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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무뢰한
용대운 저
(상) -
서 장
풍진천하(風塵天下)에 미친 놈(狂子)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1 장 천하광자(天下狂子) 1.
봉일평(鳳一平)이 그를 처음 본 것은 소주(蘇州)에서 제일 번화한 취선루(醉仙樓)의 이층 누각이었다.
무척 더운 날이었다.
그날도 봉일평은 더위를 피해 취선루의이층누각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취선루의 이층누각에 오르기만 해도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더운 줄을 몰랐으나 오늘의 날씨는 그야말로 폭염(暴炎)에 가까워 봉일평은 창가에 있으면서도 소매로 연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야 했다.
"제길...지독하게 덥군. 이 놈의 날씨가 아예 사람을 찌어 죽이려고 작정했나."
그는 약간 왜소한 체구에 단정한 용모를 하고 있었고 태도 또한 항상 깔끔했지만 오늘은 더워도 너무 더웠다. 오죽했으면 봉일평은 당장에라도 웃통을 훌훌 벗어던지고 시원한 그늘에 누워 낮잠이라도 자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만일 그랬다가는 온 소주성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 그의 벌거벗은 몸을 구경하느라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게 뻔 한지라 그저 창가에 턱을 고인 채 흐르는 땀을 씻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이층 밖을 무심코 내다보던 봉일평은 저 멀리서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은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용케도 취선루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도저히 용모를 알아볼 수가 없었으나 언뜻 보기에도 키가 엄청나게 컸다.
봉일평은 아직 그 흑의사내처럼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흑의를 입어서 더 커보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녹이 잔뜩 슬은 칼이 마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로 무지무지하게 큰 사람이었다.
"술...술..."
흑의사내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흐느적흐느적 다가와서는 취선루의 입구에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쿵!
황소가 쓰러져도 그것보다는 소리가 작았을 것이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가 쓰러지자 입구 쪽에 서 있던 점소이 하나가 깜짝 놀라 그에게로 다가갔다.
"여보시오...여보시오."
점소이는 흑의사내의 몸을 흔들었다.
봉일평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체구가 작은 점소이가 거대한 그의 몸을 흔드는 모습이 꼭 고목나무에 매미가 달라붙어 꼼지락거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흑의사내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미약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술...술 좀 줘..."
봉일평은 그 사람이 더위를 먹어서 물대신 술을 찾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술이든 물이든 시원한 것이라면 누구라도 한 잔 마시고 싶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흑의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술...술이다...술 냄새가 난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코를 킁킁거리더니 눈을 번뜩이며 취선루의 뒤쪽 뜰로 마구 달려갔다.
점소이는 화들짝 놀라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안돼요! 이봐요. 그곳은 술 창고란 말이오."
하나 흑의사내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 나왔는지 점소이를 확 밀치고는 미친 듯이 후원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꽥?"
어마어마한 체구의 그가 집어던지자 작고 왜소한 점소이는 그야말로 태풍을 만난 가랑잎처럼 사 오장 밖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앗? 저 놈 봐라!"
"막아라!"
안에 있던 취선루의 점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으나 그때는 이미 흑의사내는 후원 쪽으로 사라진 후였다.
점원들은 저마다 몽둥이나 나무막대를 들고 벌 떼같이 흑의사내가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봉일평은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이층에서 내려와 후원 쪽으로 다가갔다.
취선루의 술창고는 후원의 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봉일평이 막 후원으로 나왔을 때 흑의사내는 이미 술창고를 향해서 맹렬한기세로 돌진하고 있었다.
쾅!
벼락 치는 소리가 터지며 두꺼운 술창고의 문이 사람 형상으로 구멍이 뻥 뚫려 버렸다.
"저...저럴 수가..."
막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흑의사내를 뒤쫓아 오던 점원들이 그 광경을 보자 입을 딱 벌리며 들고 있던 몽둥이들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 술창고의 문은 특수 주문한 철심목(鐵心木)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강철 만큼이나 단단한 것이었다.
