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9. 08.
2022년 2월 4일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장.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좌우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착석한다. 모든 방송 중계 카메라는 경기장보다 귀빈석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자연스럽게 남·북·중 3자 정상회담이 개최된다. 미국 등 서방의 올림픽 보이콧으로 남북한 지도자만 한 VIP 귀빈은 없다. 제한된 관중이지만 서울과 북한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 남북 공동 열차를 타고 온 남북한 합동 응원단 800명이 한반도기를 흔든다. 2월 20일 폐막식까지 남북한 단일팀을 응원한다는 명분 아래 김여정 부부장과 남측 고위급 인사 등이 경기장을 휘젓고 다닌다. 난데없이 민족 공조 키워드가 대선 후보자 토론 화두로 등장하고 2월 한 달 내내 정상회담이라는 마술이 국내 언론을 장악한다. 대선은 평화냐 전쟁이냐를 선택한다는 선동적 구호가 난무하기 시작한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실정은 어느새 흐지부지 여론에서 사라진다. 1월까지 여야 후보 간 박빙 대결이 예상되었으나 비장의 정상회담 카드가 혜성처럼 나타나 여권 후보로 무게 추가 기울어진다. 3~5%의 무당(無黨)층은 평양 카드에 마음이 움직인다. 타임머신을 타고 내년을 조망해 본 베이징 풍경이다. 청와대와 여권이 구상하고 있을지도 모를 마지막 대선 승리 필살기 시나리오다.
▲ 지난 2018년 2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악수하고 있다. / 뉴시스
올가을 내내 청와대와 주석궁 간에 수차례 친서 교환이 물밑에서 부지런히 진행될지도 모른다. 평양의 결심 포인트는 서울이 원하는 4차 정상회담 구상에 박자를 맞출 실익 여부다. 2000년 6·15 정상회담 당시처럼 대가로 현금 4억5000만달러를 수령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평양은 문재인 정부의 강력한 요구로 세 차례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판문점 도보 다리 밀담, 문재인 대통령의 5·1경기장 연설, 남북한 정상 부부의 백두산 공동 등정 등 각종 평화 이벤트를 개최했으나 현금성 수익이 분명치 않다. 양측 간 물밑 거래를 외부에서 파악하기는 어려운 만큼 현재 평양의 대차대조표를 가늠하기는 용이하지 않다. 내부자 거래는 시간이 지나야 진상이 나올 수밖에 없다. 평양의 다른 관점은, 정상회담 카드를 남발하여 신비감을 상실할 경우 향후 입찰가가 낮아진다는 사실이다. 임기를 한두 달 남겨놓은 남한 지도자와 막판 세일 정상회담을 할 경우 5월 새 정부 출범 이후 정상회담을 통해 통일 리더를 꿈꾸는 인사와 빅딜의 호가가 낮아진다. 사진 촬영용의 식상한 정상회담 카드는 역풍을 불러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평양의 대남 통전부 전문 일꾼들은 평균 30년을 근무한다. 남측 정세 파악에 도사들이다.
역대 한국정부 대북 지원 사례
김정은은 두 가지 측면에서 노림수가 있다. 우선 여권 후보의 낙선이 우려될 경우 일단 동업자 의식이 발동할 수 있다. 2008년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바뀌면서 진보 정부와 보수 정부의 차이점을 확실히 인식한 바 있다. 남북 관계에서 갑의 위치를 상실한 기억이 생생하다. 여권 후보 당선을 위해 투표권은 없지만 외곽에서 힘을 보태는 일에 나선다. 다음은 서울이 확실한 현금과 엄청난 대북 지원 항목이 기재된 5년 이행 약속어음을 제공하는 경우다. 혹시 익명성이 보장된 거액 비트코인을 제공해준다면 대환영이다. 세계 최강인 북한의 해킹 실력을 감안하면 물밑 빅딜이 가능하다. 차기 지도자까지 배서(背書)하고 공증한 내용이라면 김정은도 마음이 동할 수 있다. 향후 임기 동안 평양에서 서울을 원격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처지에서 임기 말 정상회담은 무리한 국익 자해 행위다. 임기 말 정상회담의 폐해는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으로 실감했다. 대선이 두 달 남은 상황에서 추진한 2007년 10·4 남북 정상회담 선언은 8가지 항목으로 온갖 지원과 협력을 약속하였다. 애원(哀願) 수준의 정상회담은 자충수 수준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만들었다. 각종 대북 지원과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등 무리한 약속은 훗날 남북 관계 정립에 화근으로 작용했다. 전임 정부의 약속을 후임 정부가 이행 거부하는 행태에 대해 평양은 응징을 도모하였다. MB 정부 첫해가 지나도 약속은 이행하지 않고 2년 차에도 지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주석궁은 2009년 후반기부터 무력 기습 공격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2010년 초부터 북한 잠수함 부대의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고 결국 3월 천안함 기습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해 11월에는 연평도 포격이 가해졌다. 비공개와 공개적인 군사 도발로 약속어음 지급 거부를 되치기하였다. 이제는 임기 5년의 단임 대통령이 종신 지도자와 협상을 통해 한반도 평화통일을 달성하겠다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정상회담은 남북 관계의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다. 그간 역대 대통령들이 5차례 정상회담을 했지만 북핵은 실전 배치되어 동북아의 게임 체인저가 되었다.
문 대통령은 “우리 정부에 임기 말년은 없다”고 레임덕을 부인했다. 말년에도 민생 회복은 동의하지만 평양과 면담하는 데만 골몰한다면 완전 자충수다. 많은 국민이 부동산 폭등과 코로나 등으로 도탄에 처해있다. 무너진 내치를 조금이라도 일으켜 세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 또 한번 평양의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하산길에 긴급 국정 현안을 내팽개치고 백신과 식량 대북 지원, 화상 정상회담, 특사 파견 같은 짝사랑 카드에만 골몰한다면 모든 부담은 퇴임 후 국민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영변 핵 시설이 재가동되는데도 한미 연합 훈련 중단을 노린 통신선 복원 쇼로 국민을 현혹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영변 5MW 원자로 재가동을 보여주는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인 냉각수가 배출되고 플루토늄이 생산되고 있다. 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수명을 다했다. 9·19 군사 합의로 군(軍)은 무장해제 수준이다. 훈련하지 않는 군대는 사고의 연속이다. 임기 말년 한 차례 정상회담을 더 해본들 평양에서 어떤 변화를 유도하겠는가? 집착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훗날 평양만 사모한 지도자로 기록될 수 있다.
남성욱 /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