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2년 민광문이 세운 화봉원(華封院) 시를 지은 유희(劉曦)
고려 의종(1146.-1173) 때 민광문이 화봉원(華封院)을 건립했고 유희가 시를 짓다
학사(學士) 유희(劉曦)는 의종(毅廟) 어시(御試)에 응시하여 장원(壯元)하였는데 밀성수(密城守)가 되어 화봉원(華封院)을 지날 적에 낮에 쉬면서 벽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화봉원(華封院)
謫宦南行十六驛 좌천된 신하 남쪽으로 16역을 가서
今朝始踐尙原境 오늘 아침 비로소 상원(尙原)의 경계를 밟았네.
聊城側畔數里餘 요성(聊城) 곁 몇 리 남짓한 곳에
有一僻郡號聞慶. 문경(聞慶)이라 불리는 궁벽한 군이 있는데
郡邊新院勢甚嚴, 군(郡) 변방의 새로 지은 원(院) 형세가 매우 엄하다
爛然金碧交相映. 찬란히 금빛 벽이 서로 비추고
東偏小樓尤奇絶, 동편의 작은 누각 더욱 기묘하여
壓倒休文舊八詠 옛 팔영을 읊은 아름다운 문장 압도하네
美哉此屋是誰營, 아름답구나. 이 건물은 누가 세웠는가?
光文其名閔其姓. 이름은 광문(光文), 성은 민(閔)일세.
我是閔公門下人 내 민공 문하의 사람으로서
今見創構益自敬 지금 세우신 건물을 보니 더욱 절로 존경스럽도다.
嗟乎此人留在世 아! 이 분이 세상에 남아 있었다면
經營天下不爲病, 천하를 경영하는 데 병통이 없을 것을.
奈何天上玉樓成, 어떻게 천상의 옥루를 만들었는가.
鴈過長空不留影. 기러기가 허공을 지나가도 그림자 남기지 않듯이
塵凡已隔杳難尋 속세에서는 이미 막혀 찾기 어려우니
只自興歎玆之永 단지 절로 일어나는 한탄 길어지는구나’
만약 이 시를 곽동순에게 보게 하였다면, 아마도 기(記)라고 하였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화봉원」으로 지어 말하기를
화봉원(華封院)
萬緣灰冷老居士, 온갖 인연 재처럼 차가워진 늙은 거사(居士)
尙有丹心奉聖明 오로지 뜨거운 마음으로 성명(聖明)을 받드네.
天下蒼生皆請祝 천하 중생 모두의 축원을 바라면서
如何獨占華封名 어찌 홀로 화봉(華封)이라는 이름 차지하였을까.’
라고 하였다.
유희의 시는 옛날을 그리워하는 경우로 말이 번다하고 의미가 왜곡되었지만, 이 시는 이 원(화봉원)을 제목으로 글을 지었을 뿐이기 때문에 말이 간략하고 경계할 만하다.
유희의 아들인 대사성(大司成) 유충기(劉沖基)는 행실이 고결하고 문장이 넉넉하여 아버지 같은 풍모가 있었는데, 저술한 글들이 모두 흩어지고 없어져서 기록할 수 없었다.(참고문헌 ; 보한집補閑集 권상卷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