그 단단한 문을 흑의사내는 자신의 형체를 생생하게 남긴 채 그대로 뚫고 들어간 것이다.
흑의사내의 몸은 벌써 술창고 속으로 사라져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봉일평 또한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굉장한 내가공력(內家功力)이구나. 저 정도의 공력이라면 소주 제일의 고수(高手)라는 대신권(大神拳) 하충광(河沖廣)보다도 강하겠는데.'
점원들은 구멍이 뻥 뚫린 술창고 앞에서 감히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크. 큰일났다. 더운 공기가 들어가면 술이 금새 상하는데."
점원들이 안절부절못하자 그들 중 그래도 가장 체구가 크고 힘이 센 주방장이 용기를 내서 커다란 식칼을 들고 술 창고로 다가갔다.
이상하게도 술창고 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방장은 식칼을 힘주어 잡으며 술창고 안으로 한 발 들여 놓았다.
서늘한 공기가 더위를 씻어 주었고 냄새만 맡아도 취기를 느낄 만큼 독한 술향기가 풍겨 나왔다.
주방장은 어두컴컴한 술창고 속을 두리번거리다가 안쪽에 있는 밀실의 문이 박살난 채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그곳은 아주 특별한 장소로서 취선루가 천하에 자랑하는 옥빙주(玉氷酒)를보관하는 곳이었다.
옥빙주는 그 맛과 향기가 가히 천하일품이라 할 만큼 뛰어났으나 그 만큼 제조하고 보관하기가 까다로워서 취선루에서는 특별히 술 창고 속에 따로 밀실을 만들어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주방장은 떨리는 걸음으로 밀실로 다가갔다.
밀실의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콸콸콸콸...
그것은 마치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 같기도 했고 작은 폭포에서 물방울 튕기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아무튼 무언가 물줄기가 어딘가로 흐르는 듯한 음향이었다.
주방장은 삐끔 고개를 내밀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 순간 주방장은 눈이 툭 불거져 나온 채 입에 게거품을 물고 사지를 바르르 떨었다.
밀실 안의 옥빙주는 모두 열다섯 동아리였다. 그 동아리들은 장정 한 사람이 하나를 간신히 들만큼 컸는데 그 큰 동아리들이 모두 마개가 열려진 채 사방에 나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옥빙주는 술이 워낙 독해서 웬만한 술꾼이라도 작은 술병으로 하나만 마셔도 취기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인데 그 짧은 순간에 커다란 열다섯 개의 동아리가 모두 동이 나 버린 것이다.
주방장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넋을 잃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홀린 듯 밀실의 중앙으로 향했다.
밀실의 중앙. 조금 전의 흑의사내가 바닥에 누운 채 입을 딱 벌리고 마지막 남은 동아리를 처박고 있었다.
좔좔좔좔...
그 이상한 음향은 그 자의 목에서 나는 소리였다.
목젖이 꿈틀거릴 때마다 커다란 옥빙주의 동아리에서 폭포수 같은 술이 그의 목 안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주방장은 이곳 취선루에서 이십여 년을 생활해오면서 별의별 주당(酒黨)들을 다 보았지만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술을 처먹는 인간은 생전 처음 보았다.
이건 완전히 인간 세상의 하마였다.
주방장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마지막 옥빙주의 동아리마저 순식간에 바닥이 나 버렸다.
"꺼억..."
흑의사내는 커다란 트림을 토한 후 빈 동아리를 바닥에 휙 던졌다.
콰창!
파편이 사방으로 튀기자 그제서야 흑의사내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목을 타고 흘러내린 술들로 인해 그의 전신에서는 진한 술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그가 일어서자 술창고가 온통 꽉 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무지무지하게 큰 사람이었다. 주방장도 작은 체구는 아닌데 그와 비교하면 자라다 만 난쟁이처럼 왜소해 보였다.
거대한 체구의 흑의사내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오자 주방장은 자신도 모르게 식칼을 내던지며 벽에 몸을 찰싹 붙여 길을 비켜 주었다.
