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고장, 영주(榮州)의 인물들
김 장 환/전 동양대 교수/한국선비연구원장
한반도를 종단하는 백두대간의 중추인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자리한 영주시는 소백산을 배산(背山)으로 하여 낙동강 상류인 남원천과 서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소백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活人山)’이라고 불리었으며 소백산 줄기마다 부석사·희방사·비로사·성혈사·초암사 등 오랜 명찰들이 있어 민초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고, 계곡과 봉우리마다 선비들의 시문(詩文)이 남아 오늘까지도 후세들에게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의 큰 고비마다 이 산 아래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인물들이 한반도 역사의 물줄기를 돌리고 한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바꾸는데 기여해 왔다.
멀리 삼국시대에는 신라 죽죽(竹竹)장군의 죽령 개척으로 소백산맥 이남인 신라와 이북인 고구려의 소통의 시대가 열렸으며, 신라와 고구려가 한반도 패권쟁취의 교두보 마련을 위하여 부딪친 최전위지역이 죽령과 영주였다. 그 여파로 고구려 문화유산인 고분벽화가 최남단에 남아있는 곳이 영주이며, 영주는 신라와 고구려의 문화가 병존함으로서 양국문화의 화학적 통합지대임이었음이 역사적 유물의 발견으로 증명되고 있다.
소백산 전경
삼국통일 후에는 문무대왕이 삼국 백성들의 정신적 통일을 위한 사찰 건립을 의상대사(義湘大師)에게 요청하고, 의상대사는 화엄종을 개창하여 그 중심도량을 신라와 고구려, 백제 삼국의 변경이었던 영주 봉황산에 세우니 오늘의 부석사(浮石寺)이다. 부석사에는 의상대사와 당(唐)나라의 선묘낭자와 얽힌 애틋한 설화가 있어 관광의 묘미를 더해주는데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소백연봉을 바라보며 일몰을 감상하는 것이 아마 영주 관광의 백미일 것이다.
부석사
고려시대에는 왕건이 죽령 아래 영주를 교두보로 삼아 신라 영역을 유린하던 후백제의 견훤을 궤멸시키고 후삼국통일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 최씨 무신정권을 무너뜨려 왕권을 회복시키고 항몽(抗蒙)정권을 세운 김준(金俊) 장군이 영주 출신이며, 종래 영천(榮川)이던 지명이 영주(榮州)로 바뀐 것도 당시 집권자의 고향을 우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영주라는 지명은 김준이 피살된 이후에 다시 영천으로 환원되어 구한말 까지 사용되었다. 무신정권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김준의 왕권회복과 항몽투쟁 만큼은 지금도 역사학자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더욱이 원(元)나라가 고려를 지배하던 시대에는 영주 순흥 출신인 안향(安珦)선생이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도입하여 발전시킴으로서 불교의 부패와 무속신앙의 범람으로 황폐하였던 고려사회에 교육제도가 일신되고 인재가 양성되면서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새 나라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 정신적 기반이 형성되었다. 안향선생은 지금도 동방성리학의 비조(鼻祖)로서 숭앙받으며 문묘(文廟)와 소수서원 등 여러 원사(院祠)에서 배향을 받고 있다. 함께 소수서원에 배향된 안축(安軸)과 안보(安輔) 선생도 우리나라 국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안향선생 영정
조선이 개국되고 그 ‘선비의 나라 조선’의 설계자가 영주 출신인 정도전(鄭道傳) 선생이다. 정도전의 업적은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정도로 지대하며 그의 민본(民本)사상과 신권(臣權)주의는 현대의 국가경영논리에 적용하여도 손색이 없어 당시로서는 동서양을 통틀어 탁월한 정치사상가로 후대의 평가를 받고 있다. 태종 이방원에 의하여 오랫동안 사상과 업적이 왜곡되어 있다가 고종(高宗) 연간에 신원(伸寃)은 되었으나, 아직도 선생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그의 생가인 영주 서천(西川) 변에 있던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 에서는 오랜 기간 많은 인물들이 태어나고 성장하였지만 우리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분은 정도전 선생이다. 어린 눈에 넓고 거센 서천의 물줄기를 보며 나라를 개혁시킬 꿈을 꾸던 곳이 이곳이다. 그리고 시묘살이를 하며 후학양성 그리고 고려의 개혁을 꿈꾸었던 이산면에 있는 문천서당(文川書堂)이 있는데 생가와 문천서당 모두 제대로 유적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 이 모두 오랜 기간 왜곡되고 폄하되었던 유산이기도 한데 최근에서야 정도전 선생 재평가와 유적지 보호 관리를 위한 시민들의 자성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정도전 선생 초상
또 세종 조에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였던 김담(金淡) 선생은 이순지와 함께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등 많은 천문역서(天文曆書)를 편찬하여 우리나라에 맞는 역법을 만들어 농사와 일상생활에 혁신을 오게 하였는데 정도전처럼 삼판서고택 출신이다. 삼판서고택은 원래 정도전 선생의 부친인 정운경(鄭云敬)선생의 집으로 정도전의 생가이기도 하다. 고려 말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 선생이 사위인 황유정(黃有定)선생에게 집을 주고 황유정은 사위인 김소량(金小良)에게 주니 김소량의 아들 김담이 여기에서 태어났다. 정운경과 황유정, 김담 등 세분 판서가 태어났다고 하여 삼판서고택이라고 하며 원래는 구성산 아래 서천 변에 있었으나 1961년 영주 대수해로 허물어졌다. 대수해 복구공사 시 서천의 유로(流路)가 현재 위치로 변경되자 삼판서고택도 옮겨진 서천 언덕 위로 이건 되었다.
