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씨 반만년 뿌리를 찾아서
강씨 반만년 뿌리를 찾아서
참고문헌 : 「齊太公世家」, 「周國世家」, 「楚國世家」, 「晉國世家」, 「魯國世家」, 「陳國世家」, 「宋國世家」, 풍국초 저 <中國上下오천년사>, 유발 하라리 저, <사피엔스>, 타밈 아사리 저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신채호 저 <조선상고사> 상하, 김한규 저 <요동사>, 천관우 저 <인물로 본 한국고대사>, 궁기시정 저 <中國史>, 존W.홀 저 <日本史>, 세토 타츠 야 저 <삼국지 100년전쟁>, 강대희 저 <간략 강씨역사실록> 외 다수
반만년이란 다시 말해 5000년 전은 단군왕검이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시기 6백 40여 년 전입니다. 강성 시조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문자(文子)를 타고 반만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 직계 선조님은 1000여 분이 넘습니다
선사시대 강성의 원류를 찾기까지
1. 대한민국은 성맹(姓盲)민국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핏줄은 수십만 년을 이어 현재에 다다랐고,
그 핏줄은 지구에 인류가 살 수 없을 때까지 이어질 겁니다.
대한민국은 성맹(姓盲)민국이 되었습니다. 강성(姜姓)만이라도 성씨에 눈을 떠야합니다. 강씨는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약 120여만 명이며,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이번 세기가 지나기 전, 조상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겠지요.현생 인류는 진화 과정에서 대략 600만 년 전후 인류의 조상이라고 추정되는 침팬지, 보노보와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나무에서 내려와 직립 보행을 시작했어요. 그 덕분에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1) 우리가 이 세상에 기적적으로 태어났다는 걸 아십니까?
우리의 목숨은 살아있는 황제보다 더 존엄합니다.
“강씨 뿌리를 찾아서”를 유튜브에 올리게 된 것은 우리의 원뿌리를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새삼 알게 해주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생 인류의 기준점이라 할 수 있는 악 3~4만 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에서 출발해서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는 농경으로 문명을 탄생시켰습니다. 정착 문명은 질병을 퍼트렸고, 부족 간 싸움을 부추겼습니다. 어느 원시인의 아버지의 어머니는 질병과 전쟁과 자연재해를 용케 피하고, 죽기 전에 한 생명을 탄생시켰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1300여 대(代) 후손이 됩니다. 이 어찌! 기적이라 아니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기적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귀중한 목숨을 이어가는 선택 받은 사람입니다. 기적은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나, 신(神)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말합니다.
신만이 할 수 있는 기적을 우리 조상님들이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만년 동안 조상님들에 의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래 그림 속 어느 한 원시인이 까마득한 옛날 옛적 우리들의 조상입니다.
강성 시조 염제(炎帝)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섬서성 보계시 신농사(좌)와 신농씨 조상(彫像)
전설시대의 고대 기록은 상세한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염제(炎帝)와 신농씨(神農氏)가 동일 인물인지 여부는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한 사람이듯 염제 신농씨 또한 한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姜氏는 현존하는 성씨 중 인류 최초의 성이며 으뜸 조상님은 염제 신농씨입니다. 그렇다면 염제 신농씨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아버지는 유웅국(有熊国) 왕 소전(少典)이고 어머니는 유교씨의 딸 안등(安登)씨이며 지금의 안휘성 회북시에서 출생했습니다. 유웅국은 고대 국가로 지금의 하남성 신정(新鄭)에서 기원전 27세기경 건국된 나라입니다.
소전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려오지 않은 이상, 아버지가 계실 것이고,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5대조부, 6대조부 이렇게 자꾸 위로 올라가면 앞서 이야기했듯이 3~4만여 년 전 현생 인류 중 한 사람인 어떤 원시인이 소전의 조상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소전씨가 강성(姜姓) 시조가 돼야 하는데? 왜 신농씨를 강성 시조로 모셨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모계시대에 남자에게는 아직 성이 없었습니다. 소전씨는 이름이고 성이 아닙니다. 예씨(芮氏)는 안등의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입니다. 모계시대가 끝나고 문자를 발명한 역사시대가 왔습니다. 역사가들은 선사시대의 전설을 바탕으로 지명과 종족 이름, 성씨를 문자로 기록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소전의 두 아들이 태어난 장소를 연고로 해서 성을 지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에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도 유웅국 왕 소전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염제 신농씨와 황제 헌원씨는 각각 다른 곳에서 태어났지만 형제입니다. 황제(黃帝)에서 黃은 동서남북의 오행 사상과 관련해 중심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이름 헌원씨(軒轅氏)는 그가 태어난 곳의 지명에서 따온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황제(黃帝)로 모시며, 오랫동안 황제지손(黃帝之孫)이라 했습니다. 최근에는 염황지손(炎黃之孫)이라 합니다. 즉, 염제와 황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염제의 후손들은 한족(漢族)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강성은 한족이 아닙니다.