흑의사내는 고맙다는 듯 주방장의 통통한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고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크!"
밖에서 안의 눈치를 보고 있던 점원들이 앞을 다투어 사방으로 피했다.
흑의사내는 두 팔을 휘적거리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지날 때 우연인지 흑의사내는 봉일평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옴에 따라 봉일평은 코를 찌르는 술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가까이서 보니 봉일평은 그야말로 그의 얼굴 보기만도 아득할 정도였다.
고개를 들고 한참을 올려다 보아야 겨우 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흑의사내는 휘청거리며 봉일평의 곁을 지나다가 문득 고개를 떨구어 그를 내려다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그 자의 하얀 이가 살짝 비쳤다.
"귀여운 놈이로군..."
그러더니 솥뚜껑같이 엄청난 손을 들어 봉일평의 뺨을 꼬집는 것이 아닌가?
봉일평은 아연해져서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흑의사내는 봉일평의 뺨을 살짝 쥐고 몇 번 흔들더니 다시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봉일평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그가 저 만큼 걸어 나갈 때서야 봉일평은 간신히 정신이 들었다.
그의 곱상한 얼굴에는 아직도 흑의사내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봉일평은 너무도 화가 나고 약이 올라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한참동안이나 씩씩거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봉일평이 그 놈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결심하고 주위를 둘러 보았을 때는 그 자의 모습은 어디론가로 사라진 후였다.
봉일평은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의 눈빛이 점차 가라앉더니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흑의사내가 꼬집은 자신의 뺨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세상에 그런 미친 놈이 있다니...내가 감히 누구인지 알고..."
봉일평은 피식피식 웃으며 다시 취선루의 이층누각으로 올라갔다.
2.
그날 저녁.
봉일평은 심심하기도 하고 오후의 기분나쁜 일에 대한 화풀이도 할 겸해서 고노대(高老大)의 도박장을 찾아갔다.
고노대의 도박장은 소주 일대에서는 가장 크고 번창한 곳으로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봉일평은 두 번째로 그를 보았다.
* * *
그 망할 자식이 온 것은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는 저녁 무렵이었다.
한낮의 무더위도 한결 가셔서 낙칠(洛七)은 즐거운 마음으로 도박장으로 갔었다. 오늘따라 끗발이 잘 붙어서 낙칠은 제법 주머니가 두둑해질 정도로 돈을 땄다. 그런데 그때 바로 그 망할 놈의 자식이 나타난 것이다.
그 자식의 상통만 생각해도 낙칠은 한 달 동안 재수가 없었다.
그 자식은 이 무더운 여름날에 멋대가리도 없는 거무죽죽한 흑삼을 입고 허리에는 두부도 못 자를 것 같은 녹이 잔뜩 슬은 칼 하나를 달랑 매단 채 흐느적거리며 도박장의 안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키가 컸는지 그 자식이 들어오자 그 시끄럽던 도박장이 한순간이나마 조용해 졌다. 모두들 그 자식의 커다란 키와 엄청난 몸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기 때문이다.
낙칠은 그 자식을 처음 볼 때부터 기분이 나빴다. 그 자식이 나타나기 전만 해도 낙칠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자기가 남들보다 작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 망할 놈은 그보다 적어도 머리통 두 개는 더 큰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자식은 하고 많은 자리 중에 하필이면 낙칠이 한창 끗발을 올리고 있는 탁자로 와서 털썩 주저앉은 것이다.
의자가 뽀개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나도 한 판 낍시다."
그 자식이 입을 열 때마다 그 입에서는 도저히 인간의 몸에서 나는 냄새라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악취가 풍겨 나왔다.
(아니 이 자식은 술집 하수구에서 기어 나왔나...무슨 냄새가 이 따위냐?)
낙칠은 그때부터 재수가 없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 뒤로 벌어진 일은 낙칠의 삼십 생애 중 가장 처참한 것이었다.
