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상사도(上士道) 수행 단계에서 지(止) 수행법(修行法)
6.1.1 지관쌍운(止觀雙運)의 길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을 막론하고,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모든 공덕(功德)은 모두 지관(止觀)의 결과(結果)이다. 습기(習氣)는 지(止)로 제거(除去)하고 악취(惡趣)는 관(觀)으로 제거(除去)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이 바로 지관(止觀) 즉,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의 효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止)의 자성(自性)은 안으로 바르게 머물러 사유(思惟)하고, 마음에 짓는 내심(內心)의 상속(相續)을 뜻하는 바대로 지어간다. 이와 같이 행하면, 몸과 마음에 경안(輕安, 경쾌하고 평안한 마음 상태)이 생기나니, 이것을 곧 지(止)라고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보살은 지(止)를 완전(完全)하게 추구할 수 있게 된다.
관(觀)의 자성(自性)은 몸과 마음의 경안(輕安)을 얻고, 그 자리에 머물러 심상(心相)을 버리고, 생각하는 모든 법(法) 안에서 삼매(三昧)가 행하는 영상(影像)을 관찰(觀察)하는 것이다.
바른 삼매(三昧)에 의지하여 마음을 안주(安住)시킴을 지(止)라 하고, 모든 법(法)을 바르게 분별(分別)하는 지혜를 관(觀)이라고 한다. 지(止)란 심일경성(心一境性), 즉 마음을 한 곳에 집중(集中)하는 것이요. 관(觀)이란 마음을 바르게 관찰(觀察)하는 것이다. 모든 법(法)은 이것으로 총괄(總括)되니, 즉 지도(止道)와 관도(觀道)로 총괄됨을 알아야 한다.
진실(眞實)한 지관(止觀)은 수행으로 얻은 공덕(功德)이기 때문에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모든 공덕이 모두 지관(止觀)의 과(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심일경성(心一境性)의 삼매(三昧)는 모두 지품(止品)에 들어 있고, 여소유(如所有)와 진소유(盡所有)의 의미(意味)를 구분(區分)하는 현묘하고 거룩한 지혜(妙善慧)는 관품(觀品)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대소승(大小乘)의 모든 공덕(功德)은 관찰혜(觀察慧)로 관찰하여 심일경성(心一境性)으로 수행하여야 한다. 즉 지수(止修)나 관수(觀修) 한 가지 품(品)에 치우쳐서 편중되게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한량 없는 일체의 모든 삼매(三昧)들은 지관(止觀)으로 총괄(總括) 됨을 알아야 한다. 삼매(三昧)를 추구하는 이들은 끝 없는 차별(差別)을 모두 분명하게 탐구(探究)하기 어렵기 때문에, 모든 삼매(三昧)를 총괄(總括)하는 지관(止觀) 양자(兩者)를 잘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탐구(探究)를 닦아 배워야 한다.
세존께서 모든 보살의 모든 삼매(三昧)를 무수하고 무량(無量)한 차별(差別)로 설하셨지만, 지관(止觀) 양자(兩者)로 보는 삼매(三昧)로 포괄(包括)될 수 있기 때문에 마땅히 지관쌍운(止觀雙運)의 길로 가야 한다.
왜 반드시 지관쌍수(止觀雙修)를 하여야 하는 것인가. 무아(無我)의 진실성(眞實性)을 통찰하는 정견(正見)이 있다고 할지라도, 마음을 한 곳에 집중(集中)하는 견고(堅固)한 삼매(三昧)가 없다면, 분별(分別)의 바람에 흔들리게 되면, 실상(實相)의 뜻을 분명하게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지관쌍수(止觀雙修)가 필요하게 된다.
예를 들면, 밤에 벽화(壁畵)를 보기 위하여 등불을 켰을 때,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충분히 밝다는 두 가지의 조건(條件)이 모두 만족되면, 모든 화상(畵像)을 아주 분명(分明)하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등불이 충분히 밝지 못하거나, 밝을 지라도 바람이 분다면, 모든 형상(形象)을 분명하게 볼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성문(聲聞)이 여래(如來)의 종성(種性)을 밝게 보지 못하는 이유는 삼매(三昧)의 힘은 비록 크지만, 지혜(智慧)의 힘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살이 지혜(智慧)의 힘은 강하지만, 분명(分明)하게 보지 못할 경우는 아직 삼매(三昧)의 힘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삼매(三昧)의 힘과 지혜(智慧)의 힘이 균등(均等)하게 구족(具足)하여야 모든 잘못된 견해의 그물을 영원히 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니, 한가지 힘만으로는 여래(如來)의 종성(種性)이 분명(分明)하게 나타나지 않게 된다. 지(止)의 힘으로 동요(動搖)하지 않게 되고, 관(觀)의 힘으로 산(山)과 같이 부동(不動)하여야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