삼판서고택의 마지막 판서였던 김담 선생의 종택은 지금 무섬마을 선성김씨 집성촌에 있다. 강으로 둘러싸인 국내 전통 마을 중 가장 아름답고 고즈넉한 분위기로 관광객들의 높은 평판을 받고 있고 특히 이곳의 물 위를 건너는 외나무다리는 아름다워서 누구나 한번 건너고 싶은 길로 첫 손 손꼽히는 곳이다.
삼판댁 고택
무섬 외나무다리 전경
순흥에는 충절의 상징물인 금성단(錦城壇)이 소수서원에 인접하여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 후 순흥에 위리 안치되었던 세종의 여섯째아들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던 단종과 소백산 너머로 연락하며 단종복위운동을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됨으로서 이 지역을 피로 물들였던 정축지변(丁丑之變)의 현장이다. 정축지변의 실패로 단종이 사사(賜死)되고 순흥은 도호부에서 폐부되었다가 숙종 조에 와서야 다시 순흥부로 복설되었다. 복설되면서 금성대군과 이보흠(李甫欽) 부사 외에 무명충신지사들을 모신 금성단이 설치되어 오늘에도 제사를 올리고 있고, 충절을 위해 목숨을 바친 무명지사들의 제단 앞에 서면 누구나 그들의 단심(丹心)을 느끼며 눈시울을 붉히게 된다.
금성단 제단 전경
이 무렵 세조의 왕위찬탈에 저항하고 사화(士禍)에 관련되어 많은 선비들이 의리를 지키려고 벼슬을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러 소백산 아래 영주로 찾아들었으니 그 후손들이 지금도 영주 선비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제일 먼저 세조1년(1455년)에 안향 선생의 후손인 서파 안리(西坡 安理)선생이 안정면 대룡산에 은거하였고, 그 후 영주 화천에 은둔한 여산 송씨 동강 송계(東岡 宋啓)선생, 단산 등강촌으로 은둔한 달성 서씨 돈암 서한정(遯菴 徐翰廷)선생, 영주 휴천리로 은거한 옥천 전씨 휴계 전희철(休溪 全希哲)선생, 순흥 도촌에 은거한 우계 이씨 공북헌 이수형(拱北軒 李秀亨)선생, 영주 두서마을에 은거한 공주 이씨 두은 이진(杜隱 李畛)선생, 단산 사천리에 은거한 양천 허씨 남재 허윤공(南齋 許允恭)선생, 사육신 사건 후 1457년에 이산면 두암으로 은거한 성삼문의 종매부인 연안 김씨 김세형(金世衡)선생, 영주 배고개로 귀양왔다가 자리잡은 창원 황씨 황지헌(黃智軒)선생 등이 세조 치하에서 영주 지역으로 은거한 주요 은둔지사들이었다. 그 외에도 이름 없이 충절을 바치며 스러져간 인물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관련해서는 김종직의 문인이자 전희철의 사위인 야성 송씨 눌재 송석충(訥齋 宋碩忠)선생이 있다. 영주 한절마에 은거한 김효선은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서 단산면 병산의 처가에 의탁했던 청도 김씨 병산 김난상(山 金鸞祥)선생의 손자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서는 조광조와 일족이 피해를 입자 영주로 은거한 한양 조씨 조종(趙琮)선생이 있다. 이들은 은거지로 영주를 선택하여 절의정신의 맥을 이어가고 후손들에게 경(敬)과 의(義)에 바탕을 둔 선비정신을 전승하도록 하였다. 이들이 入鄕祖가 되어 각 성씨들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번성을 하게 되니 이후 이들이 영주 지역의 큰 정신문화를 이루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 하에 조선 중종 때 주세붕(周世鵬)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안향 선생을 추모하면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우니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이다. 주세붕군수가 이임한 후 3년 뒤에 부임한 이황 군수의 건의로 명종이 ‘소수서원(紹修書院)‘ 이란 사액을 내리니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고 우리나라 사립대학수준의 교육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전국에서 소수서원에 공부하러 오는 유생들이 넘쳐나니 안향선생의 성리학 도통을 이은 선비정신이 발현되면서 소수서원은 선비정신의 요람이 되었다. 오늘날 영주시를 일컬어 선비의 고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 근원한다고 할 수 있다. 소수서원에는 현재 주자(朱子)와 안향 선생, 주세붕군수 영정 외에도 소수서원과 관련이 없는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미수 허목(眉叟 許穆),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데 이는 후손들이 선조의 영정을 소수서원에 봉안하기를 청원하여 왕명으로 모시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소수서원이 선비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는지 알 수가 있다.