그 인간하수구가 낙칠의 앞자리에 앉은 뒤로 낙칠은 손에 무슨 망령이 들렸는지 주사위를 던지기만 하면 일(一)아니면 이(二)가 나왔다. 아마 낮은 숫자로 승부를 겨루는 도박이었으면 낙칠은 전무후무한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도박은 높은 숫자를 겨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낙칠은 졸지에 알거지가 되었다.
더욱 울화통이 치미는 것은 그 인간하수구는 처음 시작할 때 달랑 한 냥만 가지고 했는데 도박장에서 돈 잃고 죽은 귀신이라도 씌웠는지 걸기만 하면 족족 이기는지라 차츰 그 돈이 불어나더니 나중에는 낙칠 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판돈을 몽땅 휩쓸어버렸다.
그 갈쿠리 같이 큰 손으로 도박대위의 은전을 긁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마음속의 심통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단지 그것뿐이면 낙칠은 '별 재수 없는 놈 다 보겠네'하고 침이나 탁 뱉으며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 인간하수구가 낙칠을 쳐다보며 말을 건네 왔던 것이다.
"돈이 떨어진 것 같은데 내가 좀 빌려줘도 되겠소?"
낙칠은 처음에는 자신의 귓구멍만 의심했다. 세상에 어떤 할 일없는 미친 놈이 도박장에 와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려고 하겠는가?
그것도 자기가 먼저 나서서 말이다.
그때 아마 천지신명께서 낙칠을 돌봐주셨다면 그의 귀를 순간적으로 멀게 했거나 아니면 그 인간하수구의 아가리를 잠깐 봉해버리셨을 것이다. 하지만 천지신명조차도 그 순간만은 선량한 낙칠을 버리고 말았다.
"바...방금 뭐라고 하셨소?"
낙칠이 귀를 후비며 더듬거리자 그 인간하수구는 씨익 웃더니 시궁창 같은 술 냄새를 확확 풍기며 말했다.
"내가 돈을 대줄 테니 몇 판 더 놀아보라고 했소. 왜 싫소?"
그제서야 비로소 낙칠은 자신의 귓구멍이 완벽한 성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정신없이 고개를 내둘렀다.
"시...싫다니...무슨 그런 섭한 말을...나...난 좋소."
얼마나 빨리 고개를 내둘렀는지 반대쪽으로 갔던 눈동자가 미처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해서 잠깐 동안이나마 낙칠은 사파리가 되었다.
그래서 낙칠은 그 인간하수구가 주는 돈으로 다시 한 판 벌리게 되었다.
그때 낙칠에게 선견지명(先見之明)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왜 처음 보는 낮선 사람이 자신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까 하고 의심했겠지만 아쉽게도 낙칠의 사전에 선견지명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뒤로 이상하게도 낙칠의 손에 아까와는 반대의 마법이 붙었다.
던지기만 하면 오(五)아니면 육(六)이 나오는 것이다.
낙칠은 하도 신통해서 여섯 판을 연거푸 이긴 다음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스스로 깨물어 보기까지 했다.
물론 손가락만 아팠다.
낙칠은 그 밤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다.
새벽 동이 훤히 터오를 무렵 낙칠의 탁자위에는 은화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나중에 낙칠은 자기가 그때 왜 그 은화들을 가지고 내빼지 않았는지 정말 저주스러울 정도로 후회를 했으나 그때의 심정은 이 기세를 계속 밀고 나가
후대(後代)에 길이 남을 위대한 벼락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낙칠이 기세를 올리는 동안 그 인간하수구는 재수가 달아났는지 별로 신통치 않게 끄적거리다가 겨우 수중에 은자 몇 푼만 달랑 남게 되었다.
그때 그 빌어먹을 인간하수구가 다시 낙칠을 바라보며 악취를 풍겨내었다.
"아까 빌려갔던 돈 좀 다시 돌려주겠소?"
낙칠은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아까 그가 빌려주었던 돈에다가 다시 열 냥 가량 더 얹어 주었다.
