그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뿐인가?
천향소축의 추소연소저가 가끔씩 천후공자를 부탁하며 용돈까지 주고 있으니…
노칠, 사실 그때가 좋은 거야. 후후후후…"
홍삼은 입가에 연신 신비로운 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조금 전에 나갔던 노칠이 다시 들어왔다.
한데, 그의 왼쪽 눈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지 않은가?
"어휴 내 팔자야. 이놈의 눈이 하루도 성할 날이 없으니…
이 모든 것이 다 저 천후인가 뭔가 하는 놈 때문이야.
뭐 저희들이 항주오기(杭州五奇)라고?
흥! 내가 보기엔 차라리 항주잡기(杭州雜奇)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는 연신 왼쪽 눈을 만지며 거의 울상이 되어 투덜대고 있었다.
홍삼,
그는 그런 그의 모습에 항상 대하는 일처럼 씨익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항주에는 다섯 명의 독특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을 항주에서는 오기(五奇)라 불러 그들의 행동에 대신한다.
항주오기(杭州五奇).
광서생(狂書生).
증오서생(憎惡書生).
화중화(花中花).
취몽(醉夢).
만기(萬技).
이들은 모두 기이하게도 한가지씩 기행(奇行)을 행한다.
때로는 그 도(度)가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게 별다른 인물들,
하나 분명한 것은, 항주에서는 그런 그들을 때로는 높이 살 때도 있다는 것이다.
광서생(狂書生), 그는 천후다.
한때 천하제일기재로 불리던 촉망받던 인물.
하나 어느날, 그는 돌연 미친서생[狂書生]으로 불리우고 말았다.
그가 하는 행동이 광인(狂人)의 그것과도 같이 기이하다.
술을 마셔도, 여인을 만나도 언제나 그는 광서생일 뿐이다.
언제던가?
그는 항주 최고의 추물(醜物)이자
무게가 이백 근 가까이 되는 만육녀(萬肉女)에게 청혼을 한 적이 있었다.
하나 불행히도, 추물 만육녀가 그를 미쳤다하여 그 청혼을 거절하는 순간,
천후는 삼 일 밤낮을 하늘을 원망하며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자신이 스스로 천하제일기녀(天下第一妓女)이자,
천하제일미인인 화중화(花中花) 월미옥의 낭군이라고 칭하고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나무라지도 않았고 비웃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미친서생이니 그런 언행(言行)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증오서생(憎惡書生), 그는 남자임에 틀림없다.
하나, 하늘의 안배가 잘못되었는지 그는 여인을 지극히 증오한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여인을 원수처럼 증오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는 항주뿐만 아니라 절강성 제일의 갑부인 만금보산(萬金寶産) 금대인(金大人)의 독자(獨子)다.
부자집 외아들이 다 그러하듯
증오서생의 기행 또한 광서생 못지 않다
. 아니,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하나, 괴이하게도 그는 광서생인 천후를 지극히 좋아하며 아낀다.
둘 사이는 결의형제 사이로 증오서생이 형이다.
그런데도 증오서생은 모든 것을 동생인 천후에게 양보한다.
그것은 그의 이름만큼이나 기이한 일에 속한다.
화중화(花中花),
그녀는 월하루에 속하는 기루(妓樓)의 기녀다.
하나, 그녀는 보통 기녀와는 질(質)적으로 다르다.
사실 오늘날의 월하루는 그녀 때문에 번성한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들은 화중화 월미옥이 월하루라는 기루에 있다는 자체에 통곡을 금치 못한다.
세인들은 그녀가 천상의 선녀(仙女)가 인세(人世)에 하강했으니,
당연히 황실(皇室)의 보옥(寶玉)이 되어야 하는데
하찮은 기녀가 되었다고 하며 비통해 한다.
그만큼 그녀의 미와 재능은 절대적인 것이다.
한데, 그녀에게도 한가지 기행(奇行)이 있으니…
그것은 그녀는 스스로 세 가지 관문(關門)을 만들어 손님을 접대한다는 것이다.
시문(詩門), 기문(奇門), 통문(通門)이라고 명칭되는 세 가지 관문은
모두 그녀가 직접 설치한 것으로,
이 세 곳을 다 통과한 사람만이 그녀가 직접 접대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굳이 그녀의 접대를 바라는 인물에게는 무려 황금 만 냥을 요구한다.
하나, 지금까지 누가 세 관문을 통과했는지,
또 황금 만 냥의 거금으로 그녀의 접대를 받은 인물이 얼마나 있었는지,
이 모든 것은 신비에 가려져 있다.
취몽(醉夢), 그는 하나의 걸인이다.
나이조차 짐작할 수 없는 희한한 인물 취몽!
그는 하루 열두 시진을 모두 술에 취해 보낸다.
그에게는 술이 유일한 인생이요, 낙(樂)인 셈이다.
한데, 그에게도 못버릴 버릇이자, 누구도 믿지않는 허풍벽이 있으니,
그는 누구에게나 만나기만 하면 이렇게 떠든다.
너, 내가 누군지 아나? 나는 바로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야.
나는 네가 원하면 너를 천하제일고수로 만들 수도 있단 말이야.
단, 그 대가는 황금 만 냥이야.
그것만 있으면 하루는 술걱정 안해도 되거든.
취몽, 그는 오늘도 그런 헛소리를 하고 다닌다.
하나, 누구 하나 그에게 황금 만 냥을 내준 사람은 없었다.
만기(萬技).
그는 만 가지 기술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도박, 투술(偸術), 성복(星卜), 의학… 등등…
그도 취몽처럼 나이며 출신 등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하나, 그가 온갖 잡술(雜術)에 대해 능통하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항주와 절강성내에서 도둑이나 강간 등
잡스런 사건만 터지면 그는 곧장 관부(官府)로 붙들려 가기 때문이다.
한데 기이하게도, 그는 붙들려 간 지 열 시진도 않되어
여유있게 관부의 병사들이 메는 가마를 타고 나온다.
그리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세인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나 만기(萬技)는 그런 잡스런 짓을 하는 사람이 아냐.
내가 지닌 절기(絶技)는 천하제일이야.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내 절기를 전수받을 만한 인물이 있을지…
그가 바로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될 거야.
만기(萬技).
그는 오늘도 이집저집 기울이고 다니다가
가끔씩 관부에도 출장을 떠나곤 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