소수서원 명륜당
소수서원이 설립되던 시기에 주세붕군수를 도우며 활동한 영주 출신 인물로는 인물로는 「역범도(易範圖)」를 편찬한 구암 황효공(龜巖 黃孝恭) 선생, 안향의 후손인 매담 안공신(梅潭 安公信)선생, 퇴계 선생의 고제(高弟)인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 선생, 소고 박승임(嘯皐 朴承任) 선생 등이 있다. 특히 박승임 선생은 퇴계의 4대학맥(조목, 유성룡, 김성일, 정구)이 태동하기도 전에 제일 먼저 학파를 형성하였던 인물이다.
박승임 선생의 「문인록」에는 52명이 등록되어 있는데 김개국(金蓋國)·우세신(禹世臣)·장수희(張壽禧)·김륵(金玏)·권두문(權斗文)·남치형(南致亨)·이개립(李介立)·이여빈(李汝濱) 등의 제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면면이 모두 당시 영주 지역의 지성계를 대변하던 인물들이었다. 이들 제자 중에는 임진왜란 때 영주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개국 선생과 이개립 선생이 유명하며 권두문 선생은 임진왜란 중 적의 정세를 탐지해 기록한 「호구일록(虎口日錄)」을 남겨 군사학적으로도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만나 거북선의 원형설계도로 추측되고 있는 ‘귀갑선도’를 제작한 이덕홍(李德弘)선생과 배응경(裵應褧), 김응조(金應祖), 김영조(金榮祖), 정언숙(丁彦璹), 나이준(羅以俊) 등의 선비들이 영주를 빛내었다.
이런 선비정신은 일제 강점기에도 면면이 이어져 채기중(蔡基中)선생을 중심으로 최초의 광복단 투쟁이 시작된 곳이 풍기이며, 훗날 임시정부수립의 큰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또 유림대표로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하여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김동진(金東鎭)선생, 한말 의병항쟁 후기에 경북 북부․강원․충북 지역에서 크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교영(李敎永)장군, 일제하에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애국자의 유가족과 친지를 방문하여 독립투쟁 사적을 기록하고 당시의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기려수필(騎驢隨筆)을 편찬하였던 송상도(宋相燾)지사 등이 영주의 인물들이다. 그리고 글씨로는 강벽원(姜璧元)선생이 유명한데 안진경(顔眞卿)과 미불(米芾)의 골법(骨法)을 얻은 당대 제일의 명필이라고 평가를 받는다.
풍기 대한광복단 공원 전경
해방 이후 현대 인물을 소개하기는 이르지만 자행회(慈行會)와 관련된 분이 계시기에 소개를 드리고자 한다. 대구 남양학교와 수원 자혜학교 교장, 수봉재활원장, 자행회 이사장을 지내시며 우리나라 정신지체아 교육의 대부로 불리는 김동극(金東極) 선생이 그 분이시다. 김동극 선생은 또 아동문학가로서 아동문학소백동인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내며 영주를 아동문학교육의 발상지로 자리 매김하신 분으로 그의 시비가 영주문화예술회관 앞에 서 있다. 이동식, 박근칠 시인 등 후학들이 앞장서서 영주의 아동문학의 명맥을 전국에 빛내며 다시 후학양성에 전념하고 있다.
김동극 시비
또 김동극 선생의 초등학교 제자로서 선비정신을 실천한 분이 계시니 성균관대 총장을 지내고 우리나라 중어중문학의 대부이시며 제1회 대한민국선비대상을 받으신 중당 정범진(中堂 丁範鎭) 총장과 인권 변호사로 기개를 보이신 강신옥(姜信玉) 변호사가 그 분들이다. 특히 정범진 총장은 현존 인물로서 본인이 평생 모으고 기증받은 서화와 문방사우, 고서적들을 한 군데 모아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는 기념관을 고향 영주에 설립하였다. 이 중당선생기념관인 「모우재(慕愚齋)」에서는 올 곧게 선비정신을 지키며 살아오신 선생의 족적과 업적을 느낄 수 있어 보는 이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영주의 자연과 역사와 인물들을 소개하기에는 제 상식만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지만 원고 청탁에 응하여 선비의 고장 영주를 소개하다 보니 역사적 인물 들 만의 소개에 그쳐 아쉽기만 하다. 이 글이 혹시라도 영주를 직접 방문하도록 작은 길잡이 역할이라도 하게 된다면 더없는 영광으로 간직하고자 한다.
정범진 총장 기념관(모우재) 개관식
김 장 환(전 동양대 교수/한국선비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