"옛소."
그것은 낙칠의 앞에 쌓였던 은자더미에서 아예 표도 나지 않을만한 액수였으나 낙칠은 지금까지 남에게 이런 선심을 베푼 적이 없었다.
인간하수구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고개만 까닥거리더니 그 돈으로 다시 노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바람에 재수에 옴이 붙었는지 낙칠의 손은 다시 희한한 재주를 부리기 시작했다. 바로 던지기만 하면 일(一)이 나오는 것이다.
아까와 다른 것은 이(二)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어...하는 사이에 낙칠의 앞에 쌓였던 수북한 은자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불과 반시진도 되지 않아 낙칠은 다시 홀라당 모두 털리고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정말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심성을 지닌 자라해도 열통이 끓어오를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 더 낙칠로 하여금 이성(理性)을 잃게 만든 것은 그 인간하수구가 자신이 준 돈으로 야금야금 돈을 따더니 마침내는 탁자에 수북하게 은자를 쌓아놓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은자는 거의 전부가 낙칠이 잃어버렸던 것들이었다.
낙칠은 얼굴이 울그락붉그락 한 채 한참동안이나 그 악취가 풍겨 나오는 인간하수구의 상판을 노려보고 있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아까 그 돈 다시 돌려주시오."
그 인간하수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돈이라니? 무슨 돈 말이오?"
낙칠은 자기가 돌아버리지 않는 것이 신통했다.
그는 떨지 말자...이럴 때 일수록 침착하자...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지 않느냐며 자신을 위로한 후 더듬거렸다.
"그..왜 아까 내가 당신에게 줄 때 더 얹어준...그 왜 있잖아요. 그 돈."
인간하수구는 멍청한 얼굴로 낙칠을 빤히 바라보다가 돌연 히죽 웃었다.
"아. 그 돈."
아마 죽은 애비가 살아 돌아와도 이렇게 기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낙칠은 손뼉을 탁 치며 얼굴가죽이 찢어지도록 웃어댔다.
"하하...그...그렇소. 이제 생각이 난 모양이구려."
인간하수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앞에 수북이 쌓인 은자 중에서 가장 꾀죄죄한 걸로 열 냥을 집어내더니 그에게 주었다.
"여기 있소."
낙칠은 그 돈을 받으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다...당신은 더 얹어 주지 않소?"
낙칠이 수북히 쌓인 은자를 쳐다보며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데도 인간하수구는 매정하게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낙칠은 정말 인간적으로 울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분명 빌려갔던 돈을 돌려주면서 열 냥이라는 거금을 얹어주었는데 이 빌어먹을 녀석은 매정하게도 달랑 원금만 상환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정말 뜨거운 심장을 가진 인간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매정한 일로 낙씨 문중(洛氏門中)에서는 상상도 못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돈 가진 놈이 돈 줄 생각이 없다는 데야... 게다가 덩치라도 작으면 험악하게 인상이라도 써 볼 텐데 이건 아무리 봐도 눈이라도 한 번 흘겼다가는 저 무쇠방망이 같은 커다란 주먹에 한 방 얻어맞을 것만 같았다.
그 주먹에 한 대 맞았다가는 낙칠이 아니라 낙칠의 할아버지가 와도 살아남지 못할게 뻔했다.
낙칠은 그 열 냥을 가지고 다시 도박대 앞에 앉으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오냐..어디 두고 보자. 내가 다시 돈을 따기만 하면 네 놈은 그날부로 나왔던 하수구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낙칠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시 도박에 열중했다.
과연...지성이면 감천이랄까?
아니면 천지신명께선 분명 하늘 어딘가에서 낙칠을 돌보고 계시는지...그 뒤로 낙칠의 손에는 다시 마법이 붙기 시작했다.
던졌다 하면 계속적으로 육(六)이 나오는 것이다.
아까와 다른 점은 오(五)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 다는 것 뿐이었다.