다음 표는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와 <죽서기년>의 기록을 참고한 강성의 가장 먼 조상님과 황제(黃帝)의 가계(家系)입니다.
| 어떤 원시인 |
|
|
|
|
|
|
|
|
|
유웅국 왕 | 소전+안등 | 어머니 예씨의 딸 <국어(國語)> |
| | |
|
|
|
|
|
|
|
|
신농씨 어머니 | 강씨 |
| 공손씨 | 나중에 희(姬)씨로 개칭합니다 |
|
|
|
|
|
|
|
강성 시조 | 염제 신농씨 |
| 황제 헌원씨 | 한족의 시조 |
|
<사진은 섬서성 보계시에 있는 신농씨 아들 염제릉> |
역사는 구전(口傳)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구전을 문자로 표기하면서 ‘유사(有史)이래’라는 어구가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성이 먼저 생겼습니다. 염재 신농씨의 핏줄을 신농씨라 하지 않고 강씨(姜氏)라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한자는 형성(形聲)문자입니다. 형(形)은 그 한자의 뜻이고 성(聲)은 발음입니다. 강(姜)은 여(女)가 뜻이고, 양(羊)이 발음입니다. 강씨의 '강(姜)'자는 양(羊)자 아래 여(女)는 양치기 딸로 무릎을 꿇고 양젖을 짜내는 상형문자라 합니다.
양은 사람의 소리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원시 농업이 발명되기 전에 가축이 길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설문》은 "신농씨는 천수(天水)에서 태어나 성은 어머니의 성 강(姜)을 따랐다고 합니다. 모계사회에서는 아버지가 누구든 어머니의 성을 따랐습니다. 아버지의 개념이 없던 시대입니다.
중국 상고시대 최초의 전쟁 판천지전(阪泉之战)
중국 중서부의 관중평원(關中平原)과 산서(山西) 서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염제부족과 황제부족은 서로 융합하여 황하(黄河)를 건너 지금의 하북평원 서부까지 세력을 키웠습니다.
이후 중원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염제 부족과 황제 부족은 판천(阪泉)에서 3차에 걸쳐 격렬하게 싸우게 되었습니다. 염제와 황제 부족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유목민이었지만, 황제 헌원씨(軒轅氏) 부족은 일찌감치 유목 생활을 그만두고 정착해서 농사를 지어 식량이 풍부했습니다. 황제 부족은 한때 유목으로 행동이 민첩했고 식량 등 군수물자가 풍부하여 최강의 부족이었습니다. 이 씨족과 맞붙은 신농씨(神農氏) 부족에게는 뛰어난 병마(兵馬)는 있었지만,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황제 헌원씨 부족은 염제 부족의 그러한 약점을 정확하게 간파하여 후퇴하는 지연 전술을 운용했습니다. 두 부족은 지금의 개봉과 정주 사이 하남(河南)에서 싸웠지만, 처음에는 막상막하였습니다. 황제 부족은 염제부족을 유인하여지형이 자기에게 유리하고 적에게 불리한 하북으로 물러나 지금의 하북성 청원 판천(阪泉)까지 후퇴했습니다. 멋모르고 신나게 뒤쫓던 신농씨 부족은 헌원씨 부족의 계략에 말려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황제 부족에 패한 염제 부족은 지금까지 품었던 생각과 마음을 완전히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오랜 유목생활을 끝내고 정착하여 농경 생활을 하기 위해 동쪽으로 나아갔습니다. 지금의 익(冀), 노(鲁), 예(豫) 경계 지역에 있던 치우(蚩尤)의 구려족(九黎族)은 동에서 서쪽으로 진출하고 있었습니다. 염제 부족은 목축과 수렵 및 농경이 동시에 가능했던 탁록(涿鹿)의 벌판, 즉 지금의 태항산(太行山)과 태산(泰山) 사이의 지역까지 진출하여 치우 구려족과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중국 역사상 두 번째 전쟁 탁록전쟁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