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 음악편지＞행여,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원규시, 안치환 곡노래

[먼산]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이원규 시, 안치환 곡 노래

글쓴이 : 이종민

글의 고유코드 : 50

2008/08/13, 조회 : 295, 추천 : 15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시, 안치환 곡 노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3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려면
벌 받은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환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시라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시라

연화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지리산에 다녀왔습니다.
박남준 시인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고
스스로를 찾기 위해 능선 종주를 하고 왔습니다.
마음 다잡는 것이 급하다 보니 천황일출도 반야노을도
관심 밖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더위만큼이나 성가신 세상사,
그것에 번다하게 얽혀있는 제 자신에게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고통으로 번뇌를 잡을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스런 일입니다!
묘한 묘향암 부처님 전에 신 새벽 무릎이 풀릴 만큼 절도 했습니다.
오르기보다 더 힘겨운 내려오는 길 법계사 산신당에 들러
간절한 기도 올리고 있는 아낙네 눈치 살피며
묵상도 해보았습니다.
내려올 거 뭐 하러 오르나?
돌아오면 다 부질없는 일 되기 십상이지만
그래도 잠시 마음 한번 모아보았습니다.
무슨 대단한 반성을 한 것은 아니고  
그저 지친 스스로를 잠시 달래본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여름을 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원규 시인은 말합니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기 바랍니다.
다만 등산(登山)은 말고 입산(入山)하러 오시길.
등산은 인간의 정복욕과 교만의 길이지만
입산은 자연과 한 몸이 되는 상생(相生)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경쟁하듯이 지리산 종주를 하다 보면 보이는 것이라곤 앞 사람의 발꿈치뿐이지요.
하지만 입산의 마음으로 계곡의 바위들을 타고 흔적도 없이 오르는 사람에게는
몸속에 이미 지리산이 들어와 있습니다.
유정무정의 뭇 생명들이 곧 나의 거울이자 뿌리가 되는 것이지요.

종주 마치고 우쭐해지려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一日三省이라 하였으니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뒤돌아봐야 하겠지요.

이번 종주에서 얻은 사진으로 동영상 하나 마련했습니다.
이원규 시에 안치환이 곡을 얹어 부른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라는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썼습니다.

이원규 시인은 큰 언론사 기자 생활을 어느날 갑자기 청산하고 지리산에 '입산'하여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 자본세상에 저항하며 살아가고 있는 대표적 지리산지기입니다. 물질과 속도를 거부하는 듯한 그가 대형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것은 퍽 이채로운 일입니다.  그의 유일한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이 '괴물'을 매개로 지리산 자락에 깃들어 살고 있는 많은 괴짜들(중에 어느정도의 내공을 지닌 사람들만)의 네트웨크를 일구기도 하고 때로는 철없이 죽음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삶의 소중함을 일거에 깨우쳐 주는데 사용하기도 한답니다. (이와 관련된  기막힌 사연이 있습니다만 다음에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얼마전에 펴낸 [지리산 편지](대교베텔스만, 2008)만 얼핏 살펴도 그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쉬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치환의 또 다른 지리산 노래도 첨부합니다.