낙칠은 절로 신이 나서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었다.
벌써 한나절을 계속 도박대에 매달려 있자 아랫배가 살살 아프며 소변이 마려웠으나 낙칠은 끗발이 오를 때 따자 하고 나오려는 소변을 억지로 참고 계속적으로 주사위를 굴렸다.
정말 신나는 밤이었다.
낙칠의 앞에는 차곡차곡 은자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낙칠의 오줌통에도 차츰차츰 소변이 고이기 시작했다.
낙칠은 돈을 따는 재미에 희희낙락했으나 언제부턴가 조금씩 다리를 꼬며 괜히 눈을 부릅뜨곤 했다.
옆에 있던 인간하수구가 그를 보며 물었다.
"소변 마려우시오? 그럼 다녀오구려. 내가 대신 봐줄 테니."
낙칠은 인정사정없는 눈으로 그를 꼬나보았다.
그 인간하수구녀석은 천벌을 받았는지 그 뒤로 돈을 계속 잃고 있었는데 낙칠이 자리를 비우면 그새 끗발이 그 놈에게 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별 시덥잖은 소리! 난 맘만 먹으면 하루 왠종일 오줌 한 방울 안 나오는 사람이오."
낙칠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 도박에 열중했다.
하지만 한 번 입으로 오줌이라는 단어를 내뱉고 나자 이상하게도 더욱 소변이 마려웠다.
낙칠은 끙끙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주사위를 굴리기시작했다.
떼구르르...
그가 던진 주사위가 처음으로 오(五)를 가리켰다.
그 순간 낙칠은 찔끔하고 오줌 한 방울을 저렸다.
낙칠은 차츰 정신이 오락가락해졌다.
싸고 오느냐...참고 버티느냐...
주사위가 변기통으로 보이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소변과 그에 따른 부속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정신이 산만해지는데도 끗발은 신나게 올라서 점차 은자가 수북해졌다.
(참자...이 일생일대의 기회를 소변으로 날려 보낼 수는 없다. 소변은 지금 안 해도 앞으로 평생 신나게 쌀 수 있다.)
낙칠은 이를 악물며 사나이의 기개로 소변을 참았다.
마침 이번의 내기는 아주 커다란 것이 걸렸다.
물주 측에서 낙칠에게 단판승부를 제안한 것이다.
지금 낙칠의 앞에 있는 은자는 대략 보아도 이십만 냥에 가까웠다. 물주는 단판에 이십만 냥씩 걸고 대결을 벌이자고 했다.
낙칠이 이를 거절할리가 없었다.
(이번만 이기면...)
그때는 더 이상 도박을 하지 않아도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그리고 소변도 마음껏 볼 수가 있다.
낙칠은 어서 빨리 승부가 결정되기를 고대했다.
물주가 먼저 주사위를 던졌다.
물주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며 낙칠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물주는 겨우 이(二)를 던져낸 것이다.
(으흐흐...)
낙칠은 절로 회심의 미소를 짓다가 하마터면 그대로 쌀 뻔 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일생일대의 벼락부자가 될 것이다.
사십 만냥...!
실로 어마어마한 거금이 아닌가?
낙칠은 터질 듯한 아랫배를 필사적으로 움켜쥐며 힘차게 주사위를 던졌다.
떼구르르...
바닥을 구르는 주사위가 점차 멈춰지기 시작했다.
"아...육이다!"
중인들 틈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주사위가 멈춰지면서 윗면에 드러나는 숫자는 바로 육(六)이었던 것이다.
낙칠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바로 그때,
툭!
금시라도 멈춰질 듯 하던 주사위가 무엇에 걸렸는지 발랑 뒤집어 지면서 반대편 숫자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꽥?"
낙칠은 눈을 새하얗게 까뒤집었다.
뒤집혀진 주사위는 바로 일(一)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거의 손아귀에 들어왔던 거금 사십만냥이 그대로 날아가며 벼락부자의 꿈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 순간 낙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싸버리고 말았다.
흑의사내는 천천히 도박장을 벗어났다.
그런 다음 도박장의 뒤쪽 골목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한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화복을 입은 중년인이었는데 흑의사내를 보자 얼굴에 쓴웃음을 날렸다. 그는 이 도박장의 주인인 고노대(高老大)였다.
흑의사내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고노대는 얼굴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내기는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는데...설마 멀쩡한 어른이 남들 앞에서 바지에 오줌을 쌀 줄은 몰랐소. 정말 세상에는 별의별 놈이 다 있군."
그는 품속에서 전표다발을 꺼냈다.
"이것은 천하에서 가장 신용이 좋은 산서은호(山西銀號)에서 발행한 백 만 냥짜리 전표요. 확인해 보시오."
흑의사내는 확인해 보지도 않고 그것을 받아 자신의 품속으로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그런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몸을 돌려 걸어갔다. 고노대가 멍하니 보고 있는 동안 그의 커다란 몸은 골목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는 덩치답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요리조리 돌아갔다.
고노대의 시야를 벗어난 다음에도 흑의사내의 걸음은 멈추지를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빨라지는 것 같았다. 마치 누가 자신의 뒤를 쫓아와 돈을 빼앗아 가기라도 하는듯 빠르게 걷던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간곳은 하필이면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때 흑의사내는 몸을 홱 돌리더니 돌연 껄껄 웃기 시작했다.
"따라 오느라고 수고 많았다. 귀염둥이야."
한 사람이 쓴웃음을 지으며 골목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물론 봉일평이었다.
봉일평은 고노대의 도박장에서 흑의사내를 발견하고 지금까지 줄곧 그의 뒤를 몰래 따라왔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흑의사내는 이미 그가 뒤따르는 것을 알고 일부러 막다른 골목으로 온 게 분명했다.
봉일평은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흠...흠...지금 누구한테 하는 소리요?"
흑의사내는 거구를 흔들면서 웃었다.
"하하...누구긴 누구냐? 귀여운 네 녀석이지."
그러더니 그 커다란 손을 내밀어 다시 봉일평의 뺨을 만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봉일평은 질겁을 하고 뒤로 몸을 날렸다. 그 몸놀림은 가히 번개가 무색할 정도로 신속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봉일평이 방금 펼친 신법(身法)은 강호무림에서도 초일류에 속하는 것인데 느리게 다가오는 흑의사내의 손은 어느새 그의 뺨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네 놈의 뺨은 정말 말랑말랑하구나."
흑의사내는 낄낄거리며 아까처럼 그의 뺨을 꼬집어 몇 번 비틀었다.
"이...이런 미친..."
봉일평은 너무도 화가 치밀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번개같이 비호무영퇴(飛虎無影腿)의 수법으로 흑의사내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하나 그의 발이 채 뻗어 나오기도 전에 흑의사내의 거구는 이미 저 만큼 뒤로 물러나 있었다.
"하하...귀염둥이야. 다음에 다시 만나자."
봉일평이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서 있는 동안 흑의사내의 몸은 소리 없이 허공을 날아가기 시작했다.
봉일평은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이보시오! 당신은 대체 누구요?"
흑의사내의 몸은 이미 골목 저편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단지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하나의 음성이 저 멀리서 들려올 뿐이었다.
"엽단풍(葉丹楓)..."
그 음성의 마지막 말은 거의 백여 장 밖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인간의 신법이 어찌 이리도 빠를 수 있단 말인가?
봉일평은 그의 가공할 신법에 놀란 듯 쫓아갈 생각도 내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엽단풍이라...강호무림에 정말 괴짜가 나타났구나. 내 무유신보(無遊神步)를 따라잡을 수 있는 무공은 당금 무림에서 다섯 가지뿐인데 그 자의 수법(手法)이 무엇인지 모르겠군."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 자의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주겠다."
황혼의 햇살을 받은 그의 두 눈은 유달리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흑의사내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첫댓글 재미있